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429자)

가봉

손주 돌봄 파업 선언 · 윤은류

0⁠, 3⁠, 0⁠, 2⁠. 계순은 번호키를 한 자씩 눌렀다⁠. 돋보기를 끼고 눌렀다⁠. 다섯 해 동안 손가락이 외운 번호는 이제 없었다⁠. 눈으로 확인하며 누르는 새 번호였다⁠. 마지막 2를 누르자 「⁠띠리릭⁠」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5월 1일 토요일 오전 열 시 정각이었다⁠.

문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발소리가 쏟아졌다⁠. 라겸이 먼저 달려와 할머니 몸뻬 바지를 붙잡았다⁠. 이마의 거즈는 떼어져 있었다⁠. 눈썹 위에 분홍색 선이 하나 남아 있었다⁠. 계순은 손가락으로 분홍 선을 쓸었다⁠. 매끄러웠다⁠.

“⁠할머니⁠, 이거 흉터래⁠. 멋있대⁠.⁠”

“⁠누가⁠?⁠”

“⁠할아버지가⁠. 할아버지 버스 기사 할 때 이마에 이런 거 있는 형들 많았대⁠.⁠”

라율은 동생 뒤에서 할머니를 올려다봤다⁠. 계순이 손을 내밀자 라율은 손을 잡지 않고 할머니 허리를 끌어안았다⁠. 보호대 위로 다섯 살 팔이 한 바퀴를 다 돌지 못했다⁠. 현관 옷걸이에 노란 우비가 걸어져 있었다⁠. 소매 끝에 빨간 실과 노란 실⁠, 두 줄의 박음질이 나란히 보였다⁠.

거실 식탁에는 이미 셋이 앉아 있었다⁠. 혜빈⁠, 찬솔⁠, 순범⁠. 식탁 가운데에 3월 2일의 계약서가 놓여 있었다⁠. 빨간 줄이 그어지고 시침핀 자국이 네 귀퉁이에 남은 두 장이었다⁠. 혜빈이 신발장 위에서 내려 놓은 것이었다⁠.

계순은 가방에서 공구를 꺼냈다⁠. 빨간 수선 펜⁠, 시침핀 한 통⁠, 줄자⁠. 식탁 위에 차례로 놓았다⁠. 찬솔이 줄자를 보고 웃음을 참았다⁠.

“⁠오늘은 가봉이야⁠.⁠”

“⁠가봉이 뭐야⁠?⁠”

혜빈이 물었다⁠. 서른다섯 해 동안 엄마 가게에서 수없이 들은 말이었는데⁠, 뜻을 물은 적은 없었다⁠.

“⁠시침질만 해서 입어 보는 거⁠. 안 맞으면 뜯고 다시 해⁠. 오늘 정한 거 한 달 입어 보고⁠, 안 맞으면 다시 고쳐⁠.⁠”

“⁠그럼 오늘 도장은 안 찍어⁠?⁠”

“⁠가봉에 도장 찍는 사람이 어딨어⁠.⁠”

*

찬솔이 먼저 말했다⁠. 어깨 솔기에 남색 실이 두 줄 박힌 점퍼를 토요일인데도 입고 있었다⁠.

“⁠지는 오월 삼일부터 휴직입니더⁠. 여섯 달⁠. 평일 하원이랑 저녁이랑 목욕은 지가 합니더⁠. 승진 심사는 한 해 밀립니더⁠. 그건 됐심더⁠.⁠”

“⁠됐다고⁠?⁠”

혜빈이 남편을 봤다⁠. 찬솔은 아내를 보지 않고 쌍둥이를 봤다⁠. 라율과 라겸이 소파 위에서 쿠션으로 성을 쌓고 있었다⁠.

“⁠낮에 얼굴 보는 게 승진보다 낫다⁠. 해 보고 아이면 그때 말하께⁠.⁠”

계순은 빨간 펜으로 계약서 여백에 적었다⁠. 「⁠평일 하원·저녁·목욕 — 사위⁠. 5월⁠~10월⁠.⁠」

다음은 순범이었다⁠. 순범은 양복 대신 경로당 총무 조끼를 입고 있었다⁠. 가슴의 「⁠총무⁠」 글씨가 어딘가 허전했다⁠.

“⁠나는 산악회 총무 그만뒀어⁠. 회장한테 말했어⁠. 화요일 목요일 아침 등원은 내가 한다⁠. 토요일은 놀이터⁠. 한 시간 말고 오전 내내⁠.⁠”

순범은 조끼 주머니에서 통장 한 권을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육순범⁠」이 찍힌 새 통장이었다⁠. 코인을 다 팔고⁠, 증권 계좌를 닫고⁠, 남은 돈을 옮긴 통장이었다⁠.

“⁠천백이여⁠. 계약금 빼고 천삼십⁠. 니 돈이니까 니가 가져가⁠.⁠”

혜빈은 통장을 보지 않았다⁠. 엄마를 봤다⁠.

“⁠엄마 거야⁠. 엄마 수고비였잖아⁠.⁠”

계순은 통장을 집어 들고 돋보기를 내렸다⁠. 맨 아래 줄에 숫자가 있었다⁠. 계순은 숫자를 오래 보지 않았다⁠.

“⁠이거는 나중에 정하자⁠. 쓸 데가 하나 생각났어⁠.⁠”

“⁠어디⁠?⁠”

“⁠나중에⁠.⁠”

계순은 통장을 계약서 옆에 내려놓았다⁠. 빨간 펜으로 적었다⁠. 「⁠화·목 아침 등원⁠, 토요일 오전 — 할아버지⁠.⁠」

*

혜빈의 차례였다⁠. 혜빈은 노트북을 펴지 않았다⁠. 손에 아무것도 쥐지 않고 식탁에 팔을 얹었다⁠.

“⁠찬솔 씨 휴직 끝나면 11월이야⁠. 11월부터는 내가 월요일 수요일에 다섯 시 반에 퇴근해⁠. 본부장한테 어제 말했어⁠.⁠”

“⁠본부장이 뭐래⁠.⁠”

“⁠평가는 각오하래⁠. 각오했어⁠. 팀장은 지킬 거야⁠. 근데 일등 팀장은 안 할래⁠.⁠”

혜빈은 짧게 웃었다⁠. 웃음 끝이 갈라지지 않았다⁠. 계순은 딸이 일등을 내려놓는 소리를 처음 들었다⁠. 학원비를 계산해 오던 열일곱 살부터 혜빈은 일등을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엄마⁠. 11월부터 엄마는 월 수 금⁠, 아홉 시부터 네 시⁠. 하원 전까지만⁠. 저녁 목욕은 이제 엄마 일 아니야⁠.⁠”

“⁠찬솔 씨 휴직 동안은⁠?⁠”

“⁠수요일 하루만⁠. 반찬은 엄마가 하고 싶으면 금요일에⁠.⁠”

계순은 빨간 펜을 들었다가 멈췄다⁠. 펜 끝이 계약서 위 「⁠월 70만 원⁠」의 두 줄 그은 자리에 닿았다⁠. 3월 3일 밤 계순이 아무것도 적지 않고 비워 둔 자리였다⁠.

“⁠이번엔 받을래⁠.⁠”

식탁의 셋이 동시에 계순을 봤다⁠.

“⁠계약이니까⁠. 돈 없는 계약은 계약이 아니라 부탁이야⁠. 부탁은 못 그만둬⁠. 계약은 그만둘 수 있어⁠.⁠”

계순은 두 줄 그은 자리 옆에 적었다⁠. 「⁠월 50만 원⁠.⁠」 혜빈이 펜 끝을 봤다⁠.

“⁠칠십 준다니까⁠.⁠”

“⁠일하는 날이 줄었잖아⁠. 그리고 시에서 수당 나오면 그만큼 빼⁠.⁠”

“⁠엄마⁠, 그럼 엄마가 손해잖아⁠.⁠”

“⁠수선집 할 때도 단골은 깎아 줬어⁠.⁠”

순범이 웃음을 터뜨렸다⁠. 찬솔이 따라 웃었다⁠. 소파 위 쿠션 성이 무너졌고 쌍둥이가 비명을 질렀다⁠.

*

마지막 줄에서 엄마와 딸이 다시 부딪쳤다⁠. 혜빈이 적고 싶은 줄은 하나였다⁠. 「⁠비상시 연락⁠」

“⁠엄마⁠, 비상은 있잖아⁠. 애가 아프거나⁠, 내가 갑자기 야근이거나⁠. 찬솔 씨 휴직 끝나고 나서⁠.⁠”

“⁠비상은 한 달에 두 번⁠.⁠”

“⁠두 번⁠? 비상을 어떻게 세⁠. 비상이 정해진 날에 와⁠?⁠”

“⁠세야 돼⁠. 안 세면 매일이 비상이야⁠. 다섯 해 동안 매일이 비상이었어⁠.⁠”

혜빈이 입술을 깨물었다⁠. 계순은 딸의 버릇을 봤다⁠. 딸도 엄마가 펜 뚜껑을 이로 무는 것을 봤다⁠. 둘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한참 그렇게 있었다⁠. 순범이 끼어들었다⁠. 버스 기사의 목소리였다⁠.

“⁠에⁠, 노선 조정 안내 말씀드립니다⁠. 비상은 한 달에 세 번⁠. 네 번째부터는 할아버지가 갑니다⁠. 다섯 번째부터는 사위가 갑니다⁠. 이상⁠.⁠”

혜빈이 아빠를 봤다⁠. 계순도 남편을 봤다⁠. 찬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

“⁠세 번⁠.⁠”

계순이 빨간 펜으로 적었다⁠. 「⁠비상 — 한 달 세 번⁠. 넘으면 할아버지⁠, 그다음 사위⁠.⁠」 그리고 계약서 네 귀퉁이에 시침핀을 하나씩 꽂았다⁠. 3월 2일에 남은 핀 자국 바로 옆이었다⁠. 계순은 계약서를 들어 셋에게 보였다⁠. 도장은 없었다⁠. 핀 네 개가 계약서를 붙들고 있었다⁠.

“⁠한 달 입어 보고 다시 고쳐⁠.⁠”

혜빈이 계약서를 받아 들었다⁠. 핀에 찔리지 않게 귀퉁이를 피해서 쥐었다⁠.

쿠션 성에서 기어 나온 라율이 식탁 모서리에 턱을 괴고 계약서를 올려다봤다⁠. 글자는 못 읽어도 빨간 글씨가 많다는 것은 알았다⁠.

“⁠할머니⁠, 나도 써⁠.⁠”

“⁠뭐 쓸 건데⁠?⁠”

“⁠화요일은 할머니 노래하는 날⁠.⁠”

계순은 혜빈을 봤다⁠. 혜빈이 계약서를 도로 식탁에 내려놓았다⁠. 계순은 맨 아래 여백에 빨간 펜으로 손녀의 말을 그대로 적었다⁠. 「⁠화요일은 할머니 노래하는 날⁠. — 강라율⁠」 라겸이 질세라 달려와 자기도 쓰겠다고 했다⁠. 라겸의 줄은 「⁠할아버지는 버스 놀이 매일⁠」이었다⁠. 순범이 헛기침을 했다⁠. 계순은 그것도 적었다⁠.

*

5월 4일 화요일 오후 한 시⁠, 경로당 큰방⁠. 노조 할머니 스물여섯이 둘러앉았다⁠. 계순은 탁세란의 명함을 큰방 가운데 바닥에 내려놓았다⁠. 뒷면의 볼펜 글씨가 위로 오게⁠.

“⁠의원이 이렇게 하자고 했어요⁠. 수당은 줄이고⁠, 쉬는 날 여덟 번 붙이고⁠, 대신 우리는 연장반 반대 안 한다고 말해 주고⁠. 나 혼자 정하면 노조가 안 돼서 가져왔어요⁠.⁠”

할머니들이 명함을 돌려 읽었다⁠. 돋보기가 여러 개 오갔다⁠.

“⁠수당 줄이면 얼마 받노⁠.⁠”

“⁠이십만 원⁠.⁠”

“⁠삼십에서 이십이면 십만 원 손해네⁠.⁠”

“⁠대신 한 달에 여덟 번 쉰다⁠. 화요일 목요일 다 쉬는 기다⁠.⁠”

“⁠연장반 생기면 우리 손주 거기 보내라 할 낀데⁠.⁠”

“⁠보내라 하면 보내⁠. 아홉 시까지는 안 된다 하고⁠. 그건 우리 집에서 우리가 싸우는 거고⁠.⁠”

108동 할머니가 손을 들었다⁠. 손녀 둘을 일곱 해째 보는 할머니였다⁠.

“⁠나는 이십만 원보다 화요일이 좋다⁠. 수영 다닐 거다⁠.⁠”

손이 하나씩 올라갔다⁠. 스물하나였다⁠. 다섯은 손을 들지 않았다⁠. 계순은 손을 들지 않은 다섯을 하나씩 봤다⁠. 그중 하나가 말했다⁠. 나는 돈이 더 필요해⁠. 계순은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더 필요하다는 말도 맞았다⁠. 다수가 정했다⁠. 계순은 손을 들지 않은 다섯에게 귤을 하나씩 더 줬다⁠. 귤을 받은 할머니 하나가 껍질을 까서 반을 계순에게 도로 건넸다⁠. 계순은 받아서 먹었다⁠. 새콤했다⁠.

*

5월 11일 화요일 오후 두 시⁠, 화성시의회 복지위원회 회의실⁠. 대회의실보다 작은 방이었고⁠, 방청석은 마흔 석이었다⁠. 이음누리 노조 할머니 서른이 와 있었다⁠. 공청회 뒤 단톡방에 다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순범은 아흔한 살 할머니의 보행기 옆에 앉았다⁠.

회의 시작 오 분 전⁠, 시청 앞에 오토바이 한 대가 멈췄다⁠. 형광 조끼를 입은 사내가 헬멧을 벗고⁠, 뒷자리의 어머니를 부축해 내렸다⁠. 묘순이었다⁠. 묘순은 아들 팔을 잡고 회의실 앞까지 걸어왔다⁠. 아들은 문 앞에서 멈추고 어머니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둘둘 만 천이었다⁠.

“⁠엄마⁠, 이거⁠. 큰놈이 다시 썼어⁠.⁠”

“⁠아이고 마⁠… 니는 안 들어오나⁠.⁠”

“⁠배송 마흔 개 남았어⁠. 끝나고 데리러 올게⁠.⁠”

아들은 헬멧을 다시 쓰고 돌아갔다⁠. 묘순이 회의실로 들어와 계순 옆에 앉았다⁠. 허리 보호대가 둘⁠, 나란히 의자 등받이에 닿았다⁠. 묘순은 천을 펼쳤다⁠. 흰 천에 검은 매직으로 「⁠돌봄도 노동이다⁠」 이번에는 ‘⁠노⁠’ 자의 받침이 반듯했다⁠.

“⁠아들이 태워 줬어요⁠?⁠”

“⁠태워 준 기 아이고⁠, 지가 태운다 카더라⁠. 엄마 버스 타면 허리 아프다꼬⁠.⁠”

묘순은 그렇게 말하고 깃발 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계순은 묘순의 손등을 봤다⁠. 핏줄이 가라앉아 있었다⁠.

탁세란이 수정안을 읽었다⁠. 「⁠수당은 월 이십만 원으로 한다⁠. 수당을 받는 조부모에게 월 여덟 번의 쉼 돌봄을 지원한다⁠. 국공립 연장반 예산은 원안대로 유지한다⁠.⁠」 다른 위원 하나가 손을 들고 반대했다⁠. 할머니들이 연장반을 반대하면 연장반이 무너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복지위원장이 방청석을 봤다⁠.

“⁠이음누리 할머니 돌봄 노조 위원장님 계십니까⁠? 노조 입장을 한마디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계순은 일어났다⁠. 찍찍이 소리가 작은 회의실에 울렸다⁠. 할머니 서른이 계순을 올려다봤다⁠.

“⁠우리 노조는 연장반 반대 안 합니다⁠. 할머니 없는 집 손주도 우리 손주예요⁠.⁠”

복지위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표결은 오 대 이였다⁠. 의사봉이 세 번 울렸다⁠. 묘순이 깃발을 들었다⁠. 할머니 서른이 박수를 쳤다⁠. 순범이 보행기 손잡이를 잡은 채 한 손으로 무릎을 쳤다⁠.

회의가 끝나고 탁세란이 방청석으로 내려왔다⁠. 계순 앞에 멈췄다⁠.

“⁠어머님⁠, 이제 화요일엔 뭐 하실 거예요⁠?⁠”

계순은 몸뻬 주머니 속의 통장을 손으로 쥐었다⁠. 천삼십⁠. 다섯 해 동안 딸이 「⁠엄마수고비⁠」라고 적어 보낸 돈이 남은 것이었다⁠.

“⁠수선집 다시 열 거예요⁠. 경로당 창가에⁠. 화요일 목요일만⁠. 재봉틀 한 대 살 돈은 있어요⁠.⁠”

묘순이 깃발을 내리고 계순을 봤다⁠. 탁세란이 처음으로 웃는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첫 손님 해도 될까요⁠? 정장 바지 단이 길어서요⁠.⁠”

“⁠예약하세요⁠. 화요일은 사람 많아요⁠.⁠”

1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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