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532자)

물꼬 열쇠

신이 죽은 신전에서 새 신 오디션을 엽니다 · 장연무

마르그리트는 가죽끈을 머리 위로 벗었다⁠. 끈이 귀에 걸려 머리카락 몇 올이 같이 딸려 나왔고⁠, 이것을 털어 내지 않았다⁠. 쇠 열쇠가 끈 끝에서 한 바퀴 돌다가 멈췄다⁠. 이것을 전남편의 손바닥 위에 내려놓았다⁠. 끈까지 같이⁠.

촌장의 손가락이 열쇠를 감쌌다⁠. 굵은 마디 사이로 녹슨 쇠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무거운데⁠.⁠”

“⁠삼대째 목에 걸었으니까⁠.⁠”

촌장은 열쇠 쥔 손을 내리지 않고 서 있다가 헛기침을 했다⁠.

“⁠내일 아침부터 비탈은 열려 있어⁠. 내 땅 일꾼들한테도 말할게⁠. 믿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그걸로 돼⁠.⁠”

마르그리트가 돌아섰다⁠. 몇 걸음 내려가다가 촌장이 마르그리트를 불렀다⁠.

“⁠솥은 가져⁠.⁠”

“⁠원래 내 거야⁠.⁠”

캐스퍼는 마르그리트가 비탈을 내려가는 동안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는 것을 보았다⁠. 경계석 아래 리베 쪽 물꼬에서 냇물이 돌 틈을 따라 졸졸 흘렀다⁠. 이 물소리가 등 뒤에서 오래 따라왔다⁠.

*

이튿날 해 뜨기 전⁠, 캐스퍼는 휘오를 소매에 넣고 다시 비탈을 올랐다⁠. 오린이 따랐고 그르륵이 오린 발치를 뛰었다⁠. 언덕 위 옛 풍차 자리에는 돌로 쌓은 둥근 밑동만 남아 있었다⁠. 방앗간지기와 두 아들이 이 밑동에 기대어 불 항아리 셋에 젖은 짚을 넣고 있었다⁠.

“⁠늦가을 새벽이면 이 비탈에 안개가 깔려⁠. 찬 게 내려가는 길이 눈에 보이지⁠.⁠”

방앗간지기가 비탈 아래를 가리켰다⁠. 밤새 식은 공기가 우윳빛 띠가 되어 포도밭 고랑을 따라 리베 쪽으로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큰아들이 불 항아리에 불을 붙이자 흰 연기가 고랑 위에 낮게 깔려 이 띠를 따라 내려갔다⁠.

휘오가 소매에서 나왔다⁠. 사람 다섯 앞이었고 그중 셋은 휘오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었다⁠. 휘오는 망설이지 않고 풍차 밑동 위로 떠올라 두 팔을 벌렸다⁠. 연기가 고랑을 따라 내려가다 말고 위로 말려 올라갔다⁠. 비탈 위쪽의 미지근한 공기가 아래로 내려와 연기와 섞였고⁠, 우윳빛 띠가 방앗간지기네 밭 다섯 이랑 위에서 옅어졌다⁠. 이 옆⁠, 믿는 사람이 없는 이랑에서는 띠가 그대로 흘렀다⁠. 이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연기가 섞이는 곳과 안 섞이는 곳이 갈렸다⁠.

“⁠촌장 밭은 어디입니까⁠?⁠”

캐스퍼가 물었다⁠. 방앗간지기가 턱으로 비탈 맨 위 가장 넓은 밭을 가리켰다⁠. 이 밭 둑에 키 큰 사내가 팔짱을 끼고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뮐바흐 촌장이었다⁠. 촌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촌장의 밭 고랑에서는 우윳빛 띠가 막힘없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안 믿는다는 거지⁠.⁠”

방앗간지기가 말했다⁠.

“⁠그래도 구경은 왔네⁠. 저놈 어릴 때부터 저래⁠. 솥 하나로 삼 년을 싸운 놈이야⁠.⁠”

*

캐스퍼가 비탈을 내려왔을 때 리베 광장에 먼저 닿아 있던 것은 소문이었다⁠. 마르그리트가 뮐바흐 전남편에게 마을 물꼬 열쇠를 넘겼다⁠. 신들 때문에 넘겼다⁠. 칠 년 끈 소송을 하루아침에 버렸다⁠. 소문은 정확했다⁠. 정확해서 더 빨리 돌았다⁠.

캐스퍼는 신전 계단에서 이것을 보았다⁠. 아델하이트의 검은 마차가 촌장 집 앞에 서 있었고⁠, 반 시간 뒤 촌장이 마차에서 내렸다⁠. 촌장의 어깨에 대신전의 흰 띠가 둘려 있었다⁠. 띠 끝에 해 무늬가 수놓여 있었다⁠.

“⁠서부 골짜기 관리인 자리라더군요⁠.⁠”

오린이 캐스퍼 뒤에서 말했다⁠. 묻지도 않은 것을 먼저 알려 준 것은 두 번째였다⁠.

“⁠대신전 매입을 리베에서 맡아 보는 자리입니다⁠. 매입상에게 누구 포도를 얼마에 받을지 정해 줍니다⁠.⁠”

“⁠어젯밤에 정해진 겁니까⁠?⁠”

“⁠어제 오후입니다⁠. 경계석에서 내려오시기 전에⁠.⁠”

마르그리트가 열쇠를 넘기기 전에⁠, 추기경은 이미 다음 수를 두었다⁠. 캐스퍼는 이 셈을 혀로 맛보듯 굴려 보았다⁠. 쓴맛이 났다⁠.

정오에 촌장이 광장 종을 쳤다⁠. 종소리가 열두 번 울리자 리베 사람들이 모였다⁠. 촌장은 보리수 아래 심문 탁자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 탁자 위에 바구니 두 개가 놓였다⁠. 하나에는 숯 조각이⁠, 다른 하나에는 마른 포도 잎이 꽂혀 있었다⁠.

“⁠마을 회의를 하겠소⁠.⁠”

촌장의 목소리가 광장 돌바닥에 부딪쳐 튀었다⁠.

“⁠어제 마르그리트가 리베 물꼬 열쇠를 뮐바흐에 넘겼소⁠. 아랫밭 마흔 집이 여름마다 나눠 쓰던 물이오⁠. 칠 년을 싸운 물이오⁠. 마을 회의도 없이⁠, 저 신들 때문에⁠.⁠”

사람들 시선이 마르그리트에게 쏠렸다⁠. 마르그리트는 광장 끝 우물가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나는 대신전 서부 관리인으로서⁠, 그리고 리베 촌장으로서 셋을 내놓겠소⁠. 하나⁠, 저 후보 신들을 오늘 리베에서 내쫓는다⁠. 둘⁠, 열쇠를 되찾으러 장정들을 뮐바흐에 올려 보낸다⁠. 셋⁠, 마르그리트가 추기경님과 한 내기를 마을이 무른다⁠.⁠”

“⁠내기는 무를 수 없습니다⁠.⁠”

오린이 말했다⁠. 사람들이 오린을 돌아보았다⁠.

“⁠대신전의 이름으로 한 맹세입니다⁠. 대신전 법정의 심리 없이는 양쪽 다 무를 수 없습니다⁠.⁠”

촌장의 얼굴이 굳었다⁠. 촌장은 오린의 목에 단단히 채운 단추를 노려보다가 바구니를 두드렸다⁠.

“⁠그럼 둘만 하겠소⁠. 숯 바구니는 내쫓는다⁠, 잎 바구니는 남긴다⁠. 한 집에 한 알⁠.⁠”

*

“⁠우리 아랫밭 물은 어떡할 건데⁠!⁠”

빵집 안주인이 소리쳤다⁠. 뒤이어 아랫밭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마르그리트가 우물가에서 팔짱을 풀었다⁠.

“⁠내가 뮐바흐 냇물을 버린 건 맞아⁠. 그 대신 뮐바흐 비탈이 열렸어⁠. 첫서리 밤에 찬 공기가 거기서 내려와⁠. 거기서 막아야 아랫밭 마흔 집 포도가 안 얼어⁠. 여름 물은 내년 일이고 서리는 이레 뒤야⁠.⁠”

“⁠그걸 누가 믿어요⁠!⁠”

“⁠믿으라는 거 아니야⁠. 맛을 봐⁠. 내 밭 포도 맛을 보고 판단해⁠.⁠”

마르그리트가 앞치마에서 송이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던졌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촌장이 이 송이를 바구니 사이로 밀어 냈다⁠.

“⁠포도알 한 송이로 물길을 사⁠? 그 신 덕에 당신네 밭만 달아졌잖소⁠.⁠”

투표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한 알씩 바구니에 넣었다⁠. 그르륵이 탁자 다리 옆에 무릎 높이로 쪼그리고 앉아 숯 바구니를 노려보다가⁠, 슬쩍 혀를 내밀었다⁠. 오린의 구두가 이 혀 앞에 정확히 내려섰다⁠.

“⁠투표 중입니다⁠.⁠”

“⁠이 몸은 그저 숯 바구니 포도가 얼마나 신지 맛만⁠.⁠”

“⁠투표 중입니다⁠.⁠”

그르륵이 혀를 집어넣고 대신 오린의 구두를 올려다보았다⁠.

“⁠심문관 양반⁠, 그 구두 오늘은 개구리 발자국이 하나 묻었소⁠.⁠”

“⁠당신 발자국입니다⁠.⁠”

“⁠영광이오⁠.⁠”

줄 서 있던 사람들 몇이 웃었다⁠. 촌장이 탁자를 두드려 웃음을 끊었다⁠. 바쿨은 잎 바구니 옆에 서서 손을 등 뒤로 감추고 있었다⁠. 마르그리트가 바쿨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손을 대면 이 바구니 포도알이 달아질 것이고⁠, 그러면 누가 넣었는지 다 드러날 것이었다⁠.

줄 맨 끝에 엘사가 섰다⁠. 사흘 동안 신전 쪽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선술집 문은 열었지만 캐스퍼가 지나가면 덧문을 닫았다⁠. 엘사의 단골들도 엘사를 따라 줄 끝에 섰다⁠. 대장장이⁠, 방앗간 일꾼⁠, 술통 노인⁠, 빵집 둘째⁠.

엘사가 탁자 앞에 섰다⁠. 손에 쥔 포도알을 내려다보았다⁠. 촌장이 엘사를 보았다⁠.

“⁠엘사⁠. 너도 언니한테 물 뺏긴 쪽이야⁠. 네 반쪽 줄도 아랫밭이잖아⁠.⁠”

엘사가 고개를 들었다⁠. 광장 끝 우물가의 언니를 보았다⁠. 마르그리트는 동생을 보지 않고 강 쪽을 보고 있었다⁠.

“⁠촌장님⁠. 언니가 마을 물을 판 거 아니에요⁠.⁠”

“⁠그럼 뭔데⁠?⁠”

“⁠언니가 열쇠를 판 거예요⁠. 삼대째 목에 걸고 다닌 거⁠. 그거 판 돈으로 우리 아랫밭 마흔 집 포도 지키겠다고⁠.⁠”

엘사가 포도알을 잎 바구니에 넣었다⁠.

“⁠나는 캐스퍼 안 믿어요⁠. 근데 언니는 믿어⁠. 언니가 믿는 거면 나도 다시 믿어 볼래⁠.⁠”

광장 끝에서 마르그리트의 팔짱이 풀렸다⁠. 이와 동시에 캐스퍼 소매 속이 따뜻해졌다⁠. 아니⁠, 따뜻해진 것이 아니라 무거워졌다⁠. 휘오가 소매에서 흘러나와 캐스퍼의 어깨 위에 앉았다⁠. 발목까지 보였다⁠. 엘사 뒤에서 대장장이가 포도알을 잎 바구니에 넣었다⁠. 방앗간 일꾼도⁠, 술통 노인도⁠, 빵집 둘째도⁠. 이들은 엘사를 믿었고⁠, 엘사가 다시 믿었다⁠. 사흘 전 광장에서 끊어진 줄이 같은 광장에서 다른 매듭으로 다시 이어졌다⁠.

그르륵이 탁자 다리 옆에서 쑥 커졌다⁠. 앉은키가 탁자 위로 올라와 촌장과 눈높이가 맞았다⁠. 촌장이 반 걸음 물러났다⁠.

오린이 바구니를 쏟아 셌다⁠. 숯 바구니 스물아홉⁠, 잎 바구니 서른하나⁠.

“⁠신들은 남습니다⁠.⁠”

오린이 말했다⁠. 평평한 목소리였다⁠.

*

촌장은 탁자를 떠나지 않았다⁠. 숯 바구니의 포도알 스물아홉을 손바닥으로 쓸어 모았다⁠.

“⁠좋소⁠. 마을은 남기기로 했소⁠. 그럼 우리도 우리 밭 일은 우리가 정하겠소⁠.⁠”

촌장이 숯 바구니에 넣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이 가운데 스무 집이 골짜기 한가운데⁠, 뮐바흐 비탈이 끝나는 자리부터 강을 따라 길게 누운 평평한 밭의 주인들이었다⁠. 리베 사람들이 가운데 들이라 부르는 자리였다⁠. 비탈에서 내려온 찬 공기가 강가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 가는 들이었다⁠. 들의 위쪽 가장자리는 신전 비탈 맨 아랫단과 엘사네 마당 아랫단에 닿았고⁠, 아래쪽 끝은 둑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르그리트 밭 맨 아래 모퉁이와 붙어 있었다⁠.

“⁠가운데 들 스무 집은 저 신들을 우리 밭에 안 들이오⁠. 우리 집 사람이든 일꾼이든⁠, 저것들 믿는 놈은 우리 밭에 손 못 대게 하겠소⁠. 그리고 우리는 대신전에 따서 넘기오⁠. 관리인으로서 내가 셋에 둘을 쳐 주겠소⁠. 얼어도⁠.⁠”

“⁠얼어도요⁠?⁠”

캐스퍼가 물었다⁠.

“⁠추기경님 약조요⁠. 가운데 들 포도는 얼어도 셋에 둘⁠. 그러니 우리는 서리 밤에 불 항아리 하나 안 피워도 손해가 없소⁠.⁠”

마르그리트가 우물가에서 걸어 나왔다⁠. 캐스퍼는 무엇을 셈하는지 알았다⁠. 가운데 들은 골짜기 한복판이었다⁠. 뮐바흐 비탈에서 흘러내린 찬 공기가 이 평평한 들에 고이면 휘오가 섞을 수 없었다⁠. 거기는 신의 손이 닿지 않는 땅이었다⁠. 고인 찬 공기는 물웅덩이처럼 차올라 양옆으로 넘칠 것이었다⁠. 위로는 신전 비탈 아랫단과 엘사네 마당 아랫단⁠, 아래로는 마르그리트 밭 맨 아래 모퉁이⁠.

“⁠그 들을 비워 두면 양옆 밭이 다 얼어⁠.⁠”

“⁠그건 당신네 신이 알아서 하시겠지⁠.⁠”

촌장이 흰 띠를 고쳐 맸다⁠.

“⁠신이 다 해 준다며⁠.⁠”

*

해 질 녘 벨렌스 쪽 길에서 말 한 필이 달려왔다⁠. 말 탄 사람은 서부 주교의 문장이 박힌 회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신전 계단 아래에서 말을 세우고⁠, 계단 위에 서 있던 오린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붉은 밀랍에 주교의 열쇠 무늬가 찍혀 있었다⁠.

오린이 봉투를 뜯었다⁠. 읽는 동안 한 번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다 읽고 나서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무슨 내용입니까⁠?⁠”

캐스퍼가 물었다⁠. 캐스퍼의 어깨 위에서 휘오가 오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계단 아래에서 바쿨이 술병을 내려놓았고⁠, 그르륵이 우물 테두리에 올라앉아 목을 부풀렸다⁠.

“⁠서부 주교의 명입니다⁠. 리베의 이단 집회가 뮐바흐로 번졌으니 리베에서 한 내기는 무효다⁠. 사제 캐스퍼 웰을 지금 붙잡아 오늘 밤 안에 벨렌스로 압송하라⁠. 심문관 오린이 직접⁠.⁠”

전령이 말 위에서 허리에 찬 쇠고랑을 풀어 오린에게 던졌다⁠. 오린이 이것을 받았다⁠. 쇠고랑이 오린의 손안에서 철컥 소리를 냈다⁠.

캐스퍼는 계단 위에서 오린을 보았다⁠. 사흘 동안 잘 때도 곁에 있던 사람이었다⁠. 신전 긴 의자에 등을 곧게 펴고 앉아 제단 앞에서 하는 말을 다 들은 사람이었다⁠.

오린이 쇠고랑을 두 손으로 들었다⁠.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운 오린의 목젖이 한 번 움직였다⁠.

“⁠사제님⁠. 손을 내밀어 주십시오⁠.⁠”

8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