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491자)
카렌에서 온 추기경
신이 죽은 신전에서 새 신 오디션을 엽니다 · 장연무
벨렌스 여관 마당의 우물은 돌 테두리가 낮았다. 바쿨은 이 테두리에 걸터앉아 빈손을 무릎 사이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장터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 여관 이층 창에서 누군가 코를 골았다. 캐스퍼와 오린은 사슬을 찬 채 마구간 옆 짚더미에 앉아 있었다. 마르그리트는 수레 위 술통 곁에서 잤다.
아델하이트가 혼자 마당으로 나왔다. 망토를 벗고 회색 겉옷만 입었다. 손에 가죽 술병 하나를 들고 있었다. 우물 건너편 테두리에 앉았다. 바쿨과 아델하이트 사이에 우물 아가리가 검게 열려 있었다.
“마시겠나?”
아델하이트가 술병을 내밀었다. 바쿨은 받아서 한 모금 마시고 얼굴을 찡그렸다.
“리베 술이네. 강가 셋째 단.”
“대신전 성찬 포도주라네.”
“그러니까 리베 술이지. 서쪽 끝 다섯 줄은 빼고 담갔어. 그 줄은 신맛이 더 곧거든.”
아델하이트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짧고 마른 웃음이었다. 짚더미 쪽에서 캐스퍼가 몸을 일으키려다 오린의 사슬에 걸려 도로 앉았다.
“카렌 고개 아래 마을. 집이 마흔둘, 포도밭이 고개 비탈을 따라 계단처럼 올라갔지. 우리 집 밭은 맨 아래 개울가였네. 해마다 첫서리를 제일 먼저 맞았어.”
“알아. 네 아버지가 밭 둑에 돌을 하도 쌓아서, 내가 거길 지날 때마다 발이 걸렸어.”
아델하이트의 어깨가 아주 조금 굳었다.
“내가 열여덟 되던 해 가을, 위쪽 큰 집 둘이 싸웠네. 혼삿말이 깨졌고, 깨지면서 밭 경계 다툼이 붙었지. 마을이 둘로 갈렸네. 위 집 편과 아래 집 편. 우리 집은 아래 집 편이었네. 첫서리 밤에 위쪽 사람들은 아래쪽 사람들 말을 안 믿었고, 아래쪽 사람들은 위쪽 사람들이 믿는 것을 안 믿었지.”
아델하이트가 술병을 돌려받아 마셨다.
“그날 밤 위쪽 밭은 살았네. 아래쪽 밭은 다 얼었고. 우리 아버지는 그해 겨울 밭을 팔고 고개 너머 은광으로 갔네. 봄에 돌아온다고 했지.”
바쿨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네 아버지 밭 둑까지 갔어.”
바쿨의 목소리가 낮았다.
“위쪽 사람들 믿음이 아래로 안 건너갔어. 건네주던 사람들이 서로 등을 돌렸으니까. 나는 둑에 서서 손을 뻗었는데 손이 안 넘어갔어. 네 아버지가 불 항아리를 들고 둑 이쪽에서 밤새 뛰어다니는 걸 봤어. 새벽에 잎이 하얗게 얼어서 부서지는 소리가 났지. 그다음 해부터 카렌은 날 안 불렀고.”
“그래서 자네는 어디 있었나?”
“술병 뒤에.”
바쿨이 빈손을 들어 보였다.
“서른두 해. 이 마을 저 마을 외상으로 마시면서. 리베에 온 건 엘사 술이 싸서였어.”
아델하이트가 우물 아가리를 내려다보았다. 물 위에 여관 처마의 등불이 흔들렸다.
“그래서 나는 작은 신을 안 믿네. 작은 신은 사람 사이에 걸려 있어. 사람이 싸우면 신이 사라지지. 그런데 사람은 반드시 싸우네. 대신전은 사람이 싸워도 서 있네. 빛의 신을 믿는 사람은 왕국에 수십만이네. 마을 하나가 둘로 갈라져도 그 믿음은 안 깨지지.”
“빛의 신은 밤에 손을 못 써.”
“그래서 대신전은 언 포도도 사네. 손 대신 돈으로 지키는 거지.”
바쿨이 아델하이트를 똑바로 보았다. 풀려 있던 눈이 처음으로 한곳에 모였다.
“그래서 너는 리베를 싸우게 하는구나. 촌장한테 띠를 둘러 주고, 가운데 들을 떼어 내고. 네 말이 맞다는 걸 그 사람들 눈앞에서 보여 주려고.”
아델하이트는 부정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똑같이 될 걸세. 가운데 들은 이미 갈라섰어. 리베 첫서리 밤은 카렌 첫서리 밤과 같을 거네. 자네는 또 둑 앞에서 손을 뻗겠지.”
아델하이트가 일어섰다.
“이번에는 술병 뒤로 숨지 말고 끝까지 보게. 내가 보았던 걸.”
아델하이트가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바쿨은 한참 우물 테두리에 앉아 있다가, 짚더미 쪽을 돌아보았다. 캐스퍼가 바쿨을 보고 있었다. 바쿨이 말했다.
“사제. 나 그때 둑에서 한 발만 더 들어갔으면 넘어갔을까?”
“모르겠습니다.”
“그치. 모르지.”
*
이튿날 이들은 리베로 돌아왔다. 강가 밭은 수확이 한창이었다. 바쿨이 밤마다 사흘 치씩 당겨 놓은 줄을 마르그리트의 일꾼 열넷이 아래에서 위로 따 올라갔다. 바구니가 차면 엘사네 단골들이 등에 지고 신전 아래 압착장으로 날랐다. 짓이긴 포도 냄새가 골짜기에 낮게 깔렸다.
오린은 사슬을 풀지 않았다. 첫서리 밤까지라고 했다. 그래서 캐스퍼가 포도를 따면 오린도 땄다. 오린은 오른손으로 가위를 쥐었고, 서툴렀다. 첫 송이를 자르다 자기 소매 단추를 잘랐다. 두 번째 송이는 땅에 떨어뜨렸다. 세 번째 송이에서 마르그리트가 뒤에서 혀를 찼다.
“심문관 양반, 그거 대신전 꺼 아니야. 살살 해.”
“압니다.”
“아는 사람 손이 그래?”
오린이 네 번째 송이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천천히 잘랐다. 바구니에 내려놓는 손이 조심스러웠다. 마르그리트가 이것을 보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뮐바흐 비탈에서는 방앗간지기네가 날마다 새벽 불 항아리를 피웠다. 휘오를 믿는 집이 서른으로 늘었다. 촌장은 여전히 밭 둑에 팔짱을 끼고 서서 구경만 했다. 서쪽 산 너머 네 마을에서 털모자 농부와 이 이웃들이 하나둘 리베에 닿았다. 이들은 엘사네 마당에 짐을 풀고 강가 밭의 포도를 맛보았다. 그중 몇이 마르그리트에게 물었고, 마르그리트가 대답했고, 이들 가운데 셋이 믿었다.
저녁이면 엘사네 마당에서 서쪽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마을의 옛 신 이야기를 했다. 털모자 농부의 마을 신은 거위였다고 했다. 흰 거위 한 마리가 해마다 첫서리 전날 밤 마을을 한 바퀴 돌며 울었고, 사람들은 이 소리를 듣고 불 항아리를 꺼냈다.
“그 거위가 신이었소?”
그르륵이 물었다.
“우리는 그렇게 믿었지.”
“이 몸이 보기엔 그냥 시끄러운 거위였을 수도 있소.”
“당신 같은 개구리가 할 말은 아니지.”
마당이 웃음으로 터졌다. 그르륵은 반박하려다, 자기가 바로 이 시끄러운 쪽이라는 것을 깨닫고 목을 꺼뜨렸다.
*
닷새째 새벽, 휘오가 신전 종탑에서 뛰어 내려왔다. 아니, 불어 내려왔다. 캐스퍼의 앞머리가 다 뒤집혔다.
“가운데 들에서 섞였어요!”
“예?”
“새벽에 연습하는데, 가운데 들 위로 손이 넘어갔어요. 한 밭만요. 둑 따라 길쭉한 밭.”
캐스퍼는 사슬에 오린을 매단 채 비탈을 뛰어 내려갔다. 가운데 들 위로 아침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들 대부분에서 안개는 무겁게 고여 움직이지 않았다. 강을 따라 길게 누운 한 밭에서만 안개가 흩어져 고랑이 보였다. 촌장 밭이었다.
밭 가장자리에서 젊은 여자 하나가 가지를 묶고 있었다. 스물다섯쯤, 촌장을 닮아 턱이 각졌다. 촌장 딸이었다. 캐스퍼는 이 사람을 엘사네 선술집에서 본 적이 있었다. 엿새 전 회의 날 밤에도 엘사는 거기 있었다.
“엘사 언니가 믿는다길래요.”
엘사가 가지 묶던 손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아버지한테는 말 안 했어요. 우리 밭은 내가 거의 다 일궈요. 아버지는 이제 관리인이라 매입상 따라다니시느라 밭엔 안 나오시고.”
엘사가 웃었다. 캐스퍼는 따라 웃지 못했다. 들 위로 안개가 이 한 밭에서만 걷혀 있었다. 누가 보아도 보였다.
이날 오후 촌장이 광장 종을 쳤다. 관리인의 흰 띠를 두른 매입상을 옆에 세우고 보리수 아래에 섰다. 가운데 들 스무 집이 앞줄에 모였다. 캐스퍼는 사슬을 찬 채 광장 끝에서 들었다.
“추기경님 말씀을 전하오. 가운데 들 포도는 얼어도 셋에 둘, 그대로요. 다만 한 가지가 붙었소. 식구 가운데 하나라도 저 신들을 믿는 집은 그 약조에서 빠지오. 셋에 둘이 아니라 한 푼도 없소.”
앞줄이 술렁였다. 방앗간 옆집 노인이 손을 들었다.
“우리 며느리가 엘사네 단골인데.”
“그럼 며느리한테 물어보시오.”
광장 끝 사람들 사이에서 촌장 딸이 고개를 숙였다. 캐스퍼는 이 얼굴을 보았다. 촌장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촌장은 말을 마치고 매입상과 함께 촌장 집으로 들어갔다. 가운데 들 사람들은 흩어지면서 서로의 식구 이름을 낮게 물었다. 어느 집 아들이 엘사네 마당에 갔는지, 어느 집 딸이 이 꼬마 바람에게 손을 흔들었는지. 캐스퍼는 이 낮은 물음들이 광장 돌바닥 위에서 서로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카렌의 첫서리 밤 전날도 이런 소리가 났을 것이었다.
이날 저녁 그르륵이 우물에서 올라와 신전 계단에 앉았다. 몸이 다 자란 사내만 했고 풀잎 관이 새로 엮여 있었다. 그런데 목이 부풀지 않았다.
“오늘 밤 강가에서 우는 놈이 쉰 남았소.”
“내일은?”
“내일 밤이오. 내일 해 지고 나서 하나도 안 울 거요. 구름 한 점 없고, 바람도 없소.”
*
첫서리 날 해 질 녘, 가운데 들 둑길에 아델하이트의 검은 마차가 멈췄다. 아델하이트는 캐스퍼 일행보다 하루 늦게 벨렌스에서 내려와 촌장 집에 묵고 있었다. 마차 문은 열리지 않았다. 둑길에 촌장이 서 있었다. 흰 띠를 두른 어깨가 굳어 있었다.
캐스퍼는 사슬을 끌고 둑길로 내려갔다. 오린이 박자를 맞춰 따랐다. 마르그리트, 엘사, 바쿨이 뒤따랐다. 휘오가 캐스퍼 어깨 위에 앉아 있었고 그르륵이 강 쪽에서 뛰어왔다.
촌장은 딸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딸의 손에 가지 묶는 끈이 아직 들려 있었다.
“추기경님이 일러 주셨소. 믿는 놈이 손대는 밭에는 저것들 손이 닿는다고. 딸년 손이 닿는 밭에.”
“아버지, 놓으세요.”
“내 밭이야.”
촌장이 딸을 둑길로 끌어냈다. 그리고 밭 어귀의 나무 문을 닫았다. 굵은 빗장을 걸고, 거기에 쇠사슬을 감고, 자물쇠를 채웠다. 쇠 소리가 들판에 울렸다.
“오늘 밤 이 들에 믿는 놈은 한 발짝도 못 들어온다. 내 딸이든 내 일꾼이든.”
캐스퍼가 문 앞에 섰다.
“촌장님. 가운데 들에 찬 공기가 고이면 위아래로 넘칩니다. 엘사 씨 마당, 신전 비탈, 마르그리트 씨 밭 맨 아래가 다 얼어요. 촌장님 밭도 얼고요.”
“얼어도 셋에 둘이오.”
“따님이 일군 포도입니다.”
촌장의 턱이 굳었다. 딸이 아버지 팔을 잡아당겼다. 촌장은 이 손을 떼어 냈다.
“그러니까 이 들은 내 딸 거 될 거요. 신 말고 돈으로 남는 걸로.”
마르그리트가 앞으로 나섰다. 마르그리트 뒤에서 일꾼 둘이 불 항아리를 지고 있었다.
“신 말고 불이라도 놔. 내 항아리 열 개 줄게. 연기라도 깔면 덜 넘쳐.”
“당신 항아리 받으면 당신 편 되는 거요.”
“항아리에 편이 어딨어?”
“있소. 마을 사람들이 다 볼 거니까.”
촌장이 고개를 돌렸다. 엘사가 마르그리트 옆에서 촌장 딸을 보았다. 딸은 아버지에게 붙잡힌 팔을 빼지 않고 엘사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앞에서 엘사 편을 들 수는 없다는 얼굴이었다.
마차 문이 열렸다. 아델하이트가 내려와 둑길 끝에 섰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들을 보았다. 해가 비탈 너머로 넘어갔다. 하늘에 구름이 한 점도 없었고, 강물 위로 바람이 멎었다.
그르륵이 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둑 아래 갈대 사이에서 개구리 한 마리가 울다가 그쳤다. 이후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마지막 놈이 입을 다물었소.”
그르륵이 말했다. 강물 위로 하얀 김이 아주 얇게 피어올랐다가 바람 없이 제자리에 머물렀다. 둑길 풀잎 끝이 벌써 차가웠다. 캐스퍼가 숨을 내쉬자 입김이 보였다. 캐스퍼는 잠긴 문의 자물쇠를 보았다. 손을 뻗었다. 사슬 끝의 오린이 이 손을 따라 반 박자 늦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