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69자)

산문 안의 노름꾼

천하제일 비무대회의 판돈은 내가 받는다 · 설묵향

머리카락이 사각사각 떨어지는 소리를 이날 처음 들었다⁠. 마른 풀 베는 소리와 비슷한데 더 가늘다⁠. 갑례가 부엌칼을 숫돌에 세 번 문지르고 내 머리를 밀었다⁠. 칼날이 정수리를 지나갈 때마다 서늘한 바람이 거기 새로 생겼다⁠. 머리카락이 부뚜막 위에 수북이 쌓였다⁠. 갑례는 이걸 손으로 쓸어 아궁이에 넣었다⁠. 머리카락 타는 냄새는 고약했다⁠. 구팔봉이 코를 막고 말했다⁠.

“⁠삶은 달걀 같다⁠.⁠”

“⁠귀에 행주 감은 삶은 달걀이요⁠.⁠”

“⁠손가락에 젓가락 꽂은 삶은 달걀⁠.⁠”

갑례가 칼을 내려놓고 내 머리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맨살에 이 여자의 굳은살이 닿았다⁠. 따끔했다⁠.

“⁠이 머리로 산문에 들어가면 진짜 중인 줄 알 거야⁠.⁠”

“⁠그래야지요⁠. 계를 받기 전에 절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행자로 들어가야 합니다⁠.⁠”

계획은 간단했다⁠. 철선자는 강남 원로라 산문 안에 들 수 있었고⁠, 옆구리 상처 때문에 들것에 실려 가야 했다⁠. 들것은 앞을 곰이⁠, 뒤를 내가 메었다⁠. 곰은 발목을 절었지만 들것 하나쯤은 한 손으로도 들었다⁠. 나는 젓가락 감은 손 때문에 오른손 하나로 들었다⁠. 들것이 뒤로 기울었다⁠. 철선자가 들것 위에서 미끄러지며 욕을 했다⁠.

“⁠이놈아⁠, 내가 거꾸로 실려 가게 생겼다⁠.⁠”

“⁠곰 형씨가 너무 커서요⁠.⁠”

“⁠네가 너무 작은 거다⁠.⁠”

*

산문 돌 앞에는 무승 둘이 곤봉을 들고 서 있었다⁠. 결승을 앞두고 경계가 엄해져 있었다⁠. 무승 하나가 들것 위의 철선자에게 합장하고⁠, 곰을 올려다보고⁠, 마지막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맨머리에 아침 볕이 내리쬐어 정수리가 뜨거웠다⁠.

“⁠행자는 어느 전각 소속이오⁠?⁠”

나는 대답을 준비해 두지 않았다⁠. 노름꾼이 제일 못하는 일이 준비다⁠. 우리는 판 앞에서 지어낸다⁠.

“⁠그⁠, 저⁠, 객당⁠…⁠… 객당 부엌입니다⁠.⁠”

“⁠객당 부엌 행자면 염불을 해 보시오⁠. 아무거나⁠.⁠”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내가 아는 염불은 하나도 없었다⁠. 아는 것은 주사위 눈뿐이었다⁠. 그래서 이걸 염불처럼 읊었다⁠. 낮고 길게⁠, 끝을 늘이며⁠.

“⁠일이삼사오륙⁠…⁠… 육오사삼이일⁠…⁠… 넷하고 둘은 여섯이요⁠…⁠… 다섯하고 하나도 여섯이로다⁠…⁠…⁠.⁠”

무승의 눈썹이 꿈틀했다⁠. 곰이 앞에서 다급하게 말했다⁠.

“⁠이 사람 벙어리요⁠.⁠”

“⁠방금 말을 했는데⁠.⁠”

“⁠염불할 때만 말을 하오⁠. 평소엔 벙어리요⁠.⁠”

무승이 곰을 보고⁠, 나를 보고⁠, 들것 위의 철선자를 보았다⁠. 철선자가 옆구리를 움켜쥐고 아주 크게 신음을 냈다⁠. 무승이 길을 비켜 주었다⁠. 산문 돌을 지나는 순간 나는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돌 바깥은 흙이 붉었고⁠, 돌 안쪽은 흙이 조금 더 검었다⁠. 이 경계를 내 짚신이 넘었다⁠. 굴려 내려지면 어느 쪽으로 굴러갈지 셈해 보았다⁠. 비탈이 가팔랐다⁠.

*

절을 찾아온 손님을 맞는 소림 객당은 비무장 뒤편 소나무 사이에 있었다⁠. 나무 마루에 기름을 먹여 발바닥이 미끄러웠고⁠, 향 냄새가 마루 결마다 배어 있었다⁠. 바깥에서는 본선 다섯 번째 날 승부가 열리고 있었다⁠. 비무장의 함성이 소나무 숲을 지나며 걸러져서⁠, 여기서는 먼 파도 소리처럼 들렸다⁠. 담 너머가 아니라 담 안에서 듣는 함성이었다⁠. 내가 그토록 들어오고 싶던 자리였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나는 이 소리에 귀를 줄 틈이 없었다⁠.

심운학은 객당 가운데 방석에 앉아 있었다⁠. 염주가 손에 감겨 있었다⁠. 들것이 내려지고 철선자가 일어나 앉았다⁠. 노인은 옆구리를 붙잡고 심운학 앞에 머리를 숙였다⁠. 이마가 마루에 닿았다⁠.

“⁠장로님⁠, 강남 철선자입니다⁠. 예선 사흘째 저는 맞지 않고 쓰러졌습니다⁠.⁠”

심운학이 염주를 한 알 딸깍 넘겼다⁠.

철선자는 다 털어놓았다⁠. 두 해 전 개봉 흑룡방 판에서 이백 냥을 잃은 일⁠, 총관이 내민 제안⁠, 스물한 합째에 넘어진 일⁠, 대회가 끝나면 찢어 주겠다던 빚 문서까지⁠. 산문 돌 뒤에서 계율원 집사승과 흑룡방 총관 사이에 묵직한 것이 소매에서 소매로 건너가는 걸 본 일도 말했다⁠. 노인은 말하는 동안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다만 숨이 길었다⁠. 무언가를 참는 숨이었다⁠. 비무대에서 쓰러진 날 땅바닥에서 올라오던 이 숨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이 숨 끝이 내쉬어졌다⁠. 다 내쉬어졌다⁠.

심운학은 오래 말이 없었다⁠. 염주가 세 알 넘어갔다⁠.

“⁠시주의 옆구리는 어찌 된 것이오⁠?⁠”

“⁠어젯밤 흑룡방 칼에⁠.⁠”

“⁠보여 주시오⁠.⁠”

철선자가 옷섶을 열었다⁠. 무명 동여맨 자리에 피가 배어 있었다⁠. 심운학은 이 상처를 오래 보았다⁠. 다음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 행자⁠.⁠”

나는 고개를 더 숙였다⁠. 정수리가 마루에 닿을 뻔했다⁠.

“⁠시주는 머리를 깎아도 귀에 감은 행주는 못 감추오⁠.⁠”

*

나는 고개를 들었다⁠. 숨길 게 없어지니 오히려 편했다⁠. 노름판에서 패를 다 까면 다음엔 말만 남는다⁠. 말은 내 쪽이다⁠.

“⁠예⁠, 장로님⁠. 산 밑 내기판입니다⁠. 대회가 끝날 때까지 돌 안에 들지 말라 하셨는데⁠, 들었습니다⁠. 굴리시려면 굴리십시오⁠. 다만 철선자 어른 말씀은 들어 주십시오⁠.⁠”

“⁠들었소⁠.⁠” 심운학이 말했다⁠. “⁠그리고 시주의 말도 듣겠소⁠. 시주는 첫날 판을 여는 놈이 제일 바라는 게 깨끗한 승부라고 했지⁠.⁠”

“⁠예⁠.⁠”

“⁠그 말이 맞았다면 시주는 첫날 밤 왜 내게 오지 않았소⁠? 철선자가 쓰러진 날은⁠? 하 소저의 일을 안 날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은 있었다⁠. 판이 닫힐까 봐서였다⁠. 내 목이 걸려 있어서였다⁠. 이 대답이 장로 앞에서는 입 밖으로 안 나왔다⁠.

“⁠승부를 사는 자가 있으면⁠, 그 승부에 돈을 거는 자가 있소⁠. 돈을 거는 판이 커지면 승부를 사는 값도 커지오⁠.⁠” 심운학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객당 기둥이 이 소리를 받아 울렸다⁠. “⁠흑룡방이 철선자의 숨을 산 것은⁠, 시주의 쌀독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오⁠. 시주가 판을 열지 않았다면 흑룡방은 결승 하나에 그만큼의 칼과 은자를 들이지 않았을 것이오⁠. 시주도 같은 판의 사람이오⁠.⁠”

맞는 말이었다⁠. 맞는 말 앞에서 노름꾼은 다른 판을 깐다⁠. 나는 이날 처음으로 다른 판을 깔지 않았다⁠.

“⁠맞습니다⁠. 제 판이 커서 저놈들이 삽니다⁠. 판이 커질수록 제 몫도 커지고⁠, 저는 그 몫으로 제 목을 삽니다⁠. 저는 깨끗하지 않습니다⁠, 장로님⁠.⁠” 나는 젓가락 감은 왼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그래서 제 판으로 막겠다는 겁니다⁠. 판을 닫으면 저놈들은 다른 데서 삽니다⁠. 판이 열려 있어야 저놈들 돈이 어디로 가는지 들립니다⁠. 곰 승부 때 들었고⁠, 이천 냥이 거리로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그대 손가락이 꺾였지⁠.⁠”

“⁠예⁠.⁠”

“⁠그 곰은 발목을 찍혔고⁠, 이 노인은 옆구리를 베였소⁠.⁠”

“⁠예⁠.⁠”

심운학이 염주를 멈췄다⁠. 객당이 조용해졌다⁠. 바깥 함성마저 이 순간 끊겼다⁠.

*

“⁠나는 스물에 비무에서 한 번 져 주었소⁠.⁠”

장로가 말했다⁠. 철선자가 고개를 들었다⁠. 나도 들었다⁠. 심운학은 우리 둘을 보지 않았다⁠. 객당 문 너머 소나무를 보고 있었다⁠.

“⁠이 산의 일이오⁠. 문파끼리 겨루는 자리였고⁠, 소림 대표 하나를 정해야 했소⁠. 사부께서 사형이 대표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소⁠. 사형은 나보다 약했소⁠. 그래서 나는 사형과의 비무에서 스무 합째에 검을 놓쳤소⁠. 놓친 척을 했소⁠.⁠” 염주가 한 알 딸깍 넘어갔다⁠. “⁠사형은 이듬해 다른 문파와의 비무에 소림 대표로 나갔다가 죽었소⁠. 내가 져 준 자리에 서 있다가⁠.⁠”

나는 철선자를 보았다⁠. 노인의 휜 부채가 무릎 위에서 떨고 있었다⁠.

“⁠나는 그때 아무에게도 돈을 받지 않았소⁠. 사부의 말 한마디였소⁠. 그래도 승부를 판 것은 같소⁠. 그 뒤 마흔 해 동안 나는 계율원에 앉아 승부를 파는 자들을 미워했고⁠, 그 미움에 노름꾼까지 넣었소⁠. 미워할 자가 많을수록 내 부끄러움이 묽어졌으니까⁠.⁠” 장로가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보았다⁠. “⁠시주를 미워한 것은 반은 시주 탓이고 반은 내 탓이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판에서 상대가 패를 다 까 보이면⁠, 다음은 내가 무엇을 걸지 정하는 차례다⁠.

“⁠장로님⁠, 결승 심판이 계율원 집사 스님이라 들었습니다⁠.⁠”

“⁠그는 내 제자요⁠.⁠” 심운학의 입가가 굳었다⁠. “⁠지금 그를 내치면 탁문석이 결승을 다른 수로 사겠지⁠. 그의 소매에서 무엇이 나오든⁠, 결승 날까지는 그 자리에 두겠소⁠. 다만⁠.⁠”

“⁠다만⁠?⁠”

“⁠증거가 사람이라면⁠, 사람을 데려오시오⁠. 하 소저의 동생이 흑룡방에 잡혀 있다면⁠, 그 아이가 내 앞에서 제 입으로 말하게 하시오⁠. 그러면 결승은 내가 단상에서 직접 보겠소⁠. 집사승의 깃발이 오르기 전에 내 염주가 먼저 내려갈 것이오⁠.⁠”

*

그리고 값을 매겼다⁠. 장로는 값을 매기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철선자 시주는 승부를 팔았소⁠. 이번 대회의 원로석을 비우고⁠, 십 년 뒤 다음 대회에도 서지 못하오⁠.⁠”

철선자가 이마를 다시 마루에 댔다⁠. “⁠받겠습니다⁠.⁠”

“⁠왕 시주⁠.⁠”

“⁠예⁠.⁠”

“⁠결승 날 해가 지면 그대의 판을 닫으시오⁠. 이 산 아래서 다시는 열지 마시오⁠. 그대가 판을 연 탓에 다친 사람들의 값이오⁠.⁠”

나는 셈을 했다⁠. 결승 날 해 질 녘은 탁문석이 내 목을 받으러 오는 시각과 같았다⁠. 이 시각에 판이 닫히면⁠, 판 몫으로 빚을 갚을 시간은 결승 승부 하나뿐이었다⁠. 셈이 빠듯했다⁠. 빠듯한 셈을 노름꾼은 좋아한다⁠. 어차피 판은 한 번에 끝난다⁠.

“⁠받겠습니다⁠.⁠”

심운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깎은 지 반나절 된 내 맨머리를 오래 보았다⁠.

“⁠그런데 시주⁠, 머리는 왜 깎았소⁠?⁠”

“⁠행자로 꾸미려고요⁠.⁠”

“⁠소림 행자는 계를 받기 전에는 머리를 기르오⁠. 깎는 것은 계를 받는 날이오⁠.⁠”

곰이 객당 기둥이 흔들릴 만큼 먼저 웃었다⁠. 다음 철선자가 옆구리를 붙잡고 웃었다⁠. 웃다가 아파서 신음하고⁠, 신음하다가 또 웃었다⁠. 심운학은 웃지 않았다⁠. 다만 염주를 넘기는 손가락이 딸⁠, 깍⁠, 하고 한 번 박자를 놓쳤다⁠. 이게 장로가 웃는 소리라는 걸 나는 나중에 알았다⁠.

*

객당을 나와 회랑을 돌 때 맞은편에서 승려 하나가 걸어왔다⁠. 마흔 안팎⁠, 가사 소매가 유난히 넓었다⁠. 걸을 때마다 이 소매 안에서 무언가가 짤랑거렸다⁠. 아주 작게⁠, 은자 두 닢이 서로 닿는 소리였다⁠. 염주 소리가 아니었다⁠. 염주는 나무가 나무를 치고⁠, 은자는 쇠가 쇠를 친다⁠. 나는 이 차이를 열다섯 해 동안 들어 왔다⁠.

곰이 들것 앞을 잡은 채 멈춰 섰다⁠. 승려가 길을 막고 서서 곰을 올려다보고⁠, 들것의 철선자를 보고⁠, 마지막으로 나를 보았다⁠. 코를 한 번 벌름거렸다⁠.

“⁠행자에게서 노름방 냄새가 나는군⁠.⁠”

“⁠부엌 행자라 고량주로 행주를 빱니다⁠.⁠”

“⁠객당 부엌에 고량주가 있소⁠?⁠”

“⁠없어서 제가 들고 다닙니다⁠.⁠”

승려의 눈이 가늘어졌다⁠. 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회랑 지붕이 곰 머리에 닿을 듯했다⁠. 승려는 곰을 다시 올려다보고 비켜섰다⁠. 소매가 또 짤랑거렸다⁠. 지나치고 나서 철선자가 들것 위에서 낮게 말했다⁠.

“⁠저게 집사승이다⁠.⁠”

“⁠압니다⁠. 소매가 말해 줬어요⁠.⁠”

나는 맨머리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정수리에 아침 볕이 남긴 열이 아직 있었다⁠. 머리카락은 아궁이에서 타 버렸고⁠, 이 산에서 다시 판을 열 날도 결승 해 질 녘까지였다⁠. 남은 것은 계단 스물두 개였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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