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09자)

동지 팥죽

귀신 노조 파업 · 기담오

동짓날 아침 아홉 시⁠, 시청 7층 소회의실 탁자 위에 지훈이 태블릿을 세웠다⁠. 화면에 막대그래프 대신 사진 한 장이 떠 있었다⁠. 병원 침대 난간에 매달린 이름표였다⁠. 이름은 손바닥으로 가려져 있었다⁠.

“⁠마포대교 택시 기사님입니다⁠. 어제 다녀왔습니다⁠.⁠” 지훈이 화면을 넘겼다⁠. 「⁠12월 18일 밤 전면 파업 이후 사흘 · 중상 1 · 경상 다수⁠」⁠. “⁠다리뼈가 세 군데 부러지셨습니다⁠. 기사님이 그러시더군요⁠. 마포대교 지날 때마다 목덜미가 시원해서 졸음이 깼는데⁠, 그날은 안 시원했다고요⁠.⁠”

회의실에는 시장과 비서실장과 과장이 앉아 있었다⁠. 소연은 과장 뒤 벽에 붙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직무 배제 중이라 회의에 들어올 수 없었는데⁠, 과장이 「⁠상자 나르는 사람⁠」이라며 데려왔다⁠. 1974년 상자가 소연의 무릎 위에 있었다⁠.

“⁠귀신이 손을 놓으면 사람이 다칩니다⁠. 이제 다들 아십니다⁠.⁠” 지훈이 시장을 보았다⁠. 영업 말투가 아니었다⁠. “⁠그걸 무기로 쓰는 쪽과는 거래를 못 합니다⁠. 오늘 밥상을 차려 주시면⁠, 내년 겨울에 또 손을 놓겠다고 할 겁니다⁠. 그때마다 누군가 다리뼈가 부러집니다⁠. 저는 서울의 밤에 사람 목숨이 협상 카드로 오르는 게 싫습니다⁠. 그래서 팥을 뿌립니다⁠.⁠”

소연이 상자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과장이 소연의 소매를 잡았다가 놓았다⁠.

“⁠그날 밤 휴게실에서 쇳소리를 트신 건 대표님이에요⁠.⁠”

“⁠시청 지시였습니다⁠.⁠”

“⁠지시가 바뀐 걸 받아서 단추를 누르신 건 대표님 손이에요⁠. 그 단추에 귀신 백이 서울 밖으로 밀려났고⁠, 노조 위원장이 화가 나서 전면 파업을 명했고⁠, 마포대교에서 기사님이 다치셨어요⁠.⁠” 소연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말은 끊기지 않았다⁠. “⁠목숨을 협상 카드로 쓰는 게 싫으시면⁠, 대표님도 쓰지 마세요⁠. 오백 년 밤을 지킨 귀신들 목숨도 목숨이에요⁠. 한 번 죽은 목숨이라도요⁠.⁠”

지훈이 소연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주무관님은 휴게실을 알려 주셨죠⁠.⁠”

“⁠네⁠. 제가 알려 드렸어요⁠.⁠”

“⁠그럼 우리 둘 다 손이 더럽네요⁠.⁠” 지훈이 태블릿을 껐다⁠. “⁠손 더러운 사람끼리는 말이 빨리 통합니다⁠.⁠”

시장이 두 손을 탁자 위에 모았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팥죽 계약은 서명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밤 교섭이 끝날 때까지는⁠.⁠” 시장이 지훈을 보았다⁠. “⁠대신 맹 대표님도 오늘 막차에 타십시오⁠. 계약 당사자시니까⁠.⁠”

“⁠팥죽 차 열두 대는 어떻게 할까요⁠? 위약금이 나옵니다⁠.⁠”

“⁠팥죽 차는 원래 무슨 일을 하는 차입니까⁠?⁠”

“⁠동지에 절이랑 복지관에 팥죽 돌리는 차입니다⁠.⁠”

“⁠그럼 원래 일을 시키십시오⁠.⁠” 시장이 일어났다⁠. “⁠오늘 서울에 팥죽 먹을 사람은 많습니다⁠.⁠”

*

오후 두 시⁠, 소연은 여의도의 한 병원 6층 병실 앞에서 귤 한 봉지를 들고 망설였다⁠. 지훈이 회의실에서 가린 이름표의 병실이었다⁠. 과장이 병원 이름을 알아다 주었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어오라고 했다⁠.

택시 기사는 쉰 줄의 남자였다⁠. 왼쪽 다리가 무릎부터 발목까지 하얀 석고에 싸여 침대 위 고리에 매달려 있었다⁠. 기사는 소연의 공무원증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시청에서 또 오셨네⁠. 아침엔 퇴마 사장님이 오시더니⁠.⁠”

“⁠여소연이라고 합니다⁠. 귀신관리과예요⁠. 지금은 배제됐지만요⁠.⁠”

“⁠배제가 뭐요⁠?⁠”

“⁠잘린 거랑 비슷한데 월급은 나와요⁠.⁠”

기사가 껄껄 웃었다⁠. 웃다가 다리가 울렸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소연은 귤 봉지를 침대 옆 탁자에 놓았다⁠.

“⁠죄송합니다⁠. 그날 밤 일은 시청 때문이기도 하고⁠, 제 탓이기도 해요⁠.⁠”

“⁠아가씨 탓은 무슨⁠. 내가 졸았지⁠.⁠” 기사가 천장을 보았다⁠. “⁠마포대교 그 총각 귀신 있잖아요⁠. 이십 년을 넘게 내 목덜미를 불어 줬어요⁠. 나 혼자 웃겼지⁠. 새벽마다 다리만 건너면 목이 시원하니까⁠. 그날은 안 시원하더라고⁠. 아⁠, 오늘 파업이구나 했는데⁠, 그 생각 하다가 눈이 감겼어⁠.⁠”

“⁠총각 귀신 탓 안 하세요⁠?⁠”

“⁠이십 년 공짜로 깨워 준 사람을 무슨 탓을 해⁠. 하루 쉰 거 가지고⁠.⁠” 기사가 귤 하나를 집어 껍질을 깠다⁠. “⁠그 총각한테 전해 줘요⁠. 그동안 고마웠다고⁠. 그리고 밥 꼭 받아 내라고⁠. 받아 내면 나 퇴원하고 순대 사 간다고⁠.⁠”

“⁠순대는 귀신분들이 드시면 지우개 맛이 나거든요⁠.⁠”

“⁠그래도 사 가⁠. 지우개도 내가 사 준 거면 맛있지⁠.⁠”

*

동짓날 해는 다섯 시를 조금 넘겨 졌다⁠. 마포대교 아래 한강 둔치는 해가 지자마자 강바람이 칼처럼 들어왔다⁠. 소연은 목도리를 코까지 올리고 둔치 가장자리 돌계단으로 내려갔다⁠. 돌계단 아래로 검은 강물이 철썩였다⁠.

뒤에 단톡방 사람들이 백 명 넘게 서 있었다⁠. 다들 장갑을 끼고 손에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들었다⁠. 오후 내내 둔치와 다리 밑과 강가 돌 틈에서 주운 라면 봉지였다⁠. 봉투가 서른 개를 넘었다⁠. 김밥집 할머니가 봉투 하나를 열어 보이며 혀를 찼다⁠.

“⁠세상에⁠, 이걸 다 강에 버려⁠. 용왕님 화나실 만하네⁠.⁠”

“⁠할머니⁠, 용왕님 진짜 오세요⁠?⁠” 회사원이 물었다⁠.

“⁠우리 방 주무관님이 부르면 와⁠. 신령님은 해 지면 나오신대⁠.⁠”

소연은 돌계단 끝에 쪼그려 앉아 강물에 대고 말했다⁠.

“⁠한강 용왕님⁠. 라면 봉지 가져왔습니다⁠. 용왕님 몫입니다⁠.⁠”

한참 아무 일도 없었다⁠. 강바람만 불었다⁠. 뒤에서 누가 킥 웃었다⁠. 대리기사가 깁스한 다리로 몸을 지탱하며 휴대전화 손전등을 강물에 비췄다⁠.

강물이 부풀었다⁠. 물비린내가 확 끼쳤다⁠. 돌계단 아래 물이 둥글게 솟더니⁠, 젖은 소매가 먼저 올라오고 뱀처럼 긴 수염이 따라 올라왔다⁠. 용왕이 돌계단 맨 아래 칸에 걸터앉아 물을 뚝뚝 흘렸다⁠. 시민들이 한꺼번에 숨을 들이켰다⁠. 용왕은 소연이 불러서 시민들 눈에도 보였다⁠. 편의점 알바가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신령님은 찍으면 벌 받을 것 같다며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택시 기사 단골은 모자를 벗어 가슴에 댔다⁠.

“⁠몇 개요⁠?⁠”

“⁠세어 보지는 못했어요⁠. 봉투로 서른 개 넘어요⁠.⁠”

용왕이 봉투 하나를 열고 젖은 손을 넣었다⁠. 라면 봉지를 한 움큼 꺼내 들여다보았다⁠. 수염 끝이 부르르 떨렸다⁠.

“⁠이건 내가 이십 년 전에 본 봉지요⁠. 디자인이 옛날 거요⁠.⁠”

“⁠강 밑바닥 돌 틈에서 나왔어요⁠.⁠”

“⁠이십 년⁠.⁠” 용왕이 봉지를 봉투에 도로 넣었다⁠. 목소리가 물소리처럼 낮아졌다⁠. “⁠좋소⁠. 약조대로 하겠소⁠. 서울 밖으로 밀려난 귀신들⁠, 강물을 거슬러 태워 오겠소⁠. 고양은 강을 타면 금방이고⁠, 성남은 탄천을⁠, 의정부는 중랑천을 타면 되오⁠.⁠”

“⁠자정까지 오실 수 있어요⁠?⁠”

“⁠자정까지는 못 오오⁠. 백이오⁠. 등에 다 태우려면 두세 번은 오가야 하오⁠.⁠” 용왕이 몸을 강물 속으로 반쯤 담갔다⁠. “⁠막차가 한 바퀴 도는 사이에는 오겠소⁠. 디제이부터 태워 오리다⁠. 그 친구⁠, 고양 호수공원에서 오리들한테 신청곡 받고 있다 하오⁠.⁠”

용왕이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 물이 둥글게 퍼지다 잦아들었다⁠. 시민들이 한참 강물을 내려다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를 쳤다⁠. 산 사람 박수라 소리가 났다⁠. 강바람이 박수 소리를 다리 위까지 실어 갔다⁠.

*

자정 이 분⁠, 시청역 2호선 승강장⁠. 내선순환 막차가 들어왔다⁠.

맨 앞 칸 문 앞에 사람들이 모였다⁠. 시장은 회색 패딩에 목도리를 둘둘 감았고⁠, 비서실장은 서류철을 가슴에 안았다⁠. 과장은 1974년 상자를 두 팔로 안고 있었다⁠. 무릎이 안 좋다더니 오늘은 혼자 들었다⁠. 지훈은 회색 정장 위에 패딩을 걸치고⁠, 손에 은색 보온 통 하나를 들고 있었다⁠. 통 옆구리에 매직으로 「⁠팥죽⁠」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건 왜 가져오세요⁠?⁠” 소연이 물었다⁠.

“⁠만일을 위해서요⁠.⁠” 지훈이 웃었다⁠. “⁠그리고 저녁을 못 먹어서요⁠.⁠”

막차 문이 열렸다⁠. 다섯 사람이 탔다⁠. 문이 닫혔다⁠. 형광등이 징 울었다⁠.

객실이 하늘색으로 찼다⁠. 사백열이 아니었다⁠. 출구 밖 밥상 덕에 빛이 짙어진 귀신들이 칸마다 빼곡했다⁠. 갓 쓴 귀신⁠, 지게 진 귀신⁠, 안전모 쓴 귀신⁠, 배달 가방 멘 귀신⁠. 다들 붉은 머리띠를 맸고⁠, 다들 「⁠야근수당⁠」과 「⁠쟁취하자⁠!⁠」를 짝지어 들었다⁠.

객실 한가운데 귀석이 떠 있었다⁠. 남색 순라군 옷에 붉은 허리띠⁠, 검은 전립⁠, 이마의 붉은 머리띠⁠, 등의 방망이⁠. 굵은 눈썹 아래 눈이 시장을 보았다⁠. 귀석 곁에 엄마가 노약자석 손잡이 옆에 떠 있었다⁠. 고무장갑과 조끼와 얼굴까지 보였다⁠. 빛은 옅었지만 엄마는 서 있었다⁠.

천장이 삐걱거렸다⁠. 목멱대왕이 객실 천장에 정수리를 대고 허리를 반쯤 굽힌 채 서 있었다⁠. 솔 냄새가 객실 가득 퍼졌다⁠. 대왕 옆 좌석에 인왕산 할머니가 앉았고⁠, 늙은 호랑이가 통로에 엎드려 코를 골았다⁠. 귀신들이 호랑이를 피해 둥둥 떠서 지나갔다⁠. 마포 할매는 노약자석 끝에 앉아 수첩을 펴 들고 대왕을 노려보았다⁠. 회비 수첩이었다⁠.

천장 스피커가 지지직 울었다⁠. 단톡방의 기관사였다⁠.

“⁠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오늘 이 열차는 서울시장님⁠, 귀신 승객 사백여 분⁠, 남산과 인왕산 신령님⁠, 그리고 팥죽 한 통을 모시고 내선순환 한 바퀴를 돕니다⁠. 첫차 시각 전까지 차량기지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팥죽 통 뚜껑은 꼭 닫아 주십시오⁠. 호랑이 꼬리 밟지 마십시오⁠. 이상입니다⁠.⁠”

지훈이 보온 통 뚜껑을 한 번 더 비틀어 잠갔다⁠. 귀신 몇이 지훈의 손을 지켜보다가 안심한 얼굴로 숨을 내쉬었다⁠.

비서실장이 빈 좌석에 앉으려다 펄쩍 뛰어 일어났다⁠. 빈 좌석이 아니었다⁠. 갓 쓴 귀신이 먼저 앉아 있었다⁠. 비서실장의 엉덩이가 귀신을 지나가 좌석에 닿기 직전이었다⁠.

“⁠실례했습니다⁠!⁠”

“⁠괜찮소⁠. 시원하셨소⁠?⁠”

“⁠네⁠. 아주⁠.⁠”

비서실장은 서류철을 안고 손잡이를 잡았다⁠. 시장이 엄마 앞으로 가서 고개를 숙였다⁠. 엄마도 고무장갑 낀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민 여사님⁠. 영수증 잘 읽었습니다⁠.⁠”

“⁠영수증에 안 나온 것도 있어요⁠, 시장님⁠.⁠”

“⁠무엇이 안 나왔습니까⁠?⁠”

“⁠단무지 두 줄이요⁠. 그건 김밥집 언니가 서비스로 넣어 준 거라⁠.⁠”

시장이 웃음을 참느라 목도리에 입을 묻었다⁠. 과장이 상자를 고쳐 안으며 엄마에게 꾸벅 인사했다⁠. 엄마가 과장의 이마를 보고 손가락으로 제 이마를 톡톡 가리켰다⁠. 과장이 황급히 이마에서 돋보기를 내렸다⁠. 이마에 빨간 코받침 자국이 두 개 나란히 남아 있었다⁠.

열차가 출발했다⁠. 바퀴가 레일을 긁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목멱대왕이 솔잎을 한 움큼 입에 넣고 씹었다⁠. 송진 냄새가 훅 끼쳤다⁠.

“⁠시작해라⁠.⁠”

시장이 손잡이를 놓고 객실 한가운데로 나왔다⁠. 귀석과 한 걸음 거리였다⁠. 소연은 둘 사이 옆⁠, 노약자석 앞에 자리를 잡았다⁠. 엄마가 소연 바로 뒤에 있었다⁠. 등이 서늘했다⁠.

시장이 목도리를 한 바퀴 풀었다⁠. 귀석을 똑바로 보았다⁠.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오늘도 법에 없는 것은 못 합니다⁠.⁠”

객실이 웅성거렸다⁠. 귀신 몇이 피켓을 높이 들었다⁠. 귀석이 등의 방망이에 손을 얹었다⁠. 방망이를 뽑지는 않았다⁠. 열차가 을지로입구를 지나며 크게 흔들렸다⁠. 소연의 손에 쥔 보온병 속에서 보리차가 찰랑였다⁠.

1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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