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473자)

벨렌스 품평회

신이 죽은 신전에서 새 신 오디션을 엽니다 · 장연무

캐스퍼는 손을 내밀었다⁠. 오린이 쇠고랑 한쪽을 캐스퍼의 오른 손목에 채웠다⁠. 철컥⁠. 그리고 다른 한쪽을 들어 자기 왼 손목에 채웠다⁠. 철컥⁠.

전령이 말 위에서 입을 벌렸다⁠.

“⁠심문관⁠, 그게 뭐요⁠?⁠”

“⁠주교님 명대로 사제를 붙잡았습니다⁠. 오늘 밤 안에 제가 직접 벨렌스로 압송합니다⁠.⁠”

오린이 왼손을 들어 보였다⁠. 두 손목 사이에서 쇠사슬이 한 뼘 늘어졌다⁠.

“⁠그리고 첫서리 밤까지 잘 때도 사제 곁에 있으라는 추기경님 명도 지킵니다⁠. 내기는 대신전의 이름으로 한 맹세라 주교님 혼자 무를 수 없습니다⁠. 벨렌스에 가서 심리를 청하겠습니다⁠. 그 전까지 사제는 제 손목에 있습니다⁠.⁠”

“⁠그럼 열쇠는⁠?⁠”

오린이 쇠고랑 열쇠를 사제복 안주머니에 넣고 단추를 채웠다⁠.

“⁠제가 갖고 있습니다⁠.⁠”

계단 아래에서 그르륵이 우물 테두리를 물갈퀴로 두드리며 웃었다⁠. 바쿨이 술병을 집어 들었다⁠. 마르그리트는 벌써 창고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 가십니까⁠?⁠”

“⁠벨렌스⁠. 내 밭이 걸린 맹세야⁠. 남 손에 맡겨⁠?⁠”

*

밤길은 강을 따라 내려갔다⁠. 마르그리트가 빌린 노새 수레에 마르그리트 밭 포도주 한 통과 송이 바구니 셋이 실렸고⁠, 바쿨이 술통 옆에 드러누웠다⁠. 캐스퍼와 오린은 수레 뒤를 걸었다⁠. 쇠사슬 때문에 둘은 걸음을 맞춰야 했다⁠. 오린이 왼발을 내면 캐스퍼도 오른발을 냈다⁠. 열 걸음쯤 지나자 둘은 같은 박자로 걸었다⁠.

“⁠심문관님⁠, 왼손잡이시지요⁠?⁠”

“⁠예⁠.⁠”

“⁠그런데 왜 왼쪽에 채우셨습니까⁠?⁠”

“⁠오른손은 쓸 일이 별로 없습니다⁠. 무엇을 집을 때는 왼손을 씁니다⁠. 그 왼손을 사제님께 묶었으니⁠, 첫서리 밤까지 사제님 곁에서 다른 일은 안 하겠습니다⁠.⁠”

캐스퍼가 걸음을 멈출 뻔했다⁠. 사슬이 당겨졌다⁠. 오린은 대신 반 박자 늦췄다⁠.

휘오는 캐스퍼의 소매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르륵은 리베에 남았다⁠. 개구리들이 입을 다무는 수를 밤마다 세야 했다⁠. 우물가에서 오린에게 구두를 꼭 닦으라고 당부했다⁠.

강물 소리가 커지는 여울목에서 마르그리트가 수레 위에서 몸을 돌렸다⁠.

“⁠사제 양반⁠. 아까 계단에서 왜 손을 내밀었어⁠? 신전 뒷문으로 뛰면 비탈 숲이야⁠. 이 심문관 양반은 구두 더러워질까 봐 숲에는 못 들어와⁠.⁠”

“⁠들어갑니다⁠.⁠”

오린이 말했다⁠. 마르그리트가 무시했다⁠.

“⁠뛰었으면 내기는 어떻게 됩니까⁠?⁠”

캐스퍼가 되물었다⁠.

“⁠사제가 도망쳤으니 마을이 사제를 못 내준 셈이고⁠, 그럼 마르그리트 씨가 진 겁니다⁠. 제가 뛰면 마르그리트 씨 밭이 셋에 하나 값이 됩니다⁠.⁠”

마르그리트는 대답 없이 다시 앞을 보았다⁠. 노새 고삐를 쥔 손이 한 번 느슨해졌다가 도로 조였다⁠.

*

벨렌스는 골짜기 어귀⁠, 두 강이 만나는 자리에 앉은 성벽 도시였다⁠. 수확 장터가 열리는 열흘 동안 서부의 포도가 다 이리로 왔다⁠. 성문 앞 광장에 수레가 수백 대 늘어섰고⁠, 짓이긴 포도 냄새와 말똥 냄새와 구운 밤 냄새가 한데 엉켰다⁠. 광장 한복판 대신전 매입소 앞에 나무 단상이 세워져 있었다⁠. 오늘 정오에는 주교의 심리가⁠, 오후에는 해마다 하는 품평회가 이 단상 위에서 열렸다⁠.

이들은 새벽에 성문을 통과해 매입소 처마 밑 긴 의자에서 해 뜰 때까지 쉬었다⁠. 오린은 등을 곧게 펴고 앉은 채 눈을 감았다⁠. 누우려 하지 않으니 사슬에 묶인 캐스퍼도 누울 수 없었다⁠. 캐스퍼가 꾸벅 졸다가 오린의 어깨에 머리를 박았다⁠. 오린은 눈을 뜨지 않고 말했다⁠.

“⁠그쪽 어깨는 대신전 소속이 아닙니다⁠.⁠”

“⁠제 머리도 아닙니다⁠. 지금은 심문관님 손목 소속이지요⁠.⁠”

오린이 눈을 감은 채 아주 짧게 숨을 내쉬었다⁠. 웃음이었는지 캐스퍼는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수레 위에서 바쿨이 코를 골았고⁠, 마르그리트는 술통에 등을 기대고 앉아 밤새 눈을 뜨고 있었다⁠.

해가 뜨자 오린은 쇠사슬을 찬 채 매입소 문지기에게 심리를 청했다⁠. 문지기가 쇠사슬과 오린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정오⁠, 서부 주교가 단상에 앉았다⁠. 일흔쯤의 노인으로 한쪽 발을 비단 받침 위에 올려 두고 있었다⁠. 통풍이라고 했다⁠. 이 오른쪽 의자에 아델하이트가 앉았다⁠. 쇠사슬로 이어진 두 사람을 보았고⁠, 오린의 왼 손목을 오래 보았다⁠.

“⁠심문관 오린⁠. 내 명을 받고 사제를 데려왔다면서 왜 자네 손목에 묶었나⁠?⁠”

주교가 물었다⁠.

“⁠주교님 명에 붙잡으라는 말은 있었고⁠, 어디에 묶으라는 말은 없었습니다⁠.⁠”

장터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났다⁠. 단상 아래에 구경꾼이 금세 모여들었다⁠. 포도를 팔러 온 서부 농부들이었다⁠.

“⁠리베의 내기는 무효네⁠. 이단이 뮐바흐로 번졌어⁠.⁠”

아델하이트가 말했다⁠.

“⁠번진 이단을 두고 맹세를 지키는 것은 대신전이 이단을 돕는 것이네⁠. 사제는 감옥에 두고⁠, 수확이 끝나면 왕도로 보내지⁠.⁠”

주교가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이때 마르그리트가 단상 아래에서 손을 들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말했다⁠.

“⁠주교님⁠, 저는 리베에서 제일 큰 밭 주인입니다⁠. 그 맹세를 한 사람이에요⁠.⁠”

주교가 마르그리트를 내려다보았다⁠.

“⁠추기경님이 리베 가운데 들 스무 집한테⁠, 얼어도 셋에 둘을 쳐 준다고 약조했어요⁠. 뮐바흐에는 셋에 셋을 약조했고요⁠. 여기 모인 서부 농부들도 다 대신전 약조 받고 포도 팝니다⁠.⁠”

마르그리트가 단상 아래를 돌아보았다⁠. 수백 명이 마르그리트를 보았다⁠.

“⁠대신전 이름으로 한 맹세를 대신전이 마음에 안 든다고 무르면⁠, 그 셋에 둘 약조는 누구를 믿고 받습니까⁠? 올해 무를 수 있는 약조면 내년에도 무르겠지요⁠.⁠”

광장이 술렁였다⁠. 농부들이 서로 귓속말을 했다⁠. 주교가 통풍 든 발을 받침에서 내려놓았다가 아파서 다시 올렸다⁠. 아델하이트를 보았다⁠. 아델하이트는 주교를 보지 않았다⁠. 마르그리트를 보고 있었다⁠.

“⁠추기경⁠. 저 여자 말이 틀렸나⁠?⁠”

“⁠틀리지 않았습니다⁠.⁠”

아델하이트가 말했다⁠. 목소리가 평평했다⁠.

“⁠대신전이 서부에서 가진 것은 약속이 지켜진다는 믿음뿐입니다⁠. 그것을 깨면 대신전도 작은 신과 다를 게 없지요⁠.⁠”

아델하이트는 자기 입으로 자기 수를 거두었다⁠. 캐스퍼는 이 말을 들으며 혀끝이 아렸다⁠. 이 추기경은 자기 셈이 틀린 자리에서도 셈을 속이지 않았다⁠.

주교가 판정했다⁠. 리베의 맹세는 첫서리 밤까지 살아 있다⁠. 이 결과를 보고 사제의 일은 왕도 대신전 법정으로 넘긴다⁠. 이때까지 사제는 심문관이 데리고 있는다⁠. 손목에 묶든 말든⁠.

심리가 끝나자 아델하이트는 매입소 마구간 쪽으로 갔다⁠. 오린의 눈이 아델하이트를 따라갔고⁠, 사슬 때문에 캐스퍼의 눈도 따라갔다⁠. 말 한 필에 전령을 태우고 무언가를 낮게 일렀다⁠. 전령이 리베 쪽 강길로 말을 몰았다⁠. 캐스퍼는 이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혀끝에 남은 장터 먼지를 삼켰다⁠. 맹세를 무를 수 없게 된 추기경이 다음으로 손을 대는 곳은 맹세 바깥일 것이었다⁠.

*

오후의 품평회는 단상 위에 긴 탁자를 놓고 열렸다⁠. 서부 마을마다 올해 첫 술과 포도즙을 한 병씩 내놓았고⁠, 심사는 대신전 술 곳간지기 셋과 추기경이 했다⁠. 아델하이트가 탁자 가운데 앉았다⁠. 탁자에 놓인 병이 서른 개를 넘었다⁠.

리베 몫으로는 두 병이 나왔다⁠. 하나는 대신전 매입소가 내놓은 리베 술이었다⁠. 이레 전 광장 수레에 덜 익은 채 팔려 간 열한 집 포도로 담근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마르그리트가 수레에 싣고 온 통에서 뜬 술이었다⁠. 바쿨이 익힌 강가 밭 포도로⁠, 사흘 전에 짜서 아직 거품이 가시지 않았다⁠.

곳간지기 셋이 차례로 맛을 보았다⁠. 첫 병에서 셋 다 얼굴을 찡그렸다⁠. 두 번째 병에서 셋 다 잔을 내려놓지 못했다⁠. 맨 끝의 곳간지기가 잔을 한 번 더 내밀었다⁠. 아델하이트는 두 번째 병을 혀에 올리고 오래 있다가 말없이 잔을 내려놓았다⁠.

아델하이트는 서른 병을 다 맛보았다⁠. 열일곱 번째 병에서 아델하이트의 손이 잠깐 멈췄다⁠. 서쪽 산골 마을 하나가 내놓은 거친 붉은 술이었다⁠. 곳간지기가 어느 마을 것인지 말하려 하자 아델하이트가 먼저 말했다⁠.

“⁠카렌 고개 아래 비탈⁠. 돌이 많은 밭이네⁠. 해마다 첫서리를 제일 먼저 맞는 밭이지⁠.⁠”

곳간지기가 병에 매단 나무패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다⁠. 아델하이트는 이 잔을 비우지 않고 내려놓았다⁠. 캐스퍼는 이 밭의 이름을 부를 때 혀가 아니라 목으로 말했다는 것을 들었다⁠.

단상 아래 농부들이 웅성거렸다⁠. 곳간지기 하나가 남은 술을 아래로 돌렸다⁠. 잔이 이 손 저 손으로 넘어갔다⁠.

“⁠리베 강가 바닥 포도가 이 맛이라고⁠?⁠”

“⁠올해 서부는 다 늦었는데⁠.⁠”

“⁠신이 익혔대⁠.⁠”

마지막 말은 마르그리트가 한 것이었다⁠. 술통 옆에 서서 잔을 채워 주고 있었다⁠. 바쿨이 마르그리트 옆에서 빈 잔을 닦았다⁠. 사람들이 이 불그레한 술꾼을 힐끔거렸다⁠.

털모자를 쓴 늙은 농부 하나가 단상 앞으로 나왔다⁠. 바쿨의 뒤로 대여섯이 따랐다⁠. 손바닥이 갈라져 있었고 신발에 붉은 흙이 묻어 있었다⁠.

“⁠우리는 서쪽 산 너머 마을들에서 왔소⁠. 넷 다 신전이 닫혔소⁠. 셋은 다섯 해 전에⁠, 하나는 작년에⁠. 우리 신들도 그 뒤로 소식이 없소⁠.⁠”

바쿨이 쇠사슬 찬 캐스퍼를 보았다⁠.

“⁠사제 양반⁠, 우리 마을에서도 그 오디션이라는 걸 열 수 있소⁠?⁠”

단상 위의 술 곳간지기들이 아델하이트를 보았다⁠. 아델하이트는 늙은 농부를 보고 있었다⁠.

“⁠여실 수 있습니다⁠.⁠”

캐스퍼가 말했다⁠. 오린이 사슬을 당기지 않았다⁠.

“⁠다만 규칙이 있습니다⁠. 신의 손은 믿는 사람이 일구는 땅에만 닿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기적을 본다고 생기지 않습니다⁠. 어르신이 믿는 사람이 믿어 보라고 할 때 생깁니다⁠. 저를 믿지 마십시오⁠. 저는 꿀 탄 사제입니다⁠. 저 마르그리트 씨를 믿으시든⁠, 어르신 마을에서 제일 거짓말 안 하는 사람을 믿으십시오⁠.⁠”

늙은 농부가 마르그리트를 보았다⁠. 마르그리트가 농부에게 한 잔을 따라 주었다⁠.

“⁠리베 첫서리는 엿새 뒤야⁠. 와서 봐⁠. 우리 밭이 얼면 그때 가서 비웃고⁠.⁠”

농부들이 서로 보았다⁠. 털모자 농부가 잔을 비웠다⁠.

“⁠가리다⁠. 우리 넷 마을에서 다섯씩⁠.⁠”

*

품평회가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지는 동안 바쿨은 술통 옆에서 남은 술을 잔에 따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돌리고 있었다⁠. 마르그리트가 공짜로 주지 말라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따르는 손이 떨리지 않았다⁠. 리베 사람 일흔과 뮐바흐 사람 스물의 믿음이 이 손을 붙잡고 있었다⁠.

아델하이트가 단상에서 내려왔다⁠. 매입소로 들어가지 않고 술통 쪽으로 곧장 걸어왔다⁠. 붉은 망토가 장터 흙바닥을 쓸었다⁠. 오린이 몸을 곧게 폈고⁠, 쇠사슬 끝의 캐스퍼도 따라 곧게 섰다⁠.

아델하이트가 바쿨 앞에 멈췄다⁠. 한 뼘 거리였다⁠. 바쿨은 잔을 따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바쿨의 풀린 눈이 추기경의 얼굴을 훑었다⁠. 은빛 섞인 머리⁠, 회색 눈⁠, 오른쪽 눈썹 끝의 작은 흉⁠.

아델하이트가 말했다⁠.

“⁠바쿨⁠.⁠”

리베에서 아델하이트는 한 번도 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오디션 첫날 계단에서 캐스퍼가 외친 뒤로 열흘 가까이⁠, 아델하이트는 이 술꾼을 보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처음 본 날부터 알았네⁠. 서른두 해가 지나도 얼굴이 그대로더군⁠. 신은 늙지 않으니까⁠.⁠”

바쿨의 손에서 잔이 기울었다⁠. 술이 넘쳐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카렌의 포도밭을 기억하나⁠?⁠”

잔이 떨어졌다⁠. 흙바닥에서 깨지지 않고 한 번 튀어 굴렀다⁠. 바쿨의 손이 다시 떨리고 있었다⁠. 믿는 사람이 줄지 않았는데도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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