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31자)

돌기둥

학생 귀신을 만난 은퇴 교장 · 하청오

4월 19일 아침 일곱 시⁠, 정문 앞 신작로에 승용차와 택시가 줄지어 멈췄다⁠. 광주 번호판⁠, 부산 번호판⁠, 서울 번호판이었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대부분 쉰과 예순 사이였다⁠. 머리가 희끗했고⁠, 손에 무언가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꽃다발을 든 사람도 있었고⁠, 빛바랜 상자를 든 사람도 있었다⁠.

고묵순이 맨 먼저 와서 사람들을 맞았다⁠. 반찬가게 앞치마 대신 검은 정장을 입었는데⁠, 손에는 보냉 가방을 들고 있었다⁠. 가방 안에 고만덕의 졸업장과 삶은 계란 열 알이 들어 있다고 했다⁠. 고묵순은 사람들 사이를 다니며 얼굴을 확인했다⁠. 단톡방 사진과 실제 얼굴을 맞춰 보는 일이었다⁠.

“⁠판식이네 누나요⁠? 단톡방 사진은 꽃이던디⁠.⁠”

“⁠꽃이 저요⁠.⁠” 부산에서 온 예순세 살 여자가 말했다⁠. “⁠얼굴 사진 올리믄 나이 들통나잖여⁠.⁠”

“⁠우리 다 들통났어요⁠, 언니⁠. 다 늙었어⁠.⁠”

여자들이 웃었다⁠. 웃음이 신작로 위로 퍼졌다가⁠, 정문 너머 6학년 교실 창문을 보고 잦아들었다⁠. 사십팔 년 만에 서로 얼굴을 본 사람들이었다⁠. 서로 얼굴을 보면 그날이 생각난다고 연락을 끊은 사람들이었다⁠.

하귀분의 오빠는 광주에서 버스 기사를 하다가 지난해 정년을 했다고 했다⁠. 예순다섯이었다⁠. 손에 납작한 상자 하나를 들고 있었다⁠. 상자 뚜껑에 크레파스 그림이 인쇄되어 있었다⁠. 스물네 색⁠. 포장 비닐이 그대로였다⁠.

“⁠졸업 선물이었어요⁠. 귀분이 거⁠. 아버지가 읍내에서 사 왔는디 못 줬어요⁠.⁠” 하귀분의 오빠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장롱에 넣어 두셨어요⁠. 버리지도 못하고 열지도 못하고⁠.⁠”

쌍둥이네 막내는 서울에서 첫 기차를 탔다고 했다⁠. 쉰두 살이었다⁠. 쌍둥이가 떠난 뒤에 태어난 막내였다⁠. 오빠들 얼굴은 사진으로만 알았다⁠. 손에 쌍둥이의 돌 사진을 들고 있었다⁠. 돌 사진 속 두 아기가 똑같은 한복을 입고 울고 있었다⁠.

“⁠오빠들 얼굴 처음 보는 거예요⁠.⁠” 막내가 말했다⁠. “⁠엄마가 맨날 그랬어요⁠. 니 오빠들은 둘이 붙어서 장난만 쳤다고⁠. 볼 수 있을까요⁠? 저는 오빠들한테 아무것도 가르친 게 없는데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가르쳐 본 사람만 본다⁠. 막내는 오빠들에게 가르칠 기회조차 없었다⁠.

“⁠막내님⁠, 오늘 오빠들한테 하나 가르쳐 주세요⁠.⁠” 딸이 옆에서 말했다⁠. “⁠무엇이든요⁠. 저는 깨순이한테 춤을 가르쳤어요⁠.⁠”

*

일곱 시 사십 분에 덕산토건 트럭 두 대가 들어왔다⁠. 작업복 남자들이 운동장 바깥 공터에 착공식 천막을 세우기 시작했다⁠. 천막 기둥이 흙바닥에 박히는 소리가 났다⁠. 「⁠덕골 귀신 학교 체험관 착공식⁠」 현수막이 천막 앞에 펼쳐졌다⁠. 가족들이 현수막 글자를 보았다⁠. 하귀분의 오빠가 크레파스 상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일곱 시 오십 분에 검은 승용차가 왔다⁠. 회장이 내렸다⁠. 군청 직원 둘과 경비 용역 넷이 뒤따랐다⁠. 회장은 정문 앞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고⁠, 상황을 한눈에 파악하는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가족들 앞으로 걸어와 고개를 깊이 숙였다⁠.

“⁠덕골 학생들 가족분들이시지요⁠. 덕산토건 회장입니다⁠. 먼 길 오셨습니다⁠.⁠”

가족들이 대답하지 않았다⁠. 회장은 고개를 든 채로 말을 이었다⁠.

“⁠제 선친이 지은 둑에서 일어난 일⁠, 저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래서 준비한 게 있습니다⁠. 체험관 로비에 추모비를 세우겠습니다⁠. 학생들 이름을 돌에 새기고⁠, 해마다 2월 15일에 헌화하겠습니다⁠. 오늘 착공식 때 가족분들께 먼저 보여 드리려고 했습니다⁠.⁠” 회장이 직원에게서 서류철을 받아 펼쳤다⁠. 추모비 그림이었다⁠. 검은 돌에 이름 열두 개가 금빛으로 새겨져 있었다⁠. 돌 뒤로 체험관 입구가 그려져 있었고⁠, 입구 위에 「⁠공포 미로⁠」 글씨가 보였다⁠.

“⁠귀신집 입구에 추모비요⁠?⁠” 부산에서 온 여자가 말했다⁠.

“⁠사람들이 웃으러 오는 곳에 추모비가 있어야⁠, 잊지 않습니다⁠.⁠” 회장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여러분⁠, 사십팔 년 동안 아무도 이 아이들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체험관이 생기면 해마다 수만 명이 이 학교에 옵니다⁠. 그 사람들이 추모비 앞을 지나갑니다⁠. 저는 그게 아이들을 위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저희 회사 직원 예순 명의 월급도 거기 달려 있고요⁠. 숨기지 않겠습니다⁠.⁠”

가족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회장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쌍둥이네 막내가 추모비 그림을 오래 보았다⁠. 오빠들의 이름이 금빛으로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고묵순이 앞으로 나왔다⁠. 보냉 가방을 땅에 내려놓고 회장 앞으로 갔다⁠. 키가 회장의 어깨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회장님⁠. 우리 오빠는 돌에 이름 새기는 거 안 좋아할 거예요⁠. 오빠 이름은 졸업장에 있어요⁠. 2주 전에 받았어요⁠. 계란 반쪽 주고 받았어요⁠.⁠” 고묵순이 가방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들어 보였다⁠. “⁠회장님 아버지가 지은 둑에서 우리 오빠가 못 받은 거⁠, 저 학교에서 받았어요⁠. 나머지 애들도 받으러 왔어요⁠. 귀신 학교 말고⁠, 학교에서요⁠.⁠”

회장이 두루마리를 보았다⁠. 웃음이 얼굴에서 조금 내려갔다⁠.

“⁠여사님⁠, 그 학교는 오늘부터 군 재산입니다⁠. 착공식 전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안전 문제가 있어서요⁠.⁠” 회장이 경비 용역들을 돌아보았다⁠. “⁠정문 지켜 주세요⁠.⁠”

*

정문 옆에서 영어 말소리가 났다⁠. 영국 동영상 채널의 두 사람이었다⁠. 키 큰 남자가 휴대전화를 들고 생방송을 하고 있었고⁠, 옆의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통역 앱에 한국어를 넣고 있었다⁠. 딸이 두 사람에게 다가가 영어로 무언가를 말했다⁠. 남자가 카메라를 내리려다⁠, 딸의 말을 듣고 카메라를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정문이 아니라 가족들의 얼굴을 비췄다⁠.

“⁠뭐라고 했어⁠?⁠”

“⁠귀신 찍지 말고 가족들 찍으라고 했어⁠. 오늘은 귀신 체험이 아니라 졸업식이라고⁠.⁠” 딸이 말했다⁠. “⁠저 사람들이 그러네⁠, 원래 그러려고 왔대⁠. 메일에 존중한다고 쓴 거 진짜였대⁠.⁠”

회장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회장이 몸을 돌려 받았다⁠. 짧은 통화였다⁠. 회장의 대답만 들렸다⁠. “⁠네⁠, 군수님⁠. 아닙니다⁠, 소란은 아닙니다⁠. 가족분들이 오셨습니다⁠. 네⁠. 착공식은 예정대로 열 시에⁠.⁠” 회장이 전화를 끊었다⁠.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 있었다⁠.

여덟 시 십 분⁠. 정문의 쇠사슬 앞으로 등산복 차림의 남자가 걸어왔다⁠. 마상태였다⁠. 경비 용역 하나가 앞을 막았다⁠.

“⁠어디 가십니까⁠?⁠”

“⁠군청 관광과 예비 열쇠 반납하러요⁠. 반납처가 여기라서⁠.⁠”

마상태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회장이 몸을 돌렸다⁠.

“⁠마 과장⁠. 아⁠, 이제 과장이 아니지⁠.⁠” 회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자네 아버지가 정식 공무원이 된 게 우리 아버지 덕인 거 알지⁠? 준공식 잘 끝냈다고 군수한테 우리 아버지가 말을 넣어 줬어⁠. 자네가 군청에 들어간 것도 아버지 이름이 있어서였어⁠.⁠”

마상태가 회장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압니다⁠. 어제 아버지가 그 말도 하셨어요⁠.⁠” 마상태가 열쇠를 자물쇠에 꽂았다⁠. “⁠그래서 여는 겁니다⁠.⁠”

자물쇠가 풀렸다⁠. 쇠사슬이 철문에서 미끄러져 흙바닥에 떨어졌다⁠. 철렁하는 소리가 운동장 끝까지 울렸다⁠. 경비 용역들이 회장을 보았다⁠. 회장은 손을 들지 않았다⁠. 생방송 카메라가 회장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회장이 카메라를 보고⁠, 철문을 보고⁠, 가족들을 보았다⁠. 그러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들어가셔도 교실은 못 여십니다⁠.⁠” 회장이 말했다⁠. “⁠열쇠는 이장님이 갖고 계시니까요⁠.⁠”

*

가족들이 운동장으로 들어왔다⁠. 은행나무 밑을 지나며 다들 한 번씩 가지를 올려다보았다⁠. 가지에 연둣빛 잎이 손톱만 하게 돋아 있었다⁠. 6학년 교실 창문으로 아이들 열한 명이 몰려들었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마당의 어른들을 내려다보았다⁠.

“⁠우리 형이다⁠!⁠” 도판식이 소리쳤다⁠. “⁠아니다⁠, 누나다⁠! 누나가 왜 저렇게 늙었어⁠!⁠”

“⁠귀분아⁠, 저 아저씨 니 오빠 아니냐⁠?⁠”

하귀분이 창유리에 손바닥을 댔다⁠. 하귀분의 오빠가 운동장 가운데에서 걸음을 멈췄다⁠. 크레파스 상자를 든 채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오빠의 눈에는 빈 유리창이었다⁠. 오빠는 빈 유리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귀분이 마주 손을 흔들었다⁠.

쌍둥이네 막내가 창문 아래로 갔다⁠. 창틀이 막내의 가슴께에 왔다⁠. 막내는 빈 유리창을 올려다보며 한참 망설였다⁠. 그러다 휴대전화를 꺼내 유리에 대고 사진 하나를 보여 주었다⁠. 고등학생 남자아이 둘이 교복을 입고 엄지와 검지를 엇갈려 작은 하트를 만들고 있었다⁠.

“⁠오빠들⁠. 내 아들들이에요⁠. 오빠들 조카요⁠. 쌍둥이 아니고 연년생이에요⁠.⁠” 막내가 휴대전화를 내리고 자기 손을 들었다⁠. “⁠요즘 애들은 사진 찍을 때 이렇게 해요⁠. 엄지랑 검지를 이렇게 엇갈려서⁠. 하트래요⁠. 해 봐요⁠.⁠”

유리 너머에서 쌍둥이가 서로를 보았다⁠. 둘이 동시에 손가락을 들었다⁠. 형은 엄지와 중지를 엇갈렸고⁠, 동생은 엄지를 거꾸로 했다⁠. 막내가 웃었다⁠.

“⁠아니⁠, 검지⁠. 검지요⁠. 엄지 끝에 검지를 이렇게⁠.⁠”

쌍둥이가 다시 했다⁠. 이번에는 둘 다 맞았다⁠. 손가락 끝에 작은 하트가 둘 생겼다⁠. 막내가 “⁠그렇지⁠!⁠” 하고 소리친 순간 숨을 멈췄다⁠. 막내의 눈이 유리창 한 곳에 고정되었다⁠. 까까머리 남자아이 둘이 똑같은 얼굴로 손가락 하트를 내밀고 있었다⁠. 돌 사진 속 아기들의 얼굴이 열세 살이 되어 있었다⁠.

막내는 휴대전화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대신 자기도 손가락 하트를 들어 유리창에 갖다 댔다⁠. 쌍둥이가 유리창 안쪽에서 하트를 맞댔다⁠. 쉰두 살 동생과 열세 살 오빠들이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손가락 하트를 맞대고 있었다⁠.

“⁠오빠들⁠, 엄마가 맞네⁠.⁠” 막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둘이 붙어서 장난만 친다더니⁠.⁠”

백춘금이 왔다⁠. 구판장 앞치마를 벗고 꽃무늬 블라우스를 입었다⁠. 머리를 감고 빗질을 했다⁠. 은행나무 밑을 지날 때 눈을 감지 않았다⁠. 창가의 서봉님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서봉님이 유리 너머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반장이 출석을 확인하는 끄덕임이었다⁠.

여덟 시 삼십 분⁠. 교실 문의 군청 자물쇠는 그대로였다⁠. 나는 복도 끝에서 자물쇠를 보다가 정문을 보았다⁠. 신작로는 비어 있었다⁠. 추동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고⁠, 가고⁠, 끊겼다⁠.

“⁠엄마⁠, 문을 부술까⁠?⁠” 딸이 물었다⁠.

“⁠부수면 아이들이 깨진 문으로 졸업해⁠.⁠”

여덟 시 삼십오 분⁠. 경로당 할머니들이 왔다⁠. 일곱 명이었다⁠. 맨 앞에 똥광을 내려놓던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걸어왔다⁠. 도장 찍은 어른들이었다⁠. 할머니들은 가족들 뒤에 줄을 맞춰 자리를 잡았다⁠. 가족들이 돌아보았다⁠. 서로를 알아본 사람들이 있었다⁠. 사십팔 년 전에 같은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여덟 시 삼십팔 분⁠. 신작로 끝에서 트럭 엔진 소리가 났다⁠. 「⁠덕골 이장⁠」 글씨가 붙은 1톤 트럭이 정문 앞에 멈췄다⁠. 추동섭이 내렸다⁠. 1978년 가을 단체 사진 속의 양복이었다⁠. 옷이 몸에 컸고⁠, 윗도리 단추를 끝까지 채웠다⁠. 손에 열쇠 하나가 들려 있었다⁠.

추동섭이 정문 돌기둥 사이에서 멈췄다⁠. 사십팔 년 동안 사탕 봉지를 두고 돌아서던 자리였다⁠. 추동섭은 돌기둥 아래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돌기둥 사이로 걸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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