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411자)

첫서리 밤

신이 죽은 신전에서 새 신 오디션을 엽니다 · 장연무

캐스퍼의 손이 자물쇠에 닿았다⁠. 쇠가 벌써 차가웠다⁠. 캐스퍼는 자물쇠를 쥐었다가 놓았다⁠.

“⁠이건 촌장님 겁니다⁠.⁠”

촌장이 캐스퍼를 보았다⁠. 캐스퍼는 문에서 물러섰다⁠. 사슬 끝의 오린이 따라 물러섰다⁠.

“⁠자물쇠를 부수면 밭에 들어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휘오 님 손은 안 들어갑니다⁠. 믿는 사람이 이 밭에 손을 대야 하지⁠, 문이 열린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요⁠.⁠”

오린은 돌아섰다⁠. 둑길 위의 사람들을 보았다⁠. 마르그리트⁠, 엘사⁠, 바쿨⁠, 그르륵⁠, 어깨 위의 휘오⁠. 뒤로 엘사네 단골들과 서쪽 마을 사람들이 불 항아리를 지고 서 있었다⁠.

“⁠자리로 가십시오⁠. 할 수 있는 데부터 합니다⁠.⁠”

*

휘오는 뮐바흐로 올라갔다⁠. 사람 꼴이 다 갖춰진 몸으로⁠, 무릎과 발목까지 또렷하게⁠, 비탈을 거슬러 바람처럼 올라갔다⁠. 언덕 위 옛 풍차 밑동에서 방앗간지기네가 불 항아리 스무 개에 불을 붙였다⁠. 휘오는 이 밑동 위에 서서 두 팔을 벌렸다⁠. 비탈 위쪽의 미지근한 공기가 아래로 쏟아져 내려와⁠, 고랑을 따라 흘러내리던 찬 공기와 섞였다⁠.

뮐바흐 촌장 밭에서도 섞였다⁠. 촌장은 여드레 전 자기 일꾼들에게 믿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했고⁠, 일꾼 열둘 가운데 아홉이 방앗간지기를 따라 믿었다⁠. 자정이 조금 지났을 때 촌장이 비탈 맨 위 자기 밭 둑에 나타났다⁠. 손에 커다란 무쇠 솥을 들고 있었다⁠. 솥 안에 숯불이 벌겋게 담겨 있었다⁠.

“⁠그 솥⁠!⁠”

비탈 중간에서 불 항아리를 나르던 마르그리트의 일꾼이 소리쳤다⁠. 마르그리트가 리베 쪽 둑에서 고개를 들었다⁠. 촌장이 솥을 둑에 내려놓았다⁠.

“⁠어머니 솥은 내가 새로 샀어⁠. 이건 다른 솥이야⁠.⁠”

촌장이 비탈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마르그리트가 대꾸하지 않고 돌아섰다⁠. 엘사가 언니 옆구리를 찔렀다⁠. 언니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그르륵은 강에 들어갔다⁠. 다 자란 사내만 한 몸이 물속으로 미끄러지자 수면이 한 번 일렁였다⁠. 잠시 뒤 강물 위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김은 낮게 퍼지며 강가 밭으로 기어올랐다⁠. 마르그리트의 강가 밭⁠, 엘사의 반쪽 줄⁠, 신전 비탈 아래 언덕 밭들⁠, 믿는 사람의 손이 닿는 고랑마다 안개가 이불처럼 덮였다⁠. 연못 바닥 냄새가 났다⁠. 아무도 코를 쥐지 않았다⁠.

가운데 들 둑 앞에서 안개가 멎었다⁠.

벽이었다⁠. 사람 허리 높이의 흰 안개가 둑을 따라 칼로 자른 듯 서 있었고⁠, 이 너머 가운데 들은 별빛 아래 맨몸으로 누워 있었다⁠. 맑은 하늘로 땅의 온기가 빠져나갔다⁠. 비탈을 타고 내려온 찬 공기가 이 맨 들판으로 모였다⁠. 물이 웅덩이에 고이듯 들 한가운데부터 차올랐다⁠.

바쿨은 마르그리트 밭 맨 아래 모퉁이에 서 있었다⁠. 강가에서도 가장 낮은 자리⁠, 가운데 들과 둑 하나를 사이에 둔 곳이었다⁠. 이 모퉁이 여섯 줄은 아직 덜 익어 따지 못했다⁠. 바쿨은 이 여섯 줄을 밤새 익히고 있었다⁠. 그리고 둑 너머 가운데 들을 보고 있었다⁠.

“⁠카렌 둑하고 높이가 똑같네⁠.⁠”

바쿨이 중얼거렸다⁠. 옆에서 불 항아리를 놓던 엘사가 바쿨을 보았다⁠. 바쿨은 술병을 들고 있지 않았다⁠.

*

자정⁠, 가운데 들 촌장 밭의 맨 아래 고랑에서 첫서리가 맺혔다⁠. 포도 잎 가장자리가 하얗게 일어났다⁠. 캐스퍼는 둑 위에서 이것을 보았다⁠. 오린도 보았다⁠. 사슬이 둘 사이에서 차갑게 늘어졌다⁠.

아델하이트가 둑길을 걸어왔다⁠. 망토 위에 서리가 앉아 반짝였다⁠. 오린 앞에 섰다⁠.

“⁠첫서리가 내렸네⁠. 저기 잎에 앉았지⁠. 맹세는 첫서리까지였네⁠. 이제 끝났어⁠. 사슬을 풀고 사제를 벨렌스로 데려가게⁠. 지금⁠.⁠”

캐스퍼는 오린을 보았다⁠. 오린은 하얗게 일어난 잎을 보고 있었다⁠.

“⁠추기경님⁠. 맹세는 첫서리까지가 아니라 첫서리 밤까지였습니다⁠.⁠”

“⁠같은 말이네⁠.⁠”

“⁠다릅니다⁠. 맹세하실 때 마르그리트 씨는 첫서리 밤에 골짜기 포도가 얼면⁠, 이라고 했고 추기경님은 그 말을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제가 한 글자씩 따라 외웠습니다⁠.⁠”

오린의 목소리는 평평했다⁠. 다만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

“⁠밤은 해가 떠야 끝납니다⁠. 골짜기 포도가 얼었는지는 새벽에 봐야 압니다⁠. 그 전에 사제를 데려가면 마을이 사제를 내준 것이 아니라 대신전이 빼앗은 것이 됩니다⁠. 그건 맹세를 깨는 겁니다⁠.⁠”

아델하이트가 오린을 오래 보았다⁠. 서부 신전 정리를 맡은 열 해 동안 오린은 아델하이트 곁에서 한 번도 고개를 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자네가 지키는 게 사제인가⁠, 맹세인가⁠?⁠”

“⁠맹세입니다⁠. 사제님은 그 안에 묶여 계실 뿐입니다⁠.⁠”

오린이 사슬 찬 왼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이 사슬 열쇠는 새벽까지 제 단추 안에 있습니다⁠.⁠”

아델하이트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 둑길 끝으로 갔다⁠. 거기 서서 가운데 들을 보았다⁠. 잎이 한 장씩 하얘지는 것을 보았다⁠. 서른두 해 전 개울가 둑에서 본 것과 같은 것을⁠.

*

두 시쯤 가운데 들 한복판에서 고함이 났다⁠. 방앗간 옆집 며느리가 불 항아리 하나를 안고 시아버지 밭 둑을 넘으려다 촌장 집 일꾼 둘에게 붙잡혔다⁠. 엘사네 단골⁠, 이 꼬마 바람에게 손을 흔들었던 사람이었다⁠.

“⁠놔요⁠! 우리 밭이에요⁠!⁠”

“⁠촌장님 말씀이오⁠. 믿는 사람은 오늘 밤 이 들에 못 들어가오⁠.⁠”

일꾼 하나가 항아리를 빼앗아 둑 아래로 던졌다⁠. 항아리가 깨지며 숯불이 서리 앉은 풀 위로 흩어졌다⁠. 풀이 치익 소리를 내며 김을 뿜었다⁠. 시아버지 노인은 자기 밭 문 앞에서 이것을 보고만 있었다⁠. 노인은 셋에 둘을 지키는 쪽에 서 있었다⁠. 며느리가 둑길에 주저앉아 울었다⁠. 노인이 그쪽으로 한 걸음 가다가 멈췄다⁠.

서쪽 마을 사람들 틈에서 털모자 농부가 이 모습을 보고 있었다⁠. 농부가 옆 사람에게 낮게 말했다⁠.

“⁠우리 마을 신전 닫히기 전 해에도 꼭 저랬소⁠. 한 집 안에서 아들은 거위를 믿고 아비는 대신전 값을 믿었지⁠.⁠”

“⁠그래서 어떻게 됐소⁠?⁠”

“⁠그 이듬해부터 거위가 안 울었소⁠.⁠”

캐스퍼는 사슬 끝에서 이 말을 들었다⁠. 깨진 항아리 쪽으로 가서 흩어진 숯불을 맨손으로 주워 둑 이쪽 마르그리트 밭 고랑에 옮겨 놓았다⁠. 손바닥이 탔다⁠. 오린이 이 옆에 쭈그려 앉아 왼손으로 같이 주웠다⁠. 사슬 때문이었는지 아닌지는 둘 다 말하지 않았다⁠.

*

새벽 세 시⁠, 가운데 들의 찬 공기가 둑 높이까지 차올랐다⁠. 들 전체가 하얬다⁠. 찬 공기는 넘쳤다⁠. 위로는 엘사네 마당 아랫단과 신전 비탈 맨 아래 줄로⁠, 아래로는 둑 하나 너머 마르그리트 밭 맨 아래 모퉁이로⁠. 안개 이불이 덮인 자리에서도 바닥에 닿은 잎 끝이 하나씩 굳기 시작했다⁠.

“⁠모퉁이가 넘어와⁠!⁠”

마르그리트의 일꾼 우두머리가 소리쳤다⁠. 바쿨이 서 있는 모퉁이 여섯 줄⁠, 맨 아래 잎이 하얘졌다⁠. 마르그리트가 불 항아리를 더 끌어다 놓았다⁠. 연기가 피어올랐지만 넘쳐 오는 찬 공기를 다 막지 못했다⁠.

엘사가 둑길 위의 촌장 딸에게 뛰어갔다⁠. 딸은 밤새 잠긴 문 앞에 앉아 있었다⁠. 손에 가지 묶는 끈을 쥔 채였다⁠. 자기 밭 포도 잎이 하얘지는 것을⁠, 이랑 하나하나 다 보았다⁠.

촌장은 문 안쪽 둑에 서 있었다⁠. 촌장도 밤새 거기 있었다⁠. 불 항아리 하나 없이⁠, 셋에 둘을 지키려고⁠. 촌장의 장화 끝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마르그리트가 불 항아리 하나를 두 손으로 안아 들었다⁠. 무거워서 허리가 휘었다⁠. 이것을 들고 둑길을 걸어 잠긴 문 앞까지 갔다⁠. 항아리를 문 앞 땅에 내려놓았다⁠. 연기가 문살 사이로 들어갔다⁠.

“⁠문 열라는 거 아니야⁠.⁠”

마르그리트가 문살 너머 촌장에게 말했다⁠.

“⁠네 둑에 이거 놓게만 해⁠. 네 밭 넘치는 거 우리 밭으로 오고 있어⁠. 이거 하나라도 놓으면 조금은 덜 넘쳐⁠.⁠”

촌장이 대답하지 않았다⁠. 촌장의 딸이 일어섰다⁠. 문살을 두 손으로 잡았다⁠. 손가락이 서리에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버지⁠.⁠”

촌장이 딸을 보았다⁠.

“⁠저 밭 내가 일궜어요⁠. 봄에 가지 묶고⁠, 여름에 잎 따고⁠. 아버지가 매입상 따라다니는 동안⁠.⁠”

“⁠알아⁠.⁠”

“⁠나는 엘사 언니 믿고 저 바람을 믿었어요⁠. 아버지가 나를 믿으면⁠, 아버지도 한번 믿어 보세요⁠. 신 말고 나를⁠.⁠”

촌장의 턱이 굳었다⁠. 촌장은 흰 띠를 두른 자기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둑길 끝에 아델하이트가 서 있었다⁠.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렌의 개울가 둑 앞에서 열여덟의 그랬을 것처럼⁠.

촌장이 품에서 열쇠를 꺼냈다⁠. 손이 떨려서 자물쇠 구멍에 두 번 헛디뎠다⁠. 세 번째에 들어갔다⁠. 철컥⁠. 쇠사슬이 빗장에서 풀려 땅에 떨어졌다⁠. 빗장을 들어 올렸다⁠.

“⁠들어와라⁠.⁠”

딸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 촌장이 등에 대고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네가 믿는 거⁠, 나도 믿어 보마⁠.⁠”

뮐바흐 비탈 위에서 휘오가 이것을 느꼈다⁠. 잠시 뒤 비탈 쪽에서 내려온 바람이 둑 위에 선 캐스퍼의 앞머리를 한 번 뒤집었다⁠. 휘오의 바람이 비탈을 타고 내려와 둑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둑을 넘어 가운데 들 촌장 밭으로 들어갔다⁠. 고여 있던 찬 공기 위로 미지근한 공기가 쏟아졌다⁠.

가운데 들 다른 집들의 둑길에서 사람들이 촌장을 보고 있었다⁠. 밤새 자기 밭 앞에서 셋에 둘을 지키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촌장을 믿고 촌장 편에 섰었다⁠. 이제 촌장이 믿었다⁠. 방앗간 옆집 노인이 둑길에 주저앉아 있던 며느리를 불렀다⁠. 노인이 며느리 손을 잡고 자기 밭 문을 열었다⁠.

강에서 그르륵이 목을 부풀렸다⁠. 안개의 벽이 무너졌다⁠. 흰 안개가 둑을 넘어 가운데 들로 흘러들었다⁠. 한 밭⁠, 두 밭⁠, 다섯 밭⁠. 별빛 아래 맨몸이던 들판에 이불이 덮였다⁠.

바쿨은 모퉁이 둑에 서 있었다⁠. 손을 뻗었다⁠. 둑 너머 촌장 밭 쪽으로⁠. 손이 넘어갔다⁠. 아무것도 막지 않았다⁠. 손을 뻗은 채 한참 서 있었다⁠. 엘사가 이 옆에서 바쿨의 얼굴을 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술꾼의 수염이 젖어 있었다⁠.

*

해가 비탈 위로 올라왔다⁠. 골짜기 위의 안개가 천천히 걷혔다⁠. 사람들이 밭으로 흩어져 잎을 뒤집어 보았다⁠. 엘사네 마당 아랫단 두 번째 줄까지는 잎 끝만 하얬다가 해를 받자 물방울이 되어 떨어졌다⁠. 신전 비탈 맨 아래 줄도 살았다⁠. 가운데 들은 촌장 밭 아래 절반과 이 옆 두 밭의 아랫단이 얼었고⁠, 나머지는 살았다⁠.

마르그리트 밭 맨 아래 모퉁이 여섯 줄은 얼었다⁠. 잎이 다 하얗게 굳어⁠, 손으로 건드리자 바스러졌다⁠. 송이를 하나 따서 눌러 보니 알이 물렁하게 터졌다⁠. 덜 익은 채 언 포도에서 시큼한 물이 흘렀다⁠. 마르그리트는 이 물이 손목을 타고 흐르게 두었다⁠.

오린이 언 모퉁이 앞으로 걸어갔다⁠. 사슬 끝의 캐스퍼가 따랐다⁠. 아델하이트가 둑길에서 내려와 모퉁이 반대편에 섰다⁠. 골짜기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리베 사람⁠, 뮐바흐 사람⁠, 서쪽 마을 사람⁠. 뮐바흐 촌장도 솥을 든 채 비탈을 내려와 있었다⁠.

아델하이트가 모퉁이의 언 잎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었다⁠. 잎이 아델하이트 손가락 사이에서 부서졌다⁠.

“⁠얼었네⁠. 골짜기 포도가⁠.⁠”

마르그리트가 아델하이트를 보았다⁠. 대답하지 않았다⁠.

오린이 모퉁이 여섯 줄을 끝에서 끝까지 걸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골짜기를 보았다⁠. 강가 밭⁠, 엘사네 반쪽⁠, 신전 비탈⁠, 가운데 들⁠, 이 위 뮐바흐 비탈까지⁠. 사제복 단추 하나를 풀었다⁠. 안주머니에서 사슬 열쇠를 꺼냈다⁠.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판정하겠습니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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