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425자)

혀로 하는 심사

신이 죽은 신전에서 새 신 오디션을 엽니다 · 장연무

캐스퍼는 이날 밤 제단 위의 포도알을 촛불 가까이 들고 오래 보았다⁠. 껍질 아래 초록이 고르게 퍼져 있었고⁠, 꼭지 쪽에만 보랏빛이 반 뼘쯤 올라와 있었다⁠. 강가 맨 아랫줄⁠, 네 번째 나무에서 딴 알이었다⁠. 이 나무를 알았다⁠.

“⁠맨 아랫줄은 마르그리트 씨 혼자 것이 아닙니다⁠.⁠”

긴 의자에 드러누워 있던 바쿨이 고개만 들었다⁠.

“⁠두 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맨 아랫줄을 반씩 나눴습니다⁠. 서쪽 반은 엘사 씨 겁니다⁠. 엘사 씨가 선술집 일로 손을 못 대서 언니 일꾼들이 같이 거두지만⁠, 말뚝은 그대로 박혀 있어요⁠.⁠”

“⁠그래서⁠?⁠”

“⁠같은 나무⁠, 같은 흙⁠, 같은 해를 받는 줄입니다⁠. 한쪽만 달아지면 마르그리트 씨 혀가 거짓말을 못 합니다⁠.⁠”

바쿨이 술병을 내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반 줄이면 나무 스물이야⁠. 믿는 놈 둘로는 하룻밤에 못 해⁠.⁠”

“⁠열이면 됩니까⁠?⁠”

“⁠열이면 해 볼 만하지⁠.⁠”

*

엘사는 자정이 넘어 선술집 문을 닫으며 남은 단골 일곱을 불러 앉혔다⁠. 방앗간 일꾼⁠, 대장장이⁠, 술통 메우는 노인⁠, 빵집 둘째⁠, 그리고 늘 늦게까지 버티는 사내 셋⁠. 엘사가 앞치마를 풀며 말했다⁠.

“⁠오늘 내가 본 바람 얘기 들었지⁠? 나는 저 꼬마 바람이랑 술꾼 아저씨를 믿어 보기로 했어⁠. 너희도 나를 믿으면 같이 믿어 봐⁠. 믿는 사람은 한 잔 공짜⁠.⁠”

일곱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

구석에서 바쿨이 한 사람씩 잔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방앗간 일꾼의 잔이 달아졌다⁠. 대장장이도⁠, 술통 노인도⁠. 빵집 둘째의 잔에서 바쿨이 손가락을 뗐다⁠.

“⁠이건 술값이야⁠.⁠”

“⁠예⁠?⁠”

“⁠엘사를 믿어서 든 손이 아니라 공짜 술에 든 손이라고⁠. 그런 건 안 건너와⁠.⁠”

빵집 둘째가 얼굴을 붉혔다⁠. 늦게까지 버티는 사내 셋 가운데 둘도 술값이었다⁠. 엘사가 셋에게서 잔을 거둬 가며 말했다⁠.

“⁠믿을 때 다시 와⁠.⁠”

남은 것은 엘사와 단골 넷⁠, 그리고 캐스퍼였다⁠. 미사에 오던 두 할머니는 저녁에 바쿨 바구니에 포도알을 넣으며 사제가 믿으라면 믿는다고 했다⁠. 다 합쳐 여덟이었다⁠.

“⁠여덟이면 모자랍니까⁠?⁠”

“⁠밭에 손을 댄 놈이 그중 몇이냐가 문제야⁠. 그 줄 주인이 손을 대야 내 손이 닿아⁠.⁠”

엘사는 이 길로 등을 들고 강가로 내려갔다⁠. 캐스퍼와 단골 넷이 따랐다⁠. 맨 아랫줄 서쪽 반⁠, 말뚝이 박힌 자리부터 엘사는 나무 스무 그루의 잎을 한 장씩 젖혀 송이에 해가 들 자리를 냈다⁠. 이 밭에 손을 댄 것은 아버지 장례 뒤 처음이었다⁠. 손톱 밑에 흙이 끼었다⁠.

바쿨은 말뚝에 등을 기대고 앉아 술병을 무릎에 놓고 눈을 감았다⁠. 바쿨의 숨이 길어질 때마다 포도 잎 사이에서 달큰한 냄새가 올라왔다⁠. 갓 짠 포도즙을 볕에 한나절 둔 냄새였다⁠. 새벽이 가까워지자 냄새가 진해졌고⁠, 바쿨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말뚝 너머 동쪽 반⁠, 마르그리트 몫의 나무들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새벽 세 시쯤 강가 오두막 쪽에서 등불 하나가 다가왔다⁠. 마르그리트 밭의 일꾼 우두머리였다⁠. 예순 가까운 늙은이로⁠, 마르그리트의 아버지 때부터 이 밭 고랑을 탔다⁠. 우두머리는 등을 높이 들어 말뚝 앞의 사람들과 술병을 끼고 앉은 술꾼과 엘사의 흙 묻은 손을 차례로 비춰 보았다⁠.

“⁠주인 아씨한테 알릴까요⁠?⁠”

엘사가 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여긴 내 반쪽이야⁠, 아저씨⁠.⁠”

“⁠압니다⁠. 말뚝은 제가 박았으니까요⁠.⁠”

일꾼 우두머리는 등불을 내리고 한참 서 있다가⁠, 말뚝 서쪽 나무 하나의 잎을 같이 젖혀 주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엘사가 이 등불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버지 손에 흙 묻은 거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저 아저씨야⁠.⁠”

*

마르그리트는 해가 뜨자마자 불려 나왔다⁠. 엘사가 언니 손을 잡아끌고 말뚝 앞에 세웠다⁠.

“⁠동쪽 거 하나⁠, 서쪽 거 하나⁠. 언니가 직접 따⁠.⁠”

마르그리트는 대꾸 없이 동쪽 네 번째 나무에서 알 하나를 땄다⁠. 입에 넣고 씨까지 깨물었다⁠. 얼굴이 조금 찡그려졌다⁠. 늘 먹던 맛이었다⁠. 말뚝 서쪽으로 한 걸음 옮겨 같은 높이의 알을 땄다⁠.

이로 껍질을 터뜨린 순간 마르그리트의 턱이 멈췄다⁠. 단맛이 혀 가운데로 쏟아졌고 신맛은 뒤에서 이것을 받치기만 했다⁠. 씨를 깨무니 고소했다⁠. 씨가 갈색이었다⁠. 마르그리트는 씹지도 삼키지도 않고 한참 서 있었다⁠. 엘사가 언니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버지 해 같지⁠.⁠”

마르그리트가 동생을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거둔 해⁠, 이 해 포도가 이 맛이었다⁠. 이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신 즙을 삼키고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사제 양반⁠.⁠”

“⁠네⁠.⁠”

“⁠맛은 인정해⁠. 신은 안 믿어⁠.⁠”

“⁠그 둘이 다른 겁니까⁠?⁠”

“⁠다르지⁠. 맛은 내 혀가 본 거고⁠, 신은 사제 양반 말이잖아⁠.⁠”

이 사람이 일꾼들 쪽으로 돌아섰다⁠.

“⁠따는 날 열흘 미룬다⁠. 바구니 내려놔⁠.⁠”

일꾼들이 바구니를 내렸다⁠. 캐스퍼는 이 바구니들이 땅에 닿는 소리를 오래 들었다⁠. 마르그리트는 돌아서 가다가 말뚝 서쪽으로 손을 뻗어 송이 하나를 통째로 끊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그건 왜 가져가십니까⁠?⁠”

“⁠증거⁠.⁠”

엘사가 언니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내 거야⁠, 언니⁠!⁠”

“⁠열흘 뒤에 돌려줄게⁠. 씨만⁠.⁠”

*

정오가 되기 전 광장에 매입 수레가 멈췄다⁠. 벨렌스 대신전 매입상과 말 두 필⁠, 그리고 은화 자루가 실린 상자⁠. 아델하이트는 수레 옆 그늘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오린이 수레 위에 올라가 외쳤다⁠.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따서 넘기는 포도는 셋에 둘 값을 쳐 드립니다⁠. 오디션에 갔던 집도 받습니다⁠. 오늘만입니다⁠.⁠”

셋에 하나가 셋에 둘이 되었다⁠. 광장이 웅성거렸다⁠. 리베 촌장이 수레 옆에 서서 사람들 줄을 세웠다⁠. 추기경을 제 집에 묵게 한 사람다웠다⁠. 바구니를 진 사람⁠, 아직 따지도 않고 값만 물으러 온 사람⁠.

“⁠사제님이 사 주신다면서요⁠?⁠”

줄 중간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촌장이 몸을 돌렸다⁠.

“⁠어제 심문관이 신전 곳간을 열어 봤소⁠. 나도 같이 봤지⁠. 통 서른 개가 다 비었더이다⁠.⁠”

사람들이 캐스퍼를 보았다⁠. 캐스퍼는 수레 쪽으로 걸어 나가며 이 시선을 다 맞았다⁠.

“⁠비었습니다⁠. 거짓말했습니다⁠.⁠”

웅성거림이 커졌다⁠. 캐스퍼는 수레 앞까지 가서 아델하이트에게 허리를 숙였다⁠.

“⁠추기경님⁠, 대신전 성찬 포도주를 한 병 가져오셨지요⁠? 매입상 수레에는 늘 견본이 실려 있다고 들었습니다⁠.⁠”

“⁠있네⁠.⁠”

“⁠제 눈을 가리고 그 술과 리베 술을 섞어 주십시오⁠. 제가 맞히겠습니다⁠.⁠”

“⁠무엇을 맞히려는 건가⁠?⁠”

“⁠대신전 성찬 포도주가 어디 포도인지⁠.⁠”

아델하이트가 오린에게 고갯짓을 했다⁠. 오린이 수레에서 봉인된 병을 꺼냈고⁠, 엘사가 선술집에서 리베 포도주 두 병을 들고 왔다⁠. 오린이 자기 목에 두른 흰 천을 풀어 캐스퍼의 눈을 가렸다⁠. 잔 다섯이 캐스퍼의 앞에 놓였다⁠. 구경꾼이 수레를 빙 둘러쌌고⁠, 그르륵이 우물가 돌담에 올라앉아 목을 부풀렸다⁠.

“⁠이 몸이 감시하겠소⁠. 잔을 바꿔치기하는 자는 개구리가 됩니다⁠.⁠”

“⁠이미 개구리인 분은요⁠?⁠”

“⁠두 번 개구리가 되오⁠.⁠”

바쿨이 수레 바퀴에 기대 서서 다섯 잔을 차례로 노려보았다⁠. 오린이 이 앞을 몸으로 막았다⁠.

“⁠시음 중에는 손대지 마십시오⁠.⁠”

“⁠나는 손 안 대⁠. 냄새만 맡아⁠.⁠”

바쿨이 코를 잔 쪽으로 길게 뺐다⁠. 오린이 이 코를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구경꾼들이 웃었고⁠, 캐스퍼는 이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첫 잔을 입에 댔다⁠. 혀를 잔 안으로 둥글게 말아 술을 혀 전체에 펴고 나서 숨을 코로 내쉬었다⁠.

“⁠리베⁠, 언덕 위쪽 밭⁠. 빵집네 줄입니다⁠. 작년 것⁠.⁠”

두 번째 잔⁠.

“⁠대신전 성찬 포도주⁠. 그런데 이건⁠.⁠”

캐스퍼는 한 모금을 더 머금었다⁠. 혀 뒤쪽에 강가 진흙 냄새가 아주 얇게 깔려 있었다⁠. 해가 늦게 드는 밭의 날 선 신맛⁠, 씨를 오래 둔 떫은맛⁠.

“⁠리베 강가⁠, 셋째 단⁠. 마르그리트 씨 밭입니다⁠. 재작년⁠, 덜 익었을 때 딴 거예요⁠. 셋에 하나 값에 팔렸을 해입니다⁠.⁠”

광장이 조용해졌다⁠. 마르그리트가 사람들 맨 뒤에서 팔짱을 풀었다⁠. 캐스퍼가 천을 벗었다⁠.

“⁠대신전이 성찬에 쓰는 술은 리베 포도로 만듭니다⁠. 셋에 하나 값에 사서 왕도에서 열 배를 받고 팝니다⁠. 오늘 셋에 둘을 쳐 주는 것도⁠, 그래도 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매입상을 보았다⁠. 매입상이 헛기침을 했다⁠. 아델하이트는 의자에서 일어나 캐스퍼가 마신 두 번째 잔을 집었다⁠. 한 모금 머금고 눈을 감았다⁠.

“⁠리베 강가 셋째 단⁠, 마르그리트 밭⁠. 그중에서도 서쪽 끝 다섯 줄⁠. 강물이 불었던 해라 뿌리가 물을 많이 먹었네⁠.⁠”

캐스퍼가 아델하이트를 보았다⁠. 줄까지는 맞히지 못했다⁠.

“⁠사제 말이 맞네⁠. 대신전 성찬 포도주는 리베 포도로 만들고⁠, 왕도에서 비싸게 팔지⁠. 그 돈으로 서부 길을 닦고⁠, 흉년 든 마을에 곡식을 보내네⁠. 리베에 흉년이 들면 그 곡식이 리베로 오지⁠.⁠”

아델하이트가 잔을 내려놓고 광장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작은 신은 그런 약속을 못 하네⁠. 작은 신의 손은 믿는 사람 땅까지만 닿고⁠, 그 믿음은 이웃끼리 등을 돌리는 날 깨지네⁠. 마을이 서로 싸우는 날⁠, 바로 그날 밤에 작은 신은 사라지네⁠. 나는 그런 밤을 보았네⁠. 대신전은 서리가 와도 포도를 사네⁠. 언 포도도 사네⁠. 그게 신보다 나은 약속이네⁠.⁠”

그르륵이 돌담에서 뭐라고 반박하려다 오린의 눈과 마주치고 입을 다물었다⁠.

해가 지기 전까지 열한 집이 바구니를 지고 수레 앞에 섰다⁠. 빵집⁠, 대장장이 동생네⁠, 언덕 위 아홉 집⁠. 덜 익은 포도가 수레에 쏟아질 때마다 시큼한 냄새가 광장에 퍼졌다⁠. 엘사의 단골 넷은 수레 앞에 서지 않았다⁠.

캐스퍼는 줄 끝의 빵집 안주인 앞에 섰다⁠. 안주인의 바구니에는 아직 씨가 초록인 송이가 담겨 있었다⁠.

“⁠열흘만 기다려 보시지요⁠. 마르그리트 씨도 미뤘습니다⁠.⁠”

“⁠마르그리트야 밭이 크니까 열흘 버텨도 되죠⁠. 우리는 밀가루 값이 밀렸어요⁠.⁠”

빵집 안주인이 바구니 끈을 고쳐 멨다⁠.

“⁠그리고 사제님⁠, 곳간에 술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 말 믿고 우리 둘째가 어제 신전에 갔어요⁠. 대신전 사람들이 우리 집 앞을 지나가면서 쳐다보더라고요⁠.⁠”

캐스퍼는 할 말이 없었다⁠. 빵집 안주인이 캐스퍼를 지나쳐 수레 앞에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매입상이 은화 세 닢을 안주인 손바닥에 세어 얹었다⁠. 이 소리가 캐스퍼의 귀에 오래 남았다⁠.

*

수레가 떠나고 광장이 비었을 때 아델하이트가 캐스퍼를 불렀다⁠. 보리수 그늘 아래⁠, 오린도 열 걸음 밖에 세워 두었다⁠.

“⁠혀가 좋군⁠, 사제⁠.⁠”

“⁠추기경님만은 못합니다⁠.⁠”

“⁠나는 산골 포도밭에서 났네⁠. 혀가 먹고살 길이었지⁠.⁠”

아델하이트가 망토 자락을 여미었다⁠. 해가 기울며 보리수 잎 그림자가 아델하이트 얼굴 위에서 흔들렸다⁠.

“⁠그 혀로 하나 더 맞혀 보게⁠. 작년 가을⁠, 리베 신전이 대신전에 올린 제주 말일세⁠. 나는 그 술을 서부 신전 모임에서 마셨네⁠. 포도밭 어머니가 익힌 술이라고 했지⁠.⁠”

캐스퍼의 손이 소매 속에서 굳었다⁠. 소매 안에 숨어 있던 휘오가 몸을 움츠렸다⁠.

“⁠그 술에서 꿀 맛이 났네⁠.⁠”

아델하이트가 아주 낮게 말했다⁠.

“⁠포도밭 어머니는 삼 년 전부터 자네에게 대답하지 않았지⁠. 자네는 그걸 알았고⁠.⁠”

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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