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22자)

목멱대왕

귀신 노조 파업 · 기담오

솔방울은 자정 십 분에 떨어졌다⁠. 시청역 승강장 의자에서 보온병 뚜껑을 막 열던 참이었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정수리가 얼얼했고⁠, 솔방울 하나가 무릎 위로 굴러 떨어졌다⁠. 승강장 천장은 콘크리트였다⁠. 솔방울이 떨어질 데가 없었다⁠.

솔방울 비늘 사이에 종이가 말려 꽂혀 있었다⁠. 소연은 종이를 빼서 폈다⁠. 붓글씨였다⁠. 먹이 아직 덜 말라 손끝에 묻었다⁠.

「⁠남산 꼭대기로 오라⁠. 축시가 지나기 전에⁠. 목멱⁠」

옆에서 태식이 너덜너덜한 확성기를 테이프로 붙이다가 쪽지를 들여다보았다⁠. 팥 원에서 빠져나온 뒤로 태식은 시청역의 팥 줄 바깥 기둥 하나를 겨우 차지하고 있었다⁠.

“⁠어머⁠, 대왕님 친필이네⁠. 주무관님⁠, 축시는 새벽 세 시까지예요⁠. 늦으면 솔방울이 열 개 떨어져요⁠.⁠”

“⁠열 개면요⁠?⁠”

“⁠귀신도 혹이 생겨요⁠.⁠”

택시는 남산 순환도로 입구까지만 갔다⁠. 밤에는 차가 못 올라간다고 했다⁠. 소연은 보온병을 카디건 주머니에 넣고 계단을 올랐다⁠. 계단은 끝없이 이어졌다⁠. 백 계단을 넘기자 숨이 목까지 찼고⁠, 이백 계단을 넘기자 숨이 정수리까지 찼다⁠. 태식이 옆에서 둥둥 떠서 따라왔다⁠. 떠서 오니까 하나도 안 힘들어 보였다⁠.

“⁠부장님⁠, 떠 다니시니까 좋으시겠어요⁠.⁠”

“⁠좋긴요⁠. 나 살아서는 명동에서 이 계단 걸어 올라오는 게 데이트 코스였어요⁠. 지금은 다리 아픈 게 그리워요⁠.⁠”

태식이 계단 난간 위에 앉아 나팔바지 자락을 털었다⁠. 털어도 먼지가 나지 않았다⁠.

“⁠나 칠팔 년 겨울에 갔어요⁠. 하숙방에서⁠, 연탄가스로⁠. 그날도 다방 문 닫고 늦게 들어갔지⁠. 아침에 주인 할머니가 문 두드렸는데 내가 못 일어났대요⁠.⁠” 태식은 확성기에 붙인 테이프를 손톱으로 눌렀다⁠. “⁠그래서 밤에 연탄 냄새 나는 집 지나가면 창문 두드려요⁠. 일어나세요⁠, 창문 여세요⁠. 오십 년 했어요⁠. 요즘은 연탄 때는 집이 거의 없어서 일이 줄었는데⁠, 그 대신 막차 승강장을 맡았어요⁠.⁠”

소연은 계단을 오르다 말고 태식을 보았다⁠. 태식이 손을 내저었다⁠.

“⁠에이⁠, 그런 얼굴 하지 마요⁠. 디제이는 분위기 처지는 거 싫어해요⁠. 자⁠, 계단 오르는 주무관님께 신청곡⁠! 「⁠한 계단만 더⁠」⁠!⁠”

“⁠그것도 방금 만드셨죠⁠?⁠”

“⁠그럼요⁠. 나는 다 방금 만들어요⁠.⁠”

*

남산 꼭대기 팔각정 뒤 소나무 숲은 바람이 없는데도 솔잎이 흔들렸다⁠. 솔 냄새가 짙었다⁠. 숲 한가운데 너럭바위가 있었고⁠, 바위 둘레에 이상한 손님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맨 위에 앉은 것은 커다란 노인이었다⁠. 앉아 있는데도 소나무 어깨쯤 되는 키였다⁠. 수염이 솔잎처럼 뾰족뾰족했고⁠, 몸에서 송진 냄새가 났다⁠. 노인은 소나무 바늘 한 움큼을 껌처럼 씹고 있었다⁠. 목멱대왕이었다⁠.

왼편에 쪽 찐 머리의 작은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인왕산 산신이라고 태식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할머니 발치에 누렇고 늙은 호랑이 한 마리가 엎드려 코를 골았다⁠. 코 고는 소리가 너럭바위를 덜덜 울렸다⁠.

오른편 바위 끝은 축축했다⁠. 물에서 막 올라온 듯한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수염이 뱀처럼 길게 바닥까지 늘어져 있었다⁠. 물비린내가 났다⁠. 한강 용왕이었다⁠. 용왕은 젖은 소매에서 라면 봉지 하나를 꺼내 바위 위에 탁 내려놓았다⁠.

“⁠오늘만 열두 개요⁠. 열두 개⁠. 내 집 마당에⁠.⁠”

바위 아래쪽에는 동네 마을신 할매들이 여럿 둘러앉아 있었다⁠. 서빙고 할매⁠, 이태원 할매⁠, 마포 할매⁠. 할매들은 귤껍질을 까며 수다를 떨다가 소연이 오자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네가 관의 교섭 담당이냐⁠.⁠” 목멱대왕이 솔잎을 씹으며 말했다⁠. 말이 느렸다⁠. 한 마디와 다음 마디 사이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도 남았다⁠.

“⁠서울시 귀신관리과 주무관 여소연입니다⁠.⁠”

“⁠귀신관리과라⁠.⁠” 목멱대왕이 코웃음을 쳤다⁠. 송진 냄새가 훅 끼쳤다⁠. “⁠관이 귀신을 관리한다니⁠. 우리는 산을 관리한다고 한 적도 없다⁠.⁠”

“⁠회비는 걷으시잖아요⁠.⁠” 마포 할매가 끼어들었다⁠.

“⁠회비는 다르지⁠.⁠”

“⁠대왕님 회비 석 달 밀리셨어요⁠.⁠”

목멱대왕이 솔방울 하나를 집어 마포 할매에게 던졌다⁠. 할매가 고개를 까딱 숙여 피했다⁠. 솔방울이 소연의 발밑에 떨어졌다⁠.

*

“⁠본론을 말하마⁠.⁠” 목멱대왕이 솔잎을 뱉었다⁠. “⁠귀신들이 오백 년 밤일을 한 것은 안다⁠. 덕분에 우리가 편했다⁠. 그것도 안다⁠. 밤마다 다리 위에서 사람 붙잡고⁠, 계단에서 사람 붙잡고⁠. 원래 그건 우리가 할 일이었는데 귀신들이 했지⁠.⁠”

“⁠그럼 귀신들한테 밥을⁠…⁠…⁠.⁠”

“⁠그런데 그게 병이다⁠.⁠” 목멱대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너럭바위가 웅 울렸다⁠. “⁠죽은 자는 떠나야 한다⁠. 떠날 자가 밥상에 매여 떠나지 못하는 것이 서울의 병이다⁠. 쉰 해 동안 너희 관이 역마다 밥상을 차렸지⁠. 그 밥을 먹고 눌러앉은 귀신이 몇인 줄 아느냐⁠. 밥 한 그릇에 한 해⁠, 또 한 그릇에 또 한 해⁠. 귀신은 먹을수록 짙어지고⁠, 짙어질수록 못 떠난다⁠.⁠”

“⁠일하고 싶은 귀신은요⁠?⁠”

“⁠귀신이 일하고 싶다는 것부터가 병이다⁠.⁠”

“⁠산 사람도 그런 말 들어요⁠. 일하고 싶다는 게 병이라고⁠.⁠”

할매들이 귤을 까다 말고 킥킥 웃었다⁠. 목멱대왕이 할매들을 노려보았고⁠, 할매들은 다시 귤껍질에 고개를 숙였다⁠.

“⁠게다가 너희 관이 부른 그 팥 장수⁠.⁠” 목멱대왕이 손가락으로 산 아래를 가리켰다⁠. “⁠서울 바닥에 팥을 뿌려 대니 우리 길까지 막혔다⁠.⁠”

“⁠내 길이 제일 막혔소⁠.⁠” 용왕이 젖은 수염을 쓸었다⁠. “⁠한강에서 올라오는 계단마다 팥이오⁠. 내가 올라오려면 팥을 피해 하수구로 와야 하오⁠. 하수구로⁠. 용왕이⁠.⁠”

“⁠그래서 정했다⁠.⁠” 목멱대왕이 바위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숲의 솔잎이 한꺼번에 멈췄다⁠. “⁠동짓날까지 파업을 거두면⁠, 우리가 칠백을 거둬 저승으로 보내 주마⁠. 편히⁠. 쇳소리 없이⁠. 팥 없이⁠. 줄 서서 차례로⁠.⁠”

소연은 숨을 멈췄다⁠. 정확한 제안이었다⁠. 시가 바라는 것을 한 줄로 다 들어주는 제안이었다⁠. 귀신이 없으면 밥도 예산도 필요 없고⁠, 퇴마 업체 계약도 끝났다⁠.

“⁠그럼 밤에 사고는 누가 막아요⁠?⁠”

“⁠산 사람 일은 산 사람이 해라⁠. 원래 그래야 했다⁠.⁠” 목멱대왕이 솔잎을 한 움큼 더 입에 넣었다⁠. “⁠불을 켜고⁠, 눈을 치우고⁠, 졸지 말고 차를 몰고⁠. 관이 돈 쓰는 게 그런 데 아니냐⁠.⁠”

“⁠대왕님⁠, 그건 너무하세요⁠.⁠” 인왕산 할머니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가늘고 맑았다⁠. “⁠우리 인왕산 귀신들 중에는 아직 떠나기 싫은 애들도 있어요⁠. 손주 시집가는 거 보겠다는 할머니도 있고⁠.⁠”

“⁠그러니까 동짓날까지 시간을 주는 거다⁠.⁠”

“⁠동짓날까지면 열흘이에요⁠.⁠”

“⁠열흘이면 손주가 시집을 가든가 말든가 정하겠지⁠.⁠”

호랑이가 코를 골다 말고 한쪽 눈을 떴다⁠. 소연을 한 번 보고 다시 감았다⁠.

*

내려오는 계단에서 물비린내가 따라왔다⁠. 용왕이 젖은 소매를 끌며 소연 옆을 걸었다⁠. 신령은 떠다니지 않고 걸었다⁠. 걸을 때마다 계단에 물 자국이 찍혔다가 금방 말랐다⁠.

“⁠나도 내려가는 길이오⁠. 하수구로⁠.⁠”

“⁠용왕님⁠, 하나 여쭤도 될까요⁠?⁠”

“⁠라면 봉지 말고는 다 물어도 되오⁠.⁠”

“⁠팥에 밀려서 서울 밖으로 나간 귀신은 정말 혼자 못 돌아와요⁠?⁠”

용왕이 계단 중간에서 멈췄다⁠. 산 아래로 한강이 보였다⁠. 다리마다 불이 켜져 강물 위에 길게 비쳤다⁠.

“⁠혼자서는 못 오지⁠. 길을 모르니까⁠. 귀신은 제가 일하던 자리만 알고 다른 길은 모르오⁠.⁠” 용왕이 수염 끝을 비틀어 물을 짰다⁠. 물이 계단에 뚝뚝 떨어졌다⁠. “⁠그런데 강은 길을 아오⁠. 강물은 서울 밖에서도 흘러 들어오고 서울 안에서도 흘러 나가니⁠. 내가 등에 태우면 못 올 데가 없소⁠.⁠”

“⁠그럼 태워 주시면 되잖아요⁠.⁠”

“⁠공짜로⁠?⁠” 용왕이 젖은 소매에서 라면 봉지를 하나 더 꺼냈다⁠. 아까와 다른 봉지였다⁠. “⁠열세 개⁠.⁠”

소연은 라면 봉지를 받아 카디건 주머니에 넣었다⁠. 축축했다⁠.

“⁠한강 다리 귀신들이 노조에 제일 많다고 들었어요⁠.⁠”

“⁠알지⁠. 대부분 내가 건져 올린 이들이오⁠. 다리 위에서 강을 내려다보던 이들⁠.⁠” 용왕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물소리처럼 낮아졌다⁠. “⁠다들 다리 위에서 남의 어깨에 찬 바람을 불고 있소⁠. 제가 못 받은 바람을⁠. 그걸 그만두라고 대왕은 말하고⁠, 그걸 계속하게 해 달라고 너는 말하는구려⁠.⁠”

용왕은 계단 끝 하수구 앞에서 소연에게 고개를 까딱하고⁠, 몸을 길게 늘여 철망 틈으로 스르르 들어갔다⁠. 수염 끝이 마지막으로 빠져 들어갔다⁠. 하수구 안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팥 좀 치우라고 전하시오⁠. 하수구 냄새가 지독하오⁠.⁠”

*

새벽 세 시 반⁠, 소연은 남산 계단을 내려오며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과장은 신호 한 번 만에 받았다⁠. 잠을 안 자고 있던 목소리였다⁠.

“⁠남산 신령님들이 제안을 하셨어요⁠. 동짓날까지 파업 끝내면 칠백을 저승으로 데려가시겠대요⁠.⁠”

과장이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럼 밥 안 줘도 되는 거야⁠?⁠”

“⁠네⁠. 귀신이 없으니까요⁠.⁠”

“⁠퇴마 계약도⁠?⁠”

“⁠필요 없겠죠⁠.⁠”

과장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숨인지 다른 숨인지 소연은 알 수 없었다⁠. 과장은 전화를 끊기 전에 한마디를 보탰다⁠.

“⁠너희 어머니도 가시는 거야⁠?⁠”

소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과장이 먼저 끊었다⁠. 오 분 뒤 비서실장의 문자가 왔다⁠. 과장이 벌써 올린 모양이었다⁠.

「⁠시장님 말씀⁠: 좋은 안⁠. 적극 추진⁠. 귀신 측 수용하도록 설득 바람⁠」

*

새벽 네 시 이십 분⁠, 을지로입구역 승강장은 귀신으로 꽉 차 있었다⁠. 칠백열 귀신 사이에 귀석이 방망이를 무릎에 걸쳐 놓고 떠 있었다⁠. 엄마는 어제처럼 기둥에 기대 있었다⁠. 태식이 앞장서서 길을 열었다⁠.

소연은 목멱대왕의 제안을 그대로 전했다⁠. 동짓날까지⁠. 칠백 모두⁠. 편히⁠, 쇳소리 없이⁠, 팥 없이⁠. 소연이 말하는 동안 승강장이 조용했다⁠. 칠백열이 한 귀신도 움직이지 않았다⁠.

“⁠저승이라⁠.⁠” 맨 앞의 갓 쓴 귀신이 중얼거렸다⁠. “⁠거기 가면 밥이 나오오⁠?⁠”

“⁠거기는 밥이 필요 없다고 하셨어요⁠.⁠”

“⁠밥이 필요 없는 데가 있소⁠?⁠”

뒤에서 누가 말했다⁠. “⁠나는 가고 싶소⁠. 오백 년이면 됐소⁠.⁠” 다른 누가 말했다⁠. “⁠나는 안 가오⁠. 우리 손녀 아직 막차 타고 다니오⁠.⁠” 승강장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귀신끼리 몸이 겹친 자리에서 찬 바람이 일었다⁠.

귀석이 방망이를 들어 승강장 바닥을 짚었다⁠. 방망이는 바닥에 닿지 않았지만 웅성거림이 멎었다⁠.

“⁠이것은 위원장 혼자 정할 일이 아니오⁠. 총회에 부치겠소⁠. 조합원 하나하나가 정하시오⁠.⁠” 귀석이 소연을 보았다⁠. 굵은 눈썹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관은 이 안이 좋겠지⁠.⁠”

“⁠시장님이 적극 추진하신대요⁠.⁠”

“⁠그렇겠지⁠. 밥 한 그릇 안 주고 귀신을 다 치우는 안이니⁠.⁠”

엄마가 기둥에서 몸을 뗐다⁠. 한참 만에 일어났다⁠. 빛이 옅어서 엄마의 주황 조끼가 형광등 불빛에 녹아드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가 조끼 매무새를 고치고 소연을 보았다⁠.

“⁠교섭 담당자님⁠.⁠”

“⁠네⁠, 부위원장님⁠.⁠”

“⁠부위원장은 남습니다⁠.⁠”

“⁠엄마⁠.⁠”

“⁠총회는 총회고⁠, 나는 남아⁠.⁠” 엄마가 고무장갑을 끼었다⁠. “⁠잘린 다음을 정하러 왔다고 했지⁠. 아직 안 정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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