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419자)

줄자

손주 돌봄 파업 선언 · 윤은류

“⁠아니요⁠. 맞습니다⁠.⁠”

대답이 스피커를 타고 대회의실 끝까지 갔다⁠. 방청석이 술렁였다⁠. 다른 동네 할머니 단체 자리에서 누가 「⁠아이고⁠」 했다⁠. 이음누리 노조 열넷이 서로를 봤다⁠. 순범은 양복 무릎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발언자석 맨 앞자리에서 혜빈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탁세란은 빨간 불이 들어온 마이크 앞에서 다음 질문을 하지 않았다⁠. 계순이 말을 이을 때까지 기다렸다⁠.

“⁠딸 말이 맞아요⁠. 수당만 주면 끈이 돼요⁠. 시에서도 돈 주는데 엄마 조금만 더 해 줘⁠. 우리 딸이 그 말 할 거라고 했는데⁠, 할 거예요⁠. 나도 우리 엄마한테 그 말 했을 거예요⁠.⁠”

계순은 블라우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에서 화장실 종이 수건이 먼저 나와 발언대 위로 떨어졌다⁠. 젖어서 구겨진 종이였다⁠. 방청석 앞줄에서 누가 웃음을 삼켰다⁠. 계순은 종이 수건을 도로 주머니에 넣고⁠, 다른 것을 꺼냈다⁠. 노란 줄자였다⁠. 남문 시장 「⁠계순 수선⁠」에서 스물두 해 쓴 줄자로⁠, 숫자 몇 개는 손때에 지워져 있었다⁠.

계순은 줄자를 발언대 앞판에 대고 쭉 뽑았다⁠. 끝을 반대쪽 모서리에 맞췄다⁠.

“⁠이 발언대가 육십 센티네요⁠. 나는 수선집을 스물두 해 했어요⁠. 옷을 고칠 때는 입는 사람 몸을 재요⁠. 옷이 맞다⁠, 안 맞다는 몸에 대 봐야 알아요⁠.⁠”

줄자가 손에서 스르륵 감겨 들어갔다⁠. 찰칵⁠. 대회의실이 조용했다⁠.

“⁠딸 말은 맞는데⁠, 품이 하나 모자라요⁠. 수당이 끈이 되는 건 쉬는 날이 없어서예요⁠. 돈만 있고 쉬는 날이 없으면 그건 월급이 아니라 발목에 매는 거예요⁠. 쉬는 날이 같이 있으면 그건 계약이에요⁠. 우리 딸이 3월 2일 아침에 나한테 계약서를 내밀었어요⁠. 그 계약서가 틀린 게 아니었어요⁠. 쉬는 날 칸이 없어서 틀린 거였어요⁠.⁠”

계순은 원고를 펴지 않았다⁠. 빨간 줄 세 개가 그어진 원고는 발언대 위에 접힌 채로 있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고쳐 주세요⁠. 수당을 주시면⁠, 한 달에 며칠은 시에서 대신 아이를 봐 줄 선생님을 보내 주세요⁠. 할머니가 그날은 노래 교실 가고⁠, 동창 만나고⁠, 바다 보러 가게⁠. 그 대신 수당은 좀 줄이셔도 돼요⁠. 줄인 돈으로 연장반도 여세요⁠. 연장반이 필요한 집도 있어요⁠. 할머니가 없는 집⁠, 할머니가 아픈 집⁠. 우리 노조 할머니들도 연장반 반대 안 해요⁠. 아홉 시까지는 너무 길다고 할 뿐이에요⁠.⁠”

계순은 발언대에서 손을 뗐다⁠.

“⁠할머니를 집에 묶는 돈도 나쁘고⁠, 할머니를 아예 빼 버리는 도시도 나는 싫어요⁠. 우리 손주가 나를 좋아해요⁠. 화요일엔 할머니가 노래 교실 가는 날⁠, 그것만 정해 주시면 돼요⁠. 이상입니다⁠.⁠”

사 분 삼십 초였다⁠.

*

박수는 고르지 않았다⁠. 이음누리 노조 열넷이 먼저 쳤고⁠, 다른 동네 할머니 단체가 반쯤 따라 쳤고⁠, 부모들 자리는 몇몇만 쳤다⁠. 맨 뒷줄에서 묘순이 일어서서 쳤다⁠. 일어서는 데 두 번이 들었는데⁠, 두 번째에는 허리를 짚지 않고 일어났다⁠.

탁세란이 마이크 버튼을 다시 눌렀다⁠.

“⁠어머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두 가지 여쭙겠습니다⁠. 대체 돌봄 선생님을 한 달에 여덟 번 보내려면 그것도 예산입니다⁠. 수당을 줄이고⁠, 연장반을 열고⁠, 쉼 돌봄까지 하면⁠, 셋 다 반쪽이 됩니다⁠. 반쪽 정책 셋이 온전한 정책 하나보다 낫다고 보십니까⁠?⁠”

계순은 대답하기 전에 숨을 한 번 쉬었다⁠.

“⁠반쪽 바지 셋은 못 입지만⁠, 품을 조금씩 줄인 바지 셋은 세 사람이 입어요⁠. 의원님은 한 사람한테 딱 맞는 바지 한 벌을 만들자는 거고⁠, 나는 세 사람이 다 입을 수 있게 고치자는 거예요⁠.⁠”

방청석에서 웃음이 났다⁠. 기자 하나가 바지 이야기를 노트에 옮겼다⁠. 탁세란은 웃지 않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두 번째입니다⁠. 대신 오는 선생님을 아이들이 받아들일까요⁠? 아이들은 할머니를 원합니다⁠. 어머님 손주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처음엔 신발 숨겨요⁠. 우리 손주가 숨겼어요⁠. 도우미 선생님 운동화를 신발장 맨 위 칸에⁠. 이틀 만에 그만두셨어요⁠.⁠”

방청석이 다시 웃었다⁠. 발언자석 맨 앞자리의 혜빈이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조금 떨렸다⁠. 웃는 건지 아닌지 뒤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할머니가 쉬는 날이 정해져 있으면⁠, 애들도 배워요⁠. 오늘은 할머니가 바다 가는 날⁠. 애들은 다섯 살이어도 정해진 건 지켜요⁠. 안 정해 두니까 매일 할머니를 찾는 거예요⁠. 그건 애들 잘못이 아니고 어른들이 안 정해 둔 거예요⁠.⁠”

복지위원장이 시계를 봤다⁠. 의사봉을 들었다⁠.

“⁠발언 감사합니다⁠. 오늘 들은 의견을 바탕으로 5월 11일 복지위원회에서 조례안을 심사하겠습니다⁠. 공청회를 마칩니다⁠.⁠”

의사봉이 세 번 울렸다⁠.

*

공청회가 끝나고 대회의실 복도는 사람으로 찼다⁠. 기자들이 혜빈에게 갔고⁠, 혜빈은 회사 이름을 빼 달라고 했다⁠. 노조 할머니들은 계순을 둘러쌌다가⁠, 아흔한 살 할머니가 화장실이 급하다고 해서 한꺼번에 흩어졌다⁠. 순범이 보행기를 밀고 따라갔다⁠. 계순은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복도 끝 창가로 갔다⁠. 창밖으로 시청 광장이 보였다⁠. 오후 햇빛이 비스듬했다⁠.

구두 소리가 다가왔다⁠. 탁세란이었다⁠. 수행 비서 없이 혼자였다⁠. 탁세란은 계순 옆에 서서 같이 창밖을 봤다⁠.

“⁠줄자⁠, 좋았습니다⁠.⁠”

“⁠의원님 질문도 좋았어요⁠. 아팠어요⁠.⁠”

탁세란이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짧은 웃음이었다⁠. 웃음을 거두고 창틀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간담회 때 친정어머니가 열 해를 봐 주셨다고 말씀드렸죠⁠. 우리 엄마도 허리 보호대를 찼어요⁠. 어머님 것과 똑같은 검은색이요⁠. 아들이 열 살 될 때까지 찼어요⁠. 저는 엄마한테 한 푼도 안 드렸어요⁠. 드리면 엄마가 그만두지 못할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어요⁠.⁠”

“⁠지금 어머님은요⁠?⁠”

“⁠수원 사세요⁠. 오래 못 걸으세요⁠. 계단 있는 데는 안 가세요⁠. 아들은 대학생이고⁠, 할머니한테 한 달에 한 번 전화해요⁠.⁠”

계순은 탁세란의 옆얼굴을 봤다⁠. 반백의 단발 아래 귀가 붉었다⁠. 간담회 날 할머니들의 말을 하나도 끊지 않던 귀였다⁠.

“⁠그래서 수당 반대하신 거예요⁠?⁠”

“⁠그래서 연장반 하자고 한 거예요⁠. 엄마 같은 사람이 다시 없게⁠. 그런데 오늘 어머님 따님 말 들으면서⁠, 어머님 말 들으면서⁠, 우리 엄마한테 필요했던 건 연장반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엄마는 화요일이 필요했어요⁠.⁠”

탁세란은 재킷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뒷면에 볼펜으로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5월 11일 심사 때 수정안을 내겠습니다⁠. 수당 액수는 줄이고⁠, 수당 받는 분께 한 달 여덟 번 쉼 돌봄을 붙입니다⁠. 연장반 예산은 그대로 지킵니다⁠. 대신 어머님 노조가 연장반 반대 안 한다고⁠, 방청석에서 한 번 더 말씀해 주세요⁠. 할머니들이 반대하면 연장반이 무너집니다⁠.⁠”

계순은 명함을 받았다⁠. 뒷면에 「⁠쉼 돌봄 월 8회⁠」라고 적혀 있었다⁠. 계순은 돋보기를 내려 볼펜 글씨를 읽고⁠, 명함을 블라우스 주머니에 넣었다⁠. 젖은 종이 수건 옆이었다⁠.

“⁠할머니들한테 물어봐야 돼요⁠. 나 혼자 정하면 노조가 아니에요⁠.⁠”

“⁠압니다⁠. 그래서 어머님한테 드리는 거예요⁠.⁠”

탁세란이 손을 내밀었다⁠. 계순은 손을 잡았다⁠. 탁세란의 손은 생각보다 작았고⁠, 손가락 마디에 펜을 오래 쥔 굳은살이 있었다⁠. 계순의 손가락 마디에는 가위를 오래 쥔 굳은살이 있었다⁠. 두 굳은살이 맞닿았다⁠.

복도 저쪽 화장실 앞에서 아흔한 살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행기를 밀고 나오던 할머니가 탁세란을 알아보고 손을 들었다⁠.

“⁠의원 양반⁠! 내 생전에 시청 구경은 처음인데⁠, 화장실이 우리 집보다 좋네⁠!⁠”

탁세란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보행기를 미는 순범이 양복 차림으로 따라 고개를 숙였다⁠. 버스 기사의 인사는 허리가 아니라 모자 챙에서 나왔다⁠. 모자가 없어서 순범은 이마를 짚었다⁠.

*

같은 시각⁠, 대회의실 앞 복도 반대편⁠. 혜빈은 지역 신문 기자 둘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젊은 기자가 녹음기를 내밀었다⁠.

“⁠육혜빈 님⁠, 어머님과 반대편에서 발언하셨는데요⁠. 오늘 어머님이 따님 말이 맞다고 하셨잖아요⁠. 기분이 어떠세요⁠?⁠”

혜빈은 녹음기를 봤다⁠. 회사에서 배운 대로라면 여기서 숫자를 하나 말하고 끝내야 했다⁠. 연장반이 몇 곳⁠, 대기가 몇 명⁠. 혜빈은 숫자를 고르다가 그만두었다⁠.

“⁠반대편 아니었어요⁠.⁠”

“⁠네⁠?⁠”

“⁠엄마는 쉬는 날을 붙이자고 했고 저는 끈을 풀자고 했어요⁠. 둘이 같은 옷을 서로 다른 데서 잡고 있었던 거예요⁠. 엄마는 품을 쟀고 저는 길이를 쟀어요⁠.⁠”

기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혜빈은 자기가 방금 엄마 말투로 말했다는 것을 알았다⁠. 수선집 말⁠. 남문 시장 골목에서 열일곱 살 혜빈이 학원비 쪽지를 들고 서 있을 때⁠, 재봉틀 너머에서 엄마가 손님들에게 하던 말이었다⁠. 품은 넉넉하게⁠, 길이는 딱 맞게⁠.

“⁠회사 이름은 빼 주세요⁠.⁠”

혜빈은 그렇게 말하고 기자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녹음기가 혜빈의 등을 따라오다가 멈췄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면서 혜빈은 휴대전화 메모장을 열었다⁠. 새 현관 번호를 바꾸는 방법이 저장되어 있었다⁠. 어젯밤 찾아 둔 것이었다⁠.

*

엘리베이터는 사 층에 멈춰 있었다⁠. 계순이 버튼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안에 혜빈이 혼자 서 있었다⁠. 기자들을 피해 먼저 탄 것이었다⁠. 둘 다 멈칫했다⁠. 계순이 타지 않으려고 반걸음 물러나는데⁠, 복도 끝에서 순범이 보행기를 밀며 소리쳤다⁠.

“⁠먼저 내려가⁠! 나는 할머니 모시고 갈게⁠!⁠”

순범은 아내와 딸이 탄 엘리베이터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었다⁠. 일부러 늦게 오는 걸음이었다⁠. 계순은 엘리베이터에 탔다⁠.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 안은 좁았다⁠. 거울에 둘이 비쳤다⁠. 남색 정장의 딸과 흰 블라우스의 엄마⁠. 엄마의 블라우스 아랫단 한쪽이 접혀 있었다⁠. 혜빈이 거울로 그것을 봤다⁠.

“⁠아빠가 다렸어⁠?⁠”

“⁠태웠어⁠. 접었어⁠.⁠”

혜빈이 웃었다⁠. 이번에는 웃음 끝이 갈라지지 않았다⁠.

“⁠엄마⁠, 왜 맞다고 했어⁠?⁠”

“⁠맞으니까⁠.⁠”

“⁠엄마 얘기 하나도 안 했잖아⁠. 통장도⁠, 라겸이도⁠, 주사도⁠. 그거 다 말하면 엄마가 이겼을 텐데⁠.⁠”

“⁠그거 다 니 얘기잖아⁠. 니 얘기는 니가 했잖아⁠. 끈 쥐고 있었다고⁠.⁠”

엘리베이터가 일 층에 닿았다⁠. 문이 열렸다⁠. 로비에 기자 하나가 서 있었다⁠. 혜빈이 닫힘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혔다⁠. 혜빈이 사 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다시 올라갔다⁠.

“⁠다섯 해 동안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한 적이 없어⁠. 미안하다고 하면 엄마가 그만둘까 봐⁠.⁠”

“⁠엄마도 힘들다고 한 적이 없어⁠. 힘들다고 하면 니가 회사 그만둘까 봐⁠.⁠”

“⁠우리 둘 다 바보야⁠.⁠”

“⁠육씨라 그래⁠. 고집이⁠.⁠”

사 층에서 문이 열렸다⁠. 아무도 없었다⁠. 혜빈이 일 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다시 내려갔다⁠. 둘은 거울을 보며 서 있었다⁠. 혜빈이 휴대전화를 꺼내 무언가를 쳤다⁠. 엄마 바로 옆에 서서⁠,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계순의 블라우스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떨었다⁠. 명함과 종이 수건 사이에서였다⁠. 계순은 돋보기를 내리고 화면을 봤다⁠.

「⁠새 번호 0302⁠」

3월 2일⁠. 진단서를 내민 날이었다⁠. 문자가 하나 더 왔다⁠.

「⁠토요일 열 시에 와⁠. 계약서 다시 쓰자⁠. 이번엔 아빠랑 찬솔 씨도⁠. 빨간 펜 가져와⁠.⁠」

엘리베이터가 일 층에 닿았다⁠.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혜빈이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13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줄자 · 손주 돌봄 파업 선언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