11화(5,332자)

준결승

저승사자도 반한 트로트 가수 · 지백솔

오학주는 이날 가장 좋은 양복을 입고 왔다⁠. 회색 줄무늬⁠, 어깨가 조금 넓은 양복이었다⁠. 1985년 능곡 이발관 개업 십 주년 때 맞춘 것이라고 했다⁠. 머리에는 포마드를 발라 옆으로 반듯하게 넘겼다⁠. 이발소 거울 앞에서 한 시간을 들였다고 했다⁠.

“⁠어르신⁠, 오늘 결혼하세요⁠?⁠”

말희가 대기실 문간에서 놀리자 학주가 넥타이를 고쳐 맸다⁠.

“⁠장가는 한 번이면 족하오⁠. 오늘은 할멈 만나러 가는 날이오⁠. 할멈이 머리 보고 잔소리하면 안 되지⁠.⁠”

말희는 웃다가 웃음을 삼켰다⁠. 학주가 대기실 탁자에 비닐봉지를 하나 올려놓았다⁠. 콩떡이었다⁠. 봉지에 매직으로 「⁠목에 좋음⁠」 대신 다른 글씨가 적혀 있었다⁠. 「⁠끝까지⁠」

“⁠노란 티셔츠 쉰 장⁠, 오늘은 백 장이오⁠. 하모니카 할멈들도 왔소⁠. 영천 장터 막걸리 영감도 버스 대절해서 왔소⁠.⁠”

“⁠영천에서예⁠?⁠”

“⁠우물집 손녀 결승 가는 거 보러 왔다 하오⁠. 결승은 아직인데 미리 보러 왔다 하오⁠.⁠”

말희는 콩떡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이번에는 목이 메지 않게 천천히 씹었다⁠.

문간에 주옥배가 나타났다⁠. 손에 악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옥배는 들어오지 않고 문틀에 기대 말했다⁠.

“⁠한 곡 칠게유⁠. 누님 거⁠.⁠”

말희가 고개를 들었다⁠.

“⁠계약은⁠?⁠”

“⁠계약금 반 돌려줬슈⁠. PD가 그러면 준결승 한 곡은 봐준대유⁠. 결승은 안 된대유⁠.⁠”

“⁠팔백의 반이믄 사백이다⁠. 니 돈 그거⁠…⁠…⁠.⁠”

“⁠자막엔 이름 계속 나온대유⁠. 그거면 됐슈⁠.⁠”

옥배는 학주를 한 번 보았다⁠. 학주가 손을 들어 답했다⁠. 둘 사이에 말이 오간 적이 있다는 것을 말희는 그제야 알았다⁠. 옥배는 고개를 꾸벅하고 밴드석으로 갔다⁠.

*

아홉 시 이십팔 분⁠, 말희는 무대 뒤 어둠 속에서 은순이를 쥐고 서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앞 순서의 참가자가 마지막 고음을 끌고 있었다⁠. 객석 맨 앞줄 가운데⁠, 회색 줄무늬 양복이 보였다⁠. 학주 옆자리에는 휴대전화 하나가 무릎 위에 놓여 있고⁠, 휴대전화에서 하얀 이어폰 줄이 학주의 양복 주머니로 들어가 있었다⁠.

객석 맨 뒤 기둥 옆에는 검은 갓이 있었다⁠. 오늘은 팔짱을 끼지 않았다⁠. 두 손으로 종을 쥐고 있었다⁠.

“⁠금말희 씨⁠!⁠”

사회자가 이름을 불렀다⁠. 말희는 조명 아래로 걸어 나갔다⁠. 노란 티셔츠 백 장이 일어났다⁠. 「⁠영원하라⁠」 플래카드는 없었다⁠. 학주가 오늘 아침 치웠다고 했다⁠.

밴드석에서 옥배가 리듬 단추를 눌렀다⁠. 「⁠트로트 2⁠」 반 박자를 기다려 주는 손이 전주를 깔았다⁠. 서른 해 동안 들어 온 소리가 일산 스튜디오에 깔렸다⁠. 말희는 은순이를 입가에 댔다⁠. 아홉 시 삼십 분이었다⁠.

첫 소절을 냈다⁠. 맨 앞줄의 학주가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드렸다⁠. 2박자였다⁠.

1절 중간⁠, 학주가 눈을 떴다⁠.

학주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다⁠. 노란 티셔츠들이 의아하게 학주를 올려다보았다⁠. 학주는 무대를 향해 서서 말희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이발소에서 손님을 보낼 때의 인사였다⁠. 허리를 반쯤 숙이고⁠, 머리를 한 번 더 숙이는 인사⁠.

학주가 돌아서서 방청석 가운데 통로를 걸어 올라갔다⁠. 지팡이가 계단을 한 칸씩 짚었다⁠. 똑⁠, 똑⁠. 노래 박자와 맞지 않는 소리였다⁠. 말희는 지팡이 소리를 들었다⁠. 노래 사이로⁠, 반주 사이로⁠, 객석의 숨소리 사이로⁠.

말희는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꺾기를 한 번 넣었다⁠. 숨을 일찍 쉬지 않았다⁠. 학주가 맨 위 계단에 이르러 비상구 문을 밀었다⁠. 초록 불빛 아래로 회색 양복이 사라졌다⁠. 기둥 옆의 검은 갓도 함께 사라져 있었다⁠.

말희는 2절로 들어갔다⁠. 밴드석의 옥배가 고개를 들어 말희를 보았다⁠. 옥배의 손이 반 박자를 기다렸다가⁠, 오늘은 한 박자를 기다렸다⁠. 말희가 숨을 고를 수 있게⁠.

*

별관 주차장 구석⁠, 1톤 탑차 조수석 문이 열려 있었다⁠. 오학주가 조수석에 앉아 안전띠를 맸다⁠. 습관이었다⁠. 지팡이를 문틀에 기대 놓고⁠, 이어폰을 양쪽 귀에 꽂았다⁠.

저승사자가 운전석 옆에 서서 학주를 내려다보았다⁠. 스튜디오 안의 노래는 여기까지 들리지 않았다⁠. 매미 소리와 먼 도로의 차 소리⁠, 그리고 학주의 이어폰에서 새어 나오는 작은 소리뿐이었다⁠.

「⁠「⁠곱빼기 인생⁠」 능곡 이발관 오학주 어르신께⁠.⁠」

녹음 속 말희의 목소리였다⁠. 이어서 첫 소절이 흘렀다⁠. 반주 없는 맨목소리⁠. 녹음에는 숨이 없다고 저승사자는 말했었다⁠. 학주는 이어폰 속 노래에 맞춰 숨을 쉬었다⁠. 말희가 숨을 쉬어야 할 자리에서 학주가 대신 쉬었다⁠.

“⁠갓 선생⁠.⁠”

“⁠말씀하시오⁠.⁠”

“⁠이번엔 가수 양반이 숨을 일찍 안 쉬었소⁠. 들었소⁠?⁠”

“⁠들었소⁠.⁠”

“⁠가서 할멈한테 그 얘기부터 해야겠소⁠. 가수 양반이 드디어 숨을 늦게 쉰다고⁠.⁠”

저승사자의 허리춤에서 종이 울렸다⁠. 아홉 시 삼십오 분이었다⁠. 저승사자가 종을 쥐었다⁠. 종을 쥔 손이 오늘따라 쉽게 들리지 않았다⁠. 쉰여섯 해 동안 수없이 들어 올린 손이었다⁠.

“⁠오⁠—학⁠—주⁠—⁠.⁠”

종소리를 타고 이름이 나갔다⁠. 학주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2박자를 짚었다⁠. 첫 번째 부름은 예선장에서 이미 들은 소리였다⁠. 오늘 부름이 그날의 첫 부름에 이어 두 번째로 닿았다⁠.

“⁠오⁠—학⁠—주⁠—⁠.⁠”

학주가 이어폰 속 노래를 따라 입술을 움직였다⁠. 1절 후렴이었다⁠. 저승사자는 세 번째를 부르기 전에 잠깐 기다렸다⁠. 후렴이 끝나는 자리까지⁠. 그것만은 사자가 정할 수 있었다⁠.

“⁠오⁠—학⁠—주⁠—⁠.⁠”

학주의 손가락이 멈췄다⁠.

조수석에서 학주가 일어났다⁠. 몸은 안전띠를 맨 채 그대로 앉아 있었고⁠, 일어난 것은 넋이었다⁠. 넋은 회색 줄무늬 양복을 입고 포마드 바른 머리를 하고 있었다⁠. 지팡이는 없었다⁠. 넋이 탑차에서 내려와 허리를 폈다⁠. 허리가 반듯했다⁠. 이발소 의자 뒤에 서 있던 서른 해의 허리였다⁠.

“⁠가수 양반한테 인사를 못 했소⁠.⁠”

“⁠무대에서 하지 않았소⁠?⁠”

“⁠그건 손님 보내는 인사였소⁠. 고맙다는 인사는 못 했소⁠.⁠”

“⁠내가 전하겠소⁠.⁠”

학주의 넋이 조수석에 앉은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이어폰에서 아직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2절이었다⁠.

“⁠2절까지만 듣고 가면 안 되오⁠?⁠”

“⁠노래는 귀에 남소⁠. 걸으면서 들으시오⁠.⁠”

학주의 넋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승사자가 앞서 걸었다⁠. 학주가 뒤를 따랐다⁠. 주차장 끝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 학주의 넋이 박자에 맞춰 손가락을 튕겼다⁠. 저승사자의 도포 소매 안에서도 손가락이 튕겼다⁠. 둘의 그림자는 가로등 아래에 생기지 않았다⁠.

*

아홉 시 오십팔 분⁠, 말희는 무대 뒤 비상구 계단참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결과 발표까지 십이 분이 남아 있었다⁠. 무대 감독이 대기하라고 했지만 말희는 휴대전화를 들고 나왔다⁠. 열 시였다⁠.

영상 통화는 채란이 받았다⁠. 채란이 병원에 와 있었다⁠. 화면 속 채란이 휴대전화를 우갑의 얼굴 가까이 들어 주었다⁠. 우갑은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아까부터 엄마 기다렸어⁠.⁠”

“⁠알았다⁠. 부를게⁠.⁠”

말희는 계단참 벽에 등을 대고 낮게 불렀다⁠. 스튜디오 안까지 들리지 않을 만큼 낮게⁠. 1절이 반쯤 지났을 때 화면 속 우갑이 눈을 떴다⁠. 우갑의 눈길이 화면 밖⁠, 병실 문간으로 갔다⁠. 한참 그쪽을 보더니 우갑이 웃었다⁠.

“⁠형님 오셨네⁠.⁠”

말희의 노래가 끊겼다⁠.

“⁠뭐라꼬⁠?⁠”

“⁠학주 형님⁠. 갓 선생이랑 같이 문간에 서 계셔⁠. 양복 입으셨네⁠. 머리 좋다⁠.⁠”

채란이 문간을 돌아보았다⁠. 채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채란이 겁먹은 얼굴로 화면을 보았다⁠. 우갑은 문간을 향해 손을 들었다⁠.

“⁠형님⁠, 먼저 가서 자리 잡아 둬요⁠. 앞자리로⁠.⁠”

우갑이 잠깐 귀를 기울였다⁠. 문간의 누군가가 대답하는 모양이었다⁠. 우갑이 킥킥 웃었다⁠.

“⁠머리는 저승 가서도 해 주신대⁠. 대신 갓 선생 머리부터 하신대⁠.⁠”

말희는 휴대전화를 쥔 채 계단참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노래를 이어야 했다⁠. 열 시였다⁠. 종이 우갑 머리맡에서 울리고 있을 것이었다⁠.

말희는 노래를 이었다⁠. 1절 남은 반을⁠, 떨리는 목으로⁠. 화면 속 우갑이 눈을 감고 이불을 두드렸다⁠. 채란이 아빠 손을 잡고 엄마 노래를 들었다⁠. 채란은 노래가 끝날 때까지 문간을 한 번 더 돌아보았다⁠.

*

준결승 결과 발표는 열 시 십 분이었다⁠. 사회자가 봉투를 열었다⁠. 결승 진출자 두 명⁠. 첫 이름은 차온이었다⁠. 두 번째 이름이 불릴 때 노란 티셔츠 백 장이 일어났다⁠. 맨 앞줄 가운데 한 자리만 비어 있었다⁠.

“⁠금말희⁠!⁠”

말희는 무대 한가운데서 고개를 숙였다⁠. 숙인 채로 오래 있었다⁠. 사회자가 소감을 물었다⁠. 말희는 은순이를 입가에 대고 한마디만 했다⁠.

“⁠능곡 이발관 오학주 어르신⁠, 고맙습니더⁠.⁠”

사회자가 무슨 뜻인지 몰라 웃으며 넘겼다⁠. 조정실 유리 너머에서 염유준이 고개를 들었다⁠. 유준은 맨 앞줄의 빈자리를 보았다⁠. 태블릿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방송이 끝나자 말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러⁠, 금색 스팽글 드레스를 입은 채로 비상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구두 굽 하나가 계단에서 꺾였다⁠. 말희는 구두를 벗어 들고 맨발로 주차장을 달렸다⁠. 아스팔트가 아직 낮의 열기를 품고 있었다⁠.

탑차 조수석 문이 열려 있었다⁠. 학주가 안전띠를 맨 채 앉아 있었다⁠. 눈을 감고⁠, 고개를 조금 옆으로 기울이고⁠. 입가가 웃고 있었다⁠. 양쪽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3절이었다⁠.

말희는 조수석 앞에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학주의 손을 잡았다⁠. 손은 아직 따뜻했다⁠. 양복 깃 한쪽이 안전띠에 눌려 접혀 있었다⁠. 말희는 깃을 손끝으로 펴 주었다⁠. 포마드 바른 머리는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할멈이 잔소리할 데가 없는 머리였다⁠.

“⁠당신이 데려갔다⁠.⁠”

운전석 옆에 검은 갓이 있었다⁠. 저승사자는 말희의 말을 피하지 않았다⁠.

“⁠이발사 어른이 골랐소⁠.⁠”

“⁠당신이 불렀잖아⁠!⁠”

“⁠불렀소⁠. 이발사 어른이 듣기로 했소⁠. 후렴 끝까지 듣고 일어났소⁠.⁠”

말희가 저승사자를 노려보았다⁠. 노려보는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진한 빨간 립스틱이 눈물과 섞여 턱으로 흘렀다⁠. 학주가 보았으면 립스틱 번진다고 했을 것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전해 달라 했소⁠. 무대 인사는 손님 보내는 인사였고⁠, 고맙다는 인사는 못 했다고⁠.⁠”

말희는 학주의 손을 놓지 않았다⁠. 아스팔트 위에 벗어 둔 구두 한 짝이 넘어져 있었다⁠. 이어폰 속 3절이 끝나고⁠, 녹음의 마지막에 말희 자신의 숨소리가 짧게 들렸다⁠. 녹음 단추를 끄기 전에 쉰 숨이었다⁠.

구급차가 왔다가 갔다⁠. 노란 티셔츠들이 주차장에 모여 울었다⁠. 하모니카 회장 할머니가 하모니카로 「⁠고향의 봄⁠」을 불었다⁠. 십 년 동안 불던 노래였다⁠. 이번에는 숨 쉬는 자리를 아무도 틀리지 않았다⁠. 동아리 여덟 명 가운데 일곱 명이 따라 불었다⁠.

구급차가 떠난 뒤 탑차 조수석에는 하얀 이어폰 한 쌍이 남아 있었다⁠. 휴대전화는 학주의 손자가 받아 갔다⁠. 이어폰은 누구도 챙기지 않았다⁠. 말희는 이어폰을 집어 귀에 대 보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말희는 이어폰을 손바닥에 감아 쥐고 조수석에 앉았다⁠. 안전띠를 맸다⁠. 학주의 습관이었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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