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31자)

소풍 줄

학생 귀신을 만난 은퇴 교장 · 하청오

줄은 이깨순이 먼저 말했다⁠. 내가 은행나무 밑동에 기대 서서 신작로를 내다보는 아이들 등을 보고 있을 때였다⁠.

“⁠소풍 갈 때는 나갔어요⁠.⁠”

“⁠어떻게⁠?⁠”

“⁠줄 잡고요⁠. 선생님이 맨 앞에서 줄 잡고⁠, 우리는 뒤에서 한 손씩 잡고요⁠. 안 잡으면 길 잃는다고⁠. 그때는 줄 잡고 저수지 너머 절까지 갔어요⁠.⁠” 이깨순이 말끝을 흐리다가 덧붙였다⁠. “⁠졸업식 날도 줄은 안 잡았어요⁠. 트럭 탔응께⁠.⁠”

체육 창고는 강당 뒤에 있었다⁠. 자물쇠가 녹슬어서 망치로 세 번 내리쳤다⁠. 문짝이 비명을 지르며 열리자 곰팡이 냄새와 함께 1990년대의 체육 시간이 쏟아져 나왔다⁠. 바람 빠진 피구공⁠, 이가 빠진 뜀틀⁠, 운동회 때 쓰던 박 터뜨리기 바구니⁠, 줄다리기 밧줄⁠. 벽 못에는 긴 줄넘기 줄이 둘둘 감겨 있었다⁠. 단체 줄넘기용이라 길이가 십 미터는 됐다⁠. 손잡이 나무가 반들반들했다⁠.

“⁠이걸로 해 볼까⁠.⁠”

“⁠그건 쌍줄넘기 할 때 쓰는 건디⁠.⁠” 도판식이 말했다⁠. “⁠우리 반은 쌍줄넘기 군 대회 나가서 이등 했어요⁠.⁠”

“⁠일등은⁠?⁠”

“⁠읍내 학교요⁠. 걔들은 신발이 운동화였어요⁠.⁠”

운동장에 줄을 길게 폈다⁠. 내가 맨 앞 손잡이를 잡고⁠, 아이들이 차례로 줄을 잡았다⁠. 맨 앞은 서봉님이었다⁠. 반장은 맨 앞이었다⁠. 아이들 손이 줄을 쥐자 줄이 아주 조금 무거워졌다⁠. 열두 개의 손이 실린 무게는 비닐봉지 하나만큼이었다⁠.

은행나무 밑을 지났다⁠. 서봉님의 발이 그림자 경계에서 잠깐 멈칫하더니⁠, 넘어왔다⁠. 뒤의 아이들이 하나씩 넘어왔다⁠. 고만덕이 넘어오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됐다⁠! 됐어⁠!⁠” 고만덕의 고함에 놀란 도판식이 줄을 놓았다⁠. 줄을 놓는 순간 도판식의 몸이 고무줄에 당겨진 것처럼 뒤로 미끄러져 은행나무 밑동에 가서 철퍼덕 주저앉았다⁠. 아이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도판식은 은행나무 밑에서 혼자 억울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판식아⁠, 와서 다시 잡아⁠.⁠”

“⁠교장 선생님⁠, 줄 놓으면 안 된다는 거 미리 말해 주셔야지요⁠.⁠”

“⁠선생님도 방금 알았어⁠.⁠”

고백하자면 줄 손잡이를 쥐는 순간 손바닥이 먼저 기뻐했다⁠. 교장이 되고 나서 열 해 넘게 나는 줄 맨 앞에 서 본 적이 없었다⁠. 교장은 소풍날 버스 앞에서 인원 보고를 받고 손을 흔드는 사람이었다⁠. 아이들 손의 무게가 줄을 타고 오는 감촉을 나는 마흔 무렵에 마지막으로 느꼈다⁠. 줄을 타고 오던 무게가 예순세 살 손바닥에 그대로 돌아왔다⁠. 기쁨이 너무 빨리 와서 조금 부끄러웠다⁠. 교장실 의자에 앉아 결재 도장을 찍던 열 해가 손바닥 안에서 갑자기 가벼워졌다⁠. 아이들이 줄을 잡은 까닭은 소풍이 아니었는데도⁠.

*

해 질 녘에 마을로 나갔다⁠. 저녁밥 짓는 시간이라 골목마다 된장 끓는 냄새가 났다⁠. 나는 줄넘기 줄을 잡고 앞장서 걸었고⁠, 뒤에서 열두 명이 따라왔다⁠. 마을 사람 눈에는 예순세 살 여자가 줄넘기 줄 하나를 땅에 질질 끌고 걸어가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담장 너머에서 개가 짖다가⁠, 아이들이 지나가자 꼬리를 내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개는 보는 모양이었다⁠.

전봇대 가로등이 내가 다가가자 저절로 켜졌다⁠. 아이들이 일제히 멈췄다⁠.

“⁠교장 선생님이 손 안 댔는데 불이 켜졌어⁠!⁠”

“⁠사람이 지나가면 켜지는 불이야⁠.⁠”

“⁠우리가 지나가도 켜져요⁠?⁠”

“⁠너희는 사람이잖아⁠.⁠” 말해 놓고 나도 멈칫했다⁠. 가로등은 내가 지나간 뒤 한참 있다가 꺼졌다⁠. 아이들은 가로등이 꺼질 때까지 올려다보았다⁠.

경로당 창문 안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흘러나왔다⁠.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이었다⁠. 할머니들이 화면 속 젊은 가수에게 손뼉을 치고 있었다⁠. 이깨순이 창문에 이마를 대고 들여다보았다⁠.

“⁠남진이 아니네⁠.⁠”

“⁠남진은 이제 할아버지야⁠.⁠”

“⁠거짓말⁠.⁠” 이깨순이 진심으로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남진이 할아버지면 우리 엄마는 뭐여⁠.⁠”

마을 회관 앞 게시판에는 군청에서 붙인 안내문이 비닐에 싸여 있었다⁠. 「⁠귀신 학교 체험관 국비 공모 1차 통과 — 덕골 주민 여러분 축하드립니다⁠」 하귀분이 안내문 글자를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으며 읽었다⁠. 귀신이라는 글자에서 손가락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우리가 귀신이에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줄 뒤쪽에서 고만덕이 “⁠배고프다⁠.⁠”라고 말했다⁠. 사십팔 년 동안 고만덕이 한 말 가운데 가장 많이 한 말일 것이다⁠.

마을 안쪽 골목 끝에 슬레이트 지붕을 새로 얹은 집이 있었다⁠. 마당에 이장 트럭이 서 있었고⁠, 툇마루 앞 평상에 추동섭이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접는 휴대전화를 펼쳐 놓고 손가락 하나로 문자를 누르는 중이었다⁠. 화면 불빛이 노인의 턱을 아래에서 비췄다⁠.

줄이 골목에 들어서자 추동섭이 고개를 들었다⁠. 손가락이 자판 위에서 멈췄다⁠. 노인의 눈이 내 얼굴을 지나 줄을 따라 뒤로 갔다⁠. 열두 명을 하나씩 짚어 가는 눈이었다⁠. 교실 문 앞에서 아침마다 정수리를 세던 담임의 눈이었다⁠. 마지막 아이까지 가서야 눈이 멈췄다⁠.

“⁠이장님⁠, 저녁 드셨어요⁠?⁠” 내가 물었다⁠.

추동섭은 대답 대신 휴대전화를 탁 접었다⁠. 일어나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의 형광등이 꺼졌다⁠. 마당의 센서등만 우리가 지나가는 동안 켜져 있었다⁠.

“⁠추 선생님 늙었다⁠.⁠” 도판식이 줄을 잡은 채 중얼거렸다⁠.

“⁠머리가 다 하얘⁠.⁠” 이깨순이 말했다⁠.

“⁠우리 때도 하얬어⁠. 분필 가루 때문에⁠.⁠” 고만덕이 말했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 서봉님은 꺼진 방문을 보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

구판장 셔터는 반쯤 내려와 있었다⁠. 안에서 불빛과 사투리가 새어 나왔다⁠. 백춘금이 늦은 방송을 하고 있었다⁠. “⁠밤에 보시는 분들⁠, 다슬기 무침 마지막 두 개 남았소⁠! 미국 엘에이에서 보시는 분⁠, 미국까지는 배송이 안 되요잉⁠.⁠”

나는 셔터를 두드렸다⁠. 서봉님이 줄을 쥔 손에 힘을 주는 것이 줄을 타고 내 손바닥까지 왔다⁠.

“⁠문 닫았소⁠!⁠”

“⁠임길례예요⁠. 잠깐이면 돼요⁠.⁠”

셔터가 덜컥 올라갔다⁠. 백춘금이 계산대 너머에서 휴대전화를 거치대째 들고 서 있었다⁠. 화면 속 시청자들이 「⁠언니 손님 왔어요⁠?⁠」「⁠누구예요⁠?⁠」 하고 글자를 올리고 있었다⁠. 백춘금의 눈이 내 얼굴에 왔다가⁠, 내 손에 쥔 줄을 따라 내 뒤로 갔다⁠.

줄 맨 앞에 서봉님이 서 있었다⁠. 양 갈래 머리 끝에 빨간 고무줄⁠. 몸에 맞지 않는 곤색 치마⁠. 블라우스 가슴에 명찰⁠.

백춘금의 손에서 휴대전화가 미끄러졌다⁠. 거치대가 계산대 위에 쓰러지면서 화면이 천장을 비췄다⁠. 시청자들의 글자가 화면 위로 빠르게 올라갔다⁠. 「⁠언니⁠?⁠」「⁠화면이 천장만 나와요⁠」「⁠괜찮아요⁠?⁠」

“⁠춘금아⁠.⁠” 서봉님이 말했다⁠. 반장 목소리가 아니었다⁠. 열세 살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공기 다섯 알 가져왔냐⁠? 니가 졸업식 끝나고 꺾기 가르쳐 준다 했잖여⁠.⁠”

백춘금의 입술이 움직였는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교단에 서 본 사람만 아이들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하나를 가르쳐 본 사람은 보았다⁠. 열세 살 백춘금은 열세 살 서봉님에게 공깃돌 꺾는 법을 가르쳤다⁠.

“⁠이거 뭐요⁠.⁠” 백춘금이 나를 보았다⁠. 눈이 젖어 있었고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왜 데꼬 왔소⁠. 누가 데꼬 오라 했소⁠!⁠”

“⁠봉님이가 오고 싶어 했어요⁠.⁠”

“⁠선생이 뭘 안다고⁠!⁠” 백춘금이 계산대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다슬기 무침 통이 튀어 올랐다⁠. “⁠사십팔 년이요⁠! 사십팔 년을 저 학교 앞으로 안 지나다녔소⁠. 읍내 갈 때도 저수지 돌아서 갔소⁠. 그런데 선생이 와서 문을 다 열어젖히고⁠!⁠”

백춘금이 셔터 줄을 잡아당겼다⁠. 셔터가 쾅 소리를 내며 내려왔다⁠. 셔터 너머에서 방송 끄는 소리가 났고⁠, 그다음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서봉님은 셔터 앞에서 줄을 쥔 채 오래 서 있었다⁠. 뒤의 아이들은 아무도 배고프다고 하지 않았다⁠.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고만덕이 줄을 두 번 당겼다⁠. 할 말이 있다는 신호였다⁠. 소풍 때도 그렇게 했다고 했다⁠.

“⁠교장 선생님⁠, 우리 동생 묵순이도 살았어요⁠?⁠”

“⁠묵순이가 몇 살이었니⁠?⁠”

“⁠열 살이요⁠. 계란 못 받아서 울었어요⁠. 내가 이따 졸업식 끝나면 반 줄게 했는디⁠.⁠” 고만덕이 줄을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못 줬어요⁠.⁠”

“⁠찾아볼게⁠. 살아 있으면 지금 쉰여덟이야⁠.⁠”

“⁠쉰여덟⁠.⁠” 고만덕이 숫자를 입안에서 굴렸다⁠. “⁠우리 엄마보다 늙었네⁠.⁠”

정문에 닿자 휴대전화가 울렸다⁠. 마상태의 문자였다⁠. 「⁠선생님⁠, 국비 1차 통과 소식 들으셨지요⁠? 2차 심사 때 현장 사진이 필요합니다⁠. 토요일 오전에 촬영 팀 들어갑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바로 아래 딸의 문자가 이어졌다⁠. 「⁠희아⁠: 엄마 나 토요일에 내려가⁠. 아빠는 파크골프 대회라 못 온대⁠. 엄지 대신 내가 감⁠.⁠」

*

이튿날 아침 백춘금이 학교로 왔다⁠. 정문 돌기둥 앞에서 한참을 멈춰 있다가 들어왔다⁠. 은행나무 밑을 지날 때는 눈을 감았다⁠. 손에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추동섭이 흙바닥에 두고 간 봉투였다⁠. 내가 정문 기둥 옆 화분 밑에 끼워 두었던 것을 들고 온 것이었다⁠.

백춘금은 교무실 문간에서 봉투를 내밀었다⁠. “⁠도장 찍었소⁠. 부녀회장 도장이요⁠. 나도 체험관 찬성이요⁠.⁠”

“⁠왜요⁠?⁠”

“⁠귀신집 되믄 사람들이 무섭다고 소리 지르고 웃고 가겄제⁠. 사진 찍고 수제비 먹고 가겄제⁠. 아무도 안 울고 가겄제⁠.⁠” 백춘금이 봉투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나는 그게 낫소⁠.⁠”

“⁠어젯밤 봉님이를 보셨잖아요⁠.⁠”

백춘금이 교무실 창밖으로 운동장을 보았다⁠. 아침 햇빛이 흙 위에 고르게 깔려 있었다⁠. 은행나무 가지 끝에 연둣빛 눈이 하나둘 맺혀 있었다⁠.

“⁠얼음이 깨질 때 말이요⁠.⁠” 백춘금이 창밖을 본 채 말했다⁠. “⁠소리가 먼저 났소⁠. 쩡 하고⁠. 둑 위에서 물 내려오는 소리가 났는디⁠, 우리는 둑 밑 얼음 위에서 깃발 흔들고 있었소⁠. 사진 찍는 아저씨가 웃으라 해서 웃고 있었소⁠. 쩡 하더니 발밑이 기울었소⁠. 봉님이가 맨 앞이었고 나는 봉님이 바로 뒤였소⁠. 추 선생이 강가에서 뛰어들어 손을 뻗었는디⁠, 손이 안 닿았소⁠.⁠”

백춘금의 오른손이 왼쪽 어깨를 쥐었다⁠. 등 뒤를 만지려는 손이었다⁠.

“⁠봉님이가 내 등을 밀었소⁠. 두 손으로⁠. 나는 앞으로 넘어지면서 추 선생 손에 닿았소⁠. 추 선생이 나를 끌어냈소⁠. 끌어내고 돌아봤을 때는⁠.⁠” 백춘금이 말을 멈췄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내쉬었다⁠. “⁠나만 살았소⁠. 그 애가 밀어서 나만⁠. 그런 애 얼굴을 무슨 낯으로 보요⁠. 졸업장⁠? 그 애는 못 받고 나는 받으라고⁠? 선생⁠, 나는 못 하요⁠.⁠”

백춘금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교무실을 나갔다⁠. 은행나무 밑을 지날 때 또 눈을 감았다⁠. 정문을 나서서야 눈을 떴다⁠.

나는 봉투를 들고 6학년 교실로 갔다⁠. 문을 열자 서봉님이 문 바로 안쪽에 서 있었다⁠. 복도에서 나는 소리는 교실까지 다 들렸다⁠. 서봉님은 들었다⁠. 열한 명도 들었다⁠. 고만덕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깨순이 서봉님의 소매를 붙잡으려다 손을 거두었다⁠.

서봉님이 나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위로 하고⁠, 손끝을 가지런히 모은 손이었다⁠. 상장을 받을 때 배운 손이었다⁠.

“⁠교장 선생님⁠, 춘금이 졸업장 저 주세요⁠.⁠” 서봉님이 말했다⁠. “⁠제가 갖다줄게요⁠. 줄 잡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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