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465자)

준회원 총무

손주 돌봄 파업 선언 · 윤은류

경로당 현관에는 슬리퍼가 스무 켤레 넘게 놓여 있었다⁠. 크기도 색도 제각각인 슬리퍼들이 발끝을 전부 안으로 두고 있었다⁠. 3월 16일 화요일 아침 열 시⁠, 이음누리 7단지 경로당 큰방에서 바둑돌 놓는 소리가 났다⁠. 딱⁠. 한참 있다가 또 딱⁠. 할아버지들의 바둑은 생각이 길었다⁠.

계순은 현관 앞에 서서 신발을 벗지 않았다⁠. 계순 뒤로 할머니 열 명이 서 있었다⁠. 묘순은 「⁠돌봄도 노동이다⁠」라고 매직으로 쓴 달력 뒷장을 둘둘 말아 쥐고 있었다⁠. 어젯밤 묘순의 큰손자가 써 준 글씨였다⁠. ‘⁠노⁠’ 자의 받침이 옆으로 기울어 있었다⁠.

큰방 문이 열리고 순범이 나왔다⁠. 산악회 조끼 대신 경로당 총무 조끼를 입고 있었다⁠. 가슴에 「⁠총무⁠」라고 수놓은 남색 조끼였다⁠. 순범은 아내를 보고⁠, 아내 뒤의 할머니들을 보고⁠, 묘순 손에 들린 달력 뒷장을 봤다⁠.

“⁠여기 왜 왔어⁠?⁠”

“⁠방 빌리러 왔지⁠. 화요일 목요일 오후에 우리 모일 방⁠.⁠”

“⁠여긴 노인정이여⁠. 노조 사무실 아니고⁠.⁠”

“⁠할머니도 노인이야⁠.⁠”

“⁠회원만 쓰는 데여⁠. 회칙에 있어⁠.⁠”

순범은 큰방 벽에 붙은 액자를 가리켰다⁠. 「⁠이음누리 7단지 경로당 회칙⁠」 계순은 정수리의 돋보기를 내렸다⁠. 회칙 제3조는 회원 자격을 예순다섯 살 이상 단지 주민으로 정해 놓았다⁠. 아래에 손글씨로 덧붙인 줄이 있었다⁠. 「⁠단⁠, 총무 업무를 위해 예순 살 이상 주민을 준회원으로 둘 수 있다⁠. 준회원은 의결권이 없다⁠.⁠」

계순은 덧붙인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당신 준회원이네⁠.⁠”

“⁠총무여⁠.⁠”

“⁠투표는 못 하는 총무⁠.⁠”

큰방 안에서 바둑을 두던 할아버지 하나가 웃음을 참다가 기침을 했다⁠. 순범의 귀가 빨개졌다⁠. 예순넷 순범은 경로당 회원이 되기에는 한 살이 모자랐다⁠. 회장 할아버지가 열쇠 관리를 맡기면서 붙여 준 자리였고⁠, 순범은 총무 자리를 산악회 총무 자리만큼 아꼈다⁠.

“⁠회원은 할머니들이 더 많잖아⁠.⁠”

묘순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달력 뒷장으로 큰방 안을 가리켰다⁠.

“⁠아이고 마⁠, 이 방에 지금 할배 몇이고⁠. 일곱이네⁠. 회원 명단에 할매가 몇인지 아나⁠? 서른하나다⁠. 할배는 스물하나⁠. 우리가 안 오니까 할배들 방이 된 기지⁠.⁠”

“⁠안 온 게 아니고 못 온 기다⁠.⁠”

108동 할머니가 거들었다⁠. 계순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발을 벗었다⁠. 슬리퍼 하나를 골라 신었다⁠. 허리를 굽히지 못해서 발끝으로 슬리퍼를 끌어당겨 신었다⁠.

“⁠회장님 계세요⁠? 임시 총회 하죠⁠. 지금⁠.⁠”

*

회장 할아버지는 일흔아홉이었고⁠, 보청기를 낀 귀를 계순 쪽으로 돌렸다가 한 번 더 말해 달라고 했다⁠. 계순은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회원 과반이 모이면 모인 자리에서 정할 수 있다는 것이 회칙 제7조였다⁠. 계순은 회칙을 회장보다 오래 읽었다⁠.

할머니들이 휴대전화를 꺼냈다⁠. 열 명이 한꺼번에 전화를 걸자 경로당 현관이 시장통이 되었다⁠.

“⁠언니⁠, 경로당 와⁠. 지금⁠. 투표한대⁠.⁠”

“⁠무슨 투표긴⁠, 우리 방 생기는 투표지⁠.⁠”

“⁠손주⁠? 업고 와⁠. 업고 오면 되지⁠.⁠”

이십 분 만에 할머니 열네 명이 더 왔다⁠. 손주를 업고 온 할머니가 둘⁠, 유모차를 밀고 온 할머니가 하나⁠, 장 보러 가다가 장바구니를 든 채로 온 할머니가 셋이었다⁠. 마지막으로 보행기를 밀고 104동 할머니가 왔다⁠. 아흔하나였다⁠. 단지에 이사 온 뒤로 경로당 문턱을 넘은 적이 없다고 했다⁠.

“⁠내가 와야 된다며⁠.⁠”

할머니가 보행기를 큰방 문턱에 걸치고 숨을 골랐다⁠. 계순이 달려가 팔을 받쳤다⁠. 둘이 한 몸처럼 천천히 문턱을 넘었다⁠. 허리 보호대 찬 예순둘과 보행기 민 아흔하나였다⁠.

바둑판이 방구석으로 밀려났다⁠. 할아버지들은 바둑돌 통을 끌어안고 벽에 기대앉았다⁠. 회장 할아버지가 안건을 읽었다⁠. 「⁠화요일·목요일 오후 한 시부터 다섯 시까지 큰방을 손주 돌봄 할머니 모임에 내준다⁠.⁠」

“⁠찬성하시는 분⁠.⁠”

할머니 스물넷이 손을 들었다⁠. 아흔한 살 할머니는 보행기 손잡이를 놓지 못해 한 손만 들었다⁠. 할아버지 둘도 손을 들었다⁠. 손을 든 할아버지 하나는 순범의 바둑 맞수였다⁠. 순범이 맞수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집사람이 들라 그랬어⁠. 우리 집 손녀도 봐⁠.⁠”

순범은 손을 들 수 없었다⁠. 준회원이었다⁠.

*

경로당에서 103동까지 계순과 순범은 따로 걸었다⁠. 계순이 앞에서⁠, 순범이 열 걸음 뒤에서⁠. 놀이터를 가로지르면 사 분이었는데⁠, 순범은 놀이터를 돌아서 갔다⁠. 1204호 현관에서 순범이 총무 조끼를 벗어 신발장 위에 던졌다⁠.

“⁠당신⁠, 나를 동네 웃음거리로 만들었어⁠.⁠”

“⁠웃은 사람은 할아버지들이야⁠.⁠”

“⁠서른아홉 해 살면서 이런 적 없었어⁠. 남들 앞에서⁠.⁠”

계순은 냉장고 문을 열고 보리차 병을 꺼냈다⁠. 컵에 따르는 손이 조금 흔들렸다⁠. 다 따른 다음에 말했다⁠.

“⁠다섯 해 동안 나는 남들 앞에 없었어⁠. 경로당에도⁠, 동창회에도⁠, 노인대학에도⁠. 당신이 바둑 둘 때 나는 107동 욕실에서 애들 머리 감겼어⁠. 당신 바둑 맞수 집사람도 그랬고⁠.⁠”

순범은 대답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켰다⁠. 소리를 키웠다⁠. 계순은 보리차를 마저 마시고 안방으로 들어가 장롱 문을 열었다⁠. 맨 아래 칸에 다섯 해 동안 넣어 둔 외출복이 있었다⁠. 남색 원피스 하나⁠, 베이지 재킷 하나⁠. 원피스 허리는 보호대를 차면 안 맞았다⁠. 계순은 원피스를 들고 재봉틀 앞에 앉았다⁠. 토요일까지 허리를 한 치 늘리면 됐다⁠.

*

목요일 오후 한 시⁠, 큰방에 노조의 첫 모임이 열렸다⁠. 바둑판이 있던 자리에 귤 상자와 식혜 페트병이 놓였다⁠. 할머니는 열일곱으로 늘어 있었다⁠. 화요일 투표에 왔다가 그대로 남은 사람이 여섯이었다⁠. 계순은 앉지 않고 벽에 등을 대고 서 있었다⁠. 보호대 찍찍이가 벽지에 닿아 사각거렸다⁠.

“⁠쉬는 날 생기면 뭐 할 건지 하나씩 말해 봐요⁠.⁠”

할머니들이 서로 얼굴을 봤다⁠.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다섯 해⁠, 일곱 해 동안 아무도 묻지 않은 것이었다⁠.

“⁠수영⁠.⁠”

108동 할머니가 먼저 말했다⁠. 처녀 때 동네 냇가에서 개헤엄을 쳤다고 했다⁠.

“⁠친정 동생 보러 마산 간다⁠. 동생이 암 수술하고 삼 년인데 한 번도 못 갔다⁠.⁠”

묘순이 말했다⁠. 웃으면서 말했는데⁠, 웃음이 끝까지 가지 않았다⁠.

“⁠낮잠⁠.⁠”

“⁠남편 없는 데서 밥 먹기⁠.⁠”

큰방이 뒤집혔다⁠. 벽에 기대 있던 할머니 하나가 웃다가 식혜를 엎질렀다⁠. 계순은 휴지를 뜯어 건네주며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 얼굴을 하나씩 봤다⁠. 낮잠이라고 말한 할머니는 웃음이 잦아들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

3월 20일 토요일⁠, 수원 남문⁠. 계순은 동탄에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왔다⁠. 다섯 해 만이었다⁠. 팔달문 앞 사거리는 그대로였는데⁠, 시장 골목 입구의 간판은 반쯤 바뀌어 있었다⁠. 계순은 골목 안으로 들어가 열한 번째 가게 앞에서 멈췄다⁠.

「⁠계순 수선⁠」 자리는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가 되어 있었다⁠. 유리문 너머 냉동고 여섯 대가 웅웅거렸다⁠. 손님은 없었고⁠, 천장 구석의 카메라가 계순을 내려다봤다⁠. 계순은 유리문에 손바닥을 대 봤다⁠. 차가웠다⁠. 스물두 해 동안 재봉틀이 놓여 있던 자리에는 계산 기계가 있었다⁠. 바닥 타일은 그대로였다⁠. 왼쪽 구석⁠, 재봉틀 다리가 스물두 해 눌러 놓은 자리에 동그랗게 팬 자국이 넷 남아 있었다⁠.

“⁠계순아⁠!⁠”

골목 끝에서 손뼉 소리가 먼저 왔다⁠. 차영채가 손뼉을 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단발머리에 빨간 립스틱⁠, 무릎까지 오는 트렌치코트⁠. 영채는 계순을 끌어안다가 허리 보호대에 손이 닿자 팔을 풀었다⁠.

“⁠아이고⁠, 이게 뭐야⁠. 갑옷이야⁠?⁠”

“⁠우리 손주들도 그렇게 불러⁠.⁠”

“⁠다섯 해 만에 나와서 갑옷을 입고 오냐⁠. 가자⁠, 다들 기다려⁠.⁠”

한정식집 방에는 여고 동창 열아홉이 앉아 있었다⁠. 계순이 들어서자 열아홉이 동시에 일어나려다 절반은 무릎을 짚었다⁠.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십 분 동안 아무도 밥을 먹지 않았다⁠. 휴대전화가 돌았다⁠. 손주 사진⁠, 손녀 피아노 학원 발표회 영상⁠, 사위가 사 준 안마 의자⁠, 남편 무릎 수술 엑스레이⁠. 계순은 자기 휴대전화를 꺼냈다가⁠, 쌍둥이 사진 대신 주먹 쥔 할머니 이모티콘을 보여 줬다⁠. 동창들이 뒤로 넘어갔다⁠.

“⁠너 그 글 맞지⁠? 맘카페⁠.⁠”

맞은편에 앉은 동창이 물었다⁠. 반찬 접시에 젓가락을 꽂은 채였다⁠.

“⁠우리 며느리가 보여 주더라⁠. 엄마 이거 동탄이라던데 엄마 친구 아니냐고⁠. 쌍둥이에 디스크에 수선집 하던 엄마면 계순이밖에 없잖아⁠.⁠”

“⁠우리 단톡방에도 누가 퍼 날랐어⁠.⁠”

“⁠나도 파업할까 했는데 우리 딸이 먼저 울더라⁠. 그래서 못 했어⁠.⁠”

“⁠울면 지는 거야⁠.⁠”

“⁠우는 애 앞에서 안 지는 엄마가 어딨어⁠.⁠”

계순은 웃으면서 잡채를 집었다⁠. 다섯 해 동안 밥을 서서 먹었다⁠. 쌍둥이 숟가락에 반찬을 얹어 주다 보면 자기 밥은 식어 있었다⁠. 한정식집 잡채는 따뜻했다⁠. 계순은 그것을 오래 씹었다⁠.

*

식사가 끝나 갈 즈음 영채가 휴대전화를 계순 앞에 내밀었다⁠. 동영상이 하나 떠 있었다⁠. 화성시의회 복지위원회 회의실⁠, 마이크 앞에 앉은 쉰 줄의 여자⁠. 단정한 회색 재킷⁠, 반백의 단발⁠. 화면 아래 자막이 붙어 있었다⁠. 「⁠탁세란 화성시의원⁠」

“⁠손주 돌봄 수당은 결국 할머니를 집에 묶는 돈입니다⁠. 같은 예산이면 국공립 어린이집 연장반을 늘려야 합니다⁠. 할머니가 없는 집⁠, 할머니가 아픈 집은 어떻게 합니까⁠? 할머니에게 월급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가 안 계셔도 되는 도시를 만들어야 합니다⁠.⁠”

말은 차분했고 정확했다⁠. 영상 아래 조회 수는 사만을 넘겼다⁠. 댓글이 두 패로 갈려 있었다⁠. 「⁠옳은 말씀⁠」과 「⁠할머니 돌봄을 공짜로 계속 시키자는 소리⁠」

“⁠시에서 할머니들한테 손주 보는 돈을 주는 조례를 만든대⁠. 한 달에 삼십만 원인가⁠. 근데 이 의원은 반대야⁠.⁠”

영채가 말했다⁠. 동창들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화면에 모였다⁠.

“⁠줄 때 받아야지⁠. 묶이든 말든⁠.⁠”

“⁠받으면 못 그만둬⁠. 돈 받는 순간 일이 되는 거야⁠.⁠”

“⁠지금은 일이 아니야⁠? 공짜 일이지⁠.⁠”

“⁠우리 딸은 그 돈 나오면 자기가 덜 드려도 된다고 좋아할걸⁠.⁠”

계순은 영상을 한 번 더 돌렸다⁠. 「⁠할머니를 집에 묶는 돈⁠」 이상하게 의원의 말이 맞게 들렸고⁠, 맞게 들려서 화가 났다⁠. 다섯 해 동안 계순을 집에 묶은 것은 돈이 아니었다⁠. 돈은 한 푼도 없었다⁠. 계순은 영채의 휴대전화를 돌려주지 않고 쥐고 있었다⁠.

“⁠이 사람⁠, 할머니 손주 봐 본 적 있대⁠?⁠”

“⁠몰라⁠. 시의원이잖아⁠.⁠”

영채가 휴대전화를 도로 가져가 화면을 넘겼다⁠. 노인대학 반장 단톡방에 오늘 아침 올라온 사진이 있었다⁠. 동탄 노인복지관 게시판에 붙은 공문이었다⁠. 영채가 손가락으로 사진을 크게 키웠다⁠.

「⁠화성시의회 탁세란 의원 주민 간담회⁠. 손주 돌봄과 연장보육⁠, 어르신 말씀을 듣습니다⁠. 3월 31일 수요일 오후 두 시⁠. 장소 — 이음누리 7단지 경로당⁠.⁠」

계순은 돋보기를 끼고 장소를 두 번 읽었다⁠. 이음누리 7단지 경로당⁠. 화요일 목요일 오후에 할머니들이 쓰기로 한 바로 경로당 큰방이었다⁠.

“⁠너네 경로당이잖아⁠.⁠”

영채가 손뼉을 쳤다⁠. 이번에는 한 번만 쳤다⁠.

계순은 원피스 허리를 손으로 쓸었다⁠. 재봉틀로 늘린 한 치가 보호대 위에서 꼭 맞았다⁠. 계순은 영채의 휴대전화를 들고 공문 사진을 「⁠이음누리 할머니 돌봄 노조⁠」 단톡방으로 보냈다⁠. 사진 밑에 한 줄을 적었다⁠.

「⁠31일 수요일 두 시⁠. 다 나와⁠. 손주 업고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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