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098자)
열여섯 장
GOP 이등병은 오늘도 고라니와 싸운다 · 백해원
식당 긴 탁자에 열여섯 명이 앉았다. 대대장이 순시 왔던 날과 같은 자리였는데, 그날과 달리 아무도 보리차를 마시지 않았다.
한서윤은 탁자 끝에 서서 봉투를 열었다. 진술서 열여섯 장을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종이가 탁자에 닿는 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그녀는 맨 위 장의 첫 줄을 소리 내어 읽었다. 2026년 12월 6일 02시 11분, 감지기 정상 작동. 다 읽고 고개를 들었을 때 열여섯 개의 얼굴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1월 5일 군단 감찰이 와요. 그 전에 대대에서 받아 두겠다는 진술서예요. 내용은 보다시피 이미 적혀 있어요. 이름하고 서명만 비어 있고요.”
상병 하나가 손을 들었다. “소초장님, 저는 그날 자고 있었습니다.”
“알아요.”
“그럼 자다가 깼다고 씁니까, 아니면 깨어 있었다고 씁니까?”
“그건 각자 정해요.” 한서윤이 말했다. “나는 서명하라고 명령하지 않을 거예요.”
식당이 조용해졌다. 김덕배가 배식대 뒤에서 행주를 쥔 채 굳었다.
“대신 말해 줄게요. 서명하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안 하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한서윤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대대장실에서 오대훈이 그녀에게 했던 것처럼. 다만 그녀는 숨기지 않았다. “열여섯 명이 다 서명하면 감찰은 그 숫자를 확인하고 내려가요. 무사고 날짜는 계속 가고, 100일 되면 휴가 가요. 한 명이라도 다르게 쓰면 감찰은 그 한 명부터 파요. 그러면 그날 밤 감지기를 누가 재웠는지 나오고, 그 요령을 누가 알았는지 나와요. 나도 나와요. 나는 알았어요.”
최강수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대대장님이 지난 10월에 보낸 메일이 하나 있어요. 오경보 많은 소초장은 면담한다는 메일. 나는 그걸 여러분한테 안 보여 줬어요. 그 메일 때문에 내가 화면에서 눈을 돌렸어요.” 한서윤은 메일을 꺼내지 않았다. “여러분이 감지기 재운 건 내가 눈 돌려서예요. 그러니까 서명을 하든 안 하든, 나를 지켜 주려고 하지는 마요.”
*
식당이 비고 나서 최강수가 남았다.
“소초장님. 명령해 주십시오.”
한서윤은 진술서를 봉투에 도로 넣던 손을 멈췄다.
“명령하시면 다 합니다. 열여섯 명 다. 군대는 그런 데니까요. 명령이면 애들이 자기 탓이 아니게 됩니다. 나중에 감찰이 와도, 십 년 뒤에 술 먹다 생각나도, 소초장님이 시켜서 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안 해요.”
“소초장님.”
“최 병장.” 한서윤이 봉투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열여섯 명이 십 년 뒤에 술 먹다 그 생각 나서 나를 욕하는 거, 나 괜찮아요. 근데 박주원이 십 년 뒤에도 소초장이 시켜서 서명했다고 말하는 건 싫어요. 걔는 그런 말 하면 밥을 못 먹을 애예요. 지금도 못 먹잖아요.”
“그러니까 명령해 주시라는 겁니다. 명령이면 박주원도 서명합니다. 걔는 시키면 하는 애입니다. 감지기도 시켜서 재웠습니다.”
“시켜서 재웠죠.” 한서윤이 최강수를 보았다. “그 밤 이후로 걔가 뭘 시켜서 했어요?”
최강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밤 이후로 주원은 수화기를 들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고라니가 다른 골짜기에서 세 번 울려도 세 번 다 전화를 걸었다. 지휘통제실 당직병이 이제는 주원의 전화에 “고라니 형이지?”라고 받았다.
“최 병장이 대신 다 지려고 하는 거 알아요.” 한서윤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것도 명령 못 해요. 하지 말라는 명령도, 하라는 명령도.”
*
진술서는 일주일 동안 내무반을 돌았다.
봉투는 관물대 위에 놓였다. 누가 언제 서명하는지 아무도 보지 않기로 한 것처럼, 다들 봉투를 지나칠 때 눈을 돌렸다. 그런데 아침마다 서명된 장이 한 장씩 늘어 있었다. 상병 하나는 이름 옆에 작은 글씨로 「자다가 깸」이라고 적었다가 지우개로 지웠다. 종이가 얇아서 지운 자리가 하얗게 일어났다. 그는 그 자리를 손가락으로 오래 문질렀다.
장태오는 서명 칸에 이름을 쓰기 전에 연습장에 사인을 서른 번 연습했다. 연습생 시절 팬 사인회를 위해 만들어 둔 사인이 있다고 했다. 별 하나와 하트 하나가 들어간 사인이었다.
“너 그걸 진술서에 할 거야?” 고민석이 기가 막혀서 물었다.
“이게 내 사인이야. 4년 동안 연습했어. 데뷔를 못 해서 한 번도 못 써 봤단 말이야.” 장태오가 볼펜을 쥐었다. “처음 쓰는 데가 이거라는 게 좀 그렇긴 하다.”
장태오는 별과 하트를 빼고 이름만 또박또박 적었다. 다 적고 나서 연습장을 찢어 난로에 넣었다.
김덕배는 서명하지 않았다. 부사관 진술서는 따로 받는다고 했다. 대신 아침마다 현수막 숫자를 닦았다. 「77」 「78」 「79」. 12월 23일 아침에는 「80」을 붙였고, 붙이고 나서 사다리 위에서 한참 내려오지 않았다.
*
주원이 사다리를 붙잡아 준 것은 그날 아침이었다. 김덕배가 내려오다 언 가로대에서 발이 미끄러졌고, 마침 지나가던 주원이 두 손으로 사다리를 붙들었다. 김덕배는 사다리 중간에 매달린 채 숨을 고르다가 주원의 손을 보았다. 회색 장갑이었다.
“그거 그 아 장갑이제?”
“예.”
“니 아직 서명 안 했제?”
“예.”
김덕배는 내려오지 않고 사다리 중간에 그대로 앉았다. 앉으니 주원과 눈높이가 맞았다. 입김이 둘 사이에서 섞였다.
“박주원. 그 요령, 처음에 누가 만든 줄 아나?”
“최 병장님 일병 때 분대장님이……”
“그 분대장한테 갈차 준 사람.” 김덕배가 현수막을 올려다보았다. “사 년 전에, 내가 하사 달고 여 처음 왔을 때다. 그 구간이 하룻밤에 서른 번 울었다. 그때 소초장이 오경보 보고 올렸다가 대대장한테 재떨이를 맞았다. 진짜 재떨이. 그 다음 날 밤에 내가 그 구간을 재웠다. 아무한테도 안 시키고 내 손으로. 그라고 그 다음 해에 막내한테 물려줬다. 막내가 제일 덜 잃는다꼬, 그래 말하면서.”
비슷한 말을 주원은 들은 적이 있었다. 최강수의 입에서, 최강수의 옛 분대장이 한 말로. 그 말이 사 년 동안 막내에서 막내로 내려오는 사이에 말한 사람의 이름만 지워져 있었다.
“그 말 부소초장님이 처음 하신 겁니까?”
“내가 처음 했다. 잘못한 말이다.” 김덕배가 사다리에서 내려섰다. 군화가 눈을 밟는 소리가 났다. “막내가 잃을 게 제일 많다. 앞날이 제일 기니까. 그걸 사 년 걸려서 알았다. 니 덕분에.”
그는 걸레를 집어 들고 「80」을 한 번 더 닦았다. 이미 반짝이는 숫자였다.
*
12월 26일 밤, 주원은 초소 근무를 마치고 내무반에 들어왔다가 고민석이 자기 침상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고민석의 손에 봉투가 들려 있었다. 다 채워진 장들이 두툼했다. 서명이 안 된 장은 이제 셋뿐이었다. 최강수, 고민석, 그리고 주원.
“나 이제 한다.” 고민석이 말했다.
“응.”
“응이 뭐야.” 고민석이 주원을 노려보았다. “너 알지? 우리 아버지 식당.”
주원은 알았다. 훈련소에서 고민석이 밤마다 이야기하던 식당이었다. 구미 시장 골목의 국밥집, 아버지가 삼십 년 동안 연 가게. 고민석은 그 국밥 때문에 요리병을 지원했다. 그 가게가 1월 둘째 주에 문을 닫는다고 했다. 건물이 팔렸다고 했다.
“마지막 영업일이 1월 12일이야. 백 일 휴가 날짜랑 딱 맞아. 나 그날 아버지랑 마지막 국밥 같이 말아야 돼. 삼십 년 동안 아버지 혼자 말았어. 마지막 날은 내가 옆에 있어야 돼.” 고민석의 목소리가 떨렸다. “근데 너 서명 안 할 거잖아.”
“아직 안 정했어.”
“거짓말하지 마. 너 얼굴에 다 써 있어. 고라니 송곳니 설명할 때 얼굴이야, 지금.” 고민석이 봉투를 침상에 내려놓았다. “박주원. 너 혼자 깨끗하려고?”
“깨끗하려는 거 아니야.”
“그럼 뭔데?”
“내가 껐어.” 주원이 말했다. 처음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내무반 불은 꺼져 있었고 몇 명은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민석아. 그 구간 감지기, 내가 내 손으로 껐어. 분대장님이 시켜서였지만, 손은 내 손이었어. 그날 진혁이가 철책 밑에서 한 시간 동안 뭘 기다렸는지 알아? 경보 소리. 우리가 와서 잡아 주길. 근데 내가 꺼 놔서 안 울렸어. 그 한 시간이 내 거야. 그걸 두 시 십일 분이라고 쓰면, 그 한 시간이 없어져.”
“없어지면 어때서?” 고민석이 거의 소리를 질렀다. 자는 척하던 몇이 몸을 뒤척였다. “진혁이 살았잖아! 남쪽 와서 비빔밥 세 개 먹고, 귤 통조림 먹고, 헬기 타고 갔잖아! 그 한 시간 없어진다고 누가 죽어? 근데 네가 그 한 시간 살리면, 우리 휴가가 죽어. 분대장님 전역이 죽어. 소초장님이 죽어. 우리 아버지 마지막 국밥이 죽어!”
주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고민석의 말이 다 맞았다. 맞는 말 앞에서 주원이 가진 것은 손 하나뿐이었다. 감지기를 재운 손, 진혁의 언 장갑을 받은 손.
고민석은 침상에서 일어나 볼펜을 꺼냈다. 주원이 보는 앞에서 자기 장에 서명했다. 글씨가 떨렸다.
“미안하다고 안 할 거야.” 고민석이 말했다. “너도 하지 마.”
*
그 밤 늦게, 최강수가 봉투를 열었다.
주원은 침상에 누워 그 소리를 들었다.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 그리고 한 장이 빠졌다가 다른 자리에 끼워지는 소리. 최강수가 자기 장에 서명하는 볼펜 소리가 났다. 빠르고 짧았다. 그리고 최강수는 봉투를 주원의 관물대 위에 올려놓았다.
아침에 주원은 봉투를 열어 보았다. 맨 위에 있던 주원의 장이 맨 아래로 옮겨져 있었다. 그 위 열다섯 장은 서명이 끝나 있었다. 서명이 없는 것은 주원의 장 하나였다.
봉투에 쪽지가 하나 붙어 있었다. 최강수의 글씨였다. 마지막에 해라. 다 보고 나서 해라.
*
장태오가 그 볼펜을 들고 온 것은 아침 점호가 끝난 직후였다.
“이거.”
주원이 받아 든 것은 평범한 검은 볼펜이었다. 몸통에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장태오가 연습생 시절 노래 가사를 외울 때 볼펜을 깨무는 버릇이 있다는 걸 주원은 알았다.
“내가 서명한 펜이야. 사인 서른 번 연습한 펜.”
“이걸 왜 나한테 줘?”
“모르겠어.” 장태오가 머리를 긁었다. “네가 서명하든 안 하든, 이 펜으로 했으면 좋겠어. 그래야 내가 한 거랑 네가 한 게 같은 펜이잖아. 우리 동기잖아.”
주원은 볼펜을 회색 장갑 낀 손으로 쥐었다. 장갑 끝이 남아서 펜이 자꾸 미끄러졌다. 장태오가 그 손을 보다가 말했다.
“그 장갑 끼고 서명하면 글씨 엄청 이상하게 나올 거야.”
“알아.”
“그래도 낄 거지?”
주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김덕배가 사다리를 세우고 있었다. 12월 27일, 현수막의 숫자는 「84」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