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94자)

수고비

손주 돌봄 파업 선언 · 윤은류

버스 회사는 계약금 삼십만 원을 화요일 낮까지 넣어 달라고 했다⁠. 4월 5일 월요일 밤 열 시⁠, 계순은 안방 장롱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허리를 굽힐 수 없으니 장롱 아래 칸은 무릎으로 열어야 했다⁠. 노조 단톡방에는 공청회 버스에 타겠다는 할머니 이름이 서른여덟 개 올라와 있었다⁠. 간담회 뒤로 빠져나간 사람도 있었지만⁠, 버스를 탄다는 말에 돌아온 사람이 더 많았다⁠. 할머니들은 어디 데려가 준다는 말에 약했다⁠.

적금 통장은 서랍 맨 아래⁠, 결혼 앨범 밑에 두는 것이 이 집의 오래된 규칙이었다⁠. 앨범은 그대로 있었다⁠. 앨범 밑은 비어 있었다⁠.

계순은 순범이 깨지 않게 거실로 나와 전화를 걸었다⁠. 순범은 경로당 총무 회의에 가 있었다⁠. 신호가 가다가 끊겼다⁠. 다시 걸었다⁠. 「⁠회의 중이라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순범의 휴대전화가 보내는 자동 문자였다⁠. 다섯 해 전 혜빈이 아빠 휴대전화에 깔아 준 기능이었다⁠.

계순은 현관 옆 창고 문을 열었다⁠. 순범의 등산 배낭 세 개가 칸칸이 놓여 있었다⁠. 큰 것⁠, 중간 것⁠, 작은 것⁠. 큰 배낭 뒤에 신발 상자가 하나 있었다⁠. 등산화를 산 상자인데 등산화는 현관에 있었다⁠. 상자는 무거웠다⁠. 계순은 상자를 무릎 위에 올리고 거실 바닥에 앉았다⁠. 뚜껑을 열자 은행 통장이 고무줄에 묶여 일곱 권 나왔다⁠. 적금 통장은 없었다⁠. 전부 보통예금 통장이었고⁠, 표지에 「⁠육순범⁠」이 찍혀 있었다⁠.

순범은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은행에 가서 통장을 정리했다⁠. 앱이 있는데도 기계에 통장을 넣고 드르륵 찍혀 나오는 소리를 들어야 돈이 거기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서른한 해 버스 기사의 습관이었다⁠. 계순은 고무줄을 풀었다⁠. 맨 아래 통장이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2022년⁠.

정수리의 돋보기를 내렸다⁠. 숫자들이 줄을 맞춰 있었다⁠. 연금 들어온 날⁠, 관리비 나간 날⁠, 산악회비 나간 날⁠. 그리고 매달 이십오 일⁠, 같은 줄이 있었다⁠.

「⁠육혜빈 500⁠,000 엄마수고비⁠」

계순은 손가락으로 줄을 짚었다⁠. 다음 장을 넘겼다⁠. 이십오 일⁠. 「⁠엄마수고비⁠」 다음 장⁠. 이십오 일⁠. 「⁠엄마수고비⁠」 통장이 끝나면 다음 통장이 이어서 찍었다⁠. 2023년⁠, 2024년⁠. 혜빈이 팀장이 된 2026년 2월에는 한 번 육십만 원이 찍혀 있었다⁠. 메모는 「⁠엄마수고비 승진턱⁠」

계순은 손가락을 떼지 않고 계속 넘겼다⁠. 2025년 가을 통장 한가운데에 다른 줄이 있었다⁠. 「⁠정기적금 해지 18⁠,400⁠,000⁠」 바로 다음 줄⁠. 「⁠증권이체 30⁠,000⁠,000⁠」 이후로 이십오 일의 「⁠엄마수고비⁠」는 들어오는 족족 「⁠증권이체⁠」로 빠져나갔다⁠.

거실 벽시계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계순은 숫자를 더하지 않았다⁠. 더할 필요가 없었다⁠. 쉰아홉 번의 이십오 일이 있었고⁠, 어느 이십오 일에도 계순은 오십만 원을 본 적이 없었다⁠. 어느 이십오 일에도 계순은 107동 욕실에서 쌍둥이 머리를 감겼다⁠.

계순은 날짜 하나를 골라 오래 봤다⁠. 2023년 8월 25일⁠. 라율이 수족구에 걸려 유치원에 못 간 주였다⁠. 입안이 헐어 아무것도 못 먹는 손녀에게 계순은 미음을 쑤어 숟가락으로 식혀 먹였다⁠. 라겸에게 옮을까 봐 둘을 다른 방에 재우고⁠, 밤새 두 방을 오갔다⁠. 같은 주 금요일에 순범은 산악회에서 설악산 일박을 다녀왔다⁠. 통장의 같은 날 아래 줄에는 「⁠한마음산악회 설악 회비 150⁠,000⁠」이 찍혀 있었다⁠. 계순은 두 줄을 손가락 하나로 동시에 짚었다⁠. 손가락 한 마디 거리였다⁠.

무릎이 저려 왔다⁠. 계순은 통장 일곱 권을 다시 고무줄로 묶었다⁠. 묶는 손이 처음에는 떨렸고⁠, 두 번째 감을 때는 떨리지 않았다⁠. 신발 상자에 넣지 않고 몸뻬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가 불룩해졌다⁠. 계순은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켜지 않고 현관문을 봤다⁠. 열한 시 반에 순범이 들어왔고⁠, 아내가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잠깐 멈칫했다⁠.

“⁠안 자고 뭐 해⁠?⁠”

“⁠당신 기다렸지⁠. 내일 산에 가지⁠?⁠”

“⁠가지⁠. 여섯 시 사십 분 출발이여⁠.⁠”

“⁠잘 다녀와⁠.⁠”

순범은 고개를 갸웃하며 씻으러 들어갔다⁠. 계순은 이 밤 안방에 들어가지 않고 소파에서 잤다⁠. 정확하게는 소파에 누워 천장을 봤다⁠. 보호대를 풀지 않았다⁠.

*

4월 6일 화요일 새벽 여섯 시 삼십오 분⁠, 이음누리 7단지 정문 앞⁠. 「⁠동탄 한마음 산악회⁠」라고 쓴 관광버스가 비상등을 켜고 서 있었다⁠. 형광 노랑과 형광 주황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버스 앞에 모여 있었다⁠. 회장이 명찰을 나눠 주고 있었다⁠. 순범은 총무답게 버스 문 옆에서 탑승객 수를 세다가⁠, 건널목을 건너오는 아내를 보고 손가락을 멈췄다⁠.

계순은 산악회 사람들 사이로 걸어왔다⁠. 연두 티셔츠 위에 카디건⁠, 허리 보호대⁠, 꽃무늬 몸뻬⁠. 주머니가 불룩했다⁠. 회장이 계순을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들었다⁠.

“⁠아이고⁠, 사모님⁠! 오늘 같이 가시게요⁠? 우리 총무님 김밥 맛있다고 소문났어요⁠.⁠”

“⁠김밥은 오늘 편의점 거예요⁠.⁠”

계순이 대답했다⁠. 회장이 웃었다⁠. 순범은 웃지 않았다⁠. 손에 든 비닐봉지 안에서 삼각김밥 네 개가 바스락거렸다⁠.

계순은 주머니에서 통장 뭉치를 꺼냈다⁠. 고무줄을 벗기고 2025년 통장을 펼쳐 순범 앞에 들었다⁠. 순범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지는 것이 새벽빛 속에서도 보였다⁠.

“⁠이리 와⁠. 여기서 말고⁠.⁠”

순범이 아내 팔을 잡았다⁠. 계순은 팔을 빼지 않고 서 있었다⁠. 보호대를 찬 허리는 끌려가지 않았다⁠.

“⁠여기서 해⁠. 당신이 서른한 해 동안 사람들 앞에서 문 열고 닫던 자리잖아⁠.⁠”

산악회 사람들이 하나둘 말을 멈췄다⁠. 형광 등산복들이 반원으로 물러났다⁠. 반원 끝에서 누가 휴대전화를 꺼냈다가⁠, 회장의 눈짓에 넣었다⁠.

계순은 통장을 한 장 넘겨 소리 내어 읽었다⁠.

“⁠이천이십이 년 오월 이십오 일⁠. 육혜빈⁠, 오십만 원⁠. 엄마수고비⁠.⁠”

순범이 눈을 감았다⁠.

“⁠유월 이십오 일⁠. 엄마수고비⁠. 칠월 이십오 일⁠. 엄마수고비⁠.⁠”

“⁠그만해⁠.⁠”

“⁠이천이십오 년 시월⁠. 적금 해지⁠. 증권 이체 삼천만 원⁠.⁠”

“⁠그만하라고⁠.⁠”

순범의 목소리가 버스 문에 부딪쳐 돌아왔다⁠. 산악회 회장이 헛기침을 했다⁠. 계순은 통장을 덮었다⁠.

“⁠말해 봐⁠. 다섯 해 동안 혜빈이가 나한테 보낸 돈⁠, 어디 갔어⁠.⁠”

*

순범은 버스 범퍼에 엉덩이를 기댔다⁠. 삼각김밥 봉지를 발밑에 내려놓았다⁠.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버스 안내 방송 같은 말투는 없었다⁠.

“⁠처음엔⁠… 말하려고 했어⁠. 혜빈이가 첫 달에 보냈을 때⁠. 근데 당신 성격에 딸한테 돈 받는 거 알면 펄쩍 뛸 거잖아⁠. 그래서 혜빈이한테 그랬지⁠. 엄마는 돈 얘기 하면 화낸다고⁠, 엄마 앞에선 절대 꺼내지 말라고⁠. 내가 모아서 나중에 한꺼번에 주겠다고⁠.⁠”

“⁠나중에 언제⁠?⁠”

“⁠당신 환갑⁠. 재작년⁠. 크루즈 태워 주려고 했어⁠. 일본 한 바퀴 도는 거⁠. 둘이 가려면 생각보다 비싸더라고⁠.⁠”

계순은 재작년 환갑을 기억했다⁠. 생일날 아침 계순은 107동에 일곱 시 반에 가 있었다⁠. 라겸이 열이 나서 소아과에 갔다⁠. 저녁에 혜빈이 케이크를 사 왔고⁠, 쌍둥이가 촛불을 대신 불었다⁠.

“⁠그래서 코인에 넣었어⁠. 불려서 가려고⁠. 산악회에 누가 반년 만에 두 배 됐다 그래서⁠. 처음엔 올랐어⁠. 진짜로 올랐어⁠. 그러다가⁠…⁠.⁠”

“⁠얼마 남았어⁠?⁠”

“⁠천백⁠.⁠”

순범은 숫자를 바닥에 대고 말했다⁠. 반원의 산악회 사람들 가운데 누가 한숨을 쉬었다⁠. 계순은 한숨이 누구 것인지 보지 않았다⁠. 버스 안 텔레비전에서 아침 뉴스가 흘러나왔다⁠. 「⁠노후 자금 코인 투자 손실 늘어⁠… 60대 피해 신고 급증⁠」 기사 아저씨가 서둘러 채널을 돌렸다⁠.

“⁠산악회비는⁠.⁠”

“⁠…거기서도 나갔어⁠. 총무가 회비를 먼저 내야 사람들이 내⁠.⁠”

마침 정문에서 운동화 뛰는 소리가 났다⁠. 혜빈이었다⁠. 출근 블라우스에 운동화⁠, 한 손에 출근 가방⁠, 다른 손에 휴대전화⁠. 새벽 여섯 시에 계순이 보낸 메시지를 받고 달려온 것이었다⁠. 「⁠여섯 시 반 정문 산악회 버스⁠. 와라⁠.⁠」

혜빈은 아빠와 엄마와 통장을 번갈아 봤다⁠. 엄마 손에 펼쳐진 통장의 글자를 읽었다⁠. 자기가 매달 이체 메모 칸에 직접 친 네 글자였다⁠.

“⁠엄마⁠… 이거 몰랐어⁠?⁠”

“⁠몰랐어⁠.⁠”

혜빈의 출근 가방이 어깨에서 미끄러져 팔꿈치까지 내려왔다⁠. 혜빈은 가방을 추스르지 않았다⁠.

“⁠나 오 년 동안 엄마한테 돈 드리는 줄 알고 버텼어⁠. 적다는 거 알았어⁠. 그래도 드리고 있으니까⁠, 엄마가 힘들다고 안 하는 게 그 돈 때문인 줄 알았어⁠. 칠십은⁠… 칠십은 올려 드리는 거였어⁠. 이십만 원 올려 드리는 거⁠.⁠”

계순은 딸을 봤다⁠. 3월 2일 아침의 거실이⁠, 계약서와 칠십만 원과 「⁠한 시간에 이천칠백칠십팔 원⁠」이⁠, 전혀 다른 그림으로 뒤집혀 다시 보였다⁠. 딸은 엄마가 오십만 원을 받으면서 시급 이천칠백 원이라고 비웃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엄마는 딸이 다섯 해 공짜를 당연하게 여겼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엄마 앞에선 돈 얘기 꺼내지 말랬어⁠. 엄마 자존심 상한다고⁠.⁠”

혜빈이 아빠를 돌아봤다⁠. 순범은 버스 범퍼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손바닥으로 무릎을 짚었다가 떼었다⁠.

“⁠아빠⁠, 말해⁠. 내가 보낸 거 어딨어⁠.⁠”

“⁠…천백 남았다⁠.⁠”

혜빈의 입이 벌어졌다⁠. 닫히지 않았다⁠.

“⁠나 그 돈 보내려고 점심 도시락 싸 다녔어⁠. 팀장 되고 나서도⁠. 신입들이 팀장님은 왜 맨날 도시락이냐고 물으면⁠, 다이어트라고 했어⁠.⁠”

혜빈은 웃으려다 말았다⁠. 순범은 딸의 얼굴을 올려다보지 못하고 딸의 운동화 코를 봤다⁠. 출근용 구두를 신을 시간도 없이 뛰어나온 운동화였다⁠. 왼쪽 끈이 풀려 있었다⁠. 순범의 손이 저도 모르게 끈 쪽으로 내려갔다가⁠, 멈췄다⁠.

*

기사 아저씨가 경적을 짧게 울렸다⁠. 출발 시간이 오 분 지나 있었다⁠. 회장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총무님⁠… 오늘은 빠지시는 걸로 할까요⁠?⁠”

순범이 아내를 봤다⁠. 계순은 통장을 다시 고무줄로 묶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말했다⁠. 새벽 공기 속에서 목소리가 또렷했다⁠.

“⁠오늘부터 쌍둥이는 당신이 봐⁠.⁠”

“⁠뭐⁠?⁠”

“⁠혜빈이 계약서대로⁠. 아침 일곱 시 반부터 저녁 일곱 시 반까지⁠. 등원⁠, 하원⁠, 저녁⁠, 목욕⁠. 화요일 목요일만 말고 전부⁠. 수고비는 당신이 이미 받았잖아⁠. 다섯 해 치 선불로⁠.⁠”

“⁠나는 애 못 봐⁠. 머리도 못 묶어⁠.⁠”

“⁠배워⁠. 유튜브에 다 있어⁠.⁠”

혜빈이 엄마를 봤다⁠. 계순은 딸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빠한테 맡겨⁠. 엄마는 이제 공청회 준비한다⁠. 버스 계약금은 천백에서 낸다⁠.⁠”

“⁠엄마⁠.⁠”

“⁠니 돈이니까 니가 허락해⁠.⁠”

혜빈은 대답하지 못했다⁠. 손에 쥔 휴대전화에서 회사 단톡방 알림이 연달아 울렸다⁠. 혜빈은 화면을 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관광버스 문이 닫혔다⁠. 「⁠동탄 한마음 산악회⁠」가 비상등을 끄고 단지 정문을 빠져나갔다⁠. 형광 등산복들이 차창에 붙어 정문을 내다봤다⁠. 맨 뒷자리 회장이 차창에 대고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나중에 전화하라는 뜻인지⁠, 나중에 전화하지 말라는 뜻인지 아무도 몰랐다⁠. 순범은 버스가 모퉁이를 돌 때까지 손을 들지 못했다⁠. 발밑의 비닐봉지에서 삼각김밥 네 개가 아침 햇빛을 받고 있었다⁠. 일곱 시 이십 분이었다⁠. 107동 802호 초인종까지는 걸어서 오 분이었다⁠.

7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