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617자)

첫 임금

귀신 노조 파업 · 기담오

“⁠그래서 법에 있는 것만 가져왔습니다⁠.⁠”

시장이 비서실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비서실장이 서류철을 건넸다⁠. 시장은 서류철을 펴지 않고 손에 쥔 채 말했다⁠. 열차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지나며 덜컹거렸다⁠.

“⁠서울시는 귀신 밥값을 한 푼도 내지 않습니다⁠. 한 그릇도 안 삽니다⁠.⁠”

객실의 피켓들이 조금 내려갔다⁠.

“⁠대신 역마다 승강장 끝 한 자리를 시민 밥상 자리로 내드립니다⁠. 공유 재산 사용 허가입니다⁠. 법에 있습니다⁠. 밥상 자리의 전기와 청소는 역 시설 관리로 합니다⁠. 그것도 법에 있습니다⁠. 밥상 차리는 시민들은 자원봉사로 등록해서 다치면 보험이 됩니다⁠. 법에 있습니다⁠.⁠” 시장이 엄마를 보았다⁠. “⁠그리고 역마다 야간 미화원 휴게실을 다시 짓습니다⁠. 창문 있는 방으로⁠. 그건 산 사람 법에 있습니다⁠. 진작 했어야 했는데 안 했습니다⁠.⁠”

엄마가 고무장갑 낀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소연은 엄마를 돌아보지 않았다⁠. 등이 서늘했다⁠. 엄마가 바로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퇴마 계약은요⁠?⁠” 소연이 물었다⁠.

“⁠오늘로 해지합니다⁠.⁠” 시장이 지훈을 보았다⁠. “⁠위약금은 시가 냅니다⁠. 계약서에 있습니다⁠.⁠”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굵은 눈썹 아래 눈이 시장의 손에 쥔 서류철에 머물렀다⁠.

“⁠밥은 시민이 주고⁠, 자리는 관이 주고⁠.⁠” 귀석이 천천히 말했다⁠. “⁠관은 끝까지 밥을 안 주는구려⁠.⁠”

“⁠네⁠. 안 줍니다⁠.⁠” 시장이 말했다⁠. “⁠제가 주면 다음 시장이 끊을 수 있습니다⁠. 시민이 주면 시장이 못 끊습니다⁠.⁠”

객실이 조용해졌다⁠. 엄마가 소연의 귀 뒤에서 아주 작게 말했다⁠. 잡음 섞인 목소리가 귓바퀴를 차갑게 스쳤다⁠.

“⁠봐⁠. 지금 시장님이 사람 얘기 했어⁠. 위원장님이 법 얘기 하면 돼⁠.⁠”

*

“⁠그럼 밀린 야근 수당은 어찌 되오⁠.⁠” 귀석이 말했다⁠. “⁠오백 년이오⁠.⁠”

“⁠그건 법에도 없고⁠, 시민도 못 내고⁠, 저도 못 냅니다⁠.⁠” 시장이 서류철을 내렸다⁠. “⁠오백 년 치를 드리면 서울시 예산이 오백 년 치 모자랍니다⁠.⁠”

귀신들이 웅성거렸다⁠. 지훈이 손잡이를 놓고 앞으로 나왔다⁠.

“⁠하나 더 있습니다⁠.⁠” 지훈이 귀석을 보았다⁠. “⁠저는 오늘 일을 잃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하나만 받아야겠습니다⁠. 다시는 사람 목숨 걸린 일로 파업하지 않겠다는 약속⁠. 그게 없으면 오늘 밥상은 내년 겨울의 인질극 자금입니다⁠. 그 약속 없이 제가 팥 자루를 내려놓을 수는 없습니다⁠.⁠”

“⁠팥 장수가 귀신한테 약조를 받겠다는 것이오⁠?⁠”

“⁠마포대교 기사님 대신 받는 겁니다⁠.⁠” 지훈의 목소리가 낮았다⁠. “⁠기사님이 그러셨어요⁠. 그 총각 귀신 탓은 안 한다고⁠. 저는 그분이 탓 안 하는 게 더 싫었습니다⁠.⁠”

귀석이 지훈을 오래 보았다⁠. 그러고는 등의 방망이를 뽑았다⁠. 객실의 귀신들이 숨을 죽였다⁠. 귀석은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고 두 손으로 가로로 들어 가슴 앞에 받쳤다⁠. 순라군이 교대할 때 방망이를 넘겨주는 자세였다⁠.

“⁠오백 년 전⁠, 숭례문 앞에서 나는 법을 골랐소⁠. 인정이 지났으니 못 간다고⁠.⁠” 귀석의 목소리가 객실 바닥에 낮게 깔렸다⁠. “⁠사흘 전 나는 또 법을 골랐소⁠. 노조의 법을⁠. 위원장의 명을⁠. 그리고 다리 위에서 사람이 다쳤소⁠.⁠”

귀석이 시장을 보았다⁠. 지훈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소연을 보았다⁠.

“⁠서울귀신노동조합은 오늘부터 사람 목숨이 걸린 일로는 다시 파업하지 않소⁠. 졸음⁠, 얼음⁠, 다리 위⁠.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깨우오⁠. 그리고 오백 년 소급 수당은 내려놓겠소⁠. 내 몫부터⁠.⁠”

객실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졌다⁠.

“⁠위원장님⁠! 오백 년인데⁠!⁠”

“⁠오백 년이니 내려놓는 것이오⁠. 오백 년 치를 받으려면 오백 년을 더 싸워야 하오⁠. 나는 그만 싸우고 일하고 싶소⁠.⁠” 귀석이 방망이를 다시 등에 꽂았다⁠. “⁠대신 오늘부터 받는 밥은 임금이오⁠. 감사가 아니오⁠. 이름 불러 주는 밥이오⁠.⁠”

“⁠이름을 불러 드리겠습니다⁠.⁠” 시장이 말했다⁠. “⁠시민들이⁠.⁠”

엄마가 소연의 등 뒤에서 아주 작게 웃었다⁠. 지금이야⁠, 하는 웃음이었다⁠. 소연은 비서실장을 보았다⁠. 비서실장이 서류철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시장이 종이를 받아 회의 탁자 대신 지훈의 팥죽 보온 통 뚜껑 위에 올려놓고 서명했다⁠. 귀석이 엄지손가락을 종이에 대고 꾹 눌렀다⁠. 하늘색 엄지 자국이 서명 옆에 찍혔다⁠. 펜도 도장도 아니었다⁠. 종이는 비서실장의 서류철 속으로 들어갔다⁠.

지훈이 팥죽 통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저는 할 일이 없네요⁠.⁠” 지훈이 뚜껑을 비틀어 열었다⁠. “⁠저녁이나 먹겠습니다⁠.⁠”

팥죽 김이 객실에 훅 퍼졌다⁠. 맨 앞의 귀신들이 비명을 지르며 천장으로 튀어 올랐다⁠. 목멱대왕이 솔방울을 던졌다⁠. 솔방울이 지훈의 이마에 딱 맞았다⁠.

“⁠뚜껑⁠!⁠”

“⁠죄송합니다⁠!⁠” 지훈이 뚜껑을 닫았다⁠. 이마를 문지르며 숟가락을 든 채 서 있었다⁠. “⁠한 숟가락만 먹었습니다⁠.⁠”

*

열차가 강변역을 지나 땅 위로 올라왔다⁠. 창밖이 트이고⁠, 잠실철교가 나왔다⁠. 열차가 철교 위로 올라서자 발밑에서 검은 한강이 넓게 펼쳐졌다⁠.

강물이 부풀었다⁠.

용왕이 강 한가운데서 솟아올랐다⁠. 물비린내가 닫힌 창문을 뚫고 객실로 스며들었다⁠. 용왕의 등은 길었다⁠. 다리 하나 길이만큼 길었다⁠. 등 위에 하늘색 귀신들이 빼곡히 올라타 있었다⁠. 백이었다⁠. 용왕이 열차와 나란히 강물 위를 미끄러졌다⁠. 맨 앞⁠, 용왕의 머리 바로 뒤에 나팔바지가 보였다⁠. 종이 확성기도 보였다⁠.

“⁠자아⁠, 동지 여러분⁠!⁠”

태식의 목소리가 강바람을 타고 객실 창문을 두드렸다⁠.

“⁠고양 호수공원 오리들의 열렬한 성원 속에 돌아온 디제이 엄태식⁠! 돌아온 기념으로 보내 드리는 신청곡⁠! 「⁠한강 물 차가워도 디제이는 돌아온다⁠」⁠!⁠”

“⁠그것도 방금 만들었소⁠?⁠” 귀석이 창문에 대고 외쳤다⁠.

“⁠고양에서 오리들이랑 만들었어요⁠!⁠”

용왕의 등에서 귀신 백이 차례로 날아올랐다⁠. 창문을 지나 객실로 들어왔다⁠. 들어오는 귀신마다 강물에 젖은 것처럼 빛이 반짝였다⁠. 객실 안의 귀신들이 손을 맞대는 시늉으로 맞았다⁠. 손이 서로를 지나갔다⁠. 다들 상관하지 않았다⁠. 태식이 마지막으로 들어와 소연 앞에 내려왔다⁠. 확성기 테이프가 다 젖어 있었다⁠.

“⁠주무관님⁠. 신청곡 빚 갚으러 왔어요⁠.⁠”

“⁠무슨 곡이요⁠?⁠”

“⁠아직 안 만들었어요⁠. 첫차 오기 전에 만들게요⁠.⁠”

용왕은 철교 끝에서 열차를 놓아주고 강물 속으로 돌아갔다⁠. 수염 끝이 마지막으로 물 위에서 손을 흔들었다⁠. 목멱대왕이 창밖을 보며 솔잎을 뱉었다⁠.

“⁠라면 봉지 하나로 저 영감을 부려 먹다니⁠.⁠”

“⁠서른 봉투요⁠, 대왕님⁠.⁠” 소연이 말했다⁠.

“⁠알았다⁠.⁠” 목멱대왕이 객실을 둘러보았다⁠. 칠백은 아니었다⁠. 오백이 조금 넘었다⁠. 대왕은 한참 귀신들의 빛을 보다가 말했다⁠. “⁠밥 먹고 일하는 동안은 남아라⁠. 떠나고 싶은 날 언제든 남산으로 오너라⁠. 길은 열어 두마⁠. 팥은 치우고⁠.⁠”

“⁠대왕님⁠.⁠” 노약자석 끝의 마포 할매가 수첩을 들었다⁠. “⁠길 열어 두시는 김에 회비도요⁠. 넉 달이요⁠.⁠”

목멱대왕이 솔방울을 집었다가⁠, 내려놓고⁠, 소매에서 엽전 한 닢을 꺼내 할매에게 건넸다⁠.

*

새벽 네 시 오십 분⁠, 막차가 한 바퀴를 돌아 시청역으로 들어왔다⁠.

승강장 끝에서 끝까지 밥상이 이어져 있었다⁠. 접이식 밥상⁠, 아이스박스⁠, 종이 상자를 뒤집어 깐 상⁠. 김밥과 국밥과 귤과 컵라면과 햄버거 세트와 순대⁠. 순대 옆에 막장이 놓여 있었다⁠. 밥상 뒤로 시민들이 서 있었다⁠. 패딩을 입고⁠, 목도리를 두르고⁠, 귤 껍질 냄새를 풍기며⁠. 단톡방 참여자는 천삼백이었다⁠. 오늘 밤 2호선 쉰 개 역 승강장에 다 나와 있다고 방장 할머니가 공지에 썼다⁠. 시청역 밥상 맨 앞에 김밥집 할머니와 미화원 여사가 서 있었다⁠. 택시 기사 단골은 순대 한 접시를 들고 있었다⁠. 마포대교 기사가 병원에서 주문해 보낸 순대였다⁠.

문이 열렸다⁠. 귀신들이 승강장으로 흘러나왔다⁠. 시민들이 귀신에게 이름을 물었다⁠. 귀신들이 이름을 댔다⁠. 오백 년 묵은 이름⁠, 칠십 년 묵은 이름⁠, 육 년 묵은 이름⁠. 시민들이 밥상마다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박영수 님 몫입니다⁠!⁠”

“⁠김순자 님 몫입니다⁠!⁠”

“⁠엄태식 부장님 몫입니다⁠! 햄버거 세트⁠!⁠”

승강장이 이름으로 가득 찼다⁠. 이름 하나가 불릴 때마다 밥에서 김이 한 올씩 풀렸다⁠. 김이 귀신들에게 빨려 들어가고⁠, 귀신들의 빛이 하나씩 짙어졌다⁠. 승강장 형광등이 귀신들의 빛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시장이 패딩 주머니에서 은박지에 싼 김밥 한 줄을 꺼냈다⁠. 시청역 2번 출구 김밥집 은박지였다⁠. 시장은 승강장 의자에 김밥을 놓고 비서실장을 돌아보았다⁠.

“⁠이건 제 월급으로 샀습니다⁠. 영수증 없습니다⁠.⁠” 시장이 귀석을 보았다⁠. “⁠장귀석 위원장님 몫입니다⁠.⁠”

귀석이 의자 앞으로 내려왔다⁠. 전립을 벗어 가슴에 댔다⁠. 얼굴을 숙였다⁠. 김이 실처럼 풀려 수염 속으로 들어갔다⁠. 귀석은 김밥에서 얼굴을 떼지 않았다⁠. 이번에는 받지 않은 것으로 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

소연은 엄마 몫의 김밥을 밥상 한가운데 놓았다⁠. 은박지에 「⁠민정숙⁠」를 썼고⁠, 김밥집 할머니가 단무지를 두 줄 넣었다⁠.

“⁠민정숙 부위원장님 몫입니다⁠.⁠”

엄마가 김밥 위로 얼굴을 숙였다⁠. 김이 풀려 들어갔다⁠. 엄마의 빛이 짙어졌다⁠. 동짓날 밤 내내 옅었던 엄마가⁠, 육 년 전 계단 위에서 밀대를 잡고 있던 모습만큼 짙어졌다⁠. 주황 조끼의 「⁠시청역 환경미화⁠」 글자가 다시 읽혔다⁠. 엄마가 얼굴을 들었다⁠.

“⁠맛있다⁠.⁠”

“⁠다 먹은 거 맞아⁠?⁠”

“⁠다 먹었지⁠.⁠” 엄마가 웃었다⁠. 잡음이 없었다⁠. “⁠소연아⁠. 엄마 오늘 퇴근한다⁠.⁠”

소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엄마가 고무장갑 낀 손을 들어 승강장 끝 굴을 가리켰다⁠. 굴속에서 솔 냄새가 흘러나왔다⁠. 대왕이 열어 둔 길이었다⁠.

“⁠잘린 다음 정했잖아⁠. 시민이 밥 주고⁠, 관이 자리 주고⁠, 휴게실에 창문 내고⁠. 위원장님은 이제 수염 없어도 돼⁠. 사람들이 이름 부르니까⁠.⁠” 엄마가 소연을 보았다⁠. “⁠다음 교섭 담당은 누구냐⁠?⁠”

“⁠징계 끝나면 나⁠.⁠”

“⁠그럼 됐다⁠.⁠”

엄마가 고무장갑을 벗었다⁠. 귀신의 고무장갑을 벗어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소연의 카디건 주머니를 가리켰다⁠. 소연이 주머니에서 비닐도 뜯지 않은 분홍 고무장갑을 꺼냈다⁠. 제사상에 올렸던 새 장갑이었다⁠.

“⁠그거 미화원 언니 줘⁠. 계단 물청소는 둘이 하는 거야⁠. 이제 시장님이 사람 하나 더 넣어 주실 거야⁠. 넣어 주시죠⁠, 시장님⁠?⁠”

시장이 목도리를 풀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넣겠습니다⁠. 법에 있습니다⁠.⁠”

엄마가 미화원 여사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미화원 여사가 귤을 쥔 채 울었다⁠. 엄마가 귀석에게 고개를 숙였다⁠. 귀석이 전립을 가슴에 댄 채 방망이를 가로로 받쳐 들었다⁠. 태식이 확성기를 들었다가⁠, 신청곡 대신 확성기를 내렸다⁠.

엄마가 굴 쪽으로 걸어갔다⁠. 떠서 가지 않고 걸어갔다⁠. 고무장갑 없는 맨손이 조끼 옆에서 흔들렸다⁠. 굴 입구에서 엄마가 한 번 돌아보았다⁠.

“⁠보온병 뚜껑⁠.⁠”

엄마가 굴속으로 들어갔다⁠. 솔 냄새가 한 번 짙어졌다가 옅어졌다⁠.

굴 반대편에서 불빛이 번져 왔다⁠. 첫차였다⁠. 불빛이 승강장 바닥에 닿자 오백의 하늘색이 발끝부터 옅어졌다⁠. 밥상 위의 식은 김밥과 맛이 빠진 귤 사이로 귀신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귀석이 계단 꼭대기로 올라가 첫 출근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순라를 도는 자세였다⁠.

첫차 문이 열렸다⁠. 출근하는 사람들이 밥상 사이를 지나며 귤을 하나씩 집어 갔다⁠. 승강장 의자 위에 은색 보온병과⁠, 비닐도 뜯지 않은 분홍 고무장갑 한 켤레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미화원 여사가 고무장갑을 집어 들고 비닐을 뜯었다⁠. 소연은 보온병을 들어 뚜껑을 돌렸다⁠. 한 번에 닫혔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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