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352자)

팥 한 줌

귀신 노조 파업 · 기담오

시청 본관 7층 소회의실의 화면에 붉은 팥 한 알이 크게 떴다⁠. 맹지훈이 리모컨을 누르자 팥 한 알이 팥 한 줌이 되었고⁠, 팥 한 줌이 승강장 바닥을 가로지르는 붉은 줄이 되었다⁠.

“⁠귀신은 팥 줄을 못 넘습니다⁠. 그리고 쇳소리에 밀립니다⁠.⁠” 지훈이 다시 리모컨을 눌렀다⁠. 화면에 등에 지는 스피커 사진이 떴다⁠. “⁠꽹과리 소리를 녹음해 크게 틉니다⁠. 팥으로 길을 막고 쇳소리로 밀면⁠, 귀신이 바람에 밀리는 연기처럼 밀려납니다⁠. 시청역부터 한 역씩 정리하겠습니다⁠. 정리한 역에는 팥 줄을 남겨 둡니다⁠.⁠”

회의 탁자에는 비서실장과 과장과 소연이 앉아 있었다⁠. 비서실장이 손을 들었다⁠.

“⁠밀려난 귀신은 어디로 갑니까⁠?⁠”

“⁠서울 경계 밖으로 나가면 혼자서는 못 돌아옵니다⁠.⁠” 지훈이 웃었다⁠. “⁠고양이나 성남 업체에서 항의가 좀 들어오긴 하는데⁠, 그건 저희가 처리합니다⁠.⁠”

“⁠팥은 국산입니까⁠?⁠” 과장이 물었다⁠.

“⁠국산이 잘 듣습니다⁠. 수입은 반쯤 듣고요⁠. 견적에 차이가 있습니다⁠.⁠”

“⁠수입으로 해⁠.⁠”

“⁠과장님⁠.⁠” 소연이 과장을 보았다⁠.

“⁠감사 나와⁠. 국산 팥 단가가 왜 이렇게 비싸냐고⁠.⁠”

지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태블릿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러고는 화면을 바꿨다⁠. 「⁠야간 낙상·충돌·추락 신고 · 최근 나흘⁠」⁠. 날마다 막대가 하나씩 솟아 있었고⁠, 막대 아래에 작은 글씨로 신고 내용이 붙어 있었다⁠. 종로 계단 낙상⁠, 마포대교 택시 추돌⁠, 신림역 취객 넘어짐⁠, 사당역 에스컬레이터⁠.

“⁠제가 날마다 모으는 기록입니다⁠.⁠” 지훈의 목소리에서 영업 말투가 잠깐 빠졌다⁠. “⁠귀신들이 사고를 막아 왔다고들 하죠⁠. 맞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뒤집으면 귀신이 사고를 쥐고 있다는 말입니다⁠. 쥐고 있던 걸 놓겠다고 하면서 밥을 내놓으라고 하면⁠, 그게 인질극이지 뭡니까⁠. 저는 서울의 밤을 귀신 손에서 빼서 사람 손에 돌려 놓는 일을 합니다⁠.⁠”

“⁠귀신들도 서울 사람이었어요⁠.⁠” 소연이 말했다⁠.

“⁠였죠⁠.⁠” 지훈이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지금은 아니고요⁠.⁠”

비서실장이 회의를 정리했다⁠. 현장마다 시청 직원이 한 사람씩 붙어야 했고⁠, 귀신 말을 알아듣는 직원은 시청에 둘뿐이었다⁠. 과장이 소연을 가리켰다⁠.

“⁠여 주무관이 현장 협조 담당⁠. 귀신 말 제일 잘 알아들어⁠.⁠”

“⁠과장님은요⁠?⁠”

“⁠나는 밤에 잠을 자야 낮에 결재를 하지⁠.⁠”

*

자정⁠, 시청역 승강장에 팥 냄새가 났다⁠. 마른 콩 냄새에 먼지 냄새가 섞인 냄새였다⁠. 맑은밤퇴마 직원 둘이 승강장 끝에서 끝까지 허리를 굽히고 팥을 흘렸다⁠. 둘 다 스무 살 남짓한 아르바이트생이었고⁠, 등에 스피커를 메고 있었다⁠. 한 사람은 팥을 흘리면서 휴대전화로 시급 계산기를 두드렸다⁠.

“⁠사장님⁠, 이거 야간 수당 붙어요⁠?⁠”

“⁠붙지⁠. 우리는 법대로 한다⁠.⁠”

“⁠귀신들은 안 붙었다던데⁠.⁠”

“⁠그러니까 파업하지⁠.⁠”

팥 줄은 승강장 가장자리를 따라 이어지다가 계단 앞에서 둥글게 휘었다⁠. 지훈은 기둥 하나 앞에 서서 바닥에 팥으로 작은 원을 그렸다⁠. 지름이 두 걸음쯤 되는 원이었다⁠.

“⁠여기가 선전부장 자리라면서요⁠. 매일 밤 이 기둥 앞에서 나타난다고⁠.⁠”

“⁠누가 그래요⁠?⁠”

“⁠청원경찰분들이요⁠. 귀신들 얘기를 많이 해 주시더군요⁠. 밤새 서 있으면 할 얘기가 그것밖에 없대요⁠.⁠”

막차가 들어왔다가 나갔다⁠. 형광등이 징 울었다⁠.

칠백이 떠오르자마자 승강장이 술렁였다⁠. 귀신들이 팥 줄 앞에서 뜨거운 난로를 피하듯 몸을 젖혔다⁠. 계단으로 가려던 귀신들이 둥글게 휜 줄에 막혀 한데 엉겼다⁠. 기둥 앞⁠, 팥 원 한가운데에 태식이 확성기를 든 채 떠올랐다⁠. 태식은 사방을 둘러보고 팥 원의 테두리에 손을 뻗었다가 데인 것처럼 손을 털었다⁠.

“⁠아이고⁠, 뜨거⁠. 이게 뭐야⁠.⁠”

“⁠고객님⁠, 잠시만 계시면 됩니다⁠.⁠” 지훈이 말했다⁠.

태식이 확성기를 입에 댔다⁠. 갇힌 귀신의 목소리치고는 우렁찼다⁠.

“⁠자⁠, 동지 여러분⁠! 팥 원에 갇힌 디제이가 보내 드리는 긴급 신청곡⁠! 「⁠여기서 꺼내 주세요⁠」⁠!⁠”

“⁠그런 노래가 있소⁠?⁠” 귀석이 외쳤다⁠.

“⁠방금 만들었어요⁠, 위원장님⁠!⁠”

지훈이 손짓하자 아르바이트생 둘이 등의 스피커를 켰다⁠.

깨갱⁠, 깨갱⁠, 깨개갱⁠.

쇳소리가 승강장을 때렸다⁠. 꽹과리를 백 개쯤 한꺼번에 두드리는 소리였다⁠. 소연은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귀를 막아도 소리가 손바닥을 뚫고 들어왔다⁠. 쇳소리는 귀로만 들어오지 않고 이빨 뿌리까지 울렸다⁠. 귀신들은 소연보다 더 괴로워했다⁠. 쇳소리가 한 번 울릴 때마다 하늘색 몸들이 바람 맞은 연기처럼 굴 쪽으로 쏠렸다⁠. 피켓이 손에서 떨어져 날렸다⁠. 「⁠야근수당⁠」이 굴로 빨려 들어가고⁠, 「⁠쟁취하자⁠!⁠」가 짝을 잃고 승강장 바닥을 굴렀다⁠.

“⁠동지들⁠, 붙으시오⁠! 서로 붙으시오⁠!⁠”

귀석이 등의 방망이를 뽑아 들고 맨 앞에 버텼다⁠. 굵은 눈썹이 쇳소리마다 찡그려졌다⁠. 방망이는 쇳소리를 막지 못했다⁠. 귀석의 수염이 굴 쪽으로 휘날렸다⁠.

굴 입구에 주황 조끼가 보였다⁠. 엄마였다⁠. 엄마는 굴 입구에 등을 대고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밀려가는 귀신들이 엄마의 팔에 부딪혀 멈췄다⁠. 엄마의 빛이 쇳소리가 울릴 때마다 한 겹씩 옅어졌다⁠.

“⁠엄마⁠!⁠”

쇳소리 때문에 엄마는 소연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소연은 기둥 앞으로 걸어갔다⁠. 태식이 팥 원 안에서 확성기를 든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확성기가 쇳소리에 떨려 종이 끝이 너덜너덜해졌다⁠. 소연은 지훈을 보았다⁠. 지훈은 굴 입구를 보고 있었다⁠.

소연은 운동화 앞코로 팥 원의 테두리를 슬쩍 밀었다⁠. 팥알 몇 개가 굴러가며 원에 손가락 하나만 한 틈이 생겼다⁠. 태식이 고개를 들었다⁠. 소연은 앞코로 한 번 더 밀었다⁠. 틈이 손바닥만 해졌다⁠.

태식이 틈으로 빠져나가며 소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귀가 얼음에 닿은 것처럼 시렸다⁠.

“⁠주무관님⁠, 신청곡 하나 빚졌어요⁠.⁠”

*

쇳소리가 그쳤다⁠. 승강장에 귀신이 하나도 없었다⁠. 굴 저편에서 귀석의 목소리가 메아리로 돌아왔다⁠. 을지로입구로⁠, 을지로입구로⁠. 바닥에 피켓 몇 장과 팥 줄만 남았다⁠.

지훈이 기둥 앞으로 걸어왔다⁠. 팥 원을 내려다보았다⁠. 원의 한쪽이 손바닥만큼 비어 있었다⁠. 지훈은 쪼그려 앉아 팥알 몇 개를 주워 원을 다시 메웠다⁠. 그러고는 무릎을 털며 일어났다⁠.

“⁠주무관님⁠. 방금 발로 차신 거⁠, 업무 방해입니다⁠.⁠”

“⁠미끄러졌습니다⁠.⁠”

“⁠팥에 미끄러지셨어요⁠?⁠”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팥은 둥글어서 그럴 수 있죠⁠.⁠”

“⁠네⁠. 둥글어서요⁠.⁠”

“⁠계약서에 현장 협조 담당은 퇴마 작업에 협조한다고 돼 있습니다⁠. 다음에 또 미끄러지시면 시청에 보고합니다⁠. 보고는 귀신관리과장님께 갑니다⁠.⁠”

“⁠과장님은 주무세요⁠.⁠”

“⁠그럼 아침에 보시겠죠⁠.⁠”

*

새벽 두 시 반⁠, 소연은 택시를 타고 한 정거장을 갔다⁠. 을지로입구역 승강장은 시청역보다 좁았는데⁠, 귀신은 시청역보다 많았다⁠. 원래 을지로입구를 맡던 귀신 백 남짓에 밀려온 칠백이 한데 엉겨 천장까지 하늘색으로 찼다⁠. 형광등이 쉬지 않고 징징 울었다⁠. 귀신끼리 몸이 겹치는 자리마다 찬 기운이 고여 승강장 의자에 성에가 끼었다⁠.

“⁠여기는 우리 역이오⁠. 시청은 시청으로 가시오⁠.⁠”

“⁠팥이 깔려서 못 가오⁠.⁠”

“⁠그러니 우리가 왜 비켜 주어야 하오⁠? 우리는 조합원도 아니오⁠.⁠”

을지로입구 귀신들 맨 앞에 상투 튼 귀신 하나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태식이 너덜너덜한 확성기를 펴 들고 상투 귀신 앞으로 날아갔다⁠.

“⁠아이고⁠, 형님⁠. 그러니까 지금 가입하시라니까요⁠. 가입하시면 자리 다툼이 아니고 연대예요⁠. 연대하면 밥도 같이 받고요⁠.⁠”

“⁠밥이 나오오⁠?⁠”

“⁠나올 거예요⁠. 언젠가⁠.⁠”

“⁠언젠가는 오백 년 전부터 들었소⁠.⁠”

“⁠그래도 들어 두면 좋잖아요⁠. 가입서는 종이 한 장이에요⁠.⁠”

상투 귀신이 한참 태식을 노려보다가 종이를 받아 들었다⁠. 뒤에 서 있던 을지로입구 귀신들이 하나둘 손을 내밀었다⁠. 태식이 가입서를 나눠 주며 소연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칠백이 쫓겨 와서 칠백열이 되었다⁠.

귀석이 소연 앞으로 내려왔다⁠. 등에 다시 꽂은 방망이 끝이 아직 떨렸다⁠.

“⁠관의 현장 협조 담당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오⁠?⁠”

“⁠태식 부장님 괜찮으신지 보러 왔어요⁠.⁠”

“⁠들었소⁠. 팥 원을 발로 찼다고⁠.⁠” 귀석이 굵은 눈썹을 모았다⁠. “⁠고맙다는 말은 안 하겠소⁠. 아씨가 낮에 받는 월급이 그 팥 값에서 나오니⁠.⁠”

“⁠팥 값이랑 제 월급은 다른 예산인데요⁠.⁠”

“⁠같은 관이오⁠.⁠”

소연은 기둥 아래를 보았다⁠. 엄마가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빛이 옅어서 기둥의 타일 줄눈이 엄마의 얼굴을 가로질러 보였다⁠. 엄마는 눈을 감고 있다가⁠, 소연이 다가가자 눈을 반쯤 떴다⁠.

“⁠엄마⁠, 괜찮아⁠?⁠”

“⁠괜찮아⁠.⁠” 잡음이 말보다 컸다⁠. “⁠소연아⁠, 너 그거 하다 잘린다⁠.⁠”

“⁠팥 찬 거⁠?⁠”

“⁠응⁠. 공무원은 한 번 찍히면 오래 가⁠.⁠” 엄마가 다시 눈을 감았다⁠. “⁠시청역 가 봐⁠. 네 시쯤 4번 출구 계단 얼어⁠. 할머니가 여기 와 있잖아⁠.⁠”

새벽 네 시⁠, 시청역 4번 출구 계단에서 비명이 났다⁠. 소연이 뛰어 올라가니 대리기사 하나가 계단 중간에 주저앉아 발목을 감싸고 있었다⁠. 첫날 밤 난간에 매달렸던 대리기사는 아니었다⁠. 계단 꼭대기 할머니 귀신 자리는 비어 있었다⁠. 할머니 귀신도 을지로입구로 밀려갔다⁠.

소연이 119에 전화하는 동안 지훈이 뒤따라 올라왔다⁠. 지훈은 대리기사의 발목을 한 번 보고 계단 모서리를 손끝으로 쓸었다⁠. 얼음이 손끝에 묻어났다⁠.

“⁠보세요⁠. 귀신이 없어서 다친 게 아닙니다⁠. 계단이 얼어서 다친 겁니다⁠.⁠” 지훈이 아르바이트생을 불렀다⁠. “⁠염화칼슘 가져와⁠. 계단 전부⁠.⁠”

아르바이트생이 마대를 지고 올라와 계단마다 하얀 알갱이를 뿌렸다⁠. 얼음 녹는 소리가 바스락거렸다⁠. 소연은 지훈의 손을 보았다⁠. 거침없고 빨랐다⁠. 지훈은 귀신이 하던 일을 염화칼슘 한 자루로 하고 있었다⁠. 염화칼슘으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을 소연은 알았지만⁠, 지금 이 계단에서는 염화칼슘이 이겼다⁠.

구급차가 오고 대리기사가 실려 갔다⁠. 대리기사는 들것 위에서 휴대전화를 들어 다음 콜을 취소했다⁠.

“⁠할머니가 미끄럽다고 해 주셨으면 안 넘어졌을 텐데⁠.⁠”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염화칼슘 마대를 묶으며 소연을 돌아보았다⁠.

“⁠주무관님⁠, 하나만 여쭙죠⁠.⁠”

“⁠네⁠.⁠”

“⁠부위원장님이 어머님이시라면서요⁠.⁠”

소연의 손이 보온병 뚜껑 위에서 멈췄다⁠.

“⁠청원경찰분들이 그러시더군요⁠. 시장실에서 주무관님이 엄마라고 부르셨다고⁠.⁠” 지훈은 마대를 어깨에 메었다⁠. 팥알 하나가 마대 틈으로 굴러 떨어졌다⁠. “⁠저는 칠백을 상대로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비싸고 오래 걸려요⁠. 그런데 이런 일은 늘 한 사람이 모으거든요⁠. 주동자 하나만 정리하면 칠백이 흩어집니다⁠.⁠”

“⁠정리라는 게 뭔데요⁠.⁠”

“⁠어머님만 편히 보내 드리면 됩니다⁠.⁠” 지훈이 웃었다⁠. 회의실에서 보던 웃음과 같았다⁠. “⁠서울 밖으로 밀어내는 것보다 훨씬 깔끔하게요⁠. 생각해 보세요⁠. 어머님도 쉬셔야죠⁠.⁠”

지훈이 계단을 내려갔다⁠. 떨어진 팥알 하나가 염화칼슘 사이에서 붉게 남았다⁠. 소연은 팥알을 운동화 앞코로 밀었다⁠. 팥알이 계단 아래로 또르르 굴러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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