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05자)

인정

귀신 노조 파업 · 기담오

“⁠겨울이었소⁠. 지금처럼⁠.⁠”

귀석은 숭례문 앞 돌바닥 위에 떠서 종로를 보았다⁠. 방망이는 돌바닥 한 뼘 위에 세워져 있었다⁠. 소연은 돌계단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국밥은 계단 위에서 식어 가고 있었다⁠.

“⁠인정 종이 치면 도성의 문이 닫히고 길이 닫혔소⁠. 통행을 막는 종이오⁠. 종이 친 뒤에 길에 나온 자는 붙잡아 순라 막사에 두었다가⁠, 새벽에 문 여는 종이 치면 놓아주었소⁠. 그게 법이었소⁠. 나는 법을 지키는 자였고⁠.⁠”

귀석이 성문 옆 어둠을 가리켰다⁠. 지금은 차도가 지나가는 자리였다⁠.

“⁠여인 하나가 저기서 달려 나왔소⁠. 맨발이었소⁠. 남편이 열이 끓어 숨을 못 쉰다고⁠, 의원을 부르러 간다고 하였소⁠. 나는 붙잡았소⁠. 인정이 지났으니 못 간다고⁠. 새벽 종이 치면 가라고⁠.⁠” 귀석의 수염이 흔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없었다⁠. “⁠여인은 막사 바닥에 엎드려 빌었소⁠. 나는 법대로 했소⁠. 법대로 하면 내 잘못이 아니라고 배웠소⁠.⁠”

“⁠새벽에는요⁠.⁠”

“⁠새벽 종이 치자 여인이 달려 나갔소⁠. 의원을 데리고 집에 갔을 때 남편은 이미 숨이 없었다고⁠, 나중에 들었소⁠.⁠” 귀석이 방망이를 들어 다시 등에 꽂았다⁠. “⁠나는 그 뒤로 서른 해를 더 순라를 돌다가 죽었소⁠. 죽고 나서도 돌았소⁠. 밤에 사람이 법 때문에 죽지 않게⁠. 졸음이든 얼음이든 통금이든⁠. 오백 년⁠.⁠”

소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성문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 하나가 조명을 받아 누렇게 빛났다⁠.

“⁠관이 법 때문에 밥을 못 준다 하였을 때 나는 그 여인을 생각했소⁠. 통금이라 못 보낸다⁠. 법에 없어서 못 준다⁠. 같은 말이오⁠.⁠” 귀석이 소연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어젯밤 마포대교에서 택시를 몰던 이가 크게 다쳤소⁠. 우리 조합원들이 손을 놓아서⁠. 내가 손을 놓으라 명해서⁠.⁠”

귀석의 굵은 눈썹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도 법대로 했소⁠. 노조의 법대로⁠. 위원장의 명대로⁠. 오백 년 전과 똑같이⁠.⁠”

“⁠위원장님⁠.⁠”

“⁠그러니 아씨가 부르는 그 자리에 가겠소⁠.⁠” 귀석이 말했다⁠. “⁠다만 하나⁠. 관이 그 자리에서 한 줄이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나는 그 자리에서 대왕께 가겠소⁠. 칠백이든 사백이든 다 데리고⁠.⁠”

“⁠법은 사흘 만에 못 움직여요⁠.⁠”

“⁠그럼 무엇이 움직이오⁠?⁠”

소연은 계단 위의 식은 국밥을 보았다⁠. 이름을 불렀지만 귀석이 먹지 않은 국밥이었다⁠. 김만 빠지지 않고 식어 있었다⁠.

“⁠시장님이요⁠. 법은 못 움직여도⁠, 시장님은 움직일 수 있어요⁠. 시장님도 사람이니까요⁠.⁠”

귀석이 코웃음을 쳤다⁠. 웃음 끝이 조금 무너졌다⁠.

“⁠아씨는 오백 년 된 순라군한테 관의 우두머리가 사람이라고 하오⁠?⁠”

*

“⁠무릎이 안 좋아서⁠.⁠”

아침 아홉 시 반⁠, 과장이 1974년 상자 앞에서 허리를 펴며 말했다⁠. 상자에는 영수증 다발 쉰 개와 업무 지침 1호와 감사 지적서와 예산 조정 내역이 들어 있었다⁠. 상자 하나가 쌀 한 포대만큼 무거웠다⁠.

“⁠저 직무 배제인데요⁠.⁠”

“⁠배제된 건 교섭이고 상자 나르기는 아니야⁠.⁠” 과장이 상자 한쪽 손잡이를 잡았다⁠. “⁠반반 들자⁠. 감사관도 반반 받으면 되고⁠.⁠”

둘은 상자를 마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하 3층에서 시장실 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엘리베이터에 탄 직원들이 상자를 보고 한 걸음씩 물러났다⁠. 먼지가 상자 모서리에서 조금씩 떨어졌다⁠. 과장이 재채기를 세 번 했다⁠. 엘리베이터 구석의 신입 직원 하나가 상자 옆구리의 1974를 보고 중얼거렸다⁠. “⁠저희 아버지 태어나신 해네요⁠.⁠” 과장이 코를 훌쩍이며 대답했다⁠. “⁠아버님께 안부 전해⁠. 이 상자랑 동갑이시라고⁠.⁠”

비서실장이 시장실 문 앞에서 둘을 막았다⁠.

“⁠약속 없으시잖아요⁠.⁠”

“⁠쉰 해 전에 잡힌 약속입니다⁠.⁠” 과장이 말했다⁠. “⁠지침 1호에 있어요⁠.⁠”

비서실장은 상자를 내려다보다가 문을 열어 주었다⁠.

낮의 시장실은 밝았다⁠. 창밖으로 서울광장 스케이트장이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시장 책상 위의 나무 명패는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책상 서랍 위에 접힌 종이 하나가 문진에 눌려 있었다⁠. 소연은 종이 귀퉁이의 붓글씨를 알아보았다⁠. 「⁠위원장 장귀석⁠」⁠.

과장은 상자를 회의 탁자에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업무 지침 1호를 꺼내 시장 앞에 놓았다⁠. 그다음 영수증 다발을 해마다 하나씩 꺼내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1974년부터 2024년까지⁠. 탁자가 영수증 다발로 덮였다⁠. 마지막으로 감사 지적서와 예산 조정 내역을 놓았다⁠. 내역 맨 아래 「⁠예산과 주무관 탁병수⁠」 위에 과장이 손가락을 얹었다⁠.

“⁠제가 잘랐습니다⁠, 시장님⁠. 그 줄 바로 밑이 시청역 야간 미화원 두 명을 한 명으로 줄인 줄입니다⁠. 같은 날 같은 표로 잘랐습니다⁠. 그해 겨울에 시청역 미화원 한 분이 혼자 계단 물청소를 하다가 쓰러지셨습니다⁠.⁠”

시장이 과장을 보았다⁠. 소연을 보았다⁠. 소연은 시장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분 어머니십니다⁠.⁠” 과장이 말했다⁠. “⁠노조 부위원장이시고요⁠.⁠”

시장은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015년 다발을 집어 고무줄을 풀었다⁠. 「⁠시청역 · 김밥 두 줄 · 민정숙⁠」⁠. 시장은 영수증을 한 장씩 넘겼다⁠. 「⁠오늘 추워서 한 줄 더⁠」에서 손이 멈췄다⁠.

“⁠쉰 해 동안 법 없이 썼군요⁠.⁠”

“⁠네⁠.⁠”

“⁠그러면 제가 지금 쓰면 안 되는 까닭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시장이 영수증을 내려놓았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쉰 해 동안 아무도 안 들여다본 돈이 이렇게 끝났습니다⁠. 법 없는 돈은 시작할 때는 착하게 시작하고⁠, 끝날 때는 누군가를 다치게 하고 끝납니다⁠. 과장님도 다치셨고⁠, 이분 어머니도 다치셨고요⁠.⁠”

“⁠그럼 법 있는 데서 하시죠⁠.⁠” 과장이 말했다⁠.

시장이 고개를 들었다⁠.

“⁠역 공간 사용 허가는 법에 있습니다⁠. 출구 밖 인도 점용 허가도 법에 있습니다⁠. 시민 자원봉사 활동 지원도 법에 있습니다⁠. 시는 밥을 안 삽니다⁠. 한 그릇도⁠. 시민이 차리고⁠, 시는 자리를 내줍니다⁠. 역 안에 밥상 놓을 자리⁠, 전기⁠, 청소⁠. 지금 출구 밖 인도에서 영하 9도에 귤 까는 시민이 천 명입니다⁠.⁠”

“⁠귀신 밥상에 자리 내주는 것도 감사 나옵니다⁠.⁠”

“⁠제가 받겠습니다⁠.⁠” 과장이 돋보기를 이마에서 내려 손에 쥐었다⁠. “⁠이미 받기로 했습니다⁠. 어제 감사관실에 자청했습니다⁠. 쉰 해 치 감사를 저부터 받겠다고요⁠. 정년 이 년 남았는데⁠, 남은 이 년 동안 감사 받는 걸로 하죠⁠.⁠”

비서실장이 문간에서 숨을 들이켰다⁠. 시장이 과장을 오래 보았다⁠.

“⁠과장님⁠, 왜 이러십니까⁠?⁠”

“⁠저는 육 년 전에 잘랐습니다⁠. 잘린 다음을 아무도 안 정했다고⁠, 민 여사님이 그러셨습니다⁠. 이번엔 제가 다음을 정하는 자리에 서 있고 싶습니다⁠.⁠” 과장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렸다⁠. “⁠서 있다가 잘리더라도요⁠.⁠”

시장은 영수증 다발 하나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덮은 채로 한참 있었다⁠.

“⁠결정은 지금 못 합니다⁠.⁠” 시장이 말했다⁠. “⁠다만⁠, 그 노조 위원장을 다시 만나야겠습니다⁠. 이번엔 제가 먼저 청해서⁠.⁠”

*

오후 네 시⁠, 비서실장이 귀신관리과 문을 두드렸다⁠. 귀신관리과 문을 비서실장이 두드린 것은 두 번째였다⁠. 비서실장은 종이 한 장을 과장에게 건넸다⁠.

“⁠맑은밤퇴마에서 계약 연장 요청이 왔습니다⁠. 동짓날 하룻밤⁠.⁠”

과장이 종이를 읽고 소연에게 넘겼다⁠. 「⁠동지 특별 작업 · 2호선 전 역사 팥죽 분사⁠」⁠. 아래에 설명이 붙어 있었다⁠. 역마다 팥죽을 큰 솥에 끓이고⁠, 솥에서 오르는 김을 송풍기로 역사 전체에 퍼뜨린다⁠. 동짓날 팥죽 김은 팥 줄보다 세고⁠, 출구 밖까지 번진다⁠. 계약 범위를 출구 밖 이십 미터까지 넓혀 달라는 요청도 함께 적혀 있었다⁠.

“⁠출구 밖까지요⁠.⁠” 소연이 말했다⁠. “⁠밥상이 다 출구 밖에 있는데⁠.⁠”

“⁠그러니까 출구 밖까지겠지⁠.⁠” 과장이 말했다⁠.

“⁠시장님은 아직 서명 안 하셨습니다⁠.⁠” 비서실장이 덧붙였다⁠. “⁠맹 대표가 팥죽 차 열두 대를 벌써 빌려 놨답니다⁠. 서명 안 하면 위약금이 나온다고요⁠.⁠”

“⁠팥죽 차가 뭐예요⁠?⁠”

“⁠동지에 절이랑 복지관에 팥죽 돌리는 차요⁠. 솥 실은 트럭⁠.⁠” 비서실장이 한숨을 쉬었다⁠. “⁠맹 대표는 일을 미리 해요⁠. 그게 무서워요⁠.⁠”

*

자정⁠, 시청역 2번 출구 앞 밥상 가운데에 소연은 김밥 한 줄을 따로 놓았다⁠. 은박지에 볼펜으로 「⁠민정숙⁠」라고 썼다⁠.

“⁠민정숙 부위원장님 몫입니다⁠.⁠”

출구 계단 밑에서 분홍 고무장갑이 먼저 올라왔다⁠. 어젯밤 원룸에서 먹은 김밥과 믹스커피 덕에⁠, 고무장갑 위로 주황 조끼와 어깨까지는 보였다⁠. 얼굴은 아직 반쯤 흐렸다⁠. 엄마가 김밥 위로 고개를 숙이자 김이 실처럼 풀려 들어갔고⁠, 엄마의 눈가가 마저 생겼다⁠.

밥상 끝에서 귤을 까던 미화원 여사가 귤을 떨어뜨렸다⁠.

“⁠언니⁠?⁠”

“⁠어머⁠, 너 아직도 밀대 거꾸로 잡니⁠?⁠”

“⁠언니⁠!⁠” 미화원 여사가 엄마에게 달려들었다가 엄마의 몸을 지나 반대편으로 빠져나갔다⁠. 미화원 여사가 제 팔뚝을 문지르며 엄마를 돌아보았다⁠. “⁠아이고 차가워⁠. 언니⁠, 몸이 왜 이렇게 차가워⁠.⁠”

“⁠죽었으니까 차갑지⁠.⁠”

“⁠그건 아는데⁠.⁠” 미화원 여사가 웃다가 울다가 다시 웃었다⁠. “⁠언니 계단 물청소 혼자 하지 말라니까⁠.⁠”

“⁠너도 지금 혼자 하잖아⁠.⁠”

“⁠나는 밀대 거꾸로 잡아서 천천히 해⁠.⁠”

시민들이 둘을 보다가 다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웃음 사이로 소연을 보았다⁠. 목소리에 잡음이 아직 많았지만 어제보다 덜했다⁠.

“⁠동짓날 막차에서 판 벌인다며⁠. 교섭 담당 잘린 사람이 무슨 수로 다 부르냐⁠.⁠”

“⁠엄마가 시청역에서 십 년 쓸면 다 안다며⁠.⁠”

“⁠알지⁠. 하나만 알려 줄게⁠.⁠” 엄마가 고무장갑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상대가 법 얘기 하면 사람 얘기를 해⁠. 사람 얘기 하면 법 얘기를 하고⁠. 둘이 같은 얘기 하는 순간이 오면⁠, 그때 도장 찍는 거야⁠.⁠”

“⁠그거 어디서 배웠어⁠?⁠”

“⁠용역 회사 바뀔 때마다 계약서 읽다가⁠.⁠”

소연이 귤을 까는데 정수리에 딱 소리가 났다⁠. 솔방울이었다⁠. 밥상 앞의 시민들이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별 몇 개와 시청 건물 꼭대기의 붉은 항공등뿐이었다⁠.

“⁠어머⁠, 솔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져요⁠?⁠” 회사원이 물었다⁠.

“⁠남산에서 오는 거예요⁠.⁠” 소연은 정수리를 문질렀다⁠. “⁠신령님 우편이요⁠.⁠”

“⁠신령님 우편 맞으면 아파요⁠?⁠”

“⁠귀신도 혹 생겨요⁠.⁠”

솔방울 비늘 사이에 종이가 꽂혀 있었다⁠. 먹이 덜 말라 손끝에 묻었다⁠.

「⁠팥 장수가 동짓날 서울을 팥죽으로 덮겠다 한다⁠. 우리 길도 덮인다⁠. 참을 만큼 참았다⁠. 동짓날 막차에서 내가 판을 벌인다⁠. 귀신도 관도 팥 장수도 다 부르라⁠. 목멱⁠」

종이 아래 귀퉁이에 작은 글씨가 한 줄 더 있었다⁠. 「⁠마포 할매가 회비 내라고 귀찮게 한다⁠. 이것도 그날 정리한다⁠」⁠.

소연은 종이를 사진으로 찍어 과장에게 보냈다⁠. 과장이 비서실장에게⁠, 비서실장이 시장에게 보냈다⁠. 답은 한 시간 뒤에 거꾸로 돌아왔다⁠. 시장에게서 비서실장에게⁠, 비서실장에게서 과장에게⁠, 과장에게서 소연에게⁠. 과장은 시장의 문자를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넘겼다⁠.

「⁠그 자리에 가겠습니다⁠. 막차는 몇 시에 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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