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100자)

전역 아흐레 전

GOP 이등병은 오늘도 고라니와 싸운다 · 백해원

12월 31일 아침, 최강수는 라면 계산을 다시 입 밖에 냈다.

“아흐레. 라면으로 치면 열 개. 오늘 하나, 마지막 날 둘.” 그는 내무반 달력 앞에 서서 손가락을 접었다. “크리스마스 때 세 개 먹었으니까 그건 빠졌어. 나 이제 두 자리 숫자도 안 남았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최강수도 웃으라고 한 말이 아닌 것 같았다.

한동안 최강수는 그 계산을 하지 않았다. 다시 하는 걸 보고 주원은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알았다. 일곱 시 반에 한서윤이 내무반 문을 열었다.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박주원 이병. 대대장님이 찾으세요. 오늘 오전. 진술서 마감이 오늘이에요.”

“알겠습니다.”

“최 병장도 같이 내려가요. 인솔.”

최강수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 자청했습니다.”

한서윤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주원의 관물대 위에 놓인 봉투를 보았다. 봉투는 주원이 그 위에 올려놓은 뒤로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안에 서명이 끝난 열다섯 장과 서명이 없는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가져가요.” 한서윤이 말했다. “어떻게 할지는 내려가는 길에 정하든지.”

*

보급 트럭은 산을 내려가는 동안 내내 덜컹거렸다. 짐칸에는 빈 식량 상자와 기름통 두 개와 병장 하나, 이병 하나가 실려 있었다. 방수포 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기름 냄새를 짐칸 안에 휘저었다. 주원은 무릎 위에 봉투를 얹고, 회색 장갑 낀 손으로 그 봉투를 눌렀다. 장태오가 준 볼펜이 가슴 주머니에서 몸통을 쿡쿡 찔렀다. 트럭이 비탈을 내려갈 때마다 엔진 브레이크가 끙끙 앓는 소리를 냈고, 방수포 틈으로 산 아래 마을의 굴뚝 연기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전입하던 날 올라온 바로 그 길이었다. 그날은 귀가 얼어 있었는데, 오늘은 장갑 덕에 손이 얼지 않았다.

최강수는 맞은편 기름통에 등을 기대고 앉아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트럭이 첫 번째 급커브를 돌 때 입을 열었다.

“주원아.”

주원이 고개를 들었다. 전입 첫날부터 최강수는 그를 박주원이라고 불렀다. 성을 빼고 부른 건 처음이었다.

“서명해.”

“분대장님……”

“명령 아니야. 부탁이야. 나 군대 와서 후임한테 부탁하는 거 처음이다.” 최강수가 손을 무릎 사이에 모았다. 장갑을 벗은 맨손이었다. 손등이 터서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아흐레 남았어. 아흐레 뒤에 나 나가. 나가면 다시 못 들어와. 네가 감찰 앞에서 혼자 앉아 있어도 나는 옆에 못 있어. 그러니까 서명해. 내가 아직 여기 있을 때 끝내자.”

“분대장님이 같이 거짓말해 주시는 거, 고맙습니다.” 주원이 말했다. “근데 그 거짓말 하면 분대장님이 그날 밤 저를 막아서신 것도 없어집니다.”

“뭐?”

“두 시 십일 분이면, 감지기가 울려서 우리가 나간 겁니다. 그럼 분대장님이 일병 때 분대장님한테 받은 그 약속, 재웠으면 걸어서 본다는 그 약속도 없어집니다. 그날 우리가 눈 속을 사십 분 걸은 건 감지기가 울려서가 아니라 분대장님이 약속을 지켜서였습니다. 그걸 지우면, 분대장님은 그냥 경보 듣고 뛰어나간 병장이 됩니다.”

최강수가 웃었다. 짧고 마른 웃음이었다.

“나 그냥 그거면 돼. 경보 듣고 뛰어나간 병장. 좋잖아.”

“진혁이는요?”

최강수의 웃음이 멈췄다.

“진혁이는 그 밑에서 한 시간 기다렸습니다. 아무것도 안 울려서, 길을 잘못 들었나 하고. 다시 북으로 기어 가야 하나 하고.” 주원의 목소리가 짐칸 안에서 덜컹거림에 섞였다. “두 시 십일 분이라고 쓰면, 그 한 시간이 처음부터 없었던 게 됩니다. 진혁이가 철망 한 가닥 쥐고 버틴 시간이요. 제가 그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제 손으로요. 저는 그걸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럼 열다섯 명은?” 최강수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갈라졌다. “민석이 아버지 국밥은? 한 중위님은? 그 사람들 시간은 안 지워져?”

“지워집니다.”

“알면서 하는 거야?”

“알면서 하는 겁니다.”

트럭이 두 번째 급커브를 돌았다. 기름통 하나가 쓰러져 짐칸 바닥을 굴렀다. 둘 다 그것을 잡지 않았다. 기름통은 짐칸 문에 부딪혀 멈췄다.

최강수가 맨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너 처음 왔을 때 대대장님한테 고라니 짝짓기 강의할 때부터 알았다. 너 이럴 줄.”

“강의 아니었습니다.”

“강의였어. 보리차가 끓어 넘쳤잖아.”

*

트럭이 갑자기 섰다.

짐칸 앞쪽 운전석에서 경적 소리가 길게 났다. 두 번, 세 번. 최강수가 방수포를 걷고 고개를 내밀었다가 그대로 굳었다. 주원도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산길 한가운데, 눈 덮인 비탈과 비탈 사이에 고라니 한 마리가 서 있었다. 긴 송곳니가 아침 햇빛에 하얗게 빛났다. 그놈은 트럭 앞 범퍼에서 두 걸음 떨어진 자리에 서서, 경적이 울릴 때마다 귀를 한 번씩 돌릴 뿐 꼼짝하지 않았다.

“부소초장님.” 주원이 말했다.

“저거 저거, 콘크리트 부은 뒤로 영역을 넓혔어.” 최강수가 기가 막혀서 말했다. “이제 대대 가는 길까지 자기 구역이야.”

운전병이 창문을 내리고 소리쳤다. “비켜! 비키라고!”

고라니는 운전병을 쳐다보았다. 씹는 것도 없이 입을 우물거렸다.

최강수가 짐칸에서 반쯤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차렷 자세 비슷한 걸 하더니,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소초장님. 비켜 주십시오. 대대장님 기다리십니다.”

고라니가 최강수를 보았다. 한참을 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정말 천천히 길옆 비탈로 걸어 올라갔다. 비탈 중간에서 한 번 돌아보았는데, 그 얼굴이 이상하게 주원을 보는 것 같았다.

트럭이 다시 출발했다. 운전병이 앞에서 중얼거렸다. “병장님 말은 듣네…….”

최강수는 짐칸 바닥에 도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웃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길게 웃었다. 웃다가 기침을 했고, 기침하다가 다시 웃었다. 주원도 따라 웃었다. 둘이 웃는 동안 짐칸 바닥의 기름통이 덜그럭거리며 이쪽저쪽으로 굴렀다.

웃음이 그쳤을 때 최강수가 말했다.

“주원아. 그럼 한 가지만 해 줘.”

“예.”

“나 먼저 들어간다. 내가 먼저 말할게. 내가 재웠고, 내가 시켰고, 너는 따라 나왔다고. 너는 내 뒤에서 그냥 서 있어. 대대장님이 너한테 뭘 물으면 분대장한테 들으셨지 않느냐고 해. 거짓말 아니잖아. 내가 말한 거 맞잖아.”

주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최강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

대대장실 앞 복도에는 난방이 너무 세서 창문에 김이 서려 있었다. 주원과 최강수가 의자에 앉자마자 맞은편 작전과 문이 열리고 검은 패딩이 나왔다. 보온병을 든 손이었다. 국정원 서민재 과장은 복도를 반쯤 지나다가 주원의 장갑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고라니 형.”

주원이 일어나 경례를 하려다 말았다. 그녀가 군인이 아니라는 게 그제야 생각났다.

“감찰 자료 때문에 왔어요. 앉아요, 앉아.” 서민재는 주원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최강수가 엉거주춤 일어나 한 칸 비켜 앉았다. “진혁 씨 잘 있어요. 밥 잘 먹고요. 전투식량 비빔밥이 제일 맛있었다고 해서 거기 사람들이 다 웃었어요.”

“다행입니다.”

“그리고 진혁 씨가 조사 받으면서 한 말이 있어요. 이건 내가 전해도 되는 말이라서 전하는 거예요.” 서민재가 보온병 뚜껑을 돌리며 주원을 보지 않고 말했다. “숫자를 말하면 고라니 형이 벌 받느냐고 계속 묻더래요. 그래서 끝까지 숫자는 말 안 했대요. 달이 졌다는 것만 말하고.”

주원은 무릎 위 봉투를 보았다. 진혁이 거기서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주원이 끝내 서명하지 않은 그 한 장을, 진혁은 남쪽 어딘가의 방에서 숫자를 말하지 않는 것으로 지키고 있었다.

“근데 그게 소용이 없어요.” 서민재가 일어섰다. “달은 진혁 씨가 말 안 해도 지니까요. 그 소령이 그 말을 했다면서요? 맞는 말이라 얄미워요.”

그녀는 대대장실 문을 한 번 보고, 주원을 한 번 보았다.

“고라니 형. 진혁 씨는 형이 벌 안 받기를 바라요. 근데 진혁 씨는 형이 거짓말하는 것도 안 바랄 거예요. 둘 다는 안 돼요. 나는 그런 걸 많이 봤어요.”

검은 패딩이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최강수가 주원 옆으로 도로 당겨 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강수가 먼저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문틈으로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병장 최강수. 진술서 관련해서 먼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앉아, 최 병장.”

“서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날 밤 3번 초소 담당 구간 감지기는 제가 재웠습니다. 제 판단으로, 제 손으로 재웠습니다. 박주원 이병은 제 지시를 따랐을 뿐입니다. 감찰이 오면 제가 그대로 진술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박주원 이병의 진술서는 제 진술로 갈음해 주십시오. 박주원은 서명하지 않아도 되게 해 주십시오.”

긴 정적이 흘렀다. 주원은 무릎 위 봉투를 꾹 눌렀다. 장갑 낀 손바닥 밑에서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최 병장. 그럼 자네 진술서의 두 시 십일 분은 거짓말이었다는 거야?”

“…….”

“자네가 서명한 거. 열다섯 번째 장. 거기에 두 시 십일 분 감지기 정상 작동이라고 적혀 있고, 자네 이름이 있어. 그게 거짓말이었다고 지금 나한테 말하는 거야? 그 말을 감찰관한테도 할 거고?”

최강수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주원은 그제야 알았다. 최강수가 먼저 서명한 까닭을. 자기 장에 두 시 십일 분을 박아 놓고, 그 위에서 모든 걸 혼자 지겠다고 나서면, 대대장도 최강수를 쉽게 버리지 못했다. 버리면 두 시 십일 분이 같이 무너졌다. 최강수는 자기 서명을 볼모로 주원이 서명하지 않을 자유를 사려고 했다.

대대장의 목소리가 다정해졌다.

“최 병장, 자네 뜻은 알겠어. 나가 있어. 그 이병 들여보내고.”

문이 열렸다. 최강수가 나왔다. 주원과 눈이 마주쳤다. 최강수의 얼굴은 짐칸에서 웃던 얼굴이 아니었다.

주원이 들어갔다. 대대장실은 따뜻했다. 화분 세 개, 벽의 진급 심사 일정표, 1월 둘째 주의 빨간 동그라미. 오대훈은 책상 뒤에 앉아 주원에게 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요, 박주원 이병.”

주원은 앉았다. 봉투를 무릎에 올려놓았다.

오대훈은 봉투를 보지 않았다. 주원의 손을 보았다. 회색 털장갑, 손가락 끝이 남아 달랑거리는 장갑, 엄지에 갈색 실 자국이 난 장갑. 그는 그 장갑을 한참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최 병장이 다 자기가 했다고 하네. 좋은 분대장이야.” 오대훈이 깍지를 꼈다. “그런데 나는 박주원 이병한테 직접 듣고 싶어요. 딱 하나만.”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날 밤 그 구간 감지기, 끈 손이 누구 손이었어요?”

9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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