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254자)
판돈은 내가 받는다
천하제일 비무대회의 판돈은 내가 받는다 · 설묵향
쌀독 뚜껑 넷이 한꺼번에 열리는 소리를 나는 이날 처음 들었다. 무거운 사기 뚜껑이 독 아가리를 긁으며 미끄러지는 소리, 넷이 조금씩 박자가 어긋나서 꼭 첫날 새벽 종 같았다. 갑례가 첫째 독에 손을 넣고 은자 한 줌을 들어 올렸다. 은자끼리 부딪치며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거리가 숨을 들이켰다.
“줄 서. 물표 들고. 하나씩.”
결승을 보고 내려온 사람들이 비탈을 따라 줄을 섰다. 줄이 산문 돌을 지나 산 위로 올라갔다. 심운학의 금이 그어진 돌 안쪽까지 사람들이 물표를 들고 서 있었다. 무승 둘이 이걸 보고도 곤봉을 들지 않았다. 내기를 하는 게 아니라 받는 거라고 우기는 사람들 앞에서 무승들이 서로 얼굴만 보았다.
은괴 담장이 무너지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갑례가 은괴를 쪼개 은자로 바꾸고, 국숫집 사내가 저울을 들고 와 거들었다. 흑룡방 사내 넷은 은괴 담장이 줄어드는 걸 보면서 국수를 한 그릇씩 더 사 먹었다. 갑례는 이 사내들에게도 정가를 받았다.
*
판 몫은 사천삼백 냥이었다. 갑례가 셈을 끝내고 이 숫자를 말했을 때 나는 다리가 풀려 쌀독에 기댔다. 개봉 쥐구멍에서 동전 꾸러미 미끄러지는 소리를 좋아하던 놈이 사천삼백 냥 앞에 서 있었다.
“네 몫이 아니야.” 갑례가 말했다.
“판 몫이잖아요.”
“판 몫에서 내 몫부터 떼.” 이 여자가 은자를 한 무더기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독 값, 젓가락 값, 만두 값, 장독대 된장 버린 값, 탁자 다리 값.”
“탁자는 흑룡방이 부러뜨렸잖아요.”
“흑룡방한테 받을 수 있으면 받아 와.” 이 여자가 한 무더기를 더 끌어당겼다. 그리고 손을 멈췄다. 한참 은자를 내려다보다가, 은자 한 줌을 따로 집어 내 앞에 놓았다. 이 한 줌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열 해 전 영감이 개봉에서 잃은 은자, 백이십 냥이었어. 영감이 죽기 전에 숫자를 말해 줬지. 이게 그거야. 이건 받는다.”
“이자는요?”
“이자는 안 받아.” 이 여자가 은자를 앞치마에 쓸어 담았다. “대신 다시는 우리 영감 같은 사람 앞에서 손가락 펴지 마. 틀리게든 맞게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하면 가벼워질 것 같았다.
*
탁문석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 왔다. 발소리가 났다. 뒤이어 동매가 따라왔다. 이 여자의 발소리는 여전히 발바닥 전체가 땅에 붙었다.
나는 무명 자루 두 개를 탁자에 올렸다. 자루 둘에 천칠백 냥, 탁문석에게 빌린 천오백과 철선자 몫 이백이 들어 있었다.
“세어 보시지요.”
“동매.”
동매가 자루를 풀어 셌다. 손이 빨랐다. 은자가 이 여자 손가락 사이를 지나며 나는 소리가 대접 속 주사위 소리처럼 고르게 이어졌다. 다 세고 나서 동매가 고개를 끄덕였다. 탁문석이 품에서 개봉 쥐구멍에서 찻잔 받침으로 쓰던 종이 뭉치와 철선자의 문서 한 장을 꺼냈다.
철선자는 옆구리를 붙잡고 탁자 옆에 서 있었다. 노인은 제 빚 문서를 받아 들고 한참 보더니 찢지 않았다. 접어서 휜 쇠부채 살 사이에 끼웠다.
“안 찢으십니까?”
“찢으면 잊는다. 끼워 두면 펼 때마다 본다.” 노인이 부채를 접으려 했다. 휜 살 때문에 반만 접혔다. “아홉째 살 옆에 두지.”
내 것은 받지 않았다. 탁문석이 내밀었지만 나는 손을 들지 않았다. 동매가 이 종이를 받아 아궁이 쪽으로 가져가는 걸 나는 보지 않았다. 등 뒤에서 종이가 불에 사각, 하고 아주 짧게 말리는 소리만 들었다.
*
빚을 다 갚고 나니 새 빚이 줄을 섰다.
곰이 절룩거리며 와서 손을 내밀었다. “오십 냥. 그리고 만두 평생.”
“만두는 안주인이 쪄요.”
“안주인이 그러는데 평생 만두 값은 네가 낸다던데.”
갑례를 보았다. 이 여자는 못 들은 척 은자를 셌다.
개방 거지가 왔다. 이 사람은 받은 은자를 두 손에 받쳐 들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동전 세 닢으로 시작한 사람이 은자 마흔 냥을 받아 든 얼굴이었다.
“이걸 어떻게 하오?”
“쓰세요.”
“어디다?”
“만두요.”
거지가 은자를 갑례 앞에 놓았다. “만두 값 선금이오. 곰 대협 몫까지.” 그러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왕 선생 몫은 왕 선생이 내시오.”
구팔봉이 갈비뼈에 동매가 준 약을 붙이고 침상에서 기어 내려와 탁자 귀퉁이에 앉았다. 노인은 은자 무더기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오백 냥 내가 잃은 거, 그거 갚아야지.”
“스승님이 잃은 거잖아요. 제 돈으로.”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꿔 준 거지. 나는 너한테 빚이 오백이다. 그런데 열 해 전 사백은 내가 네 이름으로 졌으니 너는 나한테 빚이 사백이고. 그럼 내가 너한테 백이다.”
“그게 무슨 셈이에요?”
“내가 왕년에 만든 셈법이다.”
나는 웃었다. 갑례도 국자로 솥 바닥 긁는 소리 같은 웃음을 웃었다. 노인은 셈이 맞았다고 우기며 내 은자에서 백 냥을 집어 갔다. 나는 말리지 않았다. 판이 끝나면 한꺼번에 받는 게 노름꾼이다. 받을 게 많은 사람이 늘 나였는데, 이날은 줄 게 더 많았다. 이게 이상하게 가벼웠다.
*
하원비는 찢어진 소매를 무명으로 묶고 칼을 등에 멘 채 복길과 함께 내려왔다. 상금 주머니가 허리에 있었다. 이 여자는 탁자 앞에 서서 주머니를 풀려다 내 얼굴을 보고 멈췄다.
“빚 말고라고 하셨잖아요.”
“알아.” 이 여자가 주머니를 도로 묶었다. 대신 소매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에 놓았다. 반들반들하게 닳은 나무 염주 알 하나였다. “찢어진 소매에 들어가 있었다. 장로님께 돌려드리려다 못 했다. 네가 드려라.”
“왜 제가요?”
“너는 판을 닫으러 오는 사람을 만나야 하니까.”
복길이 누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형씨, 판 닫으면 어디로 가오? 개봉으로 가면 나도 데려가오. 왼손이 오른손한테 진 닷 냥을 아직 못 받았소.”
하원비가 동생의 뒤통수를 쳤다. 아침에 친 자리를 또 쳤다. 복길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개봉엔 흑룡방 판이 쉰 개다.” 이 여자가 말했다. “너 혼자 보내면 손가락이 몇 개 남겠냐?”
“그럼 누나도 가면 되잖아.”
이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보았다. 등에 멘 칼자루를 엄지로 한 번 쓸었다. 나는 이 손짓의 뜻을 셈하지 않았다. 셈하지 않아도 들렸다. 칼집 끈이 어깨에서 한 번 당겨지는 소리, 길 떠나기 전에 짐을 고쳐 메는 사람의 소리였다.
이 여자가 산문 쪽을 보았다. 나도 보았다. 해가 산마루에 걸려 있었다. 비탈 위에서 회색 가사가 염주 없이 빈손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
심운학은 「천하제일 비무」까지만 남은 반쪽 무명천 앞에 섰다. 심운학은 이걸 찢지 않았다. 장대에서 매듭을 풀어 손에 감았다. 천이 장대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소리가 길었다.
“해가 지오, 왕 시주.”
“예, 장로님.”
나는 쌀독 뚜껑 넷을 다 닫았다. 마지막 뚜껑이 독 아가리에 맞물리는 소리는 첫날 거지의 동전 세 닢이 빈 독 바닥에 떨어지던 소리와 닮았다. 둥글게, 낮게 울렸다.
나는 탁자 위 염주 알을 장로 앞으로 밀었다. 장로가 이것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집지 않았다.
“백일곱 알로 다시 꿰었소. 한 알이 빈 염주를 돌리면 돌릴 때마다 그 자리에서 손가락이 걸리지. 그게 낫겠소.” 장로가 이 알을 내 쪽으로 도로 밀었다. “시주가 가지시오. 판을 닫은 대가요.”
“판을 닫았는데 대가를 받습니까?”
“판을 연 대가는 이미 치렀으니까.” 장로가 내 젓가락 감은 손가락과, 행주 감은 귀와, 까끌한 맨머리를 차례로 보았다. 이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염주도 없는데 딸, 깍,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장로가 돌아서는데 뒤에서 비단이 사락, 사락 스치는 소리가 났다.
남색 비단옷이 흑룡방 객잔에서 비탈을 건너왔다. 비단옷은 장로에게 고개를 숙였고, 장로는 받지 않았다. 비단옷은 내 탁자 맞은편에 앉았다. 탁문석이 개봉에서 앉던 자리였다. 탁문석은 앉지 않고 비단옷 뒤에 섰다. 동매가 이 옆에 섰다. 개봉 쥐구멍에서 탁문석 뒤에 서 있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이번엔 앉은 사람이 달랐다.
“왕 선생, 판이 닫혔으니 이제 셈을 해도 되겠군요.”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끝을 둥글게 말았다.
“셈은 다 끝났습니다. 물레판은 판이 안 잃고, 판은 한 할만 뗍니다. 삼만 냥은 거리로 갔어요.”
“그래서 왕 선생을 뵙자는 겁니다.” 이 사람이 손톱 긴 손가락으로 탁자를 쓸었다. 두드리지 않았다. 쓸었다. “그 삼만 냥은 개봉 황성 금전방이 흑룡방에 맡긴 돈이었습니다. 황성에서 돈을 대고 이자를 받는 사람들이 모은 돈이지요. 그 돈이 왕 선생 독을 지나 숭산 비탈에 흩어졌습니다. 거지 손에도, 곰 손에도, 국숫집 사내 손에도.”
“거둬 가시려고요?”
“거둘 수 없지요. 거두면 소문이 납니다.” 이 사람이 소리 없이 웃었다. “저희는 잃는 판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잃는 판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걸 싫어하지요. 왕 선생은 안 잃는 판을 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의 판에서 무엇이 팔렸는지 듣는 귀가 있고.”
탁문석이 뒤에서 낮게 말했다. “이번엔 내가 왕 선생 빚을 쥔 게 아니오. 저분들이 왕 선생 판을 쥐고 싶어 하시지.”
“안 가면요?”
비단옷이 탁자 위에 은자 한 닢을 놓았다. 숭산 은자가 아니라 황성에서 찍은 은자였다. 테두리에 작은 글자가 찍혀 있었다.
“판돈이 커지면, 판을 여는 사람도 커져야 합니다. 사흘 뒤 개봉 황성 금전방에서 뵙지요. 안 오시면 저희가 숭산 비탈부터 셈하겠습니다. 거지부터, 곰부터, 국숫집부터.”
거리가 조용해졌다. 갑례의 국자가 솥 가장자리에서 멈췄다. 하원비의 손이 등의 칼자루로 갔다. 복길이 누나의 소매를 잡았다. 구팔봉이 기침을 했다. 그만하라는 기침이 아니었다. 해 보라는 기침이었다.
나는 품에서 동매가 돌려준 이 빠진 주사위 한 쌍을 꺼냈다. 손바닥에서 한 번 굴리고, 탁자 위에 던졌다. 뼈 주사위가 나무 탁자를 두 번 튀고, 하나가 멈추고, 깨진 모서리 놈이 반 박자 늦게 멈췄다. 늦는 소리가 들렸다. 성한 오른쪽 귀로도, 아직 덜 아문 왼쪽 귀로도.
“무엇이 나왔소?” 비단옷이 물었다. 이 사람은 주사위를 보지 않고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늦은 놈 하나가 나왔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오?”
“제 귀가 아직 살아 있습니다.” 나는 주사위를 쥐고 일어섰다. 젓가락 감은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맨머리에 저녁 바람이 닿았다. “가지요, 개봉으로. 판돈은 판 여는 놈이 받는 겁니다. 거기서도.”
탁문석이 비단옷 뒤에서 탁자를 두 번 두드리려다, 이 탁자가 자기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손을 거두었다. 비단옷이 일어났다. 비단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아주 멀리, 산 위에서 저녁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것을 세지 않았다. 대신 쥔 주먹 안에서 두 알이 서로 부딪치고, 그중 하나가 반 박자 늦게 멎는 소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