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6,459자)

조수석

고별운행 · 이수

아내가 조수석에 앉은 것은 육 년이었다⁠.

1997년 겨울부터 2003년 봄까지⁠. 그동안 정재복은 새벽 세 시 사십 분에 일어나서 도시락 두 개를 싸 놓고⁠, 점퍼를 입고⁠, 목도리를 두르고⁠, 정재복보다 먼저 현관에 나와 서 있었다⁠.

육 년 동안 조수석 시트가 정재복 모양대로 꺼졌다⁠.

그만둔 것은 무릎 때문이었다⁠.

빵 상자는 무겁지 않다⁠. 그런데 하루에 서른두 번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차에서 내리고 올라타는 것도 서른두 번이다⁠. 오르내리는 게 무릎을 깎는다⁠. 2003년 봄에 아내가 계단을 내려가다가 한 번 주저앉았다⁠.

병원에서 연골 이야기를 했다⁠.

“⁠이제 나오지 마⁠.⁠”

“⁠괜찮아요⁠.⁠”

“⁠나오지 마⁠.⁠”

“⁠…아직 할 수 있는데⁠.⁠”

“⁠나오지 말라니까⁠.⁠”

아내는 이후로 안 나왔다⁠. 대신 새벽 세 시 사십 분에 일어나는 버릇은 안 없어져서⁠, 이후로도 이십 년 넘게 이 시간에 눈을 떴다⁠. 눈을 뜨고 누워 있다가⁠, 정재복이 나가는 소리를 듣고 다시 잤다⁠.

정재복은 이걸 몰랐다⁠. 십 년쯤 지나서 딸한테 들었다⁠.

“⁠엄마 아빠 나가는 소리 다 들으신대⁠.⁠”

“⁠…그래⁠?⁠”

“⁠응⁠. 문 닫히는 소리 듣고 주무신대⁠.⁠”

정재복은 이날 저녁에 아내한테 이걸 안 물어봤다⁠. 물어보면 아내가 아니라고 할 것 같았다⁠.

*

조수석에는 이후로 아무도 안 앉았다⁠.

빈 채로 다녔다⁠. 거기에 지도책을 놓고⁠, 장갑을 놓고⁠, 겨울에는 목장갑 한 켤레를 여분으로 놓았다⁠. 물건이 앉았다⁠.

딱 한 번 사람이 앉은 적이 있다⁠.

2011년⁠, 아들이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였다⁠. 새벽에 아들이 부스럭거리며 나오더니 신발을 신었다⁠.

“⁠뭐 하냐⁠?⁠”

“⁠같이 가려고요⁠.⁠”

“⁠자⁠.⁠”

“⁠안 졸려요⁠.⁠”

아들이 조수석에 앉았다⁠. 무릎이 대시보드에 닿았다⁠. 키가 그새 컸다⁠.

두 사람은 한 시간을 아무 말도 안 하고 갔다⁠. 정재복이 빵을 내리면 아들이 따라 내려서 상자를 들었다⁠. 정재복이 비닐을 덮어 놓으면 아들이 이걸 봤다⁠.

“⁠아버지⁠, 그거 왜 해요⁠?⁠”

“⁠비 오면 젖으니까⁠.⁠”

“⁠오늘 비 안 오는데요⁠.⁠”

“⁠…그래도⁠.⁠”

아들은 더 안 물었다⁠.

일곱 번째 집 앞에서 아들이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어⁠.⁠”

“⁠매일 이렇게 하셨어요⁠?⁠”

“⁠어⁠.⁠”

“⁠십사 년을요⁠?⁠”

“⁠…어⁠.⁠”

아들이 다음에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정재복은 이게 무슨 말이었는지 지금도 모른다⁠. 이때 물어봤어야 했는데⁠, 물어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

딸은 한 번도 안 탔다⁠.

딸은 대신 다른 걸 했다⁠. 고등학교 때 딸이 자기 용돈으로 방향제를 하나 사다가 조수석 서랍에 넣어 놨다⁠. 정재복이 이걸 발견한 건 며칠 뒤였다⁠. 차에서 빵 냄새 말고 다른 냄새가 나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서랍을 열어 보니 이게 들어 있었다⁠.

레몬 냄새였다⁠.

정재복은 이걸 꺼내지 않았다⁠. 향이 다 날아가고 껍데기만 남을 때까지 두었다⁠. 그러고도 안 버렸다⁠. 스물아홉 해 동안 이 서랍에 이게 있었다⁠.

폐차하기 사흘 전⁠, 차 안 물건을 다 빼야 한다는 말을 듣고 서랍을 열었을 때 이게 나왔다⁠. 다 말라서 딱딱해진 플라스틱 껍데기였다⁠.

정재복은 이걸 주머니에 넣었다⁠.

*

아이 둘을 이 차로 키웠다⁠.

딸이 대학에 간 해에 등록금이 삼백만 원이 좀 넘었다⁠. 이 돈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새벽에서 나왔다⁠. 하루에 서른두 군데⁠, 한 달에 서른 날⁠, 일 년에 삼백육십 일⁠.

아들이 대학에 간 해에는 차가 처음으로 십오만 킬로를 넘었다⁠.

정재복은 이때 계기판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숫자가 학비구나⁠. 십오만 킬로가 애 둘 학비구나⁠.

이 생각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

지금 딸은 마흔넷이고 아들은 마흔둘이다⁠.

딸은 근처에 살아서 일주일에 한 번쯤 온다⁠. 올 때마다 냉장고에 뭘 넣어 놓고 간다⁠. 아들은 멀리 살아서 명절에 온다⁠. 대신 전화를 자주 한다⁠.

폐차하기 이틀 전⁠, 아들이 또 전화를 했다⁠.

“⁠아버지⁠, 제가 그럼 그 차 사 드릴게요⁠.⁠”

“⁠뭘 사⁠.⁠”

“⁠새 차요⁠. 아버지가 아까워서 못 보내시는 거면⁠—⁠”

“⁠아까워서 못 보내는 거 아니다⁠.⁠”

“⁠그럼 왜⁠—⁠”

정재복은 말을 안 했다⁠.

아들이 한참 기다리다가 말했다⁠.

“⁠…아버지⁠, 저 진짜 몰라서 그래요⁠.⁠”

정재복은 수화기를 들고 서 있었다⁠.

이 차는 아까운 물건이 아니다⁠. 아까운 물건이면 팔면 된다⁠. 팔면 돈이 되니까 그건 아까운 게 아니다⁠. 이건 그런 게 아니다⁠.

이 차하고 한 약속이 있다⁠. 내가 너 안 버릴 테니까 너도 나 버리지 마라⁠. 이 약속을 이 차는 스물아홉 해 동안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눈길에서도 안 어겼고 영하 17도에서도 안 어겼다⁠.

그런데 지금 어기는 사람은 나다⁠.

이 말을 하려면 스물아홉 해를 다 말해야 했다⁠. 새벽 세 시 사십 분을⁠, 서른두 개의 덮개를⁠, 오천 킬로마다 간 오일을⁠, 한 뼘짜리 골목을 다 말해야 했다⁠.

그래서 정재복은 이렇게만 말했다⁠.

“⁠…끊는다⁠.⁠”

*

이날 밤 아내가 물었다⁠.

“⁠아들이 뭐래요⁠.⁠”

“⁠차 사 준대⁠.⁠”

“⁠…그래서요⁠?⁠”

“⁠됐다고 했어⁠.⁠”

아내가 이불을 펴면서 말했다⁠.

“⁠아들도 마음이 안 좋아서 그러는 거예요⁠.⁠”

“⁠알아⁠.⁠”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말해요⁠?⁠”

정재복은 대답을 안 했다⁠.

한참 있다가 아내가 등을 돌린 채로 말했다⁠.

“⁠…나도 그 차 조수석 편했는데⁠.⁠”

“⁠…어⁠.⁠”

“⁠무릎만 안 아팠으면 더 탔지⁠.⁠”

“⁠…어⁠.⁠”

“⁠그때 못 타게 하신 거⁠, 나 그때 서운했어요⁠.⁠”

정재복은 천장을 봤다⁠.

이십삼 년 만에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랬나⁠.⁠”

“⁠이제 말하는 거예요⁠.⁠”

“⁠…미안하다⁠.⁠”

말해 놓고 정재복은 자기가 이 말을 했다는 게 놀라웠다⁠. 아내도 놀랐는지 한참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렇게 말했다⁠.

“⁠…내일 일찍 나가시게요⁠?⁠”

“⁠어⁠.⁠”

“⁠몇 시에⁠.⁠”

“⁠일곱 시⁠.⁠”

“⁠…배웅할게요⁠.⁠”

“⁠됐어⁠.⁠”

“⁠할 거예요⁠.⁠”

이날 밤 정재복은 잠이 잘 안 왔다⁠. 스물아홉 해 전⁠, 이 차를 사 온 날 밤과 똑같았다⁠.

당시에는 십 년만 버텨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십 년⁠.

달력 뒷면은 넓었다⁠.

팔월 장을 뜯어서 뒤집으니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흰 종이가 나왔다⁠. 은행에서 준 달력이라 종이가 두꺼웠다⁠. 매직이 배어 나오지 않을 만큼⁠.

정재복은 식탁에 앉았다⁠.

맨 위에 다섯 글자를 크게 썼다⁠. 고 별 운 행⁠. 글자 사이를 띄웠다⁠. 왜 띄웠는지는 자기도 모른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이 아래에 뭐라고 써야 할지 몰라서 한참 있었다⁠.

써 본 적이 없었다⁠. 편지라는 걸 마지막으로 쓴 게 군대에서였다⁠. 당시에는 어머니한테 썼고⁠, 내용은 밥 잘 먹고 있다는 것과 걱정하지 마시라는 것이 전부였다⁠.

*

정재복은 먼저 숫자를 적었다⁠.

최초등록일⁠: 1997⁠.10⁠.28 총주행거리⁠: 448⁠,000KM

숫자를 적고 나니 좀 나았다⁠. 숫자는 쓸 줄 안다⁠. 스물아홉 해 동안 장부에 숫자를 적어 왔다⁠.

다음부터가 어려웠다⁠.

정재복은 이렇게 시작했다⁠.

「⁠29년을 동고동락한 사랑하는 나의 친구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사랑하는⁠」이라고 쓰고 나서 손이 멈췄다⁠. 이 말을 종이에 쓴 것이 평생 처음이었다⁠. 아내에게도 안 써 봤다⁠. 지워야 하나 하고 한참 봤는데⁠, 매직이라 지워지지도 않았다⁠.

그냥 뒀다⁠.

*

쓰다 보니 나왔다⁠.

IMF의 폭풍을 같이 견딘 것을 썼다⁠. 이 긴 시간 동안 묵묵히 고생을 감내해 준 것을 썼다⁠. 이 덕분에 아이 둘을 키우고 가르쳤고 지금은 저희들 길에서 각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썼다⁠.

이 모든 것이 네가 있어 가능했다고 썼다⁠.

정말 고맙다고 썼다⁠.

그리고 아무 사고도 없이 달려 줘서 진짜 고맙다고 썼다⁠.

거기까지 쓰고 매직을 놓았다⁠. 손이 아팠다⁠. 큰 글씨를 오래 쓰니까 손목이 저렸다⁠.

한참 있다가 다시 들었다⁠.

「⁠시간이 흘러도 언제나 함께 하자던 우리의 약속⁠!⁠」

여기서 또 멈췄다⁠.

이 약속은 아무도 모른다⁠. 1997년 10월 28일 아침에 영업소 마당에서 정재복이 혼자 속으로 한 말이다⁠. 아내도 모르고 아이들도 모른다⁠. 이 자리에 있던 영업소 직원은 열쇠를 건네주며 예열 표시등 설명을 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이 약속을 아는 것은 둘뿐이었다⁠.

「⁠끝까지 지키지 못해 미안한 마음에⁠…⁠」

정재복은 이 문장을 다 못 쓰고 뒤에 점을 찍었다⁠. 무슨 말을 더 붙여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더 붙이면 못 쓸 것 같아서였다⁠.

아내가 등 뒤로 지나갔다⁠. 한 번 보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지나갔다⁠.

*

마지막 줄을 쓸 때는 아침이었다⁠.

「⁠하지만 너의 숨결⁠, 헌신은 영원히 간직할게⁠!⁠」 「⁠너는 그냥 자동차가 아니고 나의 인생의 동반자⁠, 친구⁠, 가족이었어⁠.⁠」

동반자⁠, 친구⁠, 가족⁠.

세 단어를 나란히 쓰고 나서 정재복은 이 줄을 오래 봤다⁠. 스물아홉 해 동안 이 셋을 다 해 준 것이 사람이 아니라 차라는 것이 이상했다⁠. 이상한데 사실이었다⁠.

「⁠이제는 너를 보내게 되어 정말 미안해⁠!⁠」 「⁠안녕⁠, 나의 친구⁠…⁠」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손이 가는대로 마음이 시키는대로 썼다⁠.

종이를 들어 보니 글씨가 삐뚤었다⁠. 아래로 갈수록 오른쪽이 처졌다⁠.

다시 쓸까 하다가 그만뒀다⁠.

*

아침 일곱 시였다⁠.

아내와 딸이 현관에 나와 있었다⁠. 딸은 전날 밤에 왔다⁠. 오지 말라고 했는데 왔다⁠.

“⁠아빠⁠.⁠”

“⁠어⁠.⁠”

“⁠…같이 갈까⁠?⁠”

“⁠됐다⁠.⁠”

“⁠혼자 가시게⁠?⁠”

“⁠혼자 가야지⁠.⁠”

딸이 뭐라고 더 말하려다가 말았다⁠. 아내가 딸의 팔을 잡았다⁠.

정재복은 신발을 신었다⁠. 등을 보인 채로 신었다⁠. 문을 열고 나가면서 뒤를 안 돌아봤다⁠.

아무도 손을 흔들지 않았다⁠.

*

폐차장은 열 시였다⁠.

일곱 시에 나갔으니 세 시간이 남았다⁠. 차로 사십 분이면 가는 거리였다⁠.

정재복은 큰길로 안 갔다⁠.

7번 코스로 들어섰다⁠.

*

첫 집은 언덕 아래 대성수퍼 자리였다⁠.

지금은 편의점이다⁠. 유리문 안쪽이 환하고 스물몇 살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 계산대에 앉아 있었다⁠.

정재복은 이 앞에 차를 세웠다⁠. 비상등을 켰다⁠.

“⁠…여기가 첫 집이었다⁠.⁠”

차 안에서 혼자 차에게 말했다⁠.

“⁠셔터 소리가 컸어⁠. 아저씨가 늘 먼저 나와서 올렸는데⁠, 그 소리가 골목에 다 울렸지⁠. 너도 알지⁠.⁠”

엔진이 낮게 돌았다⁠.

“⁠이십 년 넣었다⁠. 이십 년⁠.⁠”

비상등이 깜빡였다⁠. 정재복은 삼십 초쯤 있다가 출발했다⁠.

*

형제상회 자리는 빌라가 되어 있었다⁠.

미광슈퍼 자리는 부동산이었다⁠.

진주식품 자리는 아직 비어 있었다⁠. 셔터가 내려져 있고 이 위에 광고 스티커가 여러 장 붙어 있었다⁠. 2019년에 붙었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는 없었다⁠.

정재복은 거기서 좀 오래 섰다⁠.

“⁠여기 아주머니 목소리가 컸어⁠.⁠”

“⁠…소보로 남았다고 맨날 뭐라 그랬지⁠. 줄이면 또 모자란다 그러고⁠.⁠”

“⁠그래도 갈 때는 꼭 조심해서 가라 그랬다⁠.⁠”

한참 있다가 정재복은 이렇게 말했다⁠.

“⁠…너한테 한 말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고는 웃었다⁠. 혼자 웃었다⁠.

*

산동네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에 엔진이 울었다⁠. 짐칸이 비었는데도 소리가 났다⁠. 스물아홉 해 동안 이 소리를 냈다⁠.

네 집이 있던 자리를 다 지났다⁠. 넷 다 없었다⁠.

학생들이 오던 집 자리에는 카페가 있었다⁠. 아직 문을 안 열었다⁠.

정재복은 이 앞에 서서 창문을 조금 내렸다⁠. 아침 공기가 들어왔다⁠.

“⁠눈 온 날 기억나냐⁠?⁠”

“⁠…내려올 때 그 모퉁이⁠.⁠”

“⁠…너 그때 안 미끄러졌잖아⁠.⁠”

목이 좀 막혔다⁠. 정재복은 헛기침을 했다⁠.

“⁠…그때 내가 고맙다고 했지⁠. 소리 내서⁠. 그때가 처음이었을 거다⁠.⁠”

내려오는 길은 마른 길이었다⁠. 9월이니까⁠.

세 번째 모퉁이에 오늘은 아무 차도 없었다⁠. 길이 넓어 보였다⁠. 이렇게 넓은 길이었나 싶었다⁠.

*

마지막으로 대리점 앞을 지났다⁠.

대리점은 삼 년 전에 옮겼다⁠. 지금 이 자리에는 다른 간판이 걸려 있다⁠. 그래도 셔터 모양은 그대로였다⁠.

정재복은 거기서 차를 세우고 시계를 봤다⁠.

아홉 시 이십 분이었다⁠.

폐차장까지 이십 분⁠. 사십 분이 남았다⁠.

정재복은 시동을 끄지 않았다⁠. 끄면 다시 걸어야 하는데⁠, 오늘은 다시 거는 횟수를 늘리고 싶지 않았다⁠.

조수석 서랍을 열어 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어제 다 뺐다⁠. 지도책도⁠, 장갑도⁠, 딱딱해진 방향제 껍데기도⁠.

빈 서랍을 닫았다⁠.

정재복은 뒷주머니에서 접은 종이를 꺼냈다⁠. 달력 뒷면이었다⁠. 접힌 자리가 두꺼워서 잘 안 펴졌다⁠.

투명 테이프를 뜯어서 네 귀퉁이에 붙였다⁠.

앞유리 안쪽에서 붙일까 바깥쪽에서 붙일까 잠깐 생각하다가⁠, 바깥쪽에 붙였다⁠. 안쪽에 붙이면 유리에 가려서 잘 안 보일 것 같았다⁠.

붙이고 나서 몇 걸음 물러서서 봤다⁠.

아침 해가 유리에 비쳐서 하늘과 구름이 글씨 위에 겹쳐 있었다⁠. 그래서 아래쪽 줄은 잘 안 보였다⁠.

「⁠고 별 운 행⁠」 다섯 글자만 잘 보였다⁠.

정재복은 이걸 한참 봤다⁠.

그러고는 다시 운전석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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