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74자)

할아버지 첫날

손주 돌봄 파업 선언 · 윤은류

4월 7일 수요일 아침 일곱 시 이십구 분⁠, 순범은 107동 802호 현관 앞에서 손목시계를 봤다⁠. 버스 기사는 정류장에 일 분 일찍 서지 않았다⁠. 일 분 늦게도 서지 않았다⁠. 삼십 분이 되자 순범은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연 혜빈은 아버지를 위아래로 훑었다⁠. 산악회 조끼 대신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계순이 수선집 시절에 쓰던 앞치마였다⁠. 주머니가 여섯 개 달린 남색 앞치마로⁠, 주머니마다 「⁠계순 수선⁠」이 빨간 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계순이 어젯밤 아무 말 없이 현관에 걸어 둔 것이었다⁠.

“⁠아빠⁠, 그거 엄마 거잖아⁠.⁠”

“⁠주머니가 많아서 좋더라⁠. 물티슈 하나⁠, 손수건 하나⁠, 사탕 하나⁠, 반창고 하나⁠.⁠”

순범은 주머니를 하나씩 두드리며 들어왔다⁠. 거실에서 쌍둥이가 할아버지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할아버지는 토요일에만 오는 사람이었다⁠. 수요일 아침의 할아버지는 처음이었다⁠.

혜빈은 출근 가방을 메고 냉장고 문의 일정표를 가리켰다⁠.

“⁠아홉 시 등원⁠. 원복은 소파 위⁠. 라율이 머리는 두 갈래로 묶어야 돼⁠. 한 갈래 묶으면 울어⁠. 라겸이는 왼쪽 양말 오른쪽 양말 색 맞춰야 돼⁠. 안 맞추면 신발 안 신어⁠. 아빠⁠, 듣고 있어⁠?⁠”

“⁠듣고 있어⁠. 출발해⁠.⁠”

혜빈은 문을 닫고 나가다가 도로 열고 한마디를 더 했다⁠.

“⁠그리고 아빠⁠. 저녁에 얘기 좀 해⁠.⁠”

문이 닫혔다⁠. 순범은 문을 한참 봤다⁠.

*

라율의 머리는 생각보다 미끄러웠다⁠. 순범은 휴대전화를 식탁 위 우유 팩에 기대 세워 놓고 유튜브를 틀었다⁠. 「⁠1분 만에 끝내는 아이 양갈래 머리⁠」 화면 속 젊은 엄마는 손이 세 개쯤 되는 것처럼 움직였다⁠. 순범은 영상을 두 번 멈추고 세 번 되감았다⁠. 빗으로 가르마를 탔는데 가르마가 이마 한가운데서 왼쪽 귀로 비스듬히 달아났다⁠.

“⁠할아버지⁠, 삐뚤어졌어⁠.⁠”

“⁠도로가 원래 휘어 있는 거여⁠.⁠”

고무줄을 감았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네 바퀴째에 고무줄이 손가락까지 같이 감았다⁠. 순범의 검지가 라율의 왼쪽 머리채와 한 묶음이 되었다⁠. 라율이 고개를 돌리자 순범의 손이 따라 돌았다⁠.

“⁠할아버지 손도 묶였어⁠!⁠”

라겸이 바닥을 구르며 웃었다⁠. 라율도 웃었고⁠, 웃느라 고개를 흔들어서 순범의 손이 더 깊이 감겼다⁠. 순범은 손가락을 빼려다 포기하고 그대로 웃었다⁠. 서른한 해 동안 버스 핸들을 놓지 않던 손이 다섯 살 머리채에 묶여 있었다⁠.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순범은 자기가 언제 마지막으로 이렇게 웃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여덟 시 오십 분⁠, 순범은 쌍둥이를 현관에 일렬로 세웠다⁠. 라율의 양갈래는 높이가 달랐다⁠. 라겸의 양말은 둘 다 초록이었다⁠. 순범은 앞치마 주머니를 두드리고 현관문을 열었다⁠.

“⁠자⁠, 출발합니다⁠. 다음 정류장은 해님 유치원⁠, 해님 유치원입니다⁠. 내리실 분은 미리 벨을 눌러 주세요⁠.⁠”

쌍둥이가 서로 먼저 벨을 누르겠다고 할아버지 앞치마 주머니를 눌렀다⁠. 「⁠삐익⁠」 소리는 순범이 입으로 냈다⁠.

*

같은 시각 103동 1204호는 조용했다⁠. 계순은 눈을 뜨자마자 시계를 봤다⁠. 일곱 시 이십오 분⁠. 다섯 해 동안 이 시각이면 운동화 끈을 묶고 있었다⁠. 오늘은 신을 운동화가 없었다⁠. 정확하게는 신고 갈 데가 없었다⁠.

계순은 이불 속에 누워 천장을 봤다⁠. 한참 봤다⁠. 보호대를 풀고 잔 첫날이었다⁠. 허리가 이불 위에 그대로 놓여 있는 느낌이 낯설었다⁠. 계순은 다시 눈을 감았다⁠. 아홉 시에 깼다⁠. 다섯 해 만이었다⁠.

냉장고를 열었다⁠. 순범이 사 놓은 두부 한 모와 계순이 지난주에 만든 장조림이 있었다⁠. 계순은 밥을 한 공기 푸고 장조림을 접시에 덜어 식탁에 앉았다⁠. 앉아서 먹었다⁠. 숟가락을 내려놓을 때까지 아무도 계순을 부르지 않았다⁠. 다 먹고 나서 계순은 빈 그릇을 한참 내려다봤다⁠. 이상하게 배가 고팠다⁠.

텔레비전에서는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있었다⁠. 북유럽 어느 도시의 공원에서 아빠들이 유모차를 밀며 커피를 마셨다⁠. 해설자가 이 나라 아빠들의 육아휴직을 설명했다⁠. 계순은 화면 속 아빠의 손을 봤다⁠. 커피 컵을 쥔 손 반대편 손이 유모차 손잡이를 놓지 않고 있었다⁠. 계순은 휴대전화를 들어 「⁠육씨네⁠」 단톡방을 열었다⁠.

순범이 사진 한 장을 올려 두었다⁠. 유치원 정문 앞에서 찍은 쌍둥이였다⁠. 라율의 양갈래는 한쪽이 귀 위⁠, 한쪽이 귀 아래에 있었다⁠. 사진 아래 순범이 글을 달았다⁠. 「⁠정시 도착⁠. 승객 이상 무⁠.⁠」

계순은 「⁠투쟁⁠!⁠」 이모티콘을 보내려다 말고⁠, 사진을 길게 눌러 저장했다⁠.

*

목요일 오후 네 시⁠, 놀이터⁠. 순범은 벤치에 앉은 할머니 여섯 사이에서 유일한 할아버지였다⁠. 할머니들은 노조 모임을 마치고 하원한 손주들을 데리고 나와 있었다⁠. 순범이 앉자 벤치 끝이 조금 들썩였다⁠.

라겸이 모래 놀이를 하다가 삽을 빼앗기고 울기 시작했다⁠. 순범은 일어나서 라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달래는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서른한 해 동안 순범이 버스에서 한 말은 「⁠출발합니다⁠」 「⁠뒤로 들어가세요⁠」 「⁠카드 한 번만 찍으세요⁠」였다⁠. 라겸은 더 크게 울었다⁠.

“⁠아이고 마⁠, 총무님⁠. 그래 하면 안 된다⁠.⁠”

묘순이 벤치에서 소리쳤다⁠. 순범이 돌아봤다⁠.

“⁠그럼 어떻게 해요⁠?⁠”

“⁠우는 거 달래지 말고⁠, 삽 뺏은 놈한테 가서 돌려 달라 캐 봐라⁠. 할배가 같이 가 주면 된다⁠.⁠”

순범은 라겸의 손을 잡고 삽을 가져간 아이 앞으로 갔다⁠. 아이 할머니가 웃으며 삽을 돌려줬다⁠. 라겸이 울음을 뚝 그쳤다⁠. 순범이 벤치로 돌아오자 할머니 여섯이 박수를 쳤다⁠. 경로당에서 투표권이 없던 준회원 총무가 놀이터에서 처음 받은 박수였다⁠. 순범은 앞치마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할머니들에게 하나씩 돌렸다⁠. 주머니 여섯 개 가운데 하나가 비었다⁠.

*

4월 13일 화요일 오후 세 시⁠, 동탄 노인복지관 이 층 노래 교실⁠. 계순은 맨 뒷줄 의자에 앉았다⁠. 서른 명 가운데 할아버지가 넷이었다⁠. 강사는 트로트 가수 지망생이었다는 마흔 살 남자로⁠, 반짝이 조끼를 입고 있었다⁠. 첫 곡은 계순이 처녀 때 남문 시장 라디오에서 매일 듣던 노래였다⁠.

강사가 반주기를 틀었다⁠. 계순은 입을 벌렸다⁠. 소리가 안 나왔다⁠. 다섯 해 동안 계순이 부른 노래는 곰 세 마리와 상어 가족과 「⁠양치는 하루 세 번⁠」 같은 것들이었다⁠. 어른 노래 가사는 목에서 나오지 않았다⁠. 옆자리 할머니가 계순의 팔꿈치를 툭 쳤다⁠. 차영채였다⁠. 노인대학 반장은 출석 확인을 핑계로 노래 교실에 와 있었다⁠.

“⁠틀려도 돼⁠. 다 틀려⁠.⁠”

영채가 먼저 목청을 높였다⁠. 음이 반 키 낮았다⁠. 계순은 웃음이 터졌고⁠, 웃음 끝에 소리가 따라 나왔다⁠. 두 번째 소절부터 계순은 가사를 보지 않았다⁠. 다 알고 있었다⁠. 열아홉에 수원으로 올라와 남문 시장 수선집 직원으로 처음 재봉틀 앞에 앉던 해에 귀에 박힌 노래였다⁠. 노래가 끝나자 강사가 맨 뒷줄을 보고 박수를 쳤다⁠.

“⁠뒤에 연두색 어머님⁠, 목청 좋으시네요⁠!⁠”

노래 교실이 끝나고 복지관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계순의 휴대전화가 연달아 떨었다⁠. 노조 단톡방이었다⁠. 「⁠이음누리 할머니 돌봄 노조⁠」 대화방 인원이 스물셋에서 예순하나로 늘어 있었다⁠. 이웃 8단지와 9단지 할머니들이었다⁠. 누가 초대했는지 아무도 몰랐다⁠. 새로 들어온 할머니들은 인사 대신 사진을 올렸다⁠. 손주 가방을 무릎에 쌓은 사진⁠, 놀이터 벤치 사진⁠, 허리 파스를 붙인 등 사진⁠. 「⁠저도 버스 타도 되나요⁠」 「⁠27일 몇 시예요⁠」 「⁠손주 데리고 가도 돼요⁠?⁠」

영채가 계순 어깨너머로 화면을 봤다⁠.

“⁠너 이제 진짜 위원장이다⁠.⁠”

계순은 화면을 끝까지 내렸다⁠. 맨 아래 묘순의 메시지가 있었다⁠. 「⁠위원장 버스 두 대 해야겠다⁠」 계순은 엄지손가락으로 답을 쳤다⁠. 돋보기 없이 쳐서 오타가 났다⁠. 「⁠두 대 해라⁠. 천백에서 낸다⁠」가 「⁠두 대 해라⁠. 천백에서 넌다⁠」로 나갔다⁠. 단톡방에 웃음 이모티콘이 쏟아졌다⁠.

*

밤 아홉 시 반⁠, 107동 802호 부엌⁠. 쌍둥이는 잠들어 있었다⁠. 목욕은 순범이 시켰다⁠. 노란 우비를 입고 시켰다⁠. 물이 튀는 것이 싫어서였다⁠. 욕실 바닥에는 우비에서 떨어진 물이 아직 고여 있었다⁠.

혜빈은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어 두고 있었다⁠. 화면에는 표 하나가 떠 있었다⁠. 2022년 5월부터 2027년 3월까지⁠, 매달 이십오 일⁠, 오십만 원⁠. 맨 아래 합계 칸이 굵은 글씨였다⁠. 혜빈은 아버지를 보지 않고 화면을 돌려 보였다⁠.

“⁠아빠⁠, 이거 다 설명해⁠.⁠”

순범은 앞치마를 벗지 않고 식탁 맞은편에 앉았다⁠. 손가락에 고무줄 자국이 빨갛게 남아 있었다⁠.

“⁠엄마한테 다 말했잖아⁠.⁠”

“⁠엄마한테 말한 거 말고⁠. 나한테⁠. 내 돈이잖아⁠.⁠”

“⁠…그래⁠. 니 돈이지⁠.⁠”

순범은 처음부터 말했다⁠. 첫 달⁠, 딸에게 엄마가 돈 얘기 하면 화낸다고 말한 날⁠. 석 달째⁠, 엄마에게 말하려다 못 한 날⁠. 엄마 환갑 일 년 전⁠, 크루즈 광고 전단을 산악회 버스에서 주운 날⁠. 코인을 처음 산 날⁠, 두 배가 된 날⁠, 반 토막 난 날⁠. 순범은 말하면서 한 번도 딸을 보지 않았다⁠. 딸의 노트북 화면 가장자리만 봤다⁠.

혜빈은 끝까지 들었다⁠. 품질관리팀장은 보고를 중간에 끊지 않았다⁠. 다 들은 뒤에 물었다⁠.

“⁠아빠⁠, 엄마한테 미안해서 그런 거야⁠, 엄마한테 생색내고 싶어서 그런 거야⁠?⁠”

순범은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 있다가 말했다⁠.

“⁠둘 다여⁠.⁠”

“⁠둘 다⁠.⁠”

“⁠평생 내가 번 돈으로 산 거 같았어⁠. 버스 몰아서 집 사고⁠, 너 대학 보내고⁠. 근데 니 엄마가 가게 닫고 애들 보기 시작하니까⁠… 나는 산에 가고 니 엄마는 애들 보고⁠. 그게 맞나 싶었어⁠. 그래서 한 방에 크게 해 주고 싶었지⁠. 내가 아직 돈 버는 사람이라고⁠. 우리 집 운전대는 아직 내가 잡고 있다고⁠.⁠”

혜빈은 노트북을 덮었다⁠. 덮는 소리가 부엌에 컸다⁠.

“⁠아빠⁠, 그 운전대 엄마가 다섯 해 동안 잡고 있었어⁠.⁠”

순범은 손가락의 고무줄 자국을 문질렀다⁠. 지워지지 않았다⁠.

*

순범이 103동으로 돌아간 뒤 혜빈은 휴대전화를 열었다⁠. 맘카페 앱의 쪽지함에 열흘 전 받은 쪽지가 읽지 않음으로 남아 있었다⁠. 보낸 사람은 「⁠화성시의원 탁세란 의원실⁠」 혜빈은 쪽지를 열었다⁠.

「⁠쌍둥이팀장님⁠, 글 잘 읽었습니다⁠. 4월 27일 시의회 공청회에서 일하는 부모의 목소리를 들려주실 분을 찾고 있습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연락 주세요⁠.⁠」

쪽지 아래에 사무실 번호가 있었다⁠. 밤 열 시가 넘어 있었다⁠. 혜빈은 번호를 눌렀다⁠. 받지 않으면 내일 다시 걸 생각이었다⁠. 신호가 두 번 가고 받았다⁠. 비서가 아니었다⁠. 목소리가 낮았다⁠. 간담회 영상에서 들은 목소리였다⁠.

“⁠탁세란입니다⁠.⁠”

“⁠의원님⁠, 늦게 죄송합니다⁠. 쌍둥이팀장입니다⁠. 육혜빈이라고 합니다⁠. 이음누리 7단지요⁠.⁠”

전화 너머가 잠깐 조용했다⁠. 탁세란은 이름을 알아들은 사람의 침묵을 했다⁠.

“⁠육계순 어머님 따님이시군요⁠.⁠”

“⁠네⁠.⁠”

“⁠발언하시면 어머님 맞은편에 서시게 됩니다⁠.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먼저 말씀드립니다⁠.⁠”

혜빈은 거실을 봤다⁠. 소파 위에 순범이 벗어 두고 간 앞치마가 있었다⁠. 주머니 여섯 개에 빨간 실로 수놓은 「⁠계순 수선⁠」 한 주머니에서 반창고 끝이 비어져 나와 있었다⁠.

“⁠알아요⁠. 제가 하겠습니다⁠. 엄마 맞은편에서요⁠.⁠”

8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