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58자)

발언대

손주 돌봄 파업 선언 · 윤은류

다리미에서 김이 올라왔다⁠. 4월 27일 화요일 아침 일곱 시⁠, 103동 1204호 거실⁠. 순범은 식탁 위에 수건 두 장을 겹쳐 깔고 흰 블라우스를 펼쳐 놓았다⁠. 계순이 장롱 맨 아래 칸에서 꺼낸 블라우스였다⁠. 혜빈 결혼식 때 입고 다섯 해 넘게 비닐에 싸여 있던 옷이었다⁠.

휴대전화는 우유 팩 대신 간장병에 기대 세워져 있었다⁠. 「⁠셔츠 다림질 3분 완성⁠」 화면 속 남자는 소매부터 다렸다⁠. 순범도 소매부터 다렸다⁠. 버스 기사는 순서를 바꾸지 않았다⁠.

“⁠칼라는 뒤집어서⁠.⁠”

계순이 재봉틀 앞에서 말했다⁠. 순범은 대답 없이 칼라를 뒤집었다⁠. 다리미를 칼라 끝에서 가운데로⁠, 가운데에서 반대 끝으로 밀었다⁠. 손목이 꼿꼿했다⁠. 서른한 해 핸들을 잡은 손목이었다⁠. 앞판으로 넘어가자 다리미가 조금 오래 머물렀다⁠. 블라우스 아랫단 한쪽에 손톱만 한 누런 자국이 생겼다⁠.

순범이 다리미를 들고 멈췄다⁠. 계순이 일어나 왔다⁠. 보호대 찍찍이가 식탁 모서리를 긁었다⁠.

“⁠…미안⁠.⁠”

“⁠괜찮아⁠.⁠”

계순은 시침핀 두 개를 꺼내 아랫단을 안으로 한 번 접었다⁠. 누런 자국이 접힌 단 안으로 들어갔다⁠. 핀을 꽂고⁠, 실을 꿰어 감침질로 두 땀을 떴다⁠. 일 분이 걸리지 않았다⁠. 계순은 블라우스를 들어 올려 순범에게 보였다⁠.

“⁠이렇게 접으면 아무도 몰라⁠.⁠”

“⁠당신은 알잖아⁠.⁠”

“⁠나는 알지⁠. 접은 사람은 알아⁠.⁠”

순범이 다리미 전원을 껐다⁠. 다리미가 식는 소리가 났다⁠. 순범은 안방에 들어가 장롱을 열었다⁠. 혜빈 결혼식 때 입은 양복이 아내 블라우스 옆 칸에 있었다⁠. 순범은 양복을 꺼내 들고 나왔다⁠.

“⁠나도 가⁠.⁠”

“⁠버스에 자리 있어⁠. 열넷이야⁠.⁠”

“⁠그럼 열다섯⁠.⁠”

*

오전 열 시⁠, 경로당 큰방⁠. 노인대학 스마트폰 반 반장 영채가 큰방 텔레비전에 휴대전화를 연결했다⁠. 화면에 계순의 발언 원고가 떴다⁠. 영채가 노인대학에서 배운 프롬프터 앱이었다⁠. 글자가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흘러갔다⁠.

“⁠계순아⁠, 화면 보면서 읽어⁠. 글자가 알아서 올라가⁠.⁠”

계순은 화면을 봤다⁠. 글자가 작았다⁠. 정수리의 돋보기를 내렸다⁠. 글자가 보였는데 이미 지나가 있었다⁠.

“⁠빨라⁠.⁠”

“⁠속도 줄일게⁠.⁠”

영채가 화면을 눌렀다⁠. 이번에는 글자가 너무 느려서 계순이 한 줄을 다 읽고 다음 줄을 기다리는 동안 108동 할머니가 하품을 했다⁠. 아흔한 살 할머니는 보행기에 달린 계란 모양 주방 타이머를 오 분에 맞춰 놓고 있었다⁠. 타이머가 울렸다⁠. 계순은 원고의 반도 못 읽었다⁠.

“⁠오 분 사십 초⁠.⁠”

108동 할머니가 휴대전화 스톱워치를 보며 말했다⁠. 스톱워치를 켜는 법은 지난주 스마트폰 반에서 배웠다⁠. 끄는 법은 아직 안 배워서⁠, 108동 할머니의 스톱워치는 지난주 목요일부터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화면 위쪽에 백오십 몇 시간이 찍혀 있었다⁠.

“⁠그건 언제 끄노⁠?⁠”

“⁠다음 주에 배운다⁠.⁠” 영채가 손뼉을 쳤다⁠.

“⁠줄여야 돼⁠. 사십 초⁠.⁠”

계순은 원고를 종이로 뽑아 와서 무릎에 펼쳤다⁠. 빨간 수선 펜 뚜껑을 이로 물어 뺐다⁠. 첫 장에 「⁠3월 2일 아침⁠, 저는 딸에게 진단서를 내밀었습니다⁠」가 있었다⁠. 둘째 장에 「⁠딸은 다섯 해 동안 매달 돈을 보냈고⁠」가 있었다⁠. 셋째 장에 「⁠손자가 이마를 세 바늘 꿰맨 날⁠, 저는 바다에 있었습니다⁠」가 있었다⁠.

계순은 둘째 장의 줄에 빨간 줄을 그었다⁠. 셋째 장의 줄에도 그었다⁠. 첫 장의 줄에도 그었다⁠. 펜을 쥔 손이 멈추지 않았다⁠. 원고 세 장에서 집 이야기가 하나씩 지워졌다⁠. 영채가 어깨너머로 봤다⁠.

“⁠그거 다 지우면 뭐 남아⁠.⁠”

“⁠남는 거 말하면 돼⁠.⁠”

“⁠니 얘기가 없잖아⁠.⁠”

“⁠내 얘기는 내 입에 있어⁠. 종이에 안 써도 돼⁠.⁠”

계순은 펜 뚜껑을 이로 물어 끼웠다⁠. 딸깍⁠. 큰방의 세 할머니가 딸깍 소리를 들었다⁠. 아무도 다음 말을 하지 않았다⁠.

*

열두 시 반⁠, 단지 정문⁠. 사십오 인승 관광버스에 열다섯이 탔다⁠. 할머니 열넷과 양복 입은 할아버지 하나⁠. 빈자리가 서른이었다⁠. 아흔한 살 할머니의 보행기는 짐칸 대신 맨 앞자리 옆에 실었다⁠. 기사는 순범이 다니던 버스 회사 후배였다⁠. 순범을 보고 눈이 커졌다⁠.

“⁠선배님⁠? 여기 웬일이세요⁠?⁠”

“⁠오늘 우리 집사람 출근 날이여⁠.⁠”

순범은 기사 옆 안내석으로 갔다⁠. 손잡이를 잡고 마이크를 들었다⁠. 마이크 끝을 손바닥으로 두 번 툭툭 쳤다⁠. 습관이었다⁠.

“⁠에⁠, 승객 여러분⁠. 이 버스는 이음누리 7단지를 출발하여 화성시청까지 가는 버스입니다⁠. 가시는 동안 안전띠 꼭 매 주시고⁠, 위원장님 긴장하시니까 말 시키지 마시고⁠, 사탕은 앞자리부터 돌립니다⁠. 출발합니다⁠.⁠”

할머니 열넷이 박수를 쳤다⁠. 계순은 창가 자리에서 웃었다⁠. 웃으면서 순범의 양복 뒷모습을 봤다⁠. 양복이 어깨에서 조금 컸다⁠. 다섯 해 동안 남편 어깨가 줄어 있었다⁠. 계순은 그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

한 시 사십 분⁠, 시청 이 층 여자 화장실⁠. 계순이 들어갔을 때 세면대 앞에 혜빈이 있었다⁠. 손을 씻고 있었다⁠. 물을 오래 틀어 놓고 있었다⁠. 거울 속에서 둘의 눈이 마주쳤다⁠. 혜빈은 물을 잠그지 않았다⁠.

계순은 옆 세면대로 가서 손을 씻었다⁠. 거울 속 자기 머리를 봤다⁠. 버스 창에 기대 온 쪽 파마머리가 납작하게 눌려 있었다⁠. 계순은 젖은 손바닥으로 눌린 머리를 부풀렸다⁠. 머리는 늘 그렇듯 손을 밀어냈고⁠, 이번에는 반대쪽만 하늘로 솟았다⁠.

혜빈이 거울을 보며 그것을 봤다⁠. 입꼬리가 조금 움직였다가 멈췄다⁠.

“⁠엄마 원고 몇 분이야⁠?⁠”

“⁠오 분⁠. 사십 초 잘랐어⁠.⁠”

“⁠나는 사 분 오십 초⁠.⁠”

“⁠니가 이겼네⁠.⁠”

혜빈은 대답 없이 물을 잠갔다⁠. 종이 수건을 두 장 뽑아 하나는 자기 손을 닦고⁠, 하나는 엄마 쪽 세면대 위에 놓았다⁠. 그리고 나갔다⁠. 화장실 문이 천천히 닫혔다⁠. 계순은 딸이 놓고 간 종이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다 닦고 나서 젖은 종이 수건을 버리지 않고 블라우스 주머니에 넣었다⁠.

*

오후 두 시⁠, 화성시의회 대회의실⁠. 반원으로 놓인 위원석에 시의원 일곱이 앉았다⁠. 가운데가 복지위원장⁠, 오른쪽 끝에서 두 번째가 탁세란이었다⁠. 회색 재킷⁠, 반백의 단발⁠. 탁세란은 방청석을 한 번 훑어보고 노트를 폈다⁠.

방청석은 백이십 석이었고 거의 찼다⁠. 정장 입은 부모들⁠, 아이를 안고 온 엄마⁠, 수당에 찬성하는 다른 동네 할머니 단체⁠, 지역 신문 기자 둘⁠. 이음누리 노조 열넷과 순범은 방청석 왼쪽 가운데에 모여 앉았다⁠. 계순은 발언자석 맨 끝에 앉았다⁠. 발언자석 맨 앞자리에 혜빈이 있었다⁠.

혜빈은 엄마를 보지 않았다⁠. 남색 정장에 회사 출입증은 없었다⁠. 무릎 위에 원고 두 장을 클리어 파일에 넣어 쥐고 있었다⁠. 계순은 딸의 뒤통수를 봤다⁠. 머리를 하나로 단단히 묶었다⁠. 출근하는 날의 머리였다⁠.

방청석 맨 뒷줄 문간에 누가 늦게 들어와 앉았다⁠. 회색 카디건⁠, 검은 허리 보호대⁠. 묘순이었다⁠. 혼자였다⁠. 묘순은 계순과 눈이 마주치자 손가락을 입에 댔다⁠. 아들 몰래였다⁠.

복지위원장이 의사봉을 두드렸다⁠.

“⁠「⁠화성시 조부모 손주 돌봄 수당 지원 조례안⁠」 공청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발언자 한 분당 오 분입니다⁠. 첫 번째 발언자⁠, 일하는 부모 대표 육혜빈 님⁠.⁠”

*

혜빈이 발언대로 나갔다⁠. 마이크 높이를 한 번 맞추고⁠, 원고를 펴고⁠, 방청석을 봤다⁠. 회사에서 인증 심사관 앞에 설 때의 얼굴이었다⁠.

“⁠동탄에서 다섯 살 쌍둥이를 키우는 육혜빈입니다⁠. 의료기기 회사 품질관리팀장입니다⁠.⁠”

혜빈은 숫자부터 말했다⁠. 해님 유치원의 하원 보호자 비율⁠, 반차 횟수⁠, 연장반 대기⁠. 숫자가 정확했고⁠, 방청석의 부모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 하나가 노트에 받아 적었다⁠. 계순은 딸이 운영위원회에서 띄운 표를 기억했다⁠. 같은 숫자였다⁠.

삼 분이 지나자 혜빈이 원고를 넘기지 않았다⁠. 손이 원고 위에 멈췄다⁠. 혜빈은 원고를 보지 않고 방청석을 봤다⁠.

“⁠여기까지가 제가 써 온 겁니다⁠. 나머지는 안 쓰고 왔습니다⁠.⁠”

대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탁세란이 노트에서 고개를 들었다⁠.

“⁠저는 지난 다섯 해 동안 친정어머니께 아이 둘을 맡겼습니다⁠. 어머니가 허리가 아픈 걸 저는 몰랐습니다⁠. 모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알면 맡길 수 없으니까요⁠.⁠”

방청석 왼쪽 가운데에서 순범이 무릎 위의 손을 쥐었다⁠. 계순은 숨을 쉬지 않았다⁠.

“⁠이 수당이 생기면⁠, 저는 어머니께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시에서도 돈 주는데 엄마 조금만 더 해 줘⁠. 저는 그 말을 할 사람입니다⁠. 제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저는 올해 알았습니다⁠. 수당은 할머니를 집에 묶는 끈입니다⁠. 저는 그 끈을 제 손으로 다섯 해 동안 쥐고 있었습니다⁠. 시가 그 끈에 돈을 묶어 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대신 제가 그 끈을 놓아도 되는 도시를 만들어 주십시오⁠. 연장반⁠, 그리고 부모가 일찍 퇴근해도 감점받지 않는 회사⁠. 그게 제 발언입니다⁠.⁠”

혜빈은 원고를 클리어 파일에 넣고 발언대에서 내려왔다⁠. 사 분 오십 초였다⁠. 박수가 먼저 터진 곳은 정장 입은 부모들 자리였고⁠, 다음은 기자석이었고⁠, 그다음은 다른 동네 할머니 단체였다⁠. 이음누리 노조 열넷 가운데 몇이 박수를 치다가 계순의 눈치를 봤다⁠. 묘순은 맨 뒷줄에서 박수를 치지 않고 손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계순은 박수를 쳤다⁠. 두 손바닥이 마주칠 때마다 손바닥이 아팠다⁠. 혜빈은 발언자석 맨 앞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끝까지 엄마를 보지 않았다⁠.

*

두 번째부터 다섯 번째까지 발언은 길게 이어졌다⁠. 수당에 찬성하는 할머니 단체의 회장⁠, 국공립 어린이집 교사⁠, 한 아빠⁠, 시청 담당 과장⁠. 계순은 하나도 듣지 못했다⁠. 무릎 위의 원고만 봤다⁠. 빨간 줄이 세 줄 그어진 원고였다⁠. 지워지지 않은 줄들이 남아 있었다⁠. 계순은 남은 줄들을 읽고 또 읽었다⁠. 몇 번을 읽어도 딸의 발언보다 약했다⁠.

“⁠여섯 번째 발언자⁠, 조부모 대표 육계순 님⁠.⁠”

계순은 일어났다⁠. 보호대 찍찍이가 의자 등받이를 긁었다⁠. 찌이익⁠. 대회의실 마이크가 찍찍이 소리를 주워 스피커로 내보냈다⁠. 방청석 몇이 웃음을 참았다⁠. 계순은 천천히 걸어 발언대까지 갔다⁠. 열두 걸음이었다⁠. 발언대에 두 손을 얹었다⁠. 마이크가 계순의 키보다 높았다⁠. 순범이 일어나려다 기자 뒤통수에 막혀 도로 앉았다⁠. 진행 직원이 와서 마이크를 내려 주었다⁠.

계순은 원고를 펴지 않았다⁠. 정수리에 돋보기를 얹은 채 방청석을 봤다⁠.

“⁠여섯 번째 발언자 육계순입니다⁠. 첫 번째 발언자 엄마예요⁠.⁠”

방청석이 웅성거렸다⁠. 기자 둘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발언자석 맨 앞자리에서 혜빈이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엄마를 봤다⁠. 위원석 오른쪽 끝에서 두 번째⁠, 탁세란이 마이크 버튼을 눌렀다⁠. 빨간 불이 들어왔다⁠.

“⁠위원장님⁠, 발언 시작 전에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복지위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탁세란이 계순을 똑바로 봤다⁠. 간담회 날처럼 웃지 않는 얼굴이었다⁠.

“⁠어머님⁠. 방금 따님 말씀이 틀렸습니까⁠?⁠”

대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백이십 명의 방청석과 위원석 일곱과 발언자석의 딸이 기다렸다⁠. 계순은 발언대를 쥔 손에 힘을 줬다⁠. 허리 보호대가 갈비뼈를 밀었다⁠. 계순은 마이크에 대고 대답했다⁠.

“⁠아니요⁠.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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