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607자)

꿀단지

신이 죽은 신전에서 새 신 오디션을 엽니다 · 장연무

마르그리트의 낫이 신전 문짝에 박혔다⁠. 해가 뜬 지 반 시간도 안 됐고⁠, 캐스퍼는 제의실에서 사제복 단추를 채우다 말고 뛰어나왔다⁠. 문짝에 박힌 낫 자루가 아직 떨고 있었다⁠.

“⁠내 밭에 누가 손댔어⁠?⁠”

마르그리트의 왼손에 포도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껍질이 검붉게 익어 분이 하얗게 올라 있었다⁠. 말뚝 서쪽⁠, 엘사 몫의 송이가 아니었다⁠. 마르그리트 밭 동쪽 맨 아래 세 줄⁠, 마르그리트가 어제 아침까지 시다고 씹어 뱉던 줄이었다⁠.

“⁠아랫단 세 줄이 하룻밤 새 이렇게 됐어⁠. 그 위 줄은 그대로고⁠.⁠”

캐스퍼는 거짓말을 고르는 데 숨 한 번이 걸렸고⁠, 이 숨이 끝나기 전에 그만두었다⁠.

“⁠어젯밤 일꾼 오두막에 갔습니다⁠.⁠”

“⁠가서⁠?⁠”

“⁠엘사 씨가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우두머리 어르신이 엘사 씨를 믿으시니까⁠.⁠”

마르그리트가 문짝에서 낫을 뽑았다⁠. 나무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우두머리랑 젊은 놈 둘이 그 세 줄을 맡아⁠. 그 셋이 믿으니까 그 셋 손이 닿는 데만 익었다 이거지⁠.⁠”

“⁠네⁠.⁠”

“⁠내가 안 믿는데⁠, 내 밭에서⁠.⁠”

“⁠네⁠.⁠”

이 사람이 송이를 캐스퍼 가슴팍에 처박았다⁠. 알 몇 개가 터지며 사제복 앞자락에 붉은 물이 번졌다⁠. 단내가 확 올라왔다⁠. 마르그리트는 이 냄새를 맡고 잠깐 이를 악물었다⁠.

“⁠맛은 좋아⁠. 그래서 더 화가 나⁠.⁠”

마르그리트는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가다가 멈췄다⁠.

“⁠우두머리랑 그 둘⁠, 오늘부터 수확 날까지 내 밭 출입 금지야⁠. 엘사 반쪽이나 거들라 그래⁠. 다음에 또 내 사람한테 수작 걸면 사제 양반 혀를 뽑아서 포도 묶는 끈으로 쓸 거야⁠.⁠”

캐스퍼는 앞자락에 붉은 물을 묻힌 채 계단 위에 서 있었다⁠. 비탈 아래에서 우두머리가 짐을 꾸려 엘사 쪽 말뚝으로 옮겨 가는 것이 보였다⁠. 셋이 빠진 마르그리트 밭 아랫단은 다시 신의 손 밖이었다⁠. 이미 익은 세 줄만 아침 해에 검게 빛났다⁠.

*

정오⁠, 두 번째 심사가 엘사네 뒷마당에서 열렸다⁠. 신전에서 열면 대신전 사람들 눈에 띈다며 엘사가 마당을 내놓았다⁠. 의자 대신 빈 술통이 놓였고⁠, 사람은 처음보다 적었지만 처음과 달랐다⁠. 엘사의 단골 넷이 저마다 식구를 하나둘씩 데려왔고⁠, 엘사 반쪽으로 옮겨 온 우두머리와 젊은 일꾼 둘도 와 있었다⁠.

캐스퍼가 술통 위에 올라섰다⁠. 앞자락의 포도 물은 지우지 않았다⁠.

“⁠둘째 심사는 실기입니다⁠. 주제는 서리 막기⁠.⁠”

캐스퍼가 마당 한가운데 놓인 질항아리를 가리켰다⁠. 서리 밤마다 밭고랑에 놓는 불 항아리였다⁠. 속에 젖은 짚과 솔가지가 채워져 있었다⁠.

“⁠첫서리는 맑고 바람 없는 밤에 옵니다⁠. 찬 공기는 무거워서 비탈을 타고 내려와 강가 바닥에 고이고⁠, 따뜻한 공기는 위로 떠서 사람 키 두세 배 높이에 머뭅니다⁠. 그 위아래를 섞으면 바닥이 덜 춥습니다⁠. 위를 덮으면 땅의 온기가 하늘로 덜 빠져나갑니다⁠. 지금까지는 연기로 덮고 불로 데웠습니다⁠.⁠”

“⁠그건 다들 알아⁠.⁠”

대장장이가 말했다⁠.

“⁠아시니까 짧게 했습니다⁠. 그르륵 님⁠, 먼저 첫서리가 언제인지⁠.⁠”

그르륵이 술통 셋을 겹쳐 쌓은 단 위로 뛰어올랐다⁠. 쌓은 통이 기우뚱했다⁠.

“⁠이 몸이 지난 사흘 밤 강가에 귀를 대고 있었소⁠. 개구리들은 서리 오기 전 밤부터 하나둘 입을 다무오⁠. 땅이 식는 걸 배로 먼저 알거든⁠. 사흘 전에는 강가 개구리가 천이면 천 다 울었는데 어젯밤엔 천에서 일흔이 입을 다물었소⁠. 하루에 일흔이 줄면⁠, 마지막 개구리가 입을 다무는 밤은⁠.⁠”

그르륵이 물갈퀴를 꼽아 셌다⁠. 물갈퀴가 넷뿐이라 두 번을 셌다⁠.

“⁠열나흘 뒤⁠. 보름 하루 전⁠, 구름 한 점 없는 밤이오⁠.⁠”

마당이 술렁였다⁠. 캐스퍼는 머릿속으로 셈을 했다⁠. 신전 포도는 예년보다 열이레가 늦었다⁠. 예년에도 서리 며칠 전에야 거두었으니⁠, 이대로면 포도가 서리를 맞고도 보름 넘게 버텨야 했다⁠. 바쿨이 익히는 밭은 그보다 빠르겠지만⁠, 바쿨의 손이 닿는 밭은 아직 엘사의 반 줄과 단골 몇 집의 손바닥만 한 밭뿐이었다⁠.

“⁠다음⁠, 휘오 님⁠.⁠”

젊은 일꾼 하나가 불 항아리에 불을 붙였다⁠. 젖은 짚이 매캐한 흰 연기를 뿜었고⁠, 연기는 바람 없는 한낮이라 항아리 위에 뭉쳐 천천히 올라갔다⁠. 휘오는 캐스퍼 소매에서 나오지 않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요⁠.⁠”

“⁠처음보다 적습니다⁠.⁠”

“⁠처음엔 다 웃었잖아요⁠.⁠”

캐스퍼는 소매를 들어 휘오가 나올 구멍을 넓혀 주었다⁠.

“⁠오늘 여기 오신 분들은 웃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휘오 님을 믿어서 오셨습니다⁠. 저기 우두머리 어르신은 그것 때문에 일하던 밭에서 쫓겨나셨고요⁠.⁠”

소매 속이 조용해졌다⁠. 그러다 김 같은 것이 흘러나와 연기 기둥 옆에 섰다⁠. 흐릿한 몸이 처음보다 조금 짙어 보였다⁠. 휘오는 연기 기둥을 한 바퀴 돌더니 두 팔을 벌려 이 위에 대고 천천히 저었다⁠.

연기가 기둥에서 풀려 마당 위로 얇게 퍼졌다⁠. 사람 키 높이에서 고르게 깔리더니 아래로 둥글게 말려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갔다⁠. 마당 가장자리 술통 위에 앉은 사람들 머리 위에서 연기가 천장처럼 번졌고⁠, 이 아래 공기가 살갗에 미지근하게 닿았다⁠. 엘사가 손을 들어 연기를 휘저어 보았다⁠.

“⁠위가 따뜻해⁠.⁠”

빵집 둘째가 중얼거렸다⁠. 그저께 밤 술값으로 손을 들었다가 거절당한 이 사람이었고⁠, 오늘은 엘사 옆에 서서 박수를 쳤다⁠. 박수 소리에 휘오가 기겁해서 염소 뒤로 숨었다⁠. 염소가 고개를 돌려 휘오를 핥으려 했다⁠. 휘오는 염소 털 속으로 파고들었다⁠. 마당이 웃음으로 뒤집혔다⁠.

“⁠웃지 마세요⁠!⁠”

털 속에서 휘오가 외쳤다⁠. 염소가 매애 했다⁠.

그르륵이 차례도 아닌데 일어섰다⁠.

“⁠이 몸도 보여 드리겠소⁠!⁠”

그르륵이 목을 크게 부풀리자 마당 바닥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안개였다⁠. 무릎 높이로 깔린 안개가 마당을 덮었고⁠, 곧이어 냄새가 올라왔다⁠. 고인 연못 바닥을 휘저었을 때 나는 냄새였다⁠.

“⁠그르륵 님⁠, 냄새가⁠.⁠”

“⁠안개란 원래 이런 것이오⁠. 강에서 왔으니 강 냄새가 나는 것이 도리 아니오⁠?⁠”

엘사가 코를 쥐었다⁠. 앞니 빠진 할머니는 냄새를 못 맡는지 웃기만 했다⁠.

포도알 투표는 휘오가 이겼다⁠. 바쿨 바구니가 두 번째였고⁠, 그르륵 바구니는 셀 때 또 비어 있었다⁠. 캐스퍼가 그르륵을 노려보았다⁠.

“⁠세 번째입니다⁠.⁠”

“⁠표가 달아서 그렇소⁠. 엘사네 반쪽 포도가 너무 달단 말이오⁠.⁠”

캐스퍼는 바구니 대신 사람을 셌다⁠. 엘사⁠, 단골 넷과 이 식구⁠, 우두머리와 젊은 일꾼 둘⁠, 두 할머니⁠, 그리고 빵집 둘째⁠. 손가락을 접다 말고 다시 셌다⁠.

스물셋이었다⁠.

바쿨이 술병을 들어 올렸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마당 문간에 오린이 서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문설주 바깥에 구두 끝을 맞춰 세웠다⁠. 대신전 심문관은 이단 집회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오린의 규칙이었다⁠. 그르륵이 술통 단에서 뛰어내려 이 앞으로 갔다⁠.

“⁠심문관 양반⁠, 오늘도 증거 모으시오⁠? 이 몸이 하나 보태 드리지⁠. 아까 그 안개는 강 안개라 강 냄새가 나는데⁠, 신전 우물 안개는 숯 냄새가 나오⁠. 이 몸이 그 우물 바닥에 살잖소⁠. 우물 벽 한쪽이 제의실 바닥이랑 붙어 있는데⁠, 삼 년 동안 그 벽이 밤마다 뜨끈했단 말이오⁠. 미사 전날 밤이면 꼭⁠. 이 몸은 그게 포도밭 어머니의 숨인 줄 알고 그 벽에 등을 대고 잤지⁠. 어찌나 따뜻하던지⁠.⁠”

오린의 눈이 처음으로 그르륵에게 머물렀다⁠.

“⁠제의실 바닥⁠, 어느 쪽 벽입니까⁠?⁠”

“⁠동쪽⁠. 왜⁠, 심문관 양반도 등 대고 자 보게⁠?⁠”

오린은 대답하지 않고 허리를 삼십 도로 숙인 다음 돌아섰다⁠. 캐스퍼는 술통 위에서 이 뒷모습을 보았고⁠, 그르륵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듣지 못했다⁠. 마당이 아직 휘오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

해가 지고 마을이 잠잠해진 뒤 캐스퍼는 신전에 혼자 들어갔다⁠. 제단 앞에 서서 손바닥을 돌 위에 얹었다⁠. 돌이 차가웠다⁠. 편지가 온 날부터 줄곧 차가웠다⁠.

캐스퍼는 이 돌이 처음 차가워졌던 가을을 알았다⁠. 삼 년 전 수확 축일 아침이었다⁠. 이날 이후로 캐스퍼는 미사 전날 밤마다 제의실 바닥 돌을 들어 이 아래 작은 화로에 숯을 넣었고⁠, 제단 뒤 빈 구멍으로 열기를 올렸다⁠. 제주 잔에는 꿀을 한 숟가락 녹였다⁠. 두 할머니가 계속 왔다⁠. 마을 사람 몇이 축일에만이라도 왔다⁠. 편지가 온 날 아침에도 화로에 숯이 있었다⁠. 이후로는 넣지 않았다⁠.

“⁠차갑지⁠?⁠”

문간에서 목소리가 났다⁠. 아델하이트가 혼자 서 있었다⁠. 붉은 망토를 벗어 팔에 걸었고⁠, 신전 안의 촛불이 아델하이트의 은빛 머리를 노랗게 물들였다⁠. 통로를 걸어와 맨 앞 의자⁠, 두 할머니가 늘 앉는 자리에 앉았다⁠.

“⁠제안을 하러 왔네⁠.⁠”

“⁠들어 보겠습니다⁠.⁠”

“⁠오디션을 접게⁠. 후보들은 흩어 보내고⁠, 수확이 끝나면 열쇠를 넘기게⁠. 자네는 왕도로 오게⁠. 문서 창고가 아니라 대신전 술 곳간지기 자리네⁠. 성찬 포도주의 맛을 정하는 자리지⁠. 자네 혀는 거기서 쓰일 혀네⁠.⁠”

캐스퍼는 제단에 손을 얹은 채 서 있었다⁠.

“⁠꿀 이야기는 나와 오린만 알고 묻어 두지⁠. 신전 마당 포도나무도 뽑지 않겠네⁠. 곳간은 다른 데 지으면 되니까⁠.⁠”

이백 년 된 나무 마흔 그루⁠. 캐스퍼는 이 나무들 밑동이 실처럼 일어난 껍질을 떠올렸다⁠. 손바닥 아래 돌이 차가웠다⁠.

“⁠리베 포도는요⁠?⁠”

“⁠대신전이 사네⁠. 언 것도⁠.⁠”

“⁠셋에 하나 값으로요⁠.⁠”

“⁠서리가 오면 셋에 하나도 큰돈이네⁠.⁠”

캐스퍼가 손을 돌에서 뗐다⁠.

“⁠오늘 엘사네 마당에 스물세 명이 왔습니다⁠. 그분들은 휘오 님이 연기를 섞는 걸 보고 웃었고⁠, 휘오 님은 염소 털 속에 숨었고⁠, 그르륵 님은 포도알을 다 먹었습니다⁠. 그분들 밭은 서리 전에 익습니다⁠. 그분들이 서로를 믿는 동안은요⁠. 그 사람들한테 이제 그만 믿으라고 하라는 말씀입니까⁠?⁠”

“⁠자네를 믿어서 믿는 사람들이지⁠.⁠”

“⁠네⁠.⁠”

“⁠그 믿음이 자네 꿀 위에 서 있다는 것도 아나⁠?⁠”

캐스퍼는 입을 열지 못했다⁠. 아델하이트가 의자에서 일어나 문간을 향해 손을 들었다⁠. 오린이 들어왔다⁠. 두 손으로 무언가를 받쳐 들고 있었다⁠. 무릎에 흙이 묻어 있었다⁠.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자국이었다⁠.

오린이 제단 앞 바닥에 이것들을 내려놓았다⁠. 손바닥 둘을 모은 크기의 질그릇 단지⁠, 아가리를 밀랍으로 막았고 옆구리에 신전 벌통의 벌 무늬가 찍혀 있었다⁠. 그리고 아이 머리만 한 쇠 화로⁠, 안쪽이 검게 그을렸고 숯가루가 남아 있었다⁠.

“⁠제의실 바닥 돌 아래에서 나왔습니다⁠. 화로 위쪽 돌에 제단 뒤로 이어지는 구멍이 뚫려 있었습니다⁠.⁠”

오린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평평했다⁠. 오린은 캐스퍼를 보지 않았다⁠.

아델하이트가 단지의 밀랍을 손톱으로 긁어 냈다⁠. 꿀 냄새가 신전 안에 퍼졌다⁠. 들꽃과 밤나무 꽃⁠, 리베 비탈의 여름 냄새였다⁠. 캐스퍼는 이 냄새를 삼 년 동안 혼자 맡았다⁠.

“⁠모레 아침⁠, 광장 보리수 아래에서 심문을 열겠네⁠. 고발은 오린이 하고⁠, 재판은 내가 하네⁠. 이 단지가 증인이지⁠.⁠”

캐스퍼는 단지를 낚아챘다⁠. 질그릇이 손안에서 묵직했고 꿀이 아가리 쪽으로 천천히 쏠렸다⁠. 단지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제단 돌에 내리치면 산산조각이 날 높이였다⁠.

아델하이트는 막지 않았다⁠. 오린이 반 걸음 나서려는 것을 손짓 하나로 세웠다⁠.

“⁠깨게⁠.⁠”

아델하이트가 말했다⁠.

“⁠깨진 조각에서도 꿀 냄새가 나네⁠. 바닥에 쏟아진 꿀은 개미가 줄을 서서 증언하겠지⁠. 자네가 깨는 것을 오린이 보았으니 증인이 하나 더 느는 것이고⁠.⁠”

캐스퍼의 팔이 머리 위에서 멈췄다⁠. 꿀이 단지 안에서 한쪽으로 기울며 느릿하게 흘렀다⁠. 소매 속에서 휘오가 캐스퍼의 팔뚝을 붙잡았다⁠. 작고 차가운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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