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437자)

왕도 법정

신이 죽은 신전에서 새 신 오디션을 엽니다 · 장연무

오린이 열쇠를 사슬 구멍에 꽂았다⁠. 돌리지는 않았다⁠.

“⁠맹세의 말은 이랬습니다⁠. 첫서리 밤에 골짜기 포도가 얼면⁠.⁠”

오린이 언 모퉁이 여섯 줄을 가리켰다⁠.

“⁠이 여섯 줄은 얼었습니다⁠. 가운데 들 촌장 밭 아래 절반과 그 옆 두 밭 아랫단도 얼었습니다⁠. 리베와 뮐바흐 골짜기 포도밭을 다 합치면 열에 하나쯤입니다⁠.⁠”

아델하이트가 팔짱을 꼈다⁠.

“⁠얼면⁠, 이라고 했지 다 얼면⁠, 이라고 하지 않았네⁠.⁠”

“⁠예⁠. 그래서 여쭙겠습니다⁠. 리베 골짜기에서 첫서리 밤에 포도가 한 줄도 안 언 해가 있었습니까⁠?⁠”

아델하이트가 대답하지 않았다⁠. 마르그리트가 대신 말했다⁠.

“⁠없어⁠. 포도밭 어머니 계실 때도 강가 맨 아래 한두 줄은 해마다 얼었어⁠. 그래서 거기는 늦게 익는 걸 심었고⁠.⁠”

“⁠그렇다면 한 줄이 얼어도 지는 맹세는 맹세하는 날 이미 진 맹세입니다⁠. 대신전은 질 수밖에 없는 맹세를 받지 않습니다⁠. 받았다면 그건 맹세가 아니라 속임수입니다⁠.⁠”

오린이 아델하이트를 보았다⁠. 오린의 목 끝 단추 하나가 풀려 있었다⁠.

“⁠추기경님은 속이지 않으셨습니다⁠. 벨렌스에서 대신전이 가진 것은 약속이 지켜진다는 믿음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을 따르겠습니다⁠. 골짜기는 살았습니다⁠. 리베 신전은 닫지 않습니다⁠.⁠”

열쇠가 돌아갔다⁠. 철컥⁠. 쇠고랑이 캐스퍼 손목에서 풀렸다⁠. 여드레 동안 찬 자리에 붉은 띠가 남아 있었다⁠. 오린이 자기 손목의 고랑도 풀었다⁠. 오린의 손목에도 같은 띠가 있었다⁠.

골짜기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엘사가 언니에게 달려들었고⁠, 뮐바흐 촌장이 솥을 내려놓고 손뼉을 쳤으며⁠, 서쪽 마을 사람들이 털모자를 하늘로 던졌다⁠. 그르륵이 강에서 튀어 올라 둑 위에 철퍼덕 내려앉았다⁠.

아델하이트는 손뼉을 치지 않았다⁠. 언 모퉁이 앞에 한참 서 있다가 오린에게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판정을 받겠네⁠.⁠”

아델하이트가 둑길로 돌아갔다⁠. 마차는 이날 아침 벨렌스 쪽으로 떠났다⁠.

*

수확은 이틀이 더 걸렸다⁠. 살아남은 포도를 다 따서 압착장으로 나르고 나자⁠, 신전 마당에서 마지막 심사가 열렸다⁠. 이백 년 된 포도나무 마흔 그루 아래에 바구니 셋이 놓였다⁠. 바쿨⁠, 휘오⁠, 그르륵⁠. 리베 사람 예순 집과 뮐바흐 사람들⁠, 서쪽 마을 사람들이 줄을 섰다⁠. 마르그리트가 술통 위에 심사위원장으로 앉았다⁠.

“⁠이번엔 다 셉니다⁠. 드시면 안 됩니다⁠. 넣기만⁠.⁠”

캐스퍼가 말했다⁠. 그르륵이 두 물갈퀴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바쿨은 손을 등 뒤로 감췄다⁠. 휘오는 바구니 위에서 숨을 참았다⁠. 바람이 숨을 참으니 마당이 고요했다⁠.

포도알이 떨어졌다⁠. 툭⁠, 툭⁠. 엘사가 휘오 바구니에⁠, 우두머리가 바쿨 바구니에⁠, 앞니 빠진 할머니가 그르륵 바구니에⁠. 리베 촌장은 줄 끝에서 오래 망설이다 딸이 넣은 바구니에 넣었다⁠. 뮐바흐 방앗간지기는 휘오에게⁠, 이 큰아들은 바쿨에게⁠. 털모자 농부는 그르륵 바구니 앞에서 잠깐 멈췄다가 넣었다⁠.

“⁠거위보단 낫겠지⁠.⁠”

줄 맨 끝에 염소가 섰다⁠. 아무도 세우지 않았는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와서 섰다⁠. 염소는 그르륵 바구니에 주둥이를 박고 포도알 세 개를 먹었다⁠. 그르륵이 입을 막은 물갈퀴 사이로 비명을 질렀다⁠.

“⁠이 몸의 표를⁠!⁠”

“⁠염소가 먹은 건 무효고⁠, 염소 표도 무효야⁠.⁠”

마르그리트가 판정했다⁠. 지팡이 할머니가 자기 앞치마에서 포도알 세 개를 꺼내 그르륵 바구니에 넣었다⁠.

“⁠내 표는 아니고⁠, 염소 대신 갚는 거야⁠. 염소는 우리 집 거니까⁠.⁠”

마르그리트가 바구니 셋을 쏟아 셌다⁠. 일꾼 우두머리가 같이 셌다⁠. 둘이 세 번을 셌다⁠.

“⁠셋 다 마흔둘⁠.⁠”

마당이 조용했다가 터졌다⁠. 사람들이 웃었고 누군가 다시 세라고 외쳤다⁠. 마르그리트가 네 번째로 셌다⁠. 마흔둘⁠, 마흔둘⁠, 마흔둘⁠.

캐스퍼가 바구니 셋 앞에 섰다⁠.

“⁠셋 다 모시겠습니다⁠. 술의 신 바쿨⁠, 바람 정령 휘오⁠, 반신 그르륵⁠. 포도는 바쿨 님이⁠, 공기는 휘오 님이⁠, 안개와 개구리는 그르륵 님이⁠. 리베 신전 제단에 잔 셋을 올리겠습니다⁠.⁠”

“⁠신전 하나에 신 셋이오⁠?⁠”

리베 촌장이 물었다⁠.

“⁠포도밭 어머니 한 분 몫을 셋이 나눠 하시는 겁니다⁠. 외상값도 셋이 나눠 갚으시고요⁠.⁠”

바쿨이 기침을 했다⁠. 엘사가 웃으면서 외상 분필 판을 머리 위로 흔들었다⁠.

*

잔치는 해 질 녘까지 갔다⁠. 그리고 해 질 녘에 검은 마차가 다시 들어왔다⁠. 이번에는 마차가 둘이었다⁠. 뒤 마차에서 금실로 해 무늬를 수놓은 흰 옷의 사내가 내렸다⁠. 왕도 대신전 법정의 집행관이었다⁠. 이 사람은 신전 계단에 올라서서 두루마리를 펼쳤다⁠. 사람들이 잔을 든 채 굳었다⁠.

아델하이트가 이 옆에 섰다⁠. 사흘 만이었다⁠. 아델하이트의 망토 자락에 벨렌스 길 먼지가 하얗게 앉아 있었다⁠.

“⁠리베의 내기는 끝났네⁠. 내가 졌지⁠. 리베 신전은 닫지 않네⁠.⁠”

아델하이트가 집행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집행관이 읽었다⁠. 왕도 대신전 법정은 서부 리베의 사제 캐스퍼 웰과⁠, 신을 자칭하는 술꾼 하나와 바람 하나와 개구리 하나를 이단으로 소환한다⁠. 죄목은 거짓 신을 세운 것⁠, 이 거짓을 뮐바흐와 서쪽 네 마을로 퍼뜨린 것⁠. 재판이 끝날 때까지 리베 신전 문은 봉한다⁠.

“⁠닫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캐스퍼가 말했다⁠.

“⁠닫는 게 아니네⁠. 봉하는 것이지⁠. 재판이 끝나면 다시 열 수도 있네⁠.⁠”

오린이 집행관 옆에서 고개를 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전 법정의 소환은 따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추기경님은 사흘 전 새벽에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받았네⁠. 골짜기 일은 골짜기에서 끝났지⁠.⁠”

아델하이트가 계단 아래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리베⁠, 뮐바흐⁠, 서쪽 네 마을⁠.

“⁠그런데 이건 골짜기 일이 아니네⁠. 서쪽 네 마을이 벌써 오디션을 열겠다고 하지⁠. 내일이면 열 마을이 되고⁠, 내년이면 서부 전체가 되겠지⁠. 첫서리 밤 자네들이 이긴 건 촌장 하나가 딸을 믿어서였네⁠. 서부 모든 마을에 그런 딸이 있을 거라 믿나⁠? 없는 마을은 카렌이 되네⁠. 해마다⁠.⁠”

아델하이트가 집행관에게서 봉인 끈을 받아 신전 문고리에 걸었다⁠. 오린이 아니라 아델하이트가 직접 묶었다⁠. 붉은 밀랍이 떨어졌다⁠. 반지가 눌렀다⁠. 열여드레 전 캐스퍼가 뜯은 이 자리였다⁠.

*

이날 밤 신전 계단에서 바쿨이 말했다⁠.

“⁠왕도엔 나 믿는 놈 하나도 없어⁠. 그 큰 도시 땅 한 뼘도 날 믿는 놈이 안 일궈⁠. 거기 가면 우리 셋 다 빈손이야⁠.⁠”

“⁠알고 있습니다⁠.⁠”

“⁠그럼 왜 가⁠?⁠”

“⁠안 가면 궐석 재판입니다⁠. 거짓 신으로 판결 나면 대신전이 서부 모든 마을에 방을 붙이겠지요⁠. 리베 신은 거짓이었다고⁠. 그러면 뮐바흐 방앗간 어르신도⁠, 털모자 어르신도⁠, 그 말을 들은 사람을 믿어서 믿음을 거둘 겁니다⁠.⁠”

휘오가 캐스퍼 어깨에서 몸을 떨었다⁠.

“⁠사람 많은 데 싫어요⁠.⁠”

“⁠압니다⁠. 그래도 같이 가 주십시오⁠. 저 혼자 가면 신 없는 사제입니다⁠.⁠”

그르륵이 목을 부풀렸다⁠.

“⁠이 몸은 원래 왕도 연못에 한번 가 보고 싶었소⁠. 듣기로는 대신전 분수에 잉어가 산다더군⁠. 잉어들한테 이 몸 족보를 들려줄 생각이오⁠.⁠”

마르그리트가 술통을 굴려 왔다⁠. 이 위에 바구니 하나를 얹었다⁠. 마지막 심사 때 셋 다 마흔둘이 나온 포도알을 한데 모은 바구니였다⁠. 리베와 뮐바흐와 서쪽 마을 사람들이 제 손으로 넣은 백스물여섯 알⁠.

“⁠가져가⁠. 믿는 사람이 손댄 거니까 그 바구니 안에서는 셋 손이 닿겠지⁠.⁠”

“⁠마르그리트 씨는요⁠?⁠”

“⁠나도 가⁠. 맹세한 사람이 증인을 안 서면 누가 서⁠.⁠”

엘사가 계단 아래에서 말했다⁠.

“⁠나는 남아⁠. 압착장 돌려야지⁠. 그리고 바쿨 아저씨 외상⁠, 셋이 나눠 갚는다며⁠. 그르륵 님 몫부터 받을 거야⁠.⁠”

“⁠이 몸은 빈털터리요⁠.⁠”

“⁠그러니까 우물 청소로 갚아⁠.⁠”

*

서부 길은 열흘이었다⁠. 오린이 집행관 대신 압송을 맡겠다고 청했고⁠, 이번에는 사슬을 채우지 않았다⁠. 벨렌스에서 털모자 농부가 일행과 갈라섰다⁠. 서쪽 산 너머 제 마을로 돌아가 거위를 다시 불러 보겠다고 했고⁠, 대신 이 이웃 다섯을 왕도까지 딸려 보냈다⁠. 벨렌스 여관 마당을 지날 때 바쿨이 낮은 우물 앞에서 오래 멈춰 섰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다⁠. 이후로 지나는 마을마다 사람들이 길가에 나왔다⁠. 품평회에서 리베 술을 맛본 마을들이었다⁠. 사흘째 묵은 마을에서 일곱이 왕도까지 따라붙었다⁠. 이날 밤 길가 여관에서 오린은 처음으로 누워서 잤다⁠. 캐스퍼가 이것을 보고 웃자 오린은 눈을 감은 채⁠, 사슬이 없으니 등을 펴고 앉아 있을 까닭도 없다고 말했다⁠. 이튿날 아침 오린의 구두가 반짝이게 닦여 있었다⁠. 마르그리트가 닦아 둔 것이었다⁠. 오린은 이 구두를 내려다보며 한참 말이 없었다⁠.

왕도 성문에서 대신전 경비병들이 캐스퍼의 바구니를 붙잡았다⁠. 이단의 제물은 대신전 안에 들일 수 없다고 했다⁠. 경비병 하나가 바구니를 빼앗아 성문 옆 도랑에 쏟으려 했다⁠. 그르륵이 목을 부풀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성문 앞 땅에는 그르륵을 믿는 사람이 일구는 흙이 없었다⁠.

오린이 경비병의 손목을 잡았다⁠. 왼손이었다⁠.

“⁠그 바구니는 증거물입니다⁠. 피고가 법정에 내놓을 물건이니⁠, 법정 문 앞까지는 제가 듭니다⁠.⁠”

“⁠심문관이 이단 제물을 든다고⁠?⁠”

“⁠심문관이 증거를 듭니다⁠.⁠”

경비병이 손을 놓았다⁠. 오린이 바구니를 받아 들고 성문을 지났다⁠. 대전 문 앞에서 바구니를 캐스퍼에게 돌려주었다⁠. 포도알이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다⁠.

왕도 대신전 법정은 기둥이 마흔 개인 흰 돌 대전이었다⁠. 천장 아래 높은 창으로 아침 햇빛이 쏟아졌다⁠. 빛의 신이 손을 쓰는 시간이었다⁠. 방청석은 꽉 찼다⁠. 서부 길을 따라온 사람들이 맨 뒷줄에 서 있었다⁠. 털모자들⁠, 흙 묻은 신발들⁠.

재판장석에 늙은 대신관이 앉았다⁠. 이 오른쪽 고발석에 아델하이트가 섰다⁠. 붉은 망토를 새로 걸쳤다⁠. 오린은 증인석 옆에 섰다⁠. 마르그리트가 이 옆에서 팔짱을 꼈다⁠.

캐스퍼는 피고석 앞에 섰다⁠. 바쿨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이 땅에는 바쿨을 믿는 사람이 일구는 흙이 한 뼘도 없었다⁠. 휘오는 캐스퍼 소매 속에 반쯤 들어가 있었다⁠. 그르륵은 분수 쪽을 힐끔거렸다⁠. 캐스퍼의 두 손에 포도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백스물여섯 알⁠.

방청석 앞줄의 왕도 사람들이 그르륵을 보고 웃었다⁠. 그르륵은 그쪽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웃음이 더 커졌다⁠. 휘오가 소매 깊숙이 몸을 말았다⁠.

아델하이트가 고발석에서 짧게 말했다⁠. 서부의 작은 신들은 사람 사이에 걸려 있어서 사람이 싸우는 날 사라진다⁠. 리베는 한 번 이겼지만 이것은 운이었다⁠. 이 운을 서부 모든 마을이 따라 하게 두면 해마다 어느 마을인가는 언다⁠. 대신전은 이 마을들을 언 포도 값으로 지켜 왔다⁠. 고르는 신은 지키는 신이 아니다⁠.

방청석이 조용해졌다⁠. 마르그리트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틀린 말이 아니어서였다⁠.

재판장이 아델하이트의 고발장을 내려놓았다⁠. 피고석의 넷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술꾼⁠, 김 같은 바람⁠, 사람만 한 개구리⁠, 그리고 바구니를 든 사제⁠.

“⁠서부 리베에서 신을 고른 자가 누구냐⁠?⁠”

대전이 조용했다⁠. 방청석 맨 뒤의 털모자들이 숨을 죽였다⁠. 아델하이트가 고발석에서 캐스퍼를 보았다⁠.

캐스퍼는 포도 바구니를 두 손으로 들고 피고석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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