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21자)

백에서 칠 빼기

화성 이주 추첨에 우리 할머니가 뽑혔다 · 진해솔

서지혜는 새벽 다섯 시 반에 남색 조끼를 다렸다. 광주 첨단지구 원룸, 다리미판은 침대 끝에 걸쳐 놓았고, 다리미 김이 올라올 때마다 창문에 하얀 막이 앉았다. 다리면서 서지혜는 규정집을 외웠다. 제52조, 심사관은 심사 과정에서 중대한 위법을 인지한 경우 국제 화성 이주 기구 감사관실에 직접 보고할 수 있다. 제52조 제2항, 보고한 심사관은 그 사실을 이유로 불이익을 받지 아니한다. 서지혜는 제2항을 두 번 외웠다. 두 번 외워야 믿을 수 있는 조항이었다.

책상 위에 어젯밤 뽑은 종이가 세 장 있었다. 첫 장은 원격 진료 연계 기록이었다. 심사관은 당첨자의 진료 기록 출처를 확인할 수 있었고, 서지혜는 어젯밤 열한 시까지 그 권한을 다 썼다. 늘봄의원의 오분례 원격 진료 한 건, 연결 번호는 서울 강남의 한 사무실 대표 번호였다. 번호 주인은 「프런티어 브리지」. 둘째 장은 늘봄의원 원장 하경수가 지난 한 달 동안 발급한 고령 당첨자 소견서 목록이었다. 서른한 건. 전부 원격이었고, 전부 같은 번호에서 걸려 왔다. 셋째 장은 비어 있었다. 보고서를 쓸 종이였다.

서지혜는 조끼를 입고 볼펜 세 자루를 가슴께에 꽂았다. 하나는 기록용, 하나는 서명용, 하나는 예비였다. 어머니가 쓰던 방식이었다. 어머니는 장을 담글 때 국자를 셋 썼다. 하나는 소금물, 하나는 장, 하나는 예비. 예비 국자는 한 번도 쓰는 걸 못 봤지만 어머니는 늘 셋을 꺼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서지혜는 집에서 담근 장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

아홉 시 사십 분, 칠 층 정수기 앞에서 서지혜는 종이컵에 물을 받다가 옆에 선 회색 정장을 봤다. 마이클 정이 종이컵 두 개를 겹쳐 들고 있었다. 부은 뺨은 거의 가라앉았다.

“주무관님, 오늘 검사 잘 부탁드려요. 공정하게요.”

“대리인 발언권은 재검실 밖에서도 없습니다.”

“아, 이건 발언이 아니라 인사예요.”

“인사도 기록합니다.”

마이클 정이 웃었다. 정말로 웃겼던 모양이었다.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주무관님 어머님도 장 담그셨다면서요. 할머님 댁 현장 심사 때 그러셨다고요. 저희 어머니도 담그셨어요. 그 집 아들은 다 장 냄새를 싫어하더라고요. 어릴 때 그 냄새가 몸에 배서 학교에서 놀림받거든요.”

서지혜는 종이컵을 구겼다.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묻지 않았다. 마당에 있던 누군가가 했을 것이다. 이 남자는 마당에서 나온 말을 하나도 흘리지 않았다.

“저는 놀림받은 적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서지혜는 구긴 종이컵을 버리고 재검실로 걸어갔다. 등 뒤에서 마이클 정이 정수기 단추를 다시 누르는 소리가 났다.

*

재검실은 진술실보다 넓었다. 앞쪽에 위원 셋이 앉았다. 가운데 노성만 위원장, 왼쪽에 의사 위원, 오른쪽에 민간 위원. 민간 위원은 지역 대학의 퇴직 교수였는데, 앉자마자 졸기 시작했다. 맞은편에 오분례가 앉았고, 보호자석에 이영희가 앉았다. 뒷줄 대리인석에 마이클 정이 다리를 꼬고 있었다. 서지혜는 검사관석에서 검사지를 넘겼다.

“오분례 님. 몇 가지 여쭙겠습니다. 오늘이 몇 년, 몇 월, 며칠입니까?”

“이천사십구 년, 삼월 초여드레.”

노성만이 펜을 들었다. 할머니가 말한 날짜는 음력이었다.

“위원장님, 음력 날짜도 정답 기준에 있습니다. 지침 해설서 12쪽입니다.”

서지혜가 말했다. 노성만이 펜을 내려놓았다. 이영희가 보호자석에서 고개를 숙였는데, 어깨가 떨렸다. 웃는 중이었다.

“지금 계신 곳은 어디입니까?”

“광주. 유리 건물. 칠 층. 저번에 러닝머신 탔던 데.”

“세 단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잘 들으셨다가 나중에 다시 말씀해 주세요. 나무, 자동차, 모자.”

“나무, 자동차, 모자.”

할머니가 따라 했다. 그리고 묻지도 않은 말을 붙였다.

“나무에 자동차가 받혀 부러서 모자가 날아갔네.”

“그렇게 외우시면 안 됩니다.”

“안 되는 법이 어디 있어?”

규정집에는 없었다. 서지혜는 다음 문항으로 넘어갔다.

“백에서 칠을 빼 보세요. 그리고 거기서 또 칠을 빼세요. 다섯 번까지.”

“백에서 칠 빼믄 구십삼. 또 빼믄 팔십육. 칠십구. 칠십둘. 육십오.”

할머니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오십팔, 오십하나, 사십사—”

“다섯 번이면 됩니다.”

“아가씨, 이거 언제까지 빼? 나 매실 셀 때도 이렇게는 안 세. 매실은 열 개씩 세.”

졸던 민간 위원이 눈을 떴다. 무슨 일인지 몰라 두리번거리다가, 할머니가 손가락으로 사십사를 접는 걸 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 입가가 올라가 있었다.

“시계를 그려 주세요. 숫자를 다 넣으시고, 열한 시 십 분을 가리키게 해 주세요.”

서지혜가 종이와 연필을 건넸다. 할머니는 연필을 쥐고 동그라미를 그렸다. 동그라미가 조금 찌그러졌다. 숫자를 열둘 넣었다. 육이 조금 왼쪽으로 쏠렸다. 바늘 둘을 그렸다. 짧은 바늘이 열하나, 긴 바늘이 둘. 그리고 시계 아래에 작은 항아리 하나를 그렸다.

“이건 뭡니까?”

“장독. 열한 시 십 분에 뚜껑 열어야 혀. 볕이 그때부터 들어.”

“장독은 채점 대상이 아닙니다.”

“그라믄 덤이여.”

“아까 말씀드린 세 단어를 다시 말씀해 주세요.”

“나무에 자동차가 받혀 부러서 모자가 날아갔제. 나무, 자동차, 모자.”

서지혜는 점수를 셌다. 숫자를 세는 동안 손이 흔들리지 않게 펜을 꽉 쥐었다. 정상 범위였다. 여든둘 나이 기준이 아니라 일흔 기준으로 봐도 정상이었다. 서지혜는 점수를 기록판에 적고 노성만에게 넘겼다.

노성만은 점수를 봤다. 그리고 서류철을 열었다.

“검사 점수는 정상 범위입니다. 다만 위원회는 의료 소견서와 관계인 진술서 세 부를 함께 검토합니다. 경도 인지 장애 의심 소견과 화기 방치 진술이 있습니다. 검사는 한 시점의 상태만 보여 줍니다. 종합하면, 위원회는 재량에 따라—”

“위원장님, 휴정을 요청합니다.”

서지혜가 일어섰다. 재검실의 눈이 전부 서지혜에게 왔다. 뒷줄의 마이클 정도 다리를 풀었다.

“검사관이 휴정을 요청하는 건 규정에—”

“제38조 제3항에 있습니다. 검사관은 판정 근거 자료에 의문이 있을 때 십오 분간 휴정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노성만이 서지혜를 오래 봤다. 그러다 웃었다.

“십오 분.”

*

위원장실 문이 닫히자 노성만의 웃음이 꺼졌다. 서지혜는 책상 위에 종이 두 장을 나란히 놓았다. 원격 진료 연계 기록, 그리고 서른한 건의 소견서 목록. 노성만은 종이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그거 어디서 났어요?”

“심사관 권한으로 조회했습니다. 제22조입니다.”

“서 주무관, 이 일 몇 년 했어요?”

“칠 년입니다.”

“칠 년 했으면 알 텐데. 위원장 재량을 검사관이 뒤집는 법은 없어요.”

“뒤집지 않습니다. 기록합니다.”

“기록해서 뭐 해요?”

“소견서 서른한 건이 전부 한 회사 번호에서 나왔습니다. 그 회사 대표가 지금 재검실 뒷줄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회사 이름은 지난달 위원장님 일정표에 세 번 나옵니다. 「외부 간담회」로요. 장소는 전부 같은 한정식 집입니다.”

노성만의 턱이 굳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칠 층 창밖으로 광주 시내가 회색으로 깔려 있었다. 등을 돌린 채로 그가 말했다.

“서 주무관, 우리가 왜 고령자를 떨어뜨리는지 알아요? 화성 기지 의료 설비가 몇 명분인지 알아요? 2차 선단 고령자 넷 중 하나가 첫해에 죽었어요. 시신 재처리 설비가 고장 나서 석 달 동안 냉동고에 있었어요. 나는 그걸 보고서로 읽었어요. 그 할머니 보내면, 그다음 보고서도 내가 읽어요.”

서지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보고서를 서지혜도 읽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럼 정직하게 떨어뜨리십시오. 서류를 꾸미지 마시고요.”

“정직하게 하면 안 떨어져요. 저 할머니 봤잖아요. 러닝머신 이십이 분. 장독 그리는 양반.”

“그럼 안 떨어지는 겁니다.”

노성만이 돌아섰다. 다시 웃고 있었다.

“서지혜 주무관, 지금부터 이 사건에서 빠지세요. 검사관 교체합니다. 오늘 오후부터 연가 쓰시고요. 사유는 업무 과중으로 하죠. 요새 다들 힘드니까.”

“제52조 제2항.”

“알아요. 불이익 아니에요. 휴가예요.”

서지혜는 종이 두 장을 집어 들었다. 노성만이 손을 내밀었다.

“그건 두고 가세요. 사건 자료예요.”

서지혜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두고 나왔다. 복도로 나와 걸으면서 조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어젯밤 열한 시에 써 둔 보고서가 「보내기」 단추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받는 곳, 국제 화성 이주 기구 감사관실. 첨부, 원격 진료 연계 기록 원본, 소견서 목록 원본, 일정표 사본, 그리고 그저께 김정민이 보낸 차 안 영상의 시각 표시. 종이는 사본이었다. 원본은 처음부터 여기 있었다.

서지혜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단추를 눌렀다. 「전송 완료」.

*

재검실로 돌아간 것은 서지혜가 아니라 다른 검사관이었다. 노성만이 판정을 미뤘다. 재검 결과와 위원회 의견은 열흘 뒤 최종 심사에서 함께 발표하겠다고 했다. 이영희가 보호자석에서 일어나 뭐라고 하려는 것을 할머니가 손목을 잡아 앉혔다.

서지혜는 상자 하나를 들고 일 층 로비로 내려왔다. 상자 안에는 규정집 한 권과 볼펜 한 묶음, 머그잔 하나가 들어 있었다. 유리문 앞에서 할머니가 서 있었다. 이영희는 차를 가지러 갔고, 할머니 혼자였다. 마이클 정은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 어디 가?”

“휴가 갑니다.”

“쫓겨났구마.”

서지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몸빼 주머니를 뒤졌다. 사탕과 휴지와 동전이 차례로 나왔고, 마지막에 박하 사탕 하나가 손바닥에 남았다. 할머니는 그걸 서지혜의 상자 안 머그잔 속에 넣었다.

“손 줘 봐.”

서지혜가 상자를 한 팔로 받치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할머니가 그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할머니 손바닥은 거칠고 따뜻했다. 손금마다 흙이 배어 있어서, 씻어도 안 빠지는 갈색 줄이 손바닥을 가로질렀다.

“아직 차구마. 장 담그기 딱 좋은 손이여.”

서지혜는 그 손을 빼지 않았다. 빼는 법을 잊은 것처럼 서 있었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장을 담근 해에 서지혜는 서울에서 공무원 시험 공부를 했고, 장 담그는 날 내려오라는 전화를 세 번 받지 않았다. 그 장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이모가 퍼 갔다. 서지혜는 그 장이 무슨 맛이었는지 모른다.

“오분례 님.”

“왜?”

“열한 시 십 분에 뚜껑을 여시는 거, 저희 어머니는 열 시에 여셨습니다.”

“그 집은 볕이 일찍 드는갑다.”

할머니가 손을 놓았다. 이영희의 차가 유리문 앞에 섰다. 할머니가 타고, 차가 떠났다. 서지혜는 상자를 든 채로 로비에 서 있다가 조끼 주머니의 진동을 느꼈다.

「국제 화성 이주 기구 감사관실. 귀하의 보고가 접수되었습니다. 오분례 님 최종 심사에 감사관 1인이 참관합니다. 보고자 보호 조치가 개시되었습니다.」

서지혜는 상자 안 머그잔에서 박하 사탕을 꺼내 입에 넣었다. 맵고 달았다.

9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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