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283자)

무쇠곰이 이겼다

천하제일 비무대회의 판돈은 내가 받는다 · 설묵향

초대장은 말로 왔다⁠. 아침 일찍 흑룡방 사내 둘이 갑례 객잔 문간에 서서 방주께서 차를 한잔 대접하고 싶어 하신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을 세 번 곱씹었다⁠. 대접하고 싶어 하신다⁠. 거절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사내 하나가 웃었다⁠. 이 웃음이 대답이었다⁠.

구팔봉이 내 소매를 잡았다⁠. “⁠가지 마⁠.⁠”

“⁠안 가면 저 사람들이 저를 들고 갈 겁니다⁠.⁠”

“⁠그럼 들려 가⁠. 걸어가는 것보다 덜 비굴하다⁠.⁠”

“⁠스승님은 열 해 전에 걸어서 도망가셨잖아요⁠.⁠”

노인이 소매를 놓았다⁠. 갑례는 국자를 내려놓고 찬장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품에 쑤셔 넣었다⁠. 식은 만두 하나였다⁠. 왜 만두냐고 묻자 이 여자는 대답 대신 내 등을 떠밀었다⁠.

*

흑룡방 객잔 이층 동쪽 끝 방은 창이 산 쪽으로 나 있었다⁠. 창을 열면 산문 돌 너머 비무장 담이 보였고⁠, 바람이 그쪽에서 불면 함성이 방 안까지 들어왔다⁠. 방 가운데 탁자에 다기가 차려져 있었다⁠. 흙으로 빚은 작은 주전자 하나와 잔 두 개였다⁠. 탁문석은 창가에 앉아 찻잎을 손가락으로 집어 주전자에 넣고 있었다⁠. 손가락이 희고 길었다⁠. 찻잎을 세듯이 넣었다⁠. 주전자 손잡이에 금이 한 줄 가 있었고⁠, 이 금을 따라 옻칠로 이은 자국이 아침 볕에 반짝였다⁠. 깨진 것을 버리지 않고 이어 쓰는 사람이었다⁠. 사람도 그렇게 쓸 것이다⁠. 깨뜨리고⁠, 이어 붙이고⁠, 다시 쓴다⁠.

“⁠앉으시오⁠, 왕 선생⁠. 오늘은 곰 대협의 승부가 있는 날이니 같이 들읍시다⁠. 왕 선생은 귀로 듣고⁠, 나는 그 귀를 듣겠소⁠.⁠”

나는 앉았다⁠. 앉으니 창밖으로 담이 보였다⁠. 심운학이 나한테 금한 건 담 너머를 보는 것이었는데⁠, 여기서는 담만 보이고 담 너머는 안 보였다⁠. 탁문석은 이것까지 셈해서 이 방을 고른 사람이었다⁠.

탁문석이 물을 따랐다⁠. 첫물은 버리고 두 번째 물을 잔에 채웠다⁠. 차향이 올라왔다⁠. 숲에서 맡던 송진 냄새와 비슷한데 더 떫었다⁠.

“⁠왕 선생은 내가 왜 개봉에서 왕 선생 판을 그렇게 쉽게 사 주었는지 아시오⁠?⁠”

“⁠물레판이 되면 거리 사람들 돈이 다 한 독으로 모이니까요⁠. 승부를 미리 사 두면 그 독을 통째로 들고 가실 수 있고요⁠.⁠”

“⁠반만 맞았소⁠.⁠” 탁문석이 잔을 들었다⁠. “⁠나머지 반은 귀요⁠. 대회 승부를 사고팔면 그걸 눈치채는 놈이 꼭 하나 나오오⁠. 그런 놈은 판 밖에 두면 시끄럽고⁠, 판 안에 두면 조용하오⁠. 빚을 진 놈은 더 조용하고⁠.⁠”

“⁠제가 조용합니까⁠?⁠”

“⁠조용하지 않았지⁠.⁠” 탁문석이 웃었다⁠. 탁자를 두 번 두드렸다⁠. 톡⁠, 톡⁠. “⁠철선자를 데려갔고⁠, 하 소저를 찾아갔고⁠, 내 판꾼을 이겼소⁠. 그리고 어제는 곰한테 만두를 먹였다더군⁠.⁠”

창밖에서 첫 함성이 들렸다⁠. 본선 사흘째 첫 승부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곰의 승부는 세 번째였다⁠. 나는 찻잔을 들었다⁠. 손이 떨렸는지 찻물이 잔 가장자리에서 출렁였다⁠. 탁문석이 이걸 보았다⁠.

“⁠차가 뜨겁소⁠?⁠”

“⁠예⁠. 뜨겁습니다⁠.⁠”

*

탁문석은 승부를 기다리는 동안 이야기를 했다⁠. 말을 아끼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 방에서는 아니었다⁠. 이긴 셈이 선 사람은 말이 많아진다⁠. 개봉 뒷골목에서 처음 판을 가졌을 때⁠, 빚을 처음 사들였을 때⁠. 사람은 약점의 값이라고 말했다⁠. 고수도 장사꾼도 관리도 다 같다⁠.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고⁠, 값이 안 매겨지는 약점도 없다⁠.

“⁠그럼 방주님 약점은 얼마입니까⁠?⁠”

“⁠나는 약점이 없소⁠. 돈이 내 것이 아니니까⁠.⁠”

나는 이 말을 귀에 담았다⁠. 돈이 내 것이 아니니까⁠.

“⁠그럼 누구 돈입니까⁠?⁠”

“⁠개봉에 돈을 대 주는 분들이 계시오⁠. 이자를 받고⁠. 나는 그 돈을 굴려 드리는 사람이고⁠.⁠” 탁문석이 잔을 내려놓았다⁠. “⁠왕 선생⁠, 나는 결승 승부 하나 때문에 숭산에 온 게 아니오⁠. 대회가 끝나면 개봉 노름판을 하나로 묶을 거요⁠. 그러려면 이번 판이 크게⁠, 깨끗하게 끝나야 하오⁠. 깨끗하게 내 쪽으로⁠.⁠”

두 번째 함성이 지나갔다⁠. 다음 바람이 바뀌어 산 쪽 소리가 잠시 끊겼다⁠. 나는 숨을 고르며 바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탁문석도 기다렸다⁠. 우리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담만 보이는 창밖을 보았다⁠.

바람이 돌아왔다⁠. 세 번째 승부였다⁠. 웅성거림 위로 곰⁠, 곰⁠, 하고 사람들이 곰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거리에서 돈을 건 사람들이 산까지 올라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쇠몽둥이가 비무대 바닥에 쿵 내려놓이는 소리가 들렸다⁠. 관중석이 웅성거렸다⁠. 곰은 끝내 이 몽둥이를 쓰지 않을 작정이었다⁠. 웅 도사의 검이 칼집에서 나왔다⁠. 가볍고 빠른 검이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날렵하게 끊겼다⁠. 한 번⁠, 두 번⁠, 세 번⁠. 검이 무언가를 스치고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곰의 옷이었다⁠. 다음 곰이 숨을 크게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담 너머인데도 들렸다⁠. 이 숨은 무언가를 참는 숨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드는 숨이었다⁠.

함성이 산을 흔들었다⁠.

탁문석의 찻잔이 입 앞에서 아주 잠깐 멈췄다⁠. 탁문석은 잔을 마저 들어 마셨다⁠.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처음으로 컸다⁠.

*

총관이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숨이 턱에 닿아 있었다⁠.

“⁠곰이⁠, 곰이 이겼습니다⁠. 몽둥이는 안 쓰고⁠, 도사를 번쩍 들어서⁠, 비무대 밖에 살살 내려놨습니다⁠. 그러고는 도사한테 절을 했습니다⁠.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예⁠. 들어서 미안하다고요⁠.⁠”

나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탁문석은 웃지 않았다⁠. 총관을 내보내고 나를 보았다⁠. 우물 바닥 같은 눈이었는데⁠, 이 바닥에 처음으로 무언가가 비쳤다⁠. 아주 차가운 것이었다⁠.

“⁠이천 냥이군⁠.⁠”

탁문석이 탁자 너머로 손을 뻗어 악수하듯이 부드럽게 내 왼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서늘했다⁠. 나는 손을 빼려 했지만 이 손이 놓아주지 않았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의 손이 무공을 아는 사람의 손에서 빠져나갈 길은 없다⁠. 탁문석은 내 새끼손가락 하나만 골라 쥐었다⁠.

“⁠귀는 남겨 두겠소⁠. 아직 쓸모가 있으니⁠.⁠”

새끼손가락이 뒤로 꺾였다⁠. 소리부터 들렸다⁠. 마른 나뭇가지가 젖은 천 속에서 부러지는 소리였다⁠. 다음 아픔이 손끝에서 팔꿈치를 지나 어깨까지 한 번에 올라왔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노름꾼은 소리를 안 지른다는 건 다 거짓말이다⁠. 손가락이 꺾이면 지른다⁠. 눈앞이 하얗게 되었다가 돌아왔다⁠. 탁문석은 내 손을 놓고 찻주전자를 기울여 제 잔을 채웠다⁠.

“⁠왕 선생은 주사위를 오른손으로 굴리지⁠. 그래서 왼손으로 했소⁠.⁠”

“⁠세심하시네요⁠.⁠” 이가 딱딱 부딪쳐서 말이 쪼개졌다⁠.

“⁠결승은 이레 뒤요⁠. 나는 결승에 내 전부를 걸겠소⁠. 왕 선생 쌀독이 그 돈을 다 받을 수 있게 독을 더 구해 두시오⁠.⁠” 탁문석이 일어났다⁠. 발소리 없이 창가로 가서 담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곰 대협은 다음 승부에 못 나올 거요⁠. 산골 사람은 산에서 길을 잘 잃지⁠.⁠”

*

갑례는 내 손가락을 젓가락 두 짝으로 고정했다⁠. 부엌 부뚜막 앞이었다⁠. 이 여자는 내 손을 탁자에 눕히고 한 번에 잡아당겨 뼈를 맞췄다⁠. 나는 또 소리를 질렀다⁠. 이번엔 탁문석 앞에서보다 컸다⁠. 구팔봉이 옆에서 내 입에 행주를 물렸다⁠.

“⁠왕년에 나는 손가락 셋이 한꺼번에 부러졌는데 소리 한 번 안 냈다⁠.⁠”

“⁠행주 물고 있어서 안 내셨겠지요⁠.⁠” 행주 사이로 말했더니 웅얼웅얼 소리만 났다⁠.

갑례가 젓가락을 무명실로 칭칭 감으며 말했다⁠. “⁠이 젓가락 우리 집에서 제일 좋은 거야⁠. 대나무⁠. 값은 판 몫에서 뗀다⁠.⁠”

“⁠젓가락 값도 받으세요⁠?⁠”

“⁠만두 값도 받는다⁠.⁠” 이 여자가 내 품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아침에 쑤셔 넣은 식은 만두가 아직 거기 있었다⁠. 짓눌려서 납작해져 있었다⁠. “⁠안 먹었어⁠?⁠”

“⁠차를 마셨습니다⁠.⁠”

“⁠그놈 차를 마시고 내 만두를 안 먹었다고⁠?⁠”

이 여자가 국자를 들었다⁠. 나는 부러진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국자가 내려왔다⁠.

*

해 질 녘 쌀독 세 개가 다 열렸다⁠. 비탈에 사람이 꽉 찼다⁠. 갑례가 물표를 받고 은자를 내주었다⁠. 곰에게 건 사람들이 줄을 섰는데⁠, 이 줄이 산문 돌 아래까지 이어졌다⁠. 국숫집 주인이 은자를 받아 들고 펄쩍 뛰었다⁠. 아미파 여승이 받은 은자를 손바닥에 놓고 오래 내려다보다가 합장했다⁠. 무당 도사들은 자기 사형인 웅 도사가 졌는데도 곰에게 걸었던 터라 은자를 받으며 서로 눈치를 보았다⁠.

흑룡방의 이천 냥이 그렇게 거리로 흩어졌다⁠. 판 몫은 이백팔십 냥⁠. 갑례 몫을 떼고 이백오십이 내 손에 들어왔다⁠. 침상 밑 무명 자루에 넣으니 오백 냥이 넘었다⁠. 빚 천칠백 냥까지 아직 멀었지만 처음으로 셈이 보이기 시작했다⁠.

줄이 한창 길 때 하원비가 비탈을 내려왔다⁠. 이 여자도 이날 본선 승부를 이기고 오는 길이었다⁠. 칼집이 허벅지에 닿는 소리가 일정했다⁠. 맞은편 흑룡방 객잔 이층 창에 사람 그림자가 둘 서 있었다⁠. 나는 이걸 알았고⁠, 이 여자도 알았을 것이다⁠.

이 여자가 탁자 앞에서 멈췄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물표만 받고 은자만 세었다⁠. 젓가락 감은 왼손을 탁자 밑으로 내렸다⁠. 숲에 한 번 간 값을 남의 손가락으로 치를 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고개를 안 드는 것뿐이었다⁠.

탁자 위에 무언가 놓이는 소리가 났다⁠. 작은 질그릇이 나무를 치는 소리였다⁠. 뚜껑을 덮은 손가락만 한 약단지였다⁠. 쑥과 송진을 함께 졸인 냄새가 났다⁠.

“⁠산골 약이다⁠.⁠” 이 여자가 말했다⁠. 거리의 웅성거림에 묻힐 만큼 낮았다⁠. “⁠뼈에 바르는 거 아니다⁠. 귀에 발라라⁠.⁠”

나는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 여자도 더 서 있지 않았다⁠. 칼집 소리가 멀어졌다⁠. 이번엔 한 박자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나는 약단지를 소매 속에 넣었다⁠. 이날 밤 행주를 풀고 이 약을 귀에 발랐다⁠. 차갑다가 뜨거워졌다⁠. 귓바퀴의 칼자국이 이 약을 다 받아먹었다⁠.

개방 거지는 줄 맨 끝에 섰다⁠. 동전 일곱 닢을 걸었던 거지가 받아 간 것은 은자 세 닢과 동전 몇 개였다⁠. 거지는 은자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 동안 소리를 들었다⁠. 은자끼리 부딪치게 흔들어 보고⁠, 귀에 대 보고⁠, 이로 깨물어 보았다⁠.

“⁠진짜요⁠?⁠”

“⁠진짜입니다⁠.⁠”

거지는 은자 한 닢을 갑례 앞에 내밀었다⁠. “⁠만두⁠. 제일 큰 걸로 다섯 개⁠. 곰 대협 드릴 거요⁠.⁠”

갑례가 만두를 쪄서 기름종이에 쌌다⁠. 거지가 이걸 들고 비탈을 올라갔다⁠. 곰이 묵는 여인숙은 산문 돌 근처 숲 가장자리였다⁠. 다리를 저는 거지가 만두를 끌어안고 비탈을 오르는 소리를⁠, 나는 오래 들었다⁠. 한 걸음 디딜 때마다 기름종이가 바스락거렸다⁠.

곰은 거지가 가져간 만두를 다 먹었다고 했다⁠. 나는 이 소식을 이날 밤 들었다⁠. 그리고 이 밤이 끝나기 전에 다른 소식도 들었다⁠. 곰의 여인숙에 흑룡방 사내 여럿이 몽둥이를 들고 올라갔다고⁠. 곰이 이들을 하나씩 들어 숲에 살살 내려놓았는데⁠, 마지막 한 놈이 곰의 발목을 쇠갈고리로 찍었다고⁠.

부러진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젓가락이 무명실 속에서 삐걱거렸다⁠. 나는 침상 밑 무명 자루를 내려다보았다⁠. 오백 냥 남짓으로는 곰의 발목 값에 턱없이 모자랐다⁠.

9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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