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67자)

마을 총회

학생 귀신을 만난 은퇴 교장 · 하청오

서봉님은 졸업장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줄 맨 앞에 자리를 잡았다⁠. 졸업장은 무게가 거의 없는 종이였는데⁠, 서봉님의 팔은 무거운 물동이를 든 것처럼 떨렸다⁠. 아이들이 쥘 수 있는 것은 분필과 종이 한 장 정도였다⁠. 더 무거운 것은 손을 빠져나갔다⁠. 하귀분이 분필은 쥐면서 지우개는 놓치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아이들 손이 들 수 있는 무게를 알았다⁠.

“⁠교장 선생님⁠, 천천히 가요⁠. 떨어뜨리면 안 돼요⁠.⁠”

“⁠천천히 갈게⁠.⁠”

아침 일곱 시의 신작로는 비어 있었다⁠. 이번에는 열두 명이 다 따라오지 않았다⁠. 서봉님 혼자 줄을 잡았다⁠. 반장이 혼자 가겠다고 했고⁠,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줄넘기 줄 십 미터 가운데 앞의 일 미터만 팽팽했고⁠, 나머지는 길바닥에 끌려왔다⁠.

구판장 셔터에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임시 휴업⁠. 다슬기 주문은 문자로⁠.⁠」 매직 글씨가 비뚤었다⁠. 서봉님은 셔터 앞에 쪼그려 앉아 졸업장을 문턱 위에 내려놓았다⁠. 두루마리가 굴러가지 않게 셔터 레일 홈에 끼웠다⁠. 끼우고 나서 손바닥으로 두 번 눌렀다⁠.

“⁠춘금아⁠.⁠” 서봉님이 셔터에 대고 말했다⁠. “⁠니 거다⁠. 니가 먼저 받어⁠. 받어야 나도 받어⁠.⁠”

셔터 너머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사람이 숨을 죽이고 있는 침묵이었다⁠. 서봉님은 일어나서 줄을 잡았다⁠.

해 질 녘에 정문 돌기둥 위에 두루마리가 놓여 있었다⁠. 아침에 레일 홈에 끼워 둔 졸업장이었다⁠. 누가 갖다 놓았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았다⁠. 서봉님은 창문으로 돌기둥을 보았고⁠, 밤새 교실에서 한 번도 말을 하지 않았다⁠.

*

이튿날부터 나는 마을 집들의 문을 두드렸다⁠. 서른여덟 해 동안 가정 방문을 다니며 배운 것이 있다⁠. 첫날에는 묻지 않는다⁠. 대문 앞에서 날씨 이야기를 하고⁠, 마당의 고추 모종을 칭찬하고⁠, 차를 주면 마신다⁠. 두 번째 날에 묻는다⁠.

첫날 나는 차를 일곱 잔 마셨다⁠. 오후 네 시쯤에는 화장실이 급해서 경로당 화장실을 빌렸다⁠. 할머니들은 내 방광이 약하다는 소식을 내가 화장실에서 나오기도 전에 다 알고 있었다⁠.

“⁠교장 선생은 오줌보가 서울 사람이여⁠.⁠”

“⁠수원이에요⁠, 어머님⁠.⁠”

“⁠수원도 서울이제⁠.⁠”

경로당 할머니들은 나를 자리에 앉히고 휴대전화로 동영상을 틀어 주었다⁠. 동영상 채널이 추천해 준 영상이라고 했다⁠. 「⁠충격⁠! 폐교에 귀신이 나오는 진짜 이유 — 정부가 숨기는 것⁠」 화면 속 남자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폐교 밑에는 옛날 방공호가 있고⁠, 방공호에는⁠. 할머니 하나가 내 팔을 잡았다⁠.

“⁠봐 봐⁠, 교장 선생⁠. 방공호여⁠.⁠”

“⁠덕골초등학교 밑에는 방공호가 없어요⁠. 제가 바닥 다 봤어요⁠.⁠”

“⁠그라믄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고⁠?⁠”

“⁠이 사람은 덕골에 안 와 봤어요⁠.⁠”

할머니들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한 분이 영상을 끄고⁠, 다음 영상을 틀었다⁠. 「⁠충격⁠! 곡성 귀신 학교의 진실⁠」 썸네일에 내 정면 사진이 들어가 있었다⁠. 정문에서 구경꾼들을 줄 세우던 날 찍힌 사진이었다⁠. 돋보기가 목줄 끝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사진 아래 빨간 글씨가 박혀 있었다⁠. 「⁠귀신과 계약한 여교장⁠?⁠」

“⁠교장 선생 연예인 됐네⁠.⁠”

나는 휴대전화를 할머니에게 돌려드렸다⁠. 할머니들이 웃었다⁠. 웃음 끝에 한 분이 나를 보지 않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경로당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분이었다⁠.

“⁠우리 집 전깃불이 그해 겨울에 들어왔제⁠.⁠”

다른 할머니들이 화투패를 쥔 채 멈췄다⁠. 나는 두 번째 날이 오기도 전에 물을 수 있게 되었다⁠.

“⁠어느 해 겨울요⁠?⁠”

“⁠애들 그렇게 되고 나서⁠. 한 달도 안 돼서 전봇대가 들어왔어⁠. 둑 지은 회사가 박아 줬제⁠. 마을 앞 개울에 시멘트 다리도 놔 주고⁠. 그 전에는 비 오믄 징검돌로 건너다녔어⁠.⁠” 할머니가 화투패 하나를 내려놓았다⁠. “⁠집집이 봉투도 돌았고⁠.⁠”

“⁠봉투요⁠?⁠”

“⁠애들 집에는 두꺼운 거⁠, 다른 집에는 얇은 거⁠.⁠” 할머니가 손가락 두 개로 두께를 재 보였다⁠. “⁠봉투 받고 도장 하나씩 찍었제⁠. 애들이 지들끼리 얼음 지치러 갔다는 종이에⁠. 애들 집은 다 이사 갔어⁠. 봄 되기 전에 다⁠. 광주로 순천으로 서울로⁠. 남은 집은 춘금이네 하나여⁠.⁠”

“⁠어머님도 도장 찍으셨어요⁠?⁠”

할머니는 화투패를 한 장 더 내려놓았다⁠. 똥광이었다⁠. 아무도 패를 가져가지 않았다⁠.

*

토요일 아침 마을 회관에서 총회가 열렸다⁠. 안건은 하나였다⁠. 「⁠귀신 학교 체험관 마을기업 참여 및 군 매입 지지 결의⁠」 회관 마루에 마을 사람들이 빼곡히 앉았고⁠, 앞쪽 탁자에 추동섭이 앉았다⁠. 탁자 옆에서 마상태가 노트북을 펴고 화면을 띄웠다⁠. 체험관이 생기면 마을기업이 매점과 민박을 맡고⁠, 한 집에 한 해 얼마씩 배당이 돌아간다는 표였다⁠. 숫자가 나올 때마다 마루에서 작은 감탄이 났다⁠.

“⁠체험관이 들어오면 군에서 마을버스를 하루 네 번에서 여섯 번으로 늘려 드립니다⁠.⁠” 마상태가 화면을 넘겼다⁠. “⁠관광객이 타야 하니까요⁠. 덤으로 어르신들도 타시는 겁니다⁠.⁠”

“⁠여섯 번이믄 읍내 병원을 하루에 두 번 갈 수 있겄네⁠.⁠” 할머니 하나가 말했다⁠.

“⁠병원을 왜 두 번 가⁠?⁠”

“⁠아침에 혈압 재고⁠, 오후에 물리치료 받고⁠.⁠”

“⁠그라믄 점심은⁠?⁠”

“⁠병원 앞 국밥집⁠.⁠”

마루에 웃음이 퍼졌다⁠. 마상태도 웃었다⁠. 웃는 얼굴로 마상태가 덧붙였다⁠. “⁠지난달에 읍내 중학교가 신입생이 여섯 명이었습니다⁠. 저 다닐 때는 한 반이 쉰 명이었어요⁠. 버스가 끊기면 다음은 학교고⁠, 학교가 끊기면 다음은 마을입니다⁠.⁠” 마상태의 목소리에서 연습한 매끄러움이 잠깐 빠졌다⁠. 매끄러움이 빠진 목소리는 진짜였다⁠. 진짜라서 더 어려웠다⁠.

회의 중간에 회관 문이 열렸다⁠. 흰 운동화에 진흙을 반쯤 묻힌 젊은 여자가 캐리어를 끌고 들어왔다⁠. 딸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엄마⁠! 마을버스가 정류장 말고 아무 데나 세워 줘서⁠, 논두렁에 내렸어⁠.⁠”

“⁠여기 회의 중이야⁠, 희아야⁠.⁠”

“⁠알아⁠. 그래서 왔어⁠. 엄마 혼자 회의하게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할머니 하나가 딸의 운동화를 내려다보았다⁠. “⁠아이고⁠, 신발 버렸네⁠. 서울 신발은 흙을 못 이겨⁠.⁠”

딸이 내 옆에 앉자 마상태가 반갑게 고개를 숙였다⁠. “⁠따님이시군요⁠. 군청 관광과장 마상태입니다⁠. 어머님 일로 서울에서 걱정 많으셨지요⁠?⁠” 딸이 마주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이 나를 사이에 두고 걱정을 주고받는 모습이 꼭 학부모 상담 같았다⁠.

추동섭이 안건을 읽었다⁠. 표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은 하라고 했다⁠. 나는 손을 들었다⁠. 딸이 내 카디건 소매를 당겼다⁠. 나는 소매를 빼서 일어났다⁠.

“⁠1979년 2월 15일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마루가 조용해졌다⁠. 마상태의 손이 노트북 위에서 멈췄다⁠.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졸업식 끝나고 자기들끼리 얼음 지치러 갔다고 알고 계십니다⁠. 그날 오전 열 시에 아이들은 군청 트럭 짐칸에 타고 있었습니다⁠. 읍내 중학교에서 빌린 교복을 입고⁠, 태극기를 하나씩 들고⁠, 저수지 준공식에 갔습니다⁠. 도지사가 온다고⁠, 깃발을 흔들어야 사진이 잘 나온다고요⁠. 졸업식은 오후 두 시였습니다⁠. 아이들은 졸업식에 가 보지도 못했습니다⁠.⁠”

“⁠누가 그래요⁠?⁠” 뒤쪽에서 남자 목소리가 났다⁠.

“⁠아이들이요⁠. 그리고 졸업장이요⁠. 열세 장이 아직 교장실 금고에 있었습니다⁠.⁠”

웅성거림이 마루를 한 바퀴 돌았다⁠. 앞줄에서 칠십 대 남자 하나가 일어났다⁠. 얼굴이 벌겠다⁠.

“⁠시방 와서 뭐 하자는 거요⁠? 우리를 살인자로 만들라고⁠? 그 애들 우리 손주뻘이었소⁠. 우리라고 안 울었는 줄 아요⁠? 사십팔 년을 묻어 둔 일을 서울 양반이 와서 파헤치믄⁠, 우리는 저 학교 앞을 어떻게 지나다니요⁠?⁠”

“⁠사십팔 년 동안 아이들이 철없어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아이들 부모는 그 말을 등에 지고 이사를 갔고요⁠.⁠”

“⁠그라믄 어쩌라고⁠!⁠”

탁자 앞에서 추동섭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한 번 눌렀다⁠. 소리는 크지 않았는데 마루가 조용해졌다⁠. 교실을 조용하게 만드는 손이었다⁠.

“⁠선생 말 다 들었소⁠.⁠” 추동섭이 나를 보았다⁠. “⁠그 애들 담임이 나요⁠. 내가 제일 잘 아요⁠. 그 애들은 이제 다 끝난 애들이요⁠. 끝난 애들 때문에 살아 있는 마을을 또 묻을 수는 없소⁠. 이 마을에 아직 서른한 집이 살고⁠, 젊은 사람은 둘이요⁠. 체험관 들어오믄 셋이 되고 넷이 되겄제⁠.⁠” 추동섭이 안건지를 들었다⁠. “⁠표결하겄소⁠. 찬성하는 사람 손 드시오⁠.⁠”

손이 올라갔다⁠. 처음에는 몇 개가 머뭇머뭇 올라가다가⁠, 앞줄이 들자 뒷줄이 따라 들었다⁠. 경로당에서 똥광을 내려놓던 할머니도 손을 들었다⁠. 들고 나서 나를 보지 않았다⁠. 반대에 손을 든 사람은 둘이었다⁠. 나와⁠, 마을 사람이 아니라서 표가 없는 딸이었다⁠. 딸은 들었다가 마상태와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내렸다⁠.

“⁠가결이요⁠.⁠”

*

박수가 나오려는 순간 회관 문이 다시 열렸다⁠. 감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예순 남짓⁠, 머리를 단정하게 넘겼고 손목에 굵은 시계를 찼다⁠. 뒤에 직원 둘이 상자를 들고 따라왔다⁠. 상자 안에는 떡과 음료와 흰 봉투들이 들어 있었다⁠. 마상태가 벌떡 일어났다⁠.

“⁠덕산토건 회장님이십니다⁠. 체험관 시공을 맡아 주실 분입니다⁠.⁠”

회장이 마루 앞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덕골 어르신들⁠, 반갑습니다⁠. 마을 발전기금을 조금 가져왔습니다⁠. 저희 회사가 덕골과 인연이 깊습니다⁠. 1979년에 덕골 저수지를 지은 회사가 저희 덕산토건이고⁠, 공사를 맡으셨던 분이 제 선친이십니다⁠. 그때 마을에 전기도 넣어 드리고 다리도 놓아 드렸다고 들었습니다⁠.⁠” 회장이 마루를 둘러보았다⁠. “⁠아버지가 지은 둑 옆에서⁠, 아들이 덕골 학교를 다시 살리게 되었습니다⁠.⁠”

박수가 나왔다⁠. 처음엔 몇 사람이 치다가 다 같이 쳤다⁠. 추동섭만 박수를 치지 않았다⁠. 탁자 위에 두 손을 얹고⁠, 회장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

나는 돋보기를 찾았다⁠. 가슴께에서 줄을 더듬다가 그만두었다⁠. 돋보기 없이도 다 보였다⁠. 직원들이 흰 봉투를 집집이 한 장씩 돌렸다⁠. 봉투는 두께가 다 같았다⁠. 할머니들이 봉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으로 눌렀다⁠. 사십팔 년 전에도 저렇게 눌렀을 손이었다⁠.

회장이 나에게 다가와 명함을 내밀었다⁠. 「⁠덕산토건 대표이사 회장⁠」

“⁠임 교장 선생님이시지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학교를 아끼신다고요⁠. 저도 학교를 아낍니다⁠. 선생님 손해 안 보시게 해 드리겠습니다⁠.⁠”

“⁠회장님 선친께서 지으신 둑 밑에서 아이들 열두 명이 죽었습니다⁠.⁠”

회장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웃음 아래로 눈만 잠깐 차가워졌다가 돌아왔다⁠.

“⁠알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사고였지요⁠. 그래서 제가 그 학교를 밝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웃으면서 다녀가는 곳으로요⁠.⁠” 회장이 명함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아이들도 그걸 바랄 겁니다⁠.⁠”

딸이 내 옆에서 회장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봉투가 다 돌고 나서도 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회관을 나서며 딸이 물었다⁠.

“⁠엄마⁠. 아이들이 바란다는 거⁠, 엄마는 알아⁠?⁠”

“⁠알아⁠. 교실에 가면 물어볼 수 있어⁠.⁠”

딸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진흙 묻은 운동화가 길바닥에 박혀 있었다⁠. 딸의 눈이 처음으로 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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