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06자)

복길의 노래

천하제일 비무대회의 판돈은 내가 받는다 · 설묵향

구팔봉은 내가 보는 앞에서 내 침상 밑 마룻장을 들었다⁠. 무명 자루를 꺼내 무릎 위에 올려놓고 끈을 풀자 은자 오백 냥 남짓이 드러났다⁠. 판에서 뗀 내 몫과 탁문석에게 빌린 돈의 남은 것⁠, 그리고 갑례가 아직 떼지 않은 젓가락 값까지 다 들어 있는 자루였다⁠.

“⁠이거 빌린다⁠.⁠”

“⁠어디 쓰시게요⁠?⁠”

“⁠판을 연다⁠. 큰판⁠.⁠”

“⁠스승님⁠, 그건 제 목값입니다⁠.⁠”

“⁠목은 붙어 있는 동안만 값이 있어⁠. 결승 날 해가 지면 그 목을 탁문석이 받으러 오는데⁠, 그 전에 이 돈으로 뭘 하든 네 목은 그대로야⁠. 더 짧아지지도 않아⁠.⁠” 노인이 자루 끈을 다시 묶었다⁠. “⁠흑룡방 놈들 눈을 다 일층에 붙잡아 두려면⁠, 내가 거기서 지는 게 제일 크게 보여야 해⁠. 노름판에서 제일 시끄러운 건 큰돈이 지는 소리다⁠.⁠”

나는 반박하려다 그만두었다⁠. 이 노인 말이 맞았다⁠. 맞는 말을 하는 사기꾼이 제일 무섭다⁠.

자루를 안고 계단을 내려가던 노인을 갑례가 부엌 문간에서 막았다⁠. 이 여자는 말없이 자루 끈을 풀고 은자 세 닢을 꺼냈다⁠.

“⁠젓가락 값⁠.⁠”

“⁠지금 그걸 받소⁠?⁠”

“⁠지금 안 받으면 오늘 밤 다 잃을 거잖아⁠.⁠” 갑례가 은자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자루 끈을 도로 묶었다⁠. 그러고는 노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열 해 전 개봉 그 판⁠, 판꾼이 영감이었지⁠.⁠”

구팔봉의 손이 자루를 꽉 쥐었다⁠. 나는 이 여자에게 판꾼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이 여자는 혼자 셈을 끝냈다⁠. 귀 밝은 젊은 놈이 나라면⁠, 이 놈 앞에서 대접을 흔든 사람은 누구겠는가⁠?

“⁠…⁠…그렇소⁠.⁠”

“⁠그럼 오늘 밤 크게 져⁠.⁠” 갑례가 부엌에서 만두 하나를 꺼내 노인 손에 쥐여 주었다⁠. 김이 났다⁠. “⁠우리 영감 은자 털어 간 값⁠, 흑룡방 놈들 앞에서 크게 지는 걸로 갚아⁠. 사람들이 다 쳐다보게⁠.⁠”

노인은 만두를 받아 들고 한참 서 있었다⁠. 그러다 한 입 베어 물고 말했다⁠. “⁠간이 싱겁소⁠.⁠”

“⁠그러니까 이기고 오지 마⁠.⁠”

*

준결승 전날 밤 이경⁠, 구팔봉은 지팡이 대신 무명 자루를 짚을 듯이 끌어안고 비탈을 건넜다⁠. 흑룡방 객잔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동매야⁠! 사부가 왔다⁠! 오늘 밤 사부와 제자가 큰판을 벌인다⁠! 오백 냥이다⁠!⁠”

문이 열렸다⁠. 노인의 목소리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잠시 뒤 일층의 판 소리가 다 멈췄다⁠. 사람들이 가운데 탁자로 몰리는 발소리가 났다⁠. 의자 끄는 소리⁠, 술병 쓰러지는 소리⁠, 누가 돈을 더 거는 소리⁠. 노인이 판을 벌이면 구경꾼이 판꾼이 된다⁠. 다리 밑에서 배운 대로였다⁠.

나는 객잔 뒤편 담장 아래 곰과 함께 서 있었다⁠. 곰은 발목에 무명을 감았지만 서 있는 건 문제없었다⁠. 흑룡방 객잔은 삼층이었고 뒤쪽 이층 처마가 낮게 내려와 있었다⁠. 낮다고 해도 내 키의 두 배였다⁠.

“⁠곰 형씨⁠, 저를 저기 올려 주세요⁠.⁠”

“⁠던지오⁠?⁠”

“⁠올려 주세요⁠. 던지지 말고⁠.⁠”

곰이 내 허리를 잡았다⁠. 다음 내 몸이 하늘로 갔다⁠. 던진 거였다⁠. 나는 처마 기와 위에 배를 깔고 떨어졌다⁠. 기와 두 장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숨을 멈췄다⁠. 일층에서 구팔봉이 고함을 질렀다⁠. “⁠내 패를 봐라⁠, 이놈들아⁠!⁠” 이 고함이 기와 소리를 덮었다⁠. 노인이 일부러 이 순간에 지른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 노인은 평생 남의 소리를 덮는 소리를 질러 온 사람이었다⁠.

곰이 아래서 속삭였다⁠. “⁠미안하오⁠.⁠”

“⁠던지지 말라니까요⁠.⁠”

“⁠안 던졌소⁠. 올렸소⁠. 좀 세게⁠.⁠”

나는 기와에 볼을 대고 엎드린 채 숨을 골랐다⁠. 기와는 낮의 볕을 아직 품고 있어서 따뜻했고⁠, 깨진 두 장 틈으로 지붕 밑 묵은 먼지 냄새가 올라왔다⁠. 맨머리에 밤바람이 닿았다⁠. 머리를 깎은 보람이 하나 있다면 기와에 머리카락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이층 창은 덧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나는 젓가락 감은 손을 품에 붙이고 오른손 하나로 기어 들어갔다⁠. 이층 복도는 어두웠다⁠.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등잔 빛이 계단 난간에 걸려 있었다⁠. 대접 흔드는 소리가 마룻바닥을 뚫고 올라왔다⁠. 동매의 손목이 내는 소리였고⁠, 다음은 노인의 웃음이었다⁠.

계단은 이층에서 꺾여 삼층으로 올라갔다⁠. 일층부터 세면 스물둘⁠, 이층 층계참에서 세면 열하나가 남았다⁠. 나는 한 칸씩 밟았다⁠. 나무 계단은 사람 무게를 받을 때마다 다른 소리를 냈다⁠. 가운데를 밟으면 삐걱⁠, 벽 쪽을 밟으면 조용했다⁠. 벽 쪽으로 밟았다⁠. 열둘⁠, 열셋⁠. 아래층에서 은자가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노인이 한 판을 졌다⁠. 흑룡방 사내들이 환호했다⁠. 열넷⁠, 열다섯⁠.

그리고 위에서 끝이 올라가다가 갑자기 내려오는 가락이 들렸다⁠. 흥얼거림만은 아니었다⁠. 이 가락에 맞춰 무언가가 구르고 있었다⁠. 나무 사발 안에서 주사위 두 알이 노래 한 마디에 한 번씩 구르는 소리였다⁠.

꼭대기 방 문은 잠겨 있었다⁠. 자물쇠는 무쇠였고 내 손가락만 했다⁠. 나는 문틈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하복길⁠?⁠”

노래가 멈췄다⁠. 주사위 소리도 멈췄다⁠.

“⁠누구요⁠?⁠”

“⁠하원비 동생 맞소⁠?⁠”

“⁠누나가 보냈소⁠?⁠” 목소리가 문 바로 앞으로 왔다⁠. 스물두 살 사내의 목소리였는데⁠, 생각보다 밝았다⁠. 겁에 질린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잠깐만⁠, 이 판만 마저 하고⁠. 지금 혼자 내기 중이오⁠. 왼손이 오른손한테 닷 냥 졌소⁠.⁠”

나는 문틀에 이마를 댔다⁠. 이 남매는 어떻게 생겨 먹은 걸까⁠. 누나는 칼끝으로 귀를 베고⁠, 동생은 갇혀서 제 손끼리 노름을 했다⁠.

“⁠형씨⁠, 지금 빠져나가야 하오⁠.⁠”

“⁠문이 잠겼는데⁠?⁠”

“⁠알고 있소⁠.⁠”

“⁠열쇠는⁠?⁠”

“⁠그것도 지금 찾고 있소⁠.⁠”

“⁠그럼 찾는 동안 한 판만⁠.⁠” 사발이 다시 흔들렸다⁠. 나는 이 소리를 듣고 모르는 새 말했다⁠. “⁠넷하고 셋⁠.⁠” 사발이 엎어졌다⁠. 잠시 뒤 문 너머에서 감탄하는 소리가 났다⁠. “⁠형씨 귀신이오⁠?⁠”

“⁠노름꾼이오⁠.⁠”

“⁠나도 노름꾼인데⁠.⁠”

“⁠형씨는 노름꾼이 아니라 빚쟁이요⁠.⁠”

문 너머가 조용해졌다⁠. 다음 아주 작게⁠, 이번엔 주사위 없이 노래가 다시 시작되었다⁠. 끝이 올라가다가 내려오는 가락이⁠, 끝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떨렸다⁠. 밝은 목소리 밑에 무엇이 있었는지 그제야 들렸다⁠. 손가락 열 개를 날마다 세어 보는 사람의 노래였다⁠.

*

계단 아래에서 발소리가 올라왔다⁠. 가벼운데 디딜 때마다 발바닥 전체가 땅에 붙는 발소리였다⁠. 나는 숨을 곳이 없었다⁠. 꼭대기 방 앞 층계참은 사람 둘이 겨우 설 너비였다⁠. 이 여자가 스무 번째 칸에 올라섰을 때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동매는 손에 대접을 들고 있었다⁠. 새 주사위를 가지러 올라오는 길이었을 것이다⁠. 허리에 무쇠 열쇠 꾸러미가 매달려 있었다⁠. 이 여자가 걸음을 멈추자 열쇠들이 서로 부딪쳐 짤랑 울렸다⁠.

“⁠사부님이 아래서 지고 계십니다⁠.⁠” 동매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당신 돈으로⁠. 벌써 삼백 냥째입니다⁠.⁠”

“⁠알고 있어⁠.⁠”

“⁠그 돈이 당신 목값이라는 것도 압니까⁠?⁠”

“⁠스승님이 그러시더라⁠. 목은 붙어 있는 동안만 값이 있다고⁠.⁠”

동매가 웃지 않았다⁠. 대접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 마디의 굳은살이 등잔 빛에 하얗게 떴다⁠.

“⁠사부님은 열 해 전에 당신을 위해 도망가셨고⁠, 오늘은 당신을 위해 지고 계십니다⁠. 저를 위해서는 한 번도 아무것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매⁠, 그건 아니야⁠.⁠”

“⁠무엇이 아닙니까⁠?⁠”

“⁠스승님이 오늘 저 아래서 판을 벌인 상대가 누구야⁠? 사매잖아⁠. 열 해 만에 사매 맞은편에 앉으신 거야⁠. 지면서⁠.⁠” 나는 계단 난간을 잡았다⁠. 젓가락 감은 손이 욱신거렸다⁠. “⁠스승님은 사매 손을 보러 오신 거야⁠. 오백 냥을 내고⁠. 그 노인이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그것뿐이니까⁠.⁠”

동매의 숨이 아주 잠깐 걸렸다⁠. 구팔봉이 탁문석 앞에서⁠, 그리고 계단 스물두 개 이야기를 들을 때 걸렸던 것과 같은 숨이었다⁠. 사부와 제자는 숨도 닮는다⁠.

아래층에서 다시 은자가 쏟아졌다⁠. 구팔봉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동매가 누구보다 빨리 대접을 흔들어야 할 판이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여자가 허리에서 열쇠 꾸러미를 풀었다⁠. 무쇠 열쇠 다섯 개 가운데 하나를 골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차가웠다⁠. 그리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열쇠 위에 얹었다⁠. 뼈 주사위 한 쌍이었다⁠. 깨진 모서리가 내 손바닥을 먼저 긁었다⁠.

“⁠이건 돌려드립니다⁠.⁠”

“⁠사매가 가지라니까⁠.⁠”

“⁠제 손은 이 소리를 다 외웠습니다⁠. 당신 귀가 아직 못 외운 소리가 있어요⁠. 결승 날 쓰십시오⁠.⁠” 동매가 돌아섰다⁠. “⁠뒤쪽 처마로 나가십시오⁠. 앞으로 나가면 총관이 봅니다⁠. 그리고 사부님은⁠.⁠”

“⁠스승님은⁠?⁠”

“⁠제가 지게 해 드리겠습니다⁠. 마지막 판까지 크게⁠.⁠”

이 여자가 계단을 내려갔다⁠. 발바닥 전체가 땅에 붙는 소리가 스물⁠, 열아홉⁠, 하고 끝까지 일정하게 멀어졌다⁠.

*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는 짧았다⁠. 문이 열리자 복길이 나무 사발을 끌어안고 서 있었다⁠. 키가 누나보다 컸고⁠, 얼굴이 누나와 똑같이 생겼는데 웃는 모양만 달랐다⁠. 열 손가락이 다 붙어 있었다⁠. 나는 이것부터 하나에서 열까지 셌다⁠. 이 애가 내 눈길을 따라 제 손을 내려다보고 웃었다⁠.

“⁠다 있소⁠.⁠”

“⁠다 있네⁠.⁠”

“⁠누나는 열한 개라고 우길 거요⁠. 걱정을 하나 더 얹어서⁠.⁠”

우리는 이층 창으로 나가 처마를 탔다⁠. 곰이 아래서 팔을 벌리고 있었다⁠. 복길이 먼저 뛰어내렸고 곰이 받았다⁠. 나는 뒤따라 뛰어내렸다⁠. 곰이 나도 받았는데⁠, 받는 순간 내 젓가락 감은 손이 곰 가슴에 부딪쳤다⁠. 나는 소리를 지를 뻔했고⁠, 복길이 내 입을 손으로 막았다⁠. 남매가 다 남의 입을 막는 데는 선수였다⁠.

*

우리가 담장 모퉁이를 돌 때 흑룡방 객잔 일층에서 큰 소리가 났다⁠. 은자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소리였다⁠. 마지막 판이었다⁠. 구팔봉의 목소리가 이 위로 높이 솟았다⁠.

“⁠졌다⁠! 다 졌다⁠! 오백 냥이다⁠! 내가 왕년에 진 것 중에 오늘이 제일 크다⁠!⁠”

흑룡방 사내들이 환호했다⁠. 이 환호 속에서 누군가 계단을 스물둘까지 뛰어 올라가는 소리가 나더니 고함이 터졌다⁠. 꼭대기 방이 비었다는 고함이었다⁠.

환호가 멈췄다⁠.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 탁자가 밀리는 소리⁠, 총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몽둥이가 사람 몸을 치는 소리⁠. 둔하고 무거운 소리가 한 번⁠, 두 번⁠, 세 번⁠. 나는 걸음을 멈췄다⁠. 곰이 내 어깨를 잡았다⁠. 복길이 내 소매를 잡았다⁠.

몽둥이 소리 사이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늙고 쉰 목소리⁠, 이가 위로 셋 아래로 넷 남은 입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 맞으면서 웃고 있었다⁠. 네 번째 몽둥이 소리가 나고⁠, 웃음이 기침으로 바뀌고⁠, 기침이 다시 웃음으로 돌아왔다⁠.

“⁠판은⁠…⁠… 연 놈이 임자다⁠…⁠…⁠.⁠”

이 말이 비탈을 건너왔다⁠. 나는 이 말을 첫날 밤 노인의 잠꼬대로 들었었다⁠. 이번엔 잠꼬대가 아니었다⁠.

동매의 목소리가 났다⁠. 날카롭고 짧았다⁠. 그만두라는 소리였다⁠. 몽둥이 소리가 멎었다⁠. 다음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나는 이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것을 오래 들었다⁠. 곰이 나를 끌고 갔다⁠. 복길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번엔 끝까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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