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264자)

칼끝과 귓바퀴

천하제일 비무대회의 판돈은 내가 받는다 · 설묵향

예선 나흘째부터 내 귀에 눈이 하나 붙었다⁠. 철선자는 강남 원로 자격으로 비무장 원로석에 앉았고⁠, 승부가 하나 끝날 때마다 사람을 산 아래로 내려보냈다⁠. 이 사람이 개방 거지였다⁠. 예선 첫날 첫 판에서 떨어진 거지는 이제 하루 종일 비탈을 오르내렸다⁠. 삯은 소식 하나에 만두 한 개였다⁠.

“⁠하 소저⁠, 일곱 합⁠. 상대 칼을 쳐서 손에서 놓치게 했소⁠.⁠” 거지가 숨을 몰아쉬며 탁자에 손을 짚었다⁠. “⁠만두⁠.⁠”

갑례가 만두를 하나 내주었다⁠. 거지는 이걸 반으로 갈라 김을 후 불고 반만 먹고 반은 품에 넣었다⁠.

“⁠나머지 반은 왜 넣으십니까⁠?⁠”

“⁠다음 소식 갖고 올라갈 때 배고프니까⁠.⁠”

“⁠다음 소식 가져오시면 또 하나 드리잖아요⁠.⁠”

“⁠그건 내려올 때 먹는 거고⁠.⁠” 거지가 다시 비탈을 올라가며 외쳤다⁠. “⁠이 장사가 판보다 낫소⁠!⁠”

이날 오후 거지가 가져온 소식 가운데 하나가 내 등을 서늘하게 했다⁠. 귀면도가 상대의 칼을 반으로 잘랐다고⁠. 칼날이 칼날을 자르는 소리는 산 아래까지 들렸다⁠. 쨍⁠, 이 아니라 찍⁠, 하는 소리⁠. 쇠가 쇠를 무는 소리였다⁠. 이 소리 뒤로 관중석이 한참 조용했다⁠.

“⁠귀면도는 칼을 몇 합 썼습니까⁠?⁠”

“⁠한 합⁠. 탈 쓴 놈이 서 있다가 한 번 휘두르고 끝났소⁠. 만두⁠.⁠”

철선자 말이 맞았다⁠. 귀면도는 져 주는 상대가 필요 없는 칼이었다⁠. 그런데도 탁문석은 결승을 사 두었다⁠. 이길 놈을 이기게 만드는 게 아니라⁠, 이길 줄 알았던 편에 돈이 다 쏠리게 만드는 일⁠. 나는 쌀독을 내려다보았다⁠. 물레판으로 바꾼 뒤로 하원비에게 걸린 돈은 날마다 불었다⁠. 귀면도에게는 아직 흑룡방 사람들 말고는 거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탈을 쓴 놈한테 돈을 거는 건 얼굴 없는 놈한테 돈을 빌려주는 것 같다고⁠, 국숫집 주인이 말했다⁠.

*

밤에 비탈 위 소나무 숲으로 올라갔다⁠. 산문 돌보다 한참 옆이라 관부의 땅이었고⁠, 심운학의 금에도 걸리지 않았다⁠. 산 아래로 굴러떨어지기 싫어서 이것만은 미리 확인해 두었다⁠.

소나무 숲은 바람이 불면 귀가 바빠진다⁠. 솔잎 수천 개가 한꺼번에 서걱거리고⁠, 송진 냄새가 코를 찌르고⁠, 발밑에는 마른 솔잎이 두껍게 깔려서 밟을 때마다 솜이불처럼 꺼졌다⁠. 나는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냈다⁠. 칼 쓰는 사람에게 조용히 다가가는 놈은 베인다⁠. 철선자가 해 준 말이었다⁠. 노름판에서도 그렇다⁠. 소리 없이 뒤에 선 놈은 늘 남의 패를 보러 온 놈이다⁠.

숲 가운데 공터에서 숫돌 소리가 났다⁠. 쓱⁠, 쓱⁠. 칼을 가는 소리가 아니라 칼을 닦는 소리였다⁠. 숫돌이 아니라 기름 먹인 천이 칼날을 따라 미끄러졌다⁠. 일정했다⁠. 아주 일정했는데⁠, 일곱 번에 한 번씩 손이 멈췄다⁠.

“⁠하 소저⁠, 저는 산 밑에서 내기판을 여는⁠…⁠…⁠.⁠”

말이 거기까지 나왔을 때 왼쪽 귀가 차가웠다⁠. 칼날이 귓바퀴에 닿아 있었다⁠. 닦던 소리가 멈춘 것도⁠, 칼이 공기를 가른 것도 듣지 못했다⁠. 듣지 못한 건 내 평생 처음이었다⁠. 이 사실이 귀가 차가운 것보다 더 무서웠다⁠.

“⁠안다⁠. 첫날 쌀독 옆에 서 있던 놈⁠.⁠”

목소리가 바로 내 옆에서 났다⁠. 하원비는 나보다 반 뼘 작았는데⁠, 칼끝을 들고 있으니 나보다 커 보였다⁠. 달빛이 솔잎 사이로 들어와 이 여자 이마에 얼룩을 만들었다⁠. 숨이 고요했다⁠. 칼을 든 사람이 저렇게 숨을 고요하게 쉴 수 있다는 것도 나는 이날 처음 알았다⁠.

“⁠귀 하나로 먹고사는 놈이라 그것만은⁠…⁠…⁠.⁠”

“⁠그 귀로 벽에 붙어 엿들었지⁠.⁠”

나는 숨을 삼켰다⁠. 이 여자는 알고 있었다⁠. 첫날 밤 내가 일어나 앉던 소리를⁠, 벽 너머에서 들었던 거다⁠. 고수의 귀는 노름꾼의 귀와 다르지만⁠, 귀는 귀였다⁠.

“⁠엿들은 건 아니고⁠, 들렸습니다⁠. 벽이 얇아서요⁠.⁠”

“⁠엿들은 값으로 귀 하나면 싸다⁠.⁠”

칼끝이 살을 아주 조금 눌렀다⁠. 따끔했고⁠, 다음 뜨거웠다⁠. 귓바퀴를 타고 무언가 따뜻한 것이 목덜미로 흘러내렸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면 하나가 아니라 반쪽이 될 것 같았다⁠.

“⁠동생 손가락이 열 개 다 붙어 있다고 하더군요⁠.⁠”

칼이 멈췄다⁠. 누르지도 거두지도 않았다⁠.

“⁠그 말을 나한테 왜 하지⁠?⁠”

“⁠하 소저가 결승에서 지면 거리 사람들 돈이 다 흑룡방으로 갑니다⁠. 첫날 동전 세 닢을 하 소저한테 건 거지가 있었는데⁠, 그 영감 오늘까지 계속 하 소저한테 겁니다⁠. 만두 반쪽 남겨 가며⁠.⁠”

“⁠그래서⁠?⁠”

“⁠그래서 동생분을 빼내 오면⁠, 하 소저는 결승에서 이길 수 있지 않습니까⁠?⁠”

하원비가 웃었다⁠. 소리 없이 입꼬리만 움직였는데⁠, 이 움직임이 칼을 타고 내 귀에 전해졌다⁠. 칼이 아주 조금 떨렸다⁠.

“⁠너는 판에서 몇 할을 떼지⁠?⁠”

“⁠한 할입니다⁠.⁠”

“⁠내가 이기면⁠?⁠”

“⁠한 할 뗍니다⁠.⁠”

“⁠내가 지면⁠?⁠”

나는 대답을 늦게 했다⁠. 늦게 해도 답은 같았다⁠.

“⁠…⁠…한 할 뗍니다⁠.⁠”

“⁠그럼 너는 내가 이기든 지든 아무래도 좋은 사람이다⁠.⁠” 칼이 내 귀에서 떨어졌다⁠. 이 여자는 한 걸음 물러나 칼을 천으로 한 번 훔쳤다⁠. 내 피가 천에 묻었다⁠. “⁠노름꾼 말은 안 믿는다⁠. 내 동생이 노름꾼 말을 믿다가 이렇게 됐다⁠.⁠”

*

맞는 말이었다⁠. 맞는 말 앞에서 노름꾼이 하는 일은 하나다⁠. 다른 판을 깐다⁠. 나는 귀를 손바닥으로 누르고 솔잎 위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풀려서 앉은 건데⁠, 앉고 나니 이게 판을 까는 자세처럼 보였으면 했다⁠.

“⁠하 소저⁠, 제가 하 소저 칼을 듣고 맞혀 보겠습니다⁠. 맞히면 제 말 한마디만 더 들어 주십시오⁠.⁠”

“⁠무슨 소리냐⁠?⁠”

“⁠칼을 휘둘러 보십시오⁠. 초식 이름을 맞히겠습니다⁠.⁠”

이 여자는 나를 한참 보더니⁠, 칼을 들었다⁠. 칼이 공기를 두 번 갈랐다⁠. 이번엔 들렸다⁠. 들으라고 휘두른 칼이었다⁠. 첫 번째는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와 끝에서 한 번 꺾였고⁠, 두 번째는 땅에 닿을 듯 낮게 쓸었다⁠.

“⁠첫 번째는⁠…⁠… 학이 물을 차는 형상⁠, 백학⁠…⁠…⁠.⁠”

“⁠아니다⁠.⁠”

“⁠그럼 연자가 물을 스치는⁠…⁠…⁠.⁠”

“⁠아니다⁠.⁠”

“⁠독사가 굴로 들어가는⁠?⁠”

“⁠그런 건 없다⁠.⁠” 하원비가 칼을 내렸다⁠. “⁠우리 집 칼은 이름이 없다⁠. 아버지가 산에서 장작 패다 만든 칼이다⁠. 첫 번째가 장작 쪼개기고⁠, 두 번째가 잔가지 치기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웃음이 터졌다⁠. 터지면 안 되는 자리였는데 귀에서 피가 나는 놈이 장작 쪼개기를 학이라고 우긴 꼴이 너무 우스웠다⁠. 이 여자도 웃었다⁠. 이번엔 소리가 났다⁠. 짧고 낮은 소리⁠, 숨을 한 번 내쉬는 것과 비슷한 소리⁠. 솔잎이 서걱거리는 소리에 금방 묻혔다⁠.

“⁠이름은 틀렸어도⁠, 첫 번째 끝에서 손목을 한 번 꺾으셨지요⁠. 장작이 결대로 안 쪼개질 때 꺾는 손목⁠.⁠”

하원비의 웃음이 멈췄다⁠.

“⁠그 꺾임을 결승에서 쓰시면 됩니다⁠. 귀면도는 칼을 한 번에 끝내는 놈이라⁠, 한 번 꺾이는 칼은 못 읽을 겁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

“⁠모릅니다⁠. 다만 칼을 한 번에 끝내는 사람은 두 번째를 들어 본 적이 없지요⁠.⁠”

*

이 여자는 공터 가장자리 소나무 밑에 앉았다⁠. 칼은 무릎 위에 눕혔다⁠. 나는 이 맞은편 솔잎 위에 앉아 귀를 누르고 있었다⁠. 피는 멎어 가는데 손바닥이 끈적했다⁠. 둘 사이에 바람이 지나갔다⁠. 송진 냄새와 피 냄새가 섞였다⁠.

“⁠동생 이름이 복길이다⁠.⁠” 한참 만에 이 여자가 말했다⁠. “⁠스물두 살⁠. 나보다 여섯 살 어리다⁠. 개봉에 장작을 팔러 갔다가 흑룡방 판에 앉았다⁠. 처음엔 땄겠지⁠. 처음엔 다 따⁠.⁠”

철선자도 한 말이었다⁠. 처음엔 다 딴다⁠.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판 앞에 앉은 첫날이 떠올랐다⁠. 나도 땄다⁠.

“⁠어디 있습니까⁠?⁠”

“⁠모른다⁠. 숭산 어딘가⁠. 아침마다 흑룡방 사람이 날 데리고 어느 방 문 앞에 세운다⁠. 문은 안 연다⁠. 문 너머에서 그 애가 노래를 흥얼거린다⁠.⁠” 하원비가 칼자루를 엄지로 쓸었다⁠. “⁠어릴 때 어머니가 부르던 노래다⁠. 그 애는 겁이 나면 그걸 흥얼거린다⁠. 그게 들리면 살아 있는 거다⁠.⁠”

“⁠어느 방인지는 모르고요⁠?⁠”

“⁠눈을 가리고 데려간다⁠. 계단을 스물두 개 올라간다⁠. 그것만 안다⁠.⁠”

이 여자는 이 노래를 조금 흥얼거렸다⁠. 아주 낮게⁠, 세 마디쯤⁠. 산골 아낙들이 빨래하며 부르는 노래 같았다⁠. 끝이 올라가다가 갑자기 내려오는 가락이었다⁠. 나는 이 가락을 귀에 새겼다⁠. 노름꾼은 소리를 새기는 데 익숙하다⁠. 그런데 이 가락은 새기기도 전에 들어와 박혔다⁠.

“⁠도와 드리겠습니다⁠.⁠”

“⁠거절한다⁠.⁠” 하원비가 일어섰다⁠. “⁠남의 도움은 빚이다⁠. 우리 남매는 빚 때문에 이렇게 됐다⁠. 너한테 또 빚지면 결승 다음에 네가 내 동생 손가락을 셀 거다⁠.⁠”

“⁠저는 손가락 안 셉니다⁠. 돈만 셉니다⁠.⁠”

“⁠그게 더 나쁘다⁠.⁠”

이 여자는 칼을 칼집에 넣었다⁠. 이번엔 끝까지 밀어 넣는 소리가 단단했다⁠. 첫날 밤 벽 너머에서 들은 이 떨리는 소리와는 달랐다⁠. 이 여자가 공터를 떠나다가 멈춰 섰다⁠. 등을 보인 채 말했다⁠.

“⁠믿게 하고 싶으면⁠, 그 애를 내 눈앞에 데려와⁠. 말 말고⁠.⁠”

솔잎 밟는 소리가 멀어졌다⁠. 끝까지 일정했다⁠.

*

객잔에 돌아오니 갑례가 부엌에서 나를 보고 국자를 떨어뜨렸다⁠. 목덜미부터 앞섶까지 피가 말라붙어 있었으니 그럴 만했다⁠. 이 여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소주를 한 사발 떠다가 반은 내 귀에 붓고 반은 나한테 마시라고 했다⁠. 귀에 부은 쪽이 훨씬 아팠다⁠. 다음 행주를 찢어 내 머리를 둘둘 감았다⁠. 왼쪽 귀를 덮고 턱 밑으로 돌려 정수리에서 매듭을 지었다⁠. 다 감고 나니 내 꼴이 이 앓는 아이 같았다⁠.

구팔봉이 이 꼴을 보고 숭늉을 뿜었다⁠.

“⁠누구한테 베였냐⁠?⁠”

“⁠하원비요⁠.⁠”

“⁠귀를⁠? 칼잡이가 귀를 베었으면 봐준 거다⁠. 내가 왕년에 낙양에서 판을 뒤집었다가 양쪽 귀를 다 내놓을 뻔했는데⁠, 그때 상대가⁠…⁠…⁠.⁠”

“⁠양쪽 귀 다 붙어 계시잖아요⁠.⁠”

“⁠말을 잘해서 붙어 있는 거다⁠.⁠” 노인이 숭늉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 처자가 뭐라더냐⁠?⁠”

나는 계단 스물두 개 이야기를 했다⁠. 노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노래는 이 여자가 나한테 흥얼거린 거였다⁠. 구팔봉은 계단 이야기를 듣더니 손가락으로 탁자를 하나씩 짚었다⁠. 스물둘까지 세고 멈췄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노인이 아무 말도 안 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숨이 한 번⁠, 사흘째 저녁 탁문석 앞에서처럼 걸렸다⁠.

“⁠스승님⁠, 아시는 데 있으세요⁠?⁠”

“⁠몰라⁠. 늙으면 계단을 못 세⁠.⁠” 노인은 일어나 이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평소보다 느렸다⁠.

나는 탁자에 혼자 남았다⁠. 귀가 욱신거렸다⁠. 행주를 감은 왼쪽 귀로는 소리가 반쯤 먹혔다⁠. 하필이면 왼쪽 귀였다⁠. 대접 안의 주사위는 늘 왼쪽 귀로 먼저 들었다⁠. 나는 품에서 이 빠진 주사위를 꺼내 손바닥에서 굴렸다⁠. 두 알이 손금 위에서 부딪치고⁠, 하나가 반 박자 늦게 멈췄다⁠. 늦는 소리가 오른쪽 귀로만 들렸다⁠.

계단 스물두 개와 산골 빨래 노래⁠, 그리고 반쪽짜리 내 귀가 내가 쥔 전부였다⁠. 판돈치고는 초라했다⁠. 그래도 판은 이미 깔렸다⁠.

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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