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229자)

쌀독을 지키는 밤

천하제일 비무대회의 판돈은 내가 받는다 · 설묵향

곰은 다음 날 아침 비무대에 섰다가 내려왔다⁠. 쇠갈고리에 찍힌 발목을 무명으로 동여매고 쇠몽둥이를 지팡이 삼아 올라갔는데⁠, 심판을 보던 계율원 집사승이 곰의 발목을 한 번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고 했다⁠. 다친 몸으로 비무를 하면 상대에게도 위험하다고⁠. 곰은 다치지 않은 다리로 서 보이겠다고 한 다리로 섰고⁠, 이 꼴이 학 같아서 관중석이 웃었고⁠, 집사승은 웃지 않았다⁠.

“⁠출전 불가⁠. 기권으로 친다⁠.⁠”

곰은 몽둥이를 끌고 산을 내려왔다⁠. 거지가 이 옆에서 다리를 절며 같이 내려왔다⁠. 둘 다 절룩거려서⁠, 멀리서 보면 하나가 걷는 것 같았다⁠.

철선자가 원로석에서 내려와 내 귀에 대고 말했다⁠. “⁠그 집사승⁠, 어젯밤 흑룡방 총관하고 산문 돌 뒤에서 만났다⁠. 내가 봤다⁠. 소매에서 소매로 무언가 건너가더라⁠.⁠”

“⁠무엇이 건너갔는지는 보셨습니까⁠?⁠”

“⁠묵직한 거⁠.⁠”

“⁠묵직한 거면 은자지요⁠.⁠”

“⁠아니면 떡이거나⁠.⁠” 철선자가 혀를 찼다⁠. “⁠소림 중이 떡을 소매로 받을 리는 없지⁠.⁠”

*

흑룡방이 온 건 이날 밤 이경⁠, 거리 등불이 반쯤 꺼졌을 때였다⁠. 발소리가 먼저 왔다⁠. 비탈 건너편 흑룡방 객잔 문이 열리고⁠, 스무 명쯤 되는 발이 한꺼번에 비탈을 내려왔다⁠. 발소리가 고르지 않았다⁠. 술 먹은 발⁠, 몽둥이를 끄는 발⁠, 뒤꿈치로 걷는 발⁠. 빚 받으러 가는 사람들의 뒤꿈치였다⁠.

갑례가 부엌에서 나왔다⁠. 손에 국자가 들려 있었다⁠. 이 여자는 처마 밑 쌀독 셋을 한 번 둘러보고⁠, 치마를 걷고 가운데 독 뚜껑 위에 올라앉아 두 다리를 독 양옆으로 내렸다⁠. 독이 이 여자 무게를 받고 낮게 울렸다⁠.

“⁠안주인⁠, 들어가 계세요⁠.⁠”

“⁠네가 들어가⁠, 이 화상아⁠. 손가락 하나 부러진 놈이 뭘 지켜⁠.⁠”

맞는 말이라 나는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쌀독 옆에 섰다⁠. 젓가락 감은 왼손을 등 뒤로 숨겼다⁠. 구팔봉이 지팡이를 짚고 내 옆에 와서 섰다⁠.

“⁠스승님도 들어가세요⁠.⁠”

“⁠내가 왕년에 개봉 북문에서 서른 명하고⁠…⁠…⁠.⁠”

“⁠그 얘기는 이따 해 주세요⁠.⁠”

흑룡방 사내들이 처마 앞에 반원으로 섰다⁠. 맨 앞의 총관은 이쑤시개 대신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몽둥이 끝이 땅을 두드렸다⁠.

“⁠왕 선생⁠, 어제 곰 승부는 사기요⁠. 곰이 우리한테 은자를 받고 지겠다고 해 놓고 이겼소⁠. 사기 승부에 건 돈은 판이 물어 주는 게 노름판 법이오⁠. 이천 냥⁠, 오늘 밤 받아 가겠소⁠.⁠”

“⁠곰한테 준 은자는 곰한테 받으시지요⁠.⁠”

“⁠곰은 산에서 길을 잃었소⁠.⁠”

“⁠발목이 다쳐서 길을 못 잃던데요⁠.⁠”

총관이 몽둥이를 들어 내 앞 탁자를 내리쳤다⁠. 탁자 다리 하나가 부러지며 물표가 쏟아졌다⁠. 나무 물표들이 땅에 흩어지며 딸그락딸그락 굴렀다⁠. 구팔봉이 지진 동그라미들이 등불 아래 굴러다녔다⁠.

“⁠이 독에 든 건 결승에 건 사람들 돈이오⁠.⁠” 갑례가 독 위에서 말했다⁠. 목소리가 크지 않았는데 비탈 위까지 갔다⁠. 국수 반죽을 치대는 목소리였다⁠. “⁠하 소저한테 건 거지 영감 동전⁠, 국숫집 사내 은자⁠, 아미파 스님들 시주 돈⁠. 너희 돈은 한 닢도 없어⁠. 가져가려면 나를 먼저 들어내⁠.⁠”

*

탁문석은 이때 왔다⁠. 사내들의 반원이 갈라지고⁠, 발소리 없는 사람이 이 사이로 걸어 들어왔다⁠. 부러진 탁자를 내려다보고⁠, 쏟아진 물표를 내려다보고⁠, 독 위에 앉은 갑례를 올려다보았다⁠.

“⁠안주인⁠, 오랜만이오⁠.⁠”

“⁠나는 당신 처음 보는데⁠.⁠”

“⁠나는 안주인 남편을 보았소⁠. 열 해 전 개봉에서⁠. 국수 육수 냄새가 나던 순한 사람이었지⁠.⁠” 탁문석이 탁자를 두드리려다 탁자가 부러져 있는 걸 보고⁠, 대신 쌀독을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렸다⁠. 톡⁠, 톡⁠. 독이 울렸다⁠. “⁠그 양반 빚이 아직 남았다면 남았소⁠.⁠”

“⁠다 갚았어⁠. 내가 삼 년 국수 말아서⁠.⁠”

“⁠이자는⁠?⁠”

갑례가 국자를 들었다⁠. 탁문석은 피하지 않았다⁠. 국자가 탁문석의 이마 한 치 앞에서 멈췄다⁠. 이 여자가 멈춘 거였다⁠. 탁문석은 이걸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이때 비탈 위에서 대나무 통을 똑똑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다리를 저는 발소리가 이 소리를 따라 비탈을 내려왔다⁠. 개방 거지였다⁠. 이 사람이 대나무 통을 미친 듯이 두드리며 소리쳤다⁠.

“⁠흑룡방이 쌀독을 턴다⁠! 하 소저 돈을 턴다⁠! 다들 나와⁠!⁠”

객잔 아홉 채의 창이 하나씩 열렸다⁠. 국숫집 문이 열렸다⁠. 등불이 하나⁠, 둘⁠, 열⁠, 스물 켜졌다⁠. 비탈 위에서부터 아래로 불빛이 번져 내려왔다⁠. 사람들이 나왔다⁠. 국숫집 사내는 밀대를 들고⁠, 노새 끄는 사람들은 채찍을 들고⁠, 무당 도사 셋은 칼을 들고⁠, 아미파 여승들은 아무것도 들지 않고 염주만 감고 나왔다⁠. 곰이 쇠몽둥이를 짚고 절룩거리며 내려왔다⁠. 이 큰 몸이 등불을 가렸다⁠.

흑룡방 사내 스물이 반원으로 서 있던 자리를⁠, 거리 사람 백이 둘러쌌다⁠. 발소리가 다 달랐다⁠. 그러나 다들 같은 쪽을 향해 서 있었다⁠.

*

싸움은 짧았다⁠. 흑룡방 사내 하나가 겁을 먹고 몽둥이를 휘둘렀는데⁠, 이게 국숫집 사내의 등불을 쳤다⁠. 등불이 깨지고 기름이 땅에 번지며 불이 붙었다⁠.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이 순간 철선자가 비탈 아래 여인숙 쪽에서 휜 쇠부채를 펼쳐 들고 뛰어 올라왔다⁠. 부채살 셋이 휘어 있어서 펼 때 소리가 엉망이었다⁠. 촤르⁠, 덜컥⁠, 르륵⁠. 그래도 이 부채가 몽둥이 셋을 한꺼번에 쳐 냈다⁠.

“⁠노인네 하나 이기려고 스물이 왔느냐⁠!⁠”

흑룡방 사내 하나가 칼을 뽑았다⁠. 등불 아래 칼날이 번쩍했다⁠. 철선자의 부채가 이 칼을 막았는데⁠, 휜 살 사이로 칼끝이 미끄러져 들어갔다⁠. 천 찢어지는 소리⁠, 다음 살이 갈라지는 소리⁠. 노인이 숨을 짧게 끊었다⁠. 맞은 사람의 숨이었다⁠. 엿새 전 비무대에서 들었던 숨과 달랐다⁠. 이번엔 진짜였다⁠.

곰이 이 사내를 들었다⁠. 두 손으로 허리를 잡아 번쩍 들어 올려⁠, 흑룡방 객잔 쪽 비탈에 살살 내려놓았다⁠. 살살이라기엔 사내가 두 바퀴를 굴렀다⁠. 곰이 미안하다고 했다⁠.

구팔봉도 싸웠다⁠. 본인 말로는 그렇다⁠. 흑룡방 사내 하나가 쌀독 쪽으로 달려들 때 노인이 지팡이를 슬쩍 내밀었고⁠, 사내가 거기 걸려 코부터 땅에 박혔다⁠. 노인은 이 사내 등에 지팡이 끝을 얹고 거리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보았느냐⁠! 구씨 지팡이 열여덟 수 가운데 셋째⁠, 길에 누운 뱀이다⁠!⁠”

“⁠스승님⁠, 그냥 내미신 거잖아요⁠.⁠”

“⁠내미는 것도 수다⁠. 언제 내미느냐가 열여덟 가지야⁠.⁠”

사내가 일어나려 하자 노인이 지팡이에 체중을 실었다⁠. 예순다섯 노인의 몸무게라 사내는 쉽게 일어났다⁠. 노인이 지팡이째 뒤로 나자빠졌다⁠. 내가 이 노인을 받았다⁠. 젓가락 감은 손가락이 노인 등에 눌려 나는 또 소리를 질렀다⁠. 거리 사람들이 웃었다⁠. 싸움판 한가운데서 웃음이 터지자 흑룡방 사내들이 어리둥절해서 몽둥이를 반쯤 내렸다⁠. 노인은 이것도 웃겨서 칼을 내리게 하는 네 번째 수라고 우겼다⁠.

탁문석이 손을 들었다⁠. 사내들이 멈췄다⁠. 둘러싼 등불들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보았다⁠. 국숫집 사내⁠, 거지⁠, 도사들⁠, 여승들⁠, 곰⁠. 그리고 독 위의 갑례⁠, 독 옆의 나⁠. 탁문석의 눈이 셈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 셈이 들렸다⁠. 지금 이 거리를 다 패면⁠, 엿새 뒤 결승에 돈을 걸 사람이 없다⁠.

“⁠오늘은 돌아가겠소⁠.⁠” 탁문석이 말했다⁠. “⁠곰 승부 값은 결승에서 받겠소⁠. 결승 심판은 계율원 집사 스님이 보시오⁠. 깨끗한 걸 좋아하시는 분이지⁠.⁠”

탁문석이 돌아섰다⁠. 사내들이 뒤를 따랐다⁠. 발소리가 비탈을 건너갔다⁠. 탁문석의 발소리만 없었다⁠.

*

철선자의 옆구리 상처는 한 뼘이었다⁠. 깊지 않았지만 피가 많이 났다⁠. 갑례가 소주를 붓고 무명으로 동여맸다⁠. 노인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갑례가 무명 끝을 이로 물어 끊는 소리⁠, 매듭을 두 번 당겨 조이는 소리가 났다⁠. 이때마다 노인의 숨이 짧게 끊겼다가 길게 이어졌다⁠. 노인은 이를 꽉 물고 내 얼굴을 보았다⁠.

“⁠너는 소리 질렀다며⁠.⁠”

“⁠손가락이라서요⁠.⁠”

“⁠핑계는⁠.⁠” 노인이 웃다가 옆구리를 잡았다⁠. 휜 부채가 노인의 무릎 위에 있었다⁠. 이번 싸움으로 살 하나가 더 휘어 있었다⁠. 아홉 번째 살은 이음매까지 멀쩡했다⁠.

“⁠어른⁠, 집사승 이야기 말인데요⁠.⁠”

“⁠장로한테 내가 말하겠다⁠. 내가 넘어진 것도⁠, 내가 본 것도⁠.⁠” 노인이 부채를 쥐었다⁠. “⁠부끄러운 건 한 번에 다 하는 게 낫다⁠. 나눠서 하면 두 번 부끄럽다⁠.⁠”

“⁠장로님이 어른 말을 믿을까요⁠?⁠”

“⁠내 말은 안 믿어도 내 옆구리는 믿겠지⁠.⁠”

*

새벽이 가까워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갑례와 나만 쌀독 옆에 남았다⁠. 이 여자는 쏟아진 물표를 하나씩 주워 독 위에 쌓고 있었다⁠. 나도 젓가락 감은 손으로 거들었다⁠. 구팔봉의 손이 떨려 다 다르게 생긴 동그라미를 하나씩 주워 포갰다⁠.

“⁠열 해 전에⁠.⁠” 갑례가 물표를 쌓다가 말했다⁠. “⁠우리 영감이 개봉에 국수틀을 사러 갔어⁠. 흑룡방 놈들이 좋은 틀 파는 데 안다고 데려간 데가 노름방이었지⁠. 영감이 은자를 다 털리고 돌아왔어⁠. 객잔 문서만 품에 넣고⁠.⁠”

나는 물표를 줍던 손을 멈췄다⁠.

“⁠영감 말이⁠, 마지막 판에 문서를 걸었는데⁠, 판꾼 뒤에 젊은 놈 하나가 서 있었대⁠. 차 시중드는 놈처럼⁠. 그런데 그놈이 귀가 밝아서 판꾼한테 손가락으로 주사위 눈을 알려 주더래⁠. 영감은 그걸 판 끝날 때쯤에야 눈치챘대⁠. 그런데 마지막 판에 그놈이 손가락을 틀리게 폈대⁠. 일부러⁠. 영감이 그걸 봤대⁠. 그 덕에 영감이 그 판을 이겼고⁠, 문서는 들고 왔지⁠.⁠” 갑례가 물표 하나를 손에 쥐고 동그라미를 엄지로 쓸었다⁠. “⁠빚은 남았어⁠. 그 전에 빌린 돈이⁠. 그래서 결국 문서를 맡기고⁠, 영감은 그 겨울에 죽고⁠, 나는 삼 년을 국수 말았지⁠. 영감이 죽기 전에 그러더라⁠. 그 젊은 놈 덕에 문서는 지켰다고⁠. 그놈 은혜는 갚아야 한다고⁠. 그놈이 우리 은자를 다 털어 간 놈인데⁠.⁠”

부엌에서 밤새 끓인 솥에서 국수 육수 냄새가 건너왔다⁠. 닭 뼈와 대파를 오래 고은 냄새였다⁠. 열 해 전 화로 두 개 피운 방에서 맡았던 냄새가 그대로 거기 있었다⁠. 나는 첫날 이 객잔 문 앞에서 이 냄새를 맡고도 몰랐다⁠. 노름꾼의 코는 은자 냄새만 맡는다⁠.

“⁠안주인⁠.⁠”

“⁠왜⁠?⁠”

“⁠그 젊은 놈이 저입니다⁠.⁠”

갑례가 물표를 쥔 채 아주 오래 나를 보았다⁠. 거리 끝에서 닭이 울었다⁠. 한 번⁠, 그리고 한 번 더⁠. 이 여자는 국자를 들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국자는 내려오지 않았다⁠.

“⁠우리 은자 털어 간 것도 너고⁠.⁠”

“⁠예⁠.⁠”

“⁠문서 돌려준 것도 너고⁠.⁠”

“⁠예⁠.⁠”

이 여자가 물표를 독 위에 딸그락 내려놓았다⁠.

“⁠그럼 반은 갚았네⁠.⁠” 갑례가 일어나 치마를 털었다⁠. “⁠나머지 반은 판 몫에서 뗀다⁠. 결승 끝나면⁠.⁠”

“⁠얼마나요⁠?⁠”

“⁠내가 정해⁠.⁠”

이 여자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국자가 솥을 휘젓는 소리가 났다⁠. 나는 쌀독 옆에 혼자 앉아 날이 밝는 소리를 들었다⁠. 닭이 울고⁠, 노새가 울고⁠, 산 위에서 새벽 종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이번엔 세지 않았다⁠.

10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