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42자)

보름날

천하제일 비무대회의 판돈은 내가 받는다 · 설묵향

보름날 아침 종은 내가 세지 않아도 백여덟 번이었다⁠. 감나무 밑 내 옆에 앉은 복길이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며 대신 셌다⁠. 백여덟에서 멈추자 이 애가 말했다⁠.

“⁠백일곱 아니오⁠? 한 번은 메아리던데⁠.⁠”

“⁠그 소리는 누구한테 들었어⁠?⁠”

“⁠이층 할아버지가 어젯밤에 그러던데⁠. 숭산 종은 마지막 한 번이 메아리라고⁠.⁠”

구팔봉은 이 이층 할아버지라는 말을 들었는지 감나무 위에서 기침을 했다⁠. 갈비뼈가 아파서 못 올라간다던 노인이 새벽에 곰을 깨워 나무에 올려 달라고 했다⁠. 곰은 노인을 들어 가지 위에 살살 얹었다⁠. 살살이었는데도 노인이 비명을 질렀다⁠. 지금은 가지에 배를 걸치고 비무장 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스승님⁠, 거기서 떨어지시면 이번엔 진짜 몽둥이 서른 대 맞은 꼴 됩니다⁠.⁠”

“⁠떨어지면 네가 받아⁠. 이번엔 손가락 두 개 부러져도 소리 지르지 말고⁠.⁠”

산 위에서 함성이 일었다⁠. 결승을 보러 올라간 사람들이 산문 안 비탈을 다 메웠다고 거지가 전해 왔다⁠. 거리는 텅 비었다⁠. 갑례만 남아 쌀독 넷과 은괴 담장을 지키고 있었다⁠. 흑룡방 사내 넷이 이 옆에서 국수를 먹고 있었다⁠. 비단옷 관리는 흑룡방 객잔 이층 창가에 앉아 차를 마셨다⁠. 이 창에서 갑례 객잔 처마가 내려다보였다⁠.

동매가 비탈을 올라왔다⁠. 흑룡방 사람들은 다 산 위로 올라갔거나 은괴 곁에 서 있었는데⁠, 이 여자 혼자 감나무 쪽으로 왔다⁠. 손에 기름종이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이 여자는 나무 밑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사부님⁠, 약입니다⁠. 갈비뼈에 붙이는 거⁠.⁠”

“⁠던져라⁠.⁠”

“⁠떨어뜨리실 겁니다⁠.⁠”

“⁠사부 손을 뭘로 보고⁠.⁠”

동매가 꾸러미를 던졌다⁠. 노인이 손을 뻗었고⁠, 꾸러미는 노인의 손을 지나 노인의 이마를 맞고 내 무릎에 떨어졌다⁠. 복길이 웃음을 참다가 콧물이 나왔다⁠. 노인은 이마를 문지르며 바람 탓이라고 했다⁠. 바람은 한 점도 없었다⁠.

동매는 웃지 않았다⁠. 대신 내 옆에 쪼그려 앉아 땅에 떨어진 감꽃 하나를 주웠다⁠. 손가락으로 굴리며⁠, 나를 보지 않고 말했다⁠.

“⁠귀면도의 칼은 하나가 아닙니다⁠.⁠”

“⁠무슨 소리야⁠?⁠”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거기까지입니다⁠.⁠” 이 여자가 감꽃을 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일어섰다⁠. “⁠당신 귀가 아직 못 외운 소리가 있다고 했지요⁠. 오늘 그 소리가 날 겁니다⁠.⁠”

이 여자는 은괴 곁으로⁠, 흑룡방 쪽으로⁠, 자기가 서야 할 자리로 비탈을 내려갔다⁠. 나는 감꽃을 쥐었다⁠. 꽃잎이 손바닥 안에서 으깨지며 풋내가 났다⁠.

*

탁문석은 해가 산 중턱에 걸렸을 때 왔다⁠. 사내 하나가 등 없는 걸상을 들고 따라왔다⁠. 이 걸상을 감나무 밑 내 옆에 놓으라고 했다⁠. 내 오른쪽⁠, 성한 귀 쪽이었다⁠.

“⁠오늘은 왕 선생 귀 옆에서 듣겠소⁠.⁠”

“⁠산 위로 안 가십니까⁠? 방주님은 담 안에 들어가셔도 되잖아요⁠.⁠”

“⁠가면 칼이 보이지⁠. 칼은 흉하오⁠.⁠” 탁문석이 걸상에 앉았다⁠. 발소리가 났다⁠. 비단옷이 탁문석의 등을 민 어제부터 이 사람 발소리가 들렸다⁠. “⁠왕 선생 귀는 칼보다 깨끗하오⁠.⁠”

복길이 내 왼쪽에서 열 손가락을 무릎 위에 꼭 쥐고 탁문석을 노려보았다⁠. 탁문석은 이 애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미 판에서 빠진 패를 다시 보는 노름꾼은 없다⁠.

“⁠동생이 빠졌는데도 삼만을 거셨지요⁠.⁠” 내가 말했다⁠.

“⁠말했잖소⁠. 동생은 끈이었고 칼은 칼이오⁠.⁠”

“⁠그럼 끈이 풀렸는데 왜 아직 심판을 사 두셨습니까⁠?⁠”

탁문석이 걸상 모서리를 톡⁠, 톡 두 번 두드렸다⁠. 나무 걸상이 탁자보다 소리가 둔했다⁠.

“⁠삼만 냥은 내 돈이 아니라서⁠, 셈을 두 번 하는 거요⁠.⁠”

*

징이 울렸다⁠. 결승의 시작이었다⁠. 담 너머가 한순간 조용해졌다⁠. 수천 명이 한꺼번에 숨을 멈추는 소리는 소리가 아니라 귀가 먹먹해지는 느낌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다른 걸 다 들었다⁠. 감나무 잎이 바람에 뒤집히는 소리⁠, 구팔봉의 쌕쌕거리는 숨⁠, 복길이 침 삼키는 소리⁠, 탁문석의 비단 소매가 무릎을 스치는 소리⁠. 이것들을 다 듣고 나니 담 너머 비무대 위의 두 발소리가 남았다⁠.

하원비의 발은 가볍게 움직였다⁠. 칼집이 허벅지에 닿는 소리가 빠졌으니 칼은 이미 손에 있었다⁠. 귀면도는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숨도 거의 안 쉬었다⁠. 한 번에 끝내는 칼을 가진 사람은 이 한 번까지 기다린다⁠.

“⁠귀면도가 서 있소⁠.⁠” 탁문석이 말했다⁠. “⁠늘 그렇지⁠. 상대가 먼저 오기를⁠.⁠”

“⁠하 소저도 압니다⁠.⁠”

“⁠알아도 가야 하오⁠. 결승은 향 한 대가 다 타면 끝나고⁠, 그때까지 아무도 안 움직이면 심판이 정하오⁠.⁠”

심판이라는 말에 집사승의 소매 소리가 떠올랐다⁠. 나는 탁문석이 왜 심판을 사 두었는지 그제야 들었다⁠. 귀면도가 서 있기만 해도⁠, 원비가 다가가지 않으면 집사승이 귀면도의 손을 들 수 있다⁠. 원비가 다가가면 귀면도의 한 칼이 기다린다⁠.

향이 반쯤 탔을 때 원비가 움직였다⁠. 발소리가 세 번 빨라졌다⁠. 다음 칼이 위에서 비스듬히 바람을 갈랐다⁠. 장작 쪼개기였다⁠. 그리고 찍⁠, 하고 귀면도의 칼이 이 칼을 물었다⁠. 관중석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숨을 멈췄다⁠. 칼날이 잘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원비의 칼이 물리기 직전에 미끄러져 빠졌다⁠.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원비의 소매였다⁠. 피 소리는 없었다⁠.

“⁠아깝군⁠.⁠” 탁문석이 말했다⁠.

“⁠누구한테요⁠?⁠”

이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걸상을 내 쪽으로 반 뼘 당겼다⁠. 차 냄새가 내 성한 귀에 닿았다⁠.

“⁠왕 선생⁠, 셈을 하나 드리지⁠. 지금 저 담 너머로 소리를 질러 하 소저더러 칼을 내리라고 하시오⁠. 그 여자는 왕 선생 말을 들을 거요⁠. 어젯밤 왕 선생 방에서 늦게 나왔다던데⁠.⁠” 탁문석이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 번 두드렸다⁠. “⁠그러면 천칠백 냥⁠, 지금 이 자리에서 지워 드리겠소⁠. 철선자 몫까지⁠. 그리고 개봉에 돌아가면 내 판 하나를 맡기겠소⁠. 그 귀로⁠.⁠”

나는 웃음이 났다⁠. 진짜로 웃겼다⁠.

“⁠방주님⁠, 저는 무공을 모릅니다⁠.⁠”

“⁠알고 있소⁠.⁠”

“⁠무공 모르는 놈이 담 너머로 소리를 지르면 담만 울립니다⁠. 장로님 목소리는 가슴에 와서 앉는데⁠, 제 목소리는 담 앞에서 주저앉아요⁠. 첫날 장로님이 제 맥을 짚고 다 보셨습니다⁠. 내공이 한 톨도 없다고⁠.⁠”

“⁠그럼 사람을 올려 보내시오⁠.⁠”

“⁠올려 보낼 사람이 다 저기 있습니다⁠.⁠” 나는 감나무 위와 내 왼쪽과 비탈 아래를 차례로 가리켰다⁠. 갈비뼈 부러진 노인⁠, 손가락 열 개 다 붙은 동생⁠, 쌀독 위에 앉은 안주인⁠. “⁠다들 하 소저한테 걸었어요⁠.⁠”

탁문석이 걸상을 도로 반 뼘 물렸다⁠.

*

두 번째 합에서 원비가 잔가지 치기를 했다⁠. 낮게 쓸었다⁠. 귀면도의 발이 처음으로 뒤로 반 걸음 움직였다⁠. 경계선 쪽이었다⁠. 관중석이 술렁였다⁠. 귀면도가 경계선을 밟으면 진다⁠. 원비가 따라 들어갔다⁠.

이때 다른 소리가 들렸다⁠. 대나무 깃대가 흔들리고 거기 매단 천이 바람을 먹는 소리였다⁠. 그리고 낮고 기름진 남자 목소리가 외치기 시작했다⁠.

“⁠하원비⁠, 선을⁠—⁠”

집사승이었다⁠. 원비가 선을 밟았다고 외치려는 것이었다⁠. 원비는 선 안에 있었다⁠. 발소리로 들렸다⁠. 선 쪽에 있던 건 귀면도의 발이었다⁠.

이 외침이 끝나기 전에 다른 목소리가 이것을 덮었다⁠. 크지 않은데 산 아래 감나무 밑까지 가슴으로 와서 앉는 목소리였다⁠.

“⁠밟지 않았다⁠.⁠”

염주가 딸깍 울렸다⁠. 다음 누군가 단상에서 내려와 비무대 바닥을 디디는 소리가 났다⁠. 무거운 발이 아니라 오래 걸어온 발이었다⁠. 관중석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심운학이 경계선 위에 섰다⁠. 나는 이 발소리가 멈추는 자리를 들었다⁠. 집사승과 원비 사이였다⁠.

“⁠이 승부는 내가 보겠다⁠. 집사는 깃발을 내려라⁠.⁠”

깃대가 땅에 놓이는 소리가 났다⁠. 대나무가 돌바닥에 닿아 통 하고 울렸다⁠.

탁문석의 비단 소매가 무릎을 스치다 멈췄다⁠. 탁문석은 걸상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작게 웃었다⁠. 소리 없는 웃음이 숨으로만 나왔다⁠.

“⁠심판이 하나 더 있었군⁠.⁠”

“⁠방주님이 셈을 두 번 하셨으면⁠, 장로님은 마흔 해 동안 하신 셈이 있지요⁠.⁠”

*

세 번째 합이었다⁠. 향이 거의 다 탔다⁠. 귀면도가 처음으로 먼저 움직였다⁠. 발이 앞으로 나오며 한 칼이 왔다⁠. 그런데 칼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 밑에 다른 소리가 있었다⁠. 소매 속에서 작은 쇠가 쇠에 걸렸다 풀리는 소리였다⁠. 철컥⁠, 다음 바람을 가르는 아주 가는 소리가 났다⁠. 칼보다 짧고 빠른 것이 날았다⁠.

“⁠소매에 하나 더 있었군요⁠.⁠” 나는 탁문석을 보지 않고 말했다⁠.

이 가는 소리가 무언가에 맞았다⁠. 쇠가 아니라 실이었다⁠. 실이 투둑 끊어졌다⁠. 다음 담 너머에서 이 세상에서 들어 본 적 없는 소리가 났다⁠. 나무 구슬 백여덟 알이 돌바닥에 한꺼번에 쏟아지는 소리였다⁠. 튀고⁠, 구르고⁠, 부딪치고⁠, 또 튀었다⁠. 백여덟 개의 작은 소리가 따로따로 들렸다⁠. 비가 처음 기와에 떨어질 때처럼⁠, 그러나 훨씬 맑게⁠. 관중석이 숨을 들이켰다⁠.

심운학이 염주로 이것을 쳐 낸 것이었다⁠. 비수는 원비의 등에 닿지 못하고 비무대 바닥에 꽂혔다⁠. 칼 손잡이가 웅웅 떠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장작 쪼개기가 왔다⁠. 원비의 칼이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오다 끝에서 한 번 꺾였다⁠. 결대로 안 쪼개지는 장작을 만났을 때 꺾는 이 손목이었다⁠. 귀면도의 한 칼은 처음 오는 칼만 알았다⁠. 두 번째 꺾임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귀면도의 칼이 허공을 갈랐다⁠. 원비의 칼이 멈췄다⁠. 어디서 멈췄는지 나는 들었다⁠. 숨소리가 거기서 끊겼다⁠. 귀면도의 목 앞이었다⁠.

쇠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귀면도의 칼이었다⁠.

징이 울렸다⁠. 산이 터졌다⁠.

*

함성이 감나무를 흔들었다⁠. 구팔봉이 가지 위에서 만세를 부르다 떨어졌다⁠. 곰이 받았다⁠. 노인이 또 비명을 질렀다⁠. 복길이 일어나서 노래를 불렀다⁠. 흥얼거림이 아니라 목청껏⁠, 산골 빨래 노래를⁠. 끝이 올라가다가 내려오는 대목에서 이 애의 목이 갈라졌다⁠. 그래도 끝까지 불렀다⁠.

나는 앉아 있었다⁠. 눈을 뜨지 않았다⁠. 담 너머에서 무릎 꿇은 사람들이 흩어진 염주 알을 줍는 소리가 들렸다⁠. 한 알⁠, 두 알⁠. 누가 세고 있었다⁠. 나는 이 소리를 오래 들었다⁠. 세는 사람이 백일곱에서 멈췄다⁠. 한 알이 모자랐다⁠. 아무도 찾지 못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이 한 알이 원비의 찢어진 소매 속에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탁문석이 걸상에서 일어났다⁠. 걸상 모서리를 톡⁠, 톡 두 번 두드렸는데 이번엔 박자가 정확했다⁠. 웃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눈을 떴다⁠. 정말로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축하하오⁠, 왕 선생⁠. 판이 뒤집혔군⁠.⁠”

“⁠방주님은 삼만 냥을 잃으셨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안 잃었소⁠.⁠” 탁문석이 소매를 털었다⁠. 비단이 사락거렸다⁠. “⁠말했잖소⁠. 그 돈은 내 돈이 아니오⁠. 잃은 사람은 따로 있지⁠.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 왕 선생 쌀독 맞은편 이층 창가에서 차를 마시고 있소⁠.⁠”

이 사람이 비탈을 내려갔다⁠. 발소리가 하나하나 또렷하게 났다⁠. 나는 이 발소리 끝에 흑룡방 객잔 이층 창을 올려다보았다⁠. 창가에 남색 비단옷이 앉아 있었다⁠. 찻잔을 들고⁠, 이쪽을 내려다보면서⁠.

이 사람은 웃지 않았다⁠.

1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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