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77자)

번호키

손주 돌봄 파업 선언 · 윤은류

「⁠8단지 304동 할머니님이 나갔습니다⁠.⁠」

「⁠9단지 쌍둥이할매님이 나갔습니다⁠.⁠」

4월 19일 월요일 아침⁠, 「⁠이음누리 할머니 돌봄 노조⁠」 단톡방에 같은 모양의 회색 글자가 내려왔다⁠. 나갈 때 인사를 남긴 사람도 있었다⁠. 「⁠위원장님 죄송해요⁠. 아들이 애 다치면 어떡하냐고 해서요⁠」 우는 얼굴 이모티콘을 남긴 사람도 있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사람이 제일 많았다⁠. 회색 글자는 아침 일곱 시부터 열한 시까지 이어졌다⁠. 계순은 경로당 큰방 창가 의자에 앉아 화면이 내려가는 것을 봤다⁠. 숫자가 줄었다⁠. 예순하나⁠, 쉰넷⁠, 마흔⁠, 스물여덟⁠.

오후 한 시⁠, 큰방에 모인 사람은 넷이었다⁠. 계순⁠, 영채⁠, 108동 할머니⁠, 그리고 보행기를 민 아흔한 살 104동 할머니⁠. 바둑판이 있던 자리에 귤 상자는 없었다⁠. 묘순이 늘 가져오던 식혜 페트병도 없었다⁠.

“⁠단톡방에 열넷 남았어⁠.⁠”

영채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108동 할머니가 귤 대신 사탕을 꺼내 나눴다⁠.

“⁠열넷이면 버스 한 대도 남지⁠.⁠”

“⁠두 대 계약했어⁠. 한 대는 취소해야 돼⁠. 계약금은 안 돌려준대⁠.⁠”

계순이 말했다⁠. 계약금은 순범의 천백에서 나간 돈이었다⁠. 혜빈이 허락한 돈이었다⁠. 계순은 돈을 셀 때 처음으로 손이 무거웠다⁠.

아흔한 살 할머니가 보행기 손잡이를 쓸며 말했다⁠.

“⁠나는 버스 탄다⁠. 내 생전에 시청 구경은 처음이다⁠.⁠”

큰방에 웃음이 났다⁠. 작은 웃음이었는데 넷이 웃기엔 충분했다⁠. 영채가 손뼉을 한 번 쳤다⁠. 계순은 사탕을 입에 넣었다⁠. 박하 맛이었다⁠. 혀가 시렸다⁠.

“⁠버스 한 대에 열넷이면 자리가 남아서 누워 가도 되겠다⁠.⁠”

108동 할머니가 말했다⁠. 영채가 받았다⁠.

“⁠누워 가면 기사님 단속 걸린다더라⁠. 통영 가는 버스 기사가 그러더라⁠.⁠”

“⁠앉아서 춤추는 건 되고⁠?⁠”

“⁠엉덩이로만⁠.⁠”

넷이 다시 웃었다⁠. 아흔한 살 할머니는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 따라 웃었다⁠.

*

4월 20일 화요일 아침 여덟 시 사십 분⁠, 107동 일 층 엘리베이터 앞⁠. 계순은 반찬통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라겸이 좋아하는 메추리알 장조림이었다⁠. 거즈를 보고 싶었다⁠. 화요일은 계순의 날이었고⁠, 계순은 자기 날에 자기 발로 여기 왔다⁠.

엘리베이터 숫자가 8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7⁠, 6⁠, 5⁠. 계순은 반찬통을 두 손으로 쥐었다⁠. 문이 열렸다⁠. 혜빈이 쌍둥이 손을 하나씩 잡고 서 있었다⁠. 라겸의 이마에 하얀 거즈가 붙어 있었다⁠.

“⁠할머니⁠!⁠”

라겸이 엄마 손을 뿌리치고 달려 나왔다⁠. 계순 앞에서 멈추고 고개를 쳐들었다⁠. 거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할머니 보여 줄라고 안 뗐어⁠. 선생님이 떼도 된다 했는데 안 뗐어⁠.⁠”

계순은 무릎을 굽힐 수 없어서 허리를 숙이지 않고 손만 내렸다⁠. 손끝이 거즈 가장자리에 닿았다⁠. 거즈 아래가 조금 부어 있었다⁠.

“⁠아팠어⁠?⁠”

“⁠안 아팠어⁠. 할아버지가 울었어⁠.⁠”

혜빈이 다가와 라겸의 손을 다시 잡았다⁠. 혜빈의 얼굴은 화장이 반만 되어 있었다⁠. 이번 주 내내 연차를 낸 얼굴이었다⁠.

“⁠엄마⁠, 왜 왔어⁠?⁠”

“⁠장조림⁠.⁠”

계순은 반찬통을 내밀었다⁠. 혜빈은 받지 않았다⁠. 라율이 대신 받으려고 손을 뻗었고⁠, 혜빈이 라율의 손을 내렸다⁠.

“⁠애들 들어가 있어⁠. 엄마랑 할머니 얘기할 거야⁠.⁠”

혜빈은 쌍둥이를 경비실 앞 의자에 앉혔다⁠. 경비 아저씨가 눈치껏 사탕을 꺼냈다⁠. 혜빈은 엘리베이터 앞으로 돌아와 엄마와 마주 보았다⁠. 한 걸음 거리였다⁠.

“⁠번호 바꿨어⁠. 현관⁠. 어젯밤에⁠.⁠”

“⁠알아⁠. 아빠한테 들었어⁠.⁠”

“⁠아빠도 이제 오지 마라고 했어⁠. 엄마도⁠.⁠”

계순은 반찬통을 가슴에 붙였다⁠. 뚜껑이 손바닥에 차가웠다⁠.

“⁠다음 주부터 업체 도우미 와⁠. 하루 열 시간⁠. 찬솔 씨 휴직은 오월부터고⁠. 그때까지는 내가 연차 써⁠. 엄마 아빠한테 이제 안 맡겨⁠. 아빠는 전화 받다가 애를 놓쳤고⁠, 엄마는 바다에 있었어⁠. 둘 다 이제 쉬어⁠. 엄마가 원하던 거잖아⁠.⁠”

혜빈의 말은 이번에도 정확했다⁠. 숫자가 붙어 있었다⁠. 열 시간⁠, 오월⁠, 연차⁠. 계순은 딸의 정확한 말이 어디서 끊어질지 기다렸다⁠. 혜빈이 숨을 한 번 쉬고 마지막 말을 했다⁠.

“⁠그리고 엄마⁠. 27일에 공청회 나가지 마⁠.⁠”

“⁠니도 나가잖아⁠. 첫 번째로⁠.⁠”

“⁠나는 우리 집 얘기 안 해⁠. 연장반 숫자 얘기 할 거야⁠. 엄마는 우리 집 얘기 하잖아⁠. 계약서⁠, 통장⁠, 아빠 코인⁠, 내 맘카페 글⁠, 라겸이 이마⁠. 엄마가 시청에서 그 얘기 하면⁠, 그게 영상으로 다 돌아⁠. 우리 회사 사람들도 봐⁠. 본부장도 봐⁠.⁠”

“⁠엄마는 숫자 없어⁠. 엄마 얘기밖에 없어⁠.⁠”

“⁠그럼 하지 마⁠.⁠”

혜빈이 계순의 눈을 똑바로 봤다⁠. 서른다섯 해 동안 계순이 본 딸의 눈 가운데 가장 차가운 눈이었다⁠. 차가운 눈 아래로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엄마가 시청에서 그 얘기 하면⁠, 다신 우리 집 오지 마⁠. 애들도 못 봐⁠. 진짜로⁠.⁠”

경비실 앞 의자에서 라율이 사탕 껍질을 벗기다 고개를 들었다⁠. 다섯 살은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해도 얼굴은 다 알아들었다⁠. 라율이 동생 손을 잡았다⁠. 라겸은 거즈를 만지고 있었다⁠.

계순은 반찬통을 엘리베이터 옆 우편함 위에 올려놓았다⁠.

“⁠장조림은 두고 갈게⁠. 라겸이 메추리알 좋아해⁠.⁠”

“⁠엄마⁠.⁠”

“⁠대답은 27일에 할게⁠.⁠”

계순은 돌아서 나왔다⁠. 107동 유리문을 밀었다⁠. 유리문이 무거웠다⁠. 등 뒤에서 라겸이 할머니를 불렀다⁠. 계순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대답을 지금 해야 했다⁠.

*

4월 21일 수요일 오후⁠, 103동 엘리베이터 안⁠. 삼 층에서 문이 열리고 묘순이 탔다⁠. 손자 셋은 없었다⁠. 꽃분홍 패딩 조끼 대신 회색 카디건을 입었고⁠, 허리에 계순과 같은 검은 보호대를 두르고 있었다⁠. 묘순은 계순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문이 닫혔다⁠.

계순은 손에 든 공룡 가방을 내밀었다⁠. 응급실 의자에 남아 있던 가방이었다⁠. 묘순이 받았다⁠.

“⁠아이고 마⁠… 이거 찾느라 큰놈이 사흘을 울었다⁠.⁠”

“⁠허리는요⁠.⁠”

“⁠니캉 똑같은 거 찼다⁠. 삼⁠, 사번⁠. 아들이 사 줬다⁠.⁠”

묘순은 보호대 찍찍이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찌익⁠, 소리가 났다⁠. 둘이 동시에 웃었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 허리가 한 뼘씩 굵은 할머니 둘이 서 있었다⁠.

“⁠위원장⁠, 27일 몇 시고⁠.⁠”

“⁠두 시⁠. 버스는 열두 시 반에 정문⁠.⁠”

“⁠나는 못 탄다⁠. 아들이 안 된다 캤다⁠.⁠”

“⁠알아요⁠.⁠”

엘리베이터가 일 층에 닿았다⁠. 묘순은 내리지 않고 열림 버튼을 누른 채 서 있었다⁠. 한참 그러고 있다가 말했다⁠.

“⁠…시청 방청석은 버스 안 타도 들어가제⁠?⁠”

계순이 묘순을 봤다⁠. 묘순은 공룡 가방을 안고 먼저 내렸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손을 들어 흔들었는데⁠, 흔드는 손에 공룡 가방이 들려 있어서 공룡이 대신 인사를 했다⁠.

*

4월 22일 목요일 밤⁠, 103동 1204호 거실⁠. 순범은 텔레비전을 켜 놓고 보지 않았다⁠. 계순은 재봉틀 앞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노란 우비가 펼쳐져 있었다⁠. 라겸의 우비였다⁠. 놀이터에서 떨어진 날 입고 있던 것으로⁠, 병원 가방에서 순범이 들고 왔다⁠. 왼쪽 소매가 정글짐 쇠 봉에 긁혀 한 뼘 찢어져 있었다⁠.

계순은 찢어진 자리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작년 가을 줄인 단이 그대로 있었다⁠. 빨간 실 박음질⁠. 맘카페 사진 속 소매였다⁠.

“⁠그만해⁠.⁠”

순범이 텔레비전을 보며 말했다⁠.

“⁠우비⁠?⁠”

“⁠공청회⁠. 그만해⁠. 당신이 지금 애들 못 보는 거 못 견디는 거 내가 알아⁠. 서른아홉 해 봤어⁠. 당신 오늘 밥 한 숟갈 먹었어⁠.⁠”

계순은 실을 꿰었다⁠. 노란 비닐에 노란 실⁠. 바늘귀에 실이 한 번에 들어가지 않았다⁠. 돋보기를 내렸다⁠. 두 번째에 들어갔다⁠.

“⁠당신이 말려 봐⁠. 당신 말이면 들을게⁠.⁠”

순범이 고개를 돌렸다⁠. 아내가 자기 말을 듣겠다는 말을 순범은 처음 들었다⁠.

“⁠…그만해⁠. 혜빈이가 진짜로 문 안 열어 줄 거여⁠. 그 애 성격 당신 닮았어⁠.⁠”

“⁠알아⁠.⁠”

“⁠그럼⁠?⁠”

“⁠그래도 할 거야⁠.⁠”

계순은 바늘을 비닐에 찔렀다⁠. 비닐은 옷감과 달라서 한 번 뚫으면 구멍이 남았다⁠. 잘못 찌르면 메울 수 없었다⁠. 계순은 천천히 박았다⁠.

“⁠당신⁠, 오늘 혜빈이가 왜 그렇게 화났는지 알아⁠?⁠”

“⁠…코인 때문이지⁠. 나 때문에⁠.⁠”

“⁠아니⁠. 엄마가 시청에서 우리 집 얘기 하면⁠, 자기가 다섯 해 동안 엄마를 붙잡고 있었다는 게 다 들통나니까⁠. 혜빈이는 자기가 나쁜 딸이 될까 봐 무서운 거야⁠. 근데 혜빈이는 나쁜 딸이 아니야⁠. 나쁜 딸이 아닌데 엄마를 붙잡을 수밖에 없는 게 이상한 거야⁠. 그 얘기를 하러 가는 거야⁠.⁠”

순범은 대답하지 못했다⁠. 텔레비전에서 밤 뉴스가 나왔다⁠. 「⁠화성시의회⁠, 27일 손주 돌봄 수당 공청회⁠… 찬반 맞서⁠」 화면에 탁세란이 나왔다가 지나갔다⁠.

계순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받으니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탁세란 의원실 비서였다⁠.

“⁠육계순 어머님⁠, 27일 발언 순서 확인차 전화드렸습니다⁠. 여섯 번째⁠, 오 분입니다⁠. 혹시 발언 그대로 하십니까⁠?⁠”

계순은 우비를 내려다봤다⁠. 찢어진 자리가 반쯤 메워져 있었다⁠.

“⁠합니다⁠.⁠”

“⁠네⁠, 어머님⁠. 그럼 그날 뵙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순범이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껐다⁠. 거실이 조용해졌다⁠. 재봉틀 바늘이 비닐을 뚫는 소리만 남았다⁠. 톡⁠, 톡⁠, 톡⁠. 순범은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를 열고 밥솥을 열었다⁠. 밥을 한 공기 퍼서 장조림 몇 알과 함께 재봉틀 옆 작은 탁자에 놓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순도 아무 말 하지 않고 바늘을 내려놓고 숟가락을 들었다⁠.

*

4월 24일 토요일 저녁 여섯 시⁠, 107동 8층 복도⁠.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천천히 울렸다⁠. 띵⁠. 계순은 노란 우비를 개어 들고 802호 앞에 멈췄다⁠. 우비 소매는 새 단이 박혀 있었다⁠. 빨간 실 옛 단 위에 노란 실 새 단⁠. 두 줄이 나란히 지나갔다⁠.

현관 번호키 덮개를 밀어 올렸다⁠. 숫자판에 파란 불이 들어왔다⁠. 다섯 해 동안 계순이 하루에 두 번씩 누른 번호였다⁠. 쌍둥이 생일⁠. 계순은 손가락으로 천천히 눌렀다⁠.

「⁠삐리릭⁠.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기계음이 복도에 울렸다⁠. 계순은 손을 내렸다⁠. 다시 누르지 않았다⁠. 문 너머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그쳤다⁠. 누가 현관 쪽으로 오는 발소리가 났다가 멈췄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문 너머에서 노래가 들렸다⁠. 라율의 목소리였다⁠. 곰 세 마리⁠. 아빠 곰은 뚱뚱해⁠, 엄마 곰은 날씬해⁠. 라겸이 따라 불렀다⁠. 둘은 엄마 곰 다음에 가사를 바꿨다⁠. 할머니 곰은 갑옷 입어⁠. 할머니 곰은 갑옷 입어⁠.

3월 3일 아침에는 계순이 문 안에 있었고 손주들이 문 밖에 있었다⁠. 오늘은 반대였다⁠.

계순은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노란 우비를 펼쳐 목 부분의 고리를 현관 문고리에 걸어 두었다⁠. 우비가 문 앞에 길게 늘어졌다⁠. 소매 끝 두 줄의 박음질이 복도 형광등 아래 반짝였다⁠. 계순은 우비 소매를 한 번 쓸어 주름을 폈다⁠.

노래가 2절로 넘어갔다⁠. 계순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 않고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여덟 층이었다⁠. 보호대 찍찍이를 한 번 더 조이고⁠, 난간을 잡고⁠, 한 칸씩 내려갔다⁠. 계단참마다 위에서 노래가 조금씩 작아졌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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