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189자)

이번엔 고라니가 아니다

GOP 이등병은 오늘도 고라니와 싸운다 · 백해원

“제 손이었습니다.”

주원은 그 말을 하고 나서 자기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한 번 더 말했다.

“그날 밤 그 구간 감지기는 제 손으로 재웠습니다, 대대장님.”

오대훈은 깍지 낀 손을 풀지 않았다. 화분 하나의 잎끝이 난방 바람에 흔들렸다. 벽시계 초침 소리가 들렸다. 주원은 그 소리를 세지 않으려고 애썼다.

“분대장이 시켜서?”

“분대장님이 처음에 알려 주셨습니다. 그 밤에는 아무 말도 안 하셨습니다. 제 손이 혼자 했습니다.”

“그럼 최 병장은 왜 자기가 했다고 했을까요?”

“저를 지키시려고요.”

“그걸 알면서 지금 그 말을 해요?”

“알아서 하는 겁니다.”

주원은 무릎 위 봉투를 열었다. 열다섯 장을 꺼내지 않고, 맨 아래 한 장만 빼냈다. 이름과 서명 자리가 빈 장이었다. 그는 그 장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 옆에 손을 얹었다. 회색 장갑 낀 손이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시 이십 분, 열한 번째 고라니 경보 다음에 제가 그 구간을 재웠습니다. 한 시 오십 분, 교대 근무자를 깨워 앉히고 분대장님과 초소를 나섰습니다. 감지기가 울려서 나간 게 아니라, 재웠으니까 걸어서 보러 나갔습니다. 두 시 삼십 분, 철책 밑 패인 자리에서 리진혁을 찾았습니다. 리진혁은 그 밑에서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그 사이 감지기는 한 번도 울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꺼 놔서요.”

“두 시 십일 분은?”

“그 시각에 저는 분대장님 등을 보면서 눈 속을 걷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명 안 하겠다?”

“안 하겠습니다.”

오대훈이 처음으로 주원의 장갑에서 눈을 뗐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 얼굴에 웃음이 다시 걸렸는데, 이번에는 다정하지 않았다. 지쳐 보였다. 주원은 그 얼굴이 무서운 얼굴보다 더 다루기 어렵다는 걸 알았다.

“박주원 이병. 내가 왜 그 메모를 썼는지 알아요?”

“진급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있어요. 숨기지 않을게.” 오대훈이 벽의 일정표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런데 그것만 있으면 나 같은 사람은 이 자리에 못 와요. 내가 그 메모를 쓴 건, 그 메모 한 장이면 아무도 안 다치니까야. 귀순자는 살았고, 구멍은 메웠고, 열여섯 명은 휴가 가고. 이병 하나가 그 한 장을 찢으면 어떻게 되는지 말해 줄까요?”

“들었습니다. 소초장님이 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 중위가 말 안 한 게 하나 있어요.” 오대훈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감찰관 앞에서 나는 이렇게 말할 거예요. 감지기를 재우라고 시킨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분대장도 소초장도 대대장도. 어느 이병이 혼자 판단해서 재웠다. 그 이병이 지금 와서 진술을 바꾸고 있다. 열다섯 명의 진술서가 다 두 시 십일 분이라고 하는데, 이병 하나만 다른 말을 한다.” 그가 빈 진술서를 손끝으로 주원 쪽으로 밀었다. “감찰관은 누구 말을 믿을까요?”

주원은 그 종이를 도로 밀지 않았다. 손을 얹은 채 가만히 있었다.

“그럼 열다섯 명이 저를 거짓말쟁이로 만듭니까?”

“아니. 열다섯 명이 서명한 종이가 그렇게 만들어요. 그 사람들은 아무 말도 안 해도 돼. 그게 종이가 하는 일이에요.”

“그 종이는 대대장님이 쓰셨습니다.”

오대훈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대장님이 쓰시고, 소초장님이 들고 올라오셨고, 열다섯 명이 이름을 적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왜 적었는지 압니다. 민석이 아버지 국밥집이 1월 12일에 문을 닫습니다. 분대장님은 아흐레 뒤에 전역하십니다. 소초장님은 대대장님 메일을 아홉 달 동안 혼자 들고 계셨습니다.” 주원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는 떨리는 채로 말했다. “그분들 서명은 그분들 겁니다. 저는 제 것만 말씀드립니다. 제 것은 한 시 이십 분입니다.”

벽시계 초침이 한 바퀴를 돌았다.

“장갑 벗어요.” 오대훈이 말했다. 존댓말이 남아 있었다. 그것이 더 차가웠다. “보급품 아닌 걸 끼고 대대장 앞에 앉았어요. 그것부터 규정 위반이야.”

주원은 장갑을 벗었다. 오른쪽부터, 그다음 왼쪽. 진혁이 헬기장에서 벗던 순서 그대로였다. 장갑을 접어 무릎에 올려놓았다. 맨손이 된 손가락 끝이 대대장실의 더운 공기 속에서 이상하게 시렸다.

“나가 봐요.” 오대훈이 빈 진술서를 집어 서랍에 넣었다. “1월 5일에 다시 봐요. 감찰관 앞에서.”

*

돌아가는 트럭 짐칸에서 최강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주원이 먼저 말했다. “말씀드렸습니다.”

최강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핫팩 하나를 꺼내 주원의 맨손에 쥐여 주었다. 뜯은 지 오래된 것이라 미지근했다. 그래도 주원은 그것을 두 손으로 감쌌다. 최강수는 방수포 틈으로 산을 보았다. 트럭이 올라가는 동안 내내 그쪽만 보았다. 고라니는 길에 나오지 않았다.

*

12월 31일 밤 내무반은 조용했다.

해마다 이 밤에는 라면을 끓여 자정에 먹는다고 했다. 그런데 열한 시가 넘도록 아무도 냄비를 꺼내지 않았다. 고민석은 침상에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다. 몇 명은 주원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몇 명은 마주치고 피하지 않았는데, 그 눈이 더 아팠다. 장태오만 주원 옆에 앉아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며 새해 카운트다운 영상을 소리 없이 틀어 놓고 있었다.

열한 시 반에 한서윤이 내무반 문을 열었다. 근무표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침상 사이를 걸어와 주원 앞에 섰다.

“박주원 이병. 오늘 새벽 3번 초소. 최 병장이랑.”

내무반 몇 명이 고개를 들었다. 전입 첫날 대대장이 내린 벌과 같은 자리였다.

“벌입니까?”

“아니요.” 한서윤이 근무표에 볼펜으로 무언가를 고쳐 적었다. “거기가 제일 잘 보이는 자리라서요. 그 구간 화면을 제일 오래 본 사람이 박주원 이병이에요. 감찰 오기 전까지, 거기는 박주원 이병이 봐요.”

그녀는 돌아서다가 문간에서 멈췄다. 김덕배가 복도에서 사다리를 접어 들고 지나가고 있었다. 내일 아침 붙일 「89」 스티커가 그의 가슴 주머니에서 삐죽 나와 있었다. 날짜는 아직 가고 있었다. 감찰이 오기 전까지는.

열한 시 오십 분, 최강수가 일어나 냄비를 꺼냈다.

“막내. 물.”

주원이 물을 올렸다. 일병이 면을 넣었다. 상병이 스프를 뜯었다. 고민석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면이 들어가기 직전에 가스 불을 한 칸 올렸다. 물이 다 끓은 뒤에 면이 들어가도록. 일병이 그걸 보고 면 넣는 손을 멈췄다가, 물이 제대로 끓자 넣었다. 아무도 서열 위반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최강수가 계란을 깼다. 장태오의 휴대전화에서 숫자가 줄어들었다. 십, 구, 팔. 자정이 되자 내무반 창밖 멀리 산 아래 어딘가에서 폭죽 하나가 터졌다가 꺼졌다.

최강수가 국자로 국물을 떠서 숟가락에 담았다. 국물 첫 숟갈이었다. 그는 그것을 자기 입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주원 앞으로 내밀었다.

“먹어.”

“분대장님, 그건 병장……”

“새해다. 서열 위반이다. 먹어.”

주원은 숟가락을 받았다. 국물이 뜨거워서 혀가 데었고, 데었는데 계속 먹었다. 고민석이 냄비 너머에서 그걸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채로 말했다.

“……물 다 끓고 넣었으니까 안 퍼졌을 거야.”

그게 고민석이 그 밤에 한 말 전부였다. 주원에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

1월 1일 새벽 세 시, 3번 초소.

최강수의 마지막 새벽 근무들 중 하나였다. 그는 핫팩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눈을 반쯤 감은 채 의자에 몸을 묻고 있었다. 첫날 밤과 같은 자세였다. 주원은 화면을 보고 있었다. 회색 장갑을 다시 끼고 있었다. 초소 안에서는 아무도 그걸 뭐라고 하지 않았다.

“주원아.” 최강수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나 전역하면 뭐 할 것 같냐?”

“라면 가게 차리실 것 같습니다. 계란은 사장만 깨는 가게요.”

최강수가 눈을 번쩍 떴다. “……어떻게 알았어?”

“라면을 마흔한 개로 세시는 분이 다른 걸 하실 리가 없습니다.”

최강수는 대답 대신 도로 눈을 감았다. 입가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메워진 그 구간은 보름 넘게 조용했다. 콘크리트가 굳은 뒤로 고라니는 그쪽으로 오지 않았다. 감지기도 그쪽에서는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세 시 십칠 분, 그 구간에서 경보가 울렸다.

주원은 반사적으로 화면을 보았다. 투광등 아래 철책, 굳은 콘크리트, 그 위로 쌓인 새 눈. 고라니는 없었다. 철책 이쪽 눈밭은 비어 있었다. 화면의 시야 끝, 철책 너머 어두운 쪽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서 있었다. 네 다리가 아니었다.

“분대장님.”

최강수가 눈을 떴다. 화면을 보았다. 핫팩이 겨드랑이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그걸 줍지 않았다.

“고라니 아니다.”

주원은 수화기를 들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막지 않았다. 지휘통제실 당직병이 “고라니 형이지?”라고 받았고, 주원이 아니라고 말하자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그다음은 빨랐다. 소초에 불이 켜지고, 한서윤의 목소리가 무전기로 들어오고, 최강수가 헬멧 끈을 조였다.

이번에는 감지기가 울려서 나갔다.

*

칠백 미터를 그들은 이십 분 만에 갔다. 눈이 얕았고, 주원의 다리가 그 길을 알았다. 골짜기 바닥에 닿자 바람이 꺾였다. 철망이 한 음 높게 울었다. 그 소리 사이에, 첫 귀순자 때와 같은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다른 소리가 있었다. 철망 너머에서 눈을 밟는 소리. 서 있는 사람이 체중을 이쪽 발에서 저쪽 발로 옮기는 소리였다.

최강수가 손전등을 켰다.

철책 너머, 손을 뻗으면 철망에 닿을 거리에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북쪽 군복에 솜 누빈 겉옷, 털모자. 진혁보다 키가 컸고 어깨가 넓었다. 등에 총을 메고 있었는데, 두 손은 비어 있었다. 그 두 손이 천천히 올라왔다. 손전등 불빛 속에서 그 사람은 눈을 찡그리지 않았다.

“정지! 움직이지 마!”

최강수의 총구가 철망 너머를 겨눴다. 그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올린 손 중 오른손에만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주원은 그 장갑을 보았다. 회색 털실이었다. 엄지 자리를 한 번 기운 자국이 있었다. 검은 실이었다.

주원은 저도 모르게 자기 오른손을 보았다. 회색 털실. 엄지에 검은 실 자국 하나와, 갈색 실 자국 하나.

같은 날 같은 실로 뜬 장갑이었다.

철망 너머의 사람도 주원의 손을 보고 있었다. 손전등 불빛이 주원의 장갑에 머물렀다. 그 사람의 눈이 거기서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이 둘 사이 철망을 지나가며 낮게 울었다. 최강수의 총구는 내려가지 않았고, 주원은 그 총구와 철망 사이에 서지 않았다. 이번에는 철망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사람이 입을 열었다. 북쪽 말씨였다. 진혁보다 목소리가 낮았고, 떨리지 않았다.

“그 장갑, 어디서 났소?”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작가를 구독하면 다음 화가 올라올 때 알려 드립니다.

10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