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341자)

목값

천하제일 비무대회의 판돈은 내가 받는다 · 설묵향

먼저 털어놓고 시작하겠다⁠. 나는 무공을 모른다⁠. 주먹을 쥐면 엄지를 어디 둬야 하는지도 서른이 되도록 헷갈리고⁠, 개봉 뒷골목에서 칼 든 놈과 마주치면 내가 하는 일은 딱 하나⁠, 그놈보다 먼저 달리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를 아는 사람들은 왕삼통이 무섭다고 했다⁠. 엎어 놓은 대접 안에서 주사위 두 알이 구르다 멈추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눈이 몇인지 안다⁠. 그거 하나로 먹고살았다⁠.

이날 밤도 그랬다⁠. 개봉 남쪽 골목 국숫집 마루 밑으로 계단을 열한 개 내려가면 「⁠쥐구멍⁠」이라는 노름방이 나오는데⁠, 천장이 낮아서 키 큰 놈들은 다 허리를 숙이고 노름을 했다⁠. 기름 등잔 그을음과 땀내와 싸구려 고량주 냄새가 한데 엉겨 코를 막아도 혀에 붙었다⁠. 판꾼이 대접을 흔들었다⁠. 사기 대접 안에서 뼈 주사위가 벽을 세 번 치고⁠, 바닥에 떨어져 한 번 튀고⁠, 하나가 조금 더 굴러 모서리로 섰다가 누웠다⁠.

“⁠넷하고 둘⁠.⁠”

내가 말했고⁠, 판꾼이 대접을 들었다⁠. 넷하고 둘이었다⁠. 맞은편 비단 장수가 앓는 소리를 내며 동전 꾸러미를 밀어 보냈다⁠. 동전이 탁자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다⁠. 봄비가 기와를 타고 내려가는 소리보다 좋다⁠.

이 소리가 갑자기 멎었다⁠. 동전 소리만이 아니라 방 안의 숨소리가 반으로 줄었다⁠. 계단 위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없었는데⁠, 다들 계단 쪽을 보고 있었다⁠.

*

흑룡방 방주 탁문석은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걷는 사람이었다⁠. 마흔다섯⁠, 키는 나만 한데 어깨가 좁고 손이 희었다⁠. 검은 비단 겉옷 소매 끝에 은실로 수놓은 용 꼬리가 등잔불에 한 번 번쩍했다⁠. 비단 장수 의자를 손가락 하나로 가리켰고⁠, 비단 장수는 동전 꾸러미를 챙길 생각도 못 하고 일어났다⁠. 탁문석이 이 자리에 앉았다⁠. 내 맞은편이었다⁠.

탁문석은 품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탁자에 놓고⁠, 이 위에 찻잔을 얹었다⁠. 따라온 졸개가 주전자를 기울였다⁠. 찻물이 종이 귀퉁이에 한 방울 떨어져 번졌다⁠. 내 이름이 쓰인 쪽이었다⁠.

“⁠왕 선생 빚이오⁠. 개봉 골목 열두 군데에 흩어져 있던 걸 내가 다 샀소⁠. 합치니 천 냥이 되더군⁠.⁠”

“⁠천 냥이요⁠?⁠” 나는 웃었다⁠. 웃음이 목에 걸려 한 번 꺾였다⁠. “⁠방주님⁠, 셈을 다시 하셔야겠습니다⁠. 제가 진 건 많아야 육백이고⁠, 나머지는 이자가 새끼를 친 거지요⁠.⁠”

“⁠새끼도 내 새끼요⁠.⁠”

탁문석이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렸다⁠. 톡⁠, 톡⁠. 이 사람이 웃을 때 내는 소리라는 걸 나는 나중에 알았다⁠. 당시에는 그냥 내 관자놀이를 두드리는 것 같았다⁠.

“⁠숭산에서 십 년 만에 천하제일 비무대회가 열리오⁠. 사흘 뒤에 시작해서 보름을 가지⁠. 대회가 끝나는 보름날 해 질 때까지 천 냥을 가져오시오⁠. 못 가져오면 왕 선생 목을 받겠소⁠.⁠”

“⁠목은 팔아도 값이 안 나갑니다⁠. 제 목엔 살도 없어요⁠.⁠”

“⁠값은 내가 정하오⁠.⁠”

이 사람은 고개를 돌려 등 뒤에 선 여자에게 턱짓을 했다⁠. 스물일고여덟쯤 되었을까⁠, 머리를 뒤로 단단히 묶고 소매를 걷어 올린 여자였다⁠. 흑룡방 판꾼 동매⁠. 개봉에서 이 손을 모르는 노름꾼은 없었다⁠. 이 여자가 판꾼 대접을 받아 들고 흔드는데⁠, 손목만 움직이고 어깨는 꼼짝도 안 했다⁠.

“⁠들으시오⁠.⁠”

나는 눈을 감았다⁠. 주사위가 대접 벽을 친다⁠. 한 번⁠, 두 번⁠. 그런데 세 번째 소리가 이상했다⁠. 한 알이 벽에 붙어 미끄러지면서 끝까지 구르지 않았다⁠. 대접이 탁자에 엎어지는 소리가 이 미끄러짐을 덮으려고 일부러 크게 났다⁠. 손이 빠른 사람이었다⁠. 내 귀가 조금 더 빨랐을 뿐이다⁠.

“⁠여섯하고⁠, 하나⁠. 하나는 처음부터 하나였고요⁠.⁠”

동매가 대접을 들었다⁠. 여섯하고 하나였다⁠. 이 여자의 눈썹이 아주 조금⁠, 한 올쯤 올라갔다⁠. 탁문석이 다시 탁자를 두 번 두드렸다⁠.

“⁠소문대로군⁠.⁠”

*

목이 걸린 사람은 말이 빨라진다⁠. 나도 그랬다⁠.

“⁠방주님⁠, 저한테 보름을 주신다면서요⁠. 그 보름 동안 제가 숭산에서 판을 하나 열겠습니다⁠.⁠”

“⁠무슨 판이오⁠?⁠”

“⁠비무대회 판이요⁠.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지에 돈을 거는 판⁠. 십 년 만의 대회면 구경꾼이 산 밑까지 줄을 설 겁니다⁠. 고수들 칼 구경만 하고 돌아가면 서운하지요⁠. 거기 돈을 걸게 하면 보는 맛이 두 배가 됩니다⁠. 판은 거기서 한 몫씩 떼고요⁠. 보름이면 천 냥은 나옵니다⁠.⁠”

나는 사실 이 자리에서 지어낸 말을 하고 있었다⁠. 노름꾼이 제일 잘하는 일이 그거다⁠. 지어낸 말을 하면서 이 말이 맞는 것처럼 상대 눈을 본다⁠. 탁문석의 눈은 우물 바닥 같아서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나는 탁문석이 거절할 줄 알았다⁠. 거절하면 다음 말을 붙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탁문석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다시 내 빚 위에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밑천은 있소⁠?⁠”

“⁠그게⁠, 이제부터 마련해야지요⁠.⁠”

“⁠이백 냥을 빌려주겠소⁠. 그것도 보름날에 같이 갚으시오⁠.⁠”

이백 냥짜리 은자 꾸러미가 탁자에 놓였다⁠. 묵직하게 떨어지는 소리였다⁠. 빚 천 냥을 갚으라고 빚 이백 냥을 더 주는 사람⁠. 나는 이 꾸러미를 끌어당기면서 등줄기에 땀이 한 줄 내려가는 걸 느꼈다⁠. 셈이 너무 쉽게 맞았다⁠. 노름판에서 셈이 쉽게 맞을 때는 늘 상대가 먼저 셈을 끝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탁문석이 일어났다⁠. 계단을 올라갈 때도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동매만 한 번 돌아보았다⁠. 이 여자는 내 귀를 보고 있었다⁠.

*

사흘 길을 노새 수레로 갔다⁠. 숭산 가는 큰길에는 칼 찬 사람이 개봉 장날 엿장수보다 많았다⁠. 두 번째 날 아침 정주 못미처 고갯마루에서⁠, 길가 바위에 앉아 있던 노인 하나가 내 수레를 보더니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뒤에 훌쩍 올라탔다⁠. 허락을 구하는 말은 없었다⁠.

“⁠어이⁠, 삼통아⁠. 늙은 스승을 걸어서 숭산까지 보낼 셈이었냐⁠?⁠”

구팔봉이었다⁠. 예순다섯⁠, 이가 위로 셋 아래로 넷 남은 입으로 웃는데⁠, 웃을 때 혀를 차는 버릇은 내가 스무 살 때 보던 그대로였다⁠. 개봉 노름판에서 한때 이름 대신 별명으로만 불리던 사기꾼⁠, 나에게 대접 소리를 처음 듣게 한 사람⁠, 그리고 열 해 전 아무 말 없이 사라진 사람⁠.

“⁠스승님이 숭산엔 왜 가십니까⁠?⁠”

“⁠내가 왕년에 숭산 대회에서 무당파 장문인한테 노름을 가르쳐 준 사람이다⁠. 그 양반이 나한테 진 돈이 아직 백 냥이야⁠. 받으러 가⁠.⁠”

“⁠그 장문인 돌아가신 지 스무 해 됐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한테 받아야지⁠.⁠”

노새가 방귀를 뀌었다⁠. 구팔봉은 이게 자기 말에 맞장구친 거라고 우겼다⁠. 나는 품속의 뼈 주사위 한 쌍을 만지작거렸다⁠. 스무 살 생일에 이 노인이 준 것이었다⁠. 하나는 모서리 한쪽이 깨져서⁠, 굴리면 다른 하나보다 반 박자 늦게 멈춘다⁠. 이 늦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 노인이 사라지고 나서도 이 주사위는 안 버렸다⁠.

“⁠내 소식 들었냐⁠?⁠” 구팔봉이 물었다⁠.

“⁠무슨 소식이요⁠?⁠”

“⁠네가 탁문석이한테 목을 잡혔다는 소식⁠. 개봉 바닥에 쫙 퍼졌어⁠. 그래서 내가 왔지⁠. 스승이 제자 목을 구하러⁠.⁠”

“⁠구해 주실 방법은 있으세요⁠?⁠”

“⁠없어⁠. 그런데 구경은 해야 할 거 아니냐⁠?⁠”

*

숭산 산문 아래 객잔 거리는 해 질 녘에 도착하니 벌써 등불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산문 돌에서 비탈을 따라 객잔 아홉 채가 늘어섰고⁠, 이 사이사이 국숫집과 향 파는 노점과 말 거간이 끼어 있었다⁠. 쇠를 숫돌에 가는 소리⁠, 노새 우는 소리⁠, 사투리 열두 가지가 한데 섞였고⁠, 누가 어디서 고기를 굽는지 기름 타는 냄새가 비탈을 타고 내려왔다⁠. 방이 남은 객잔은 맨 아래 하나뿐이었다⁠. 간판도 없이 문설주에 국자 하나가 걸린 집이었다⁠.

안주인은 마흔쯤 된 여자로⁠, 팔뚝이 내 종아리만 했다⁠. 이 여자는 내 행색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국자로 문설주를 탕 쳤다⁠.

“⁠방 없어⁠.⁠”

“⁠방이 없는 집이 문을 왜 열어 둡니까⁠?⁠”

“⁠사람 봐 가며 없어⁠. 노름꾼 냄새가 나⁠.⁠”

“⁠냄새가 납니까⁠?⁠” 나는 내 소매를 맡아 보았다⁠. 노새 냄새가 났다⁠. 구팔봉이 뒤에서 킬킬거렸다⁠.

나는 품에서 이백 냥 꾸러미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이 여자의 부엌 쪽을 보았다⁠. 부뚜막 옆에 허리까지 오는 쌀독이 셋 있었는데⁠, 하나는 비어서 뚜껑을 두드리면 울릴 것 같았다⁠.

“⁠안주인⁠, 저 빈 독 하나만 보름 동안 빌려주시오⁠. 그 안에 돈이 차면 열에 한 몫을 드리지⁠.⁠”

“⁠무슨 돈⁠?⁠”

“⁠고수들 승부에 거는 돈이요⁠. 내일부터 이 거리 사람들이 다 저 독에 돈을 넣을 겁니다⁠.⁠”

여자는 국자를 내리지 않았다⁠. 갑례라고⁠, 나중에야 이름을 알았다⁠. 이 여자는 나를 삼십 박자쯤 노려본 다음 말했다⁠.

“⁠열에 한 몫이면 내가 돈을 세고⁠, 내가 지키고⁠, 내가 내준다⁠. 너는 손도 못 대⁠.⁠”

“⁠그럼 제가 뭘 합니까⁠?⁠”

“⁠떠들어⁠. 노름꾼은 떠드는 게 일이잖아⁠, 이 화상아⁠.⁠”

구팔봉이 지팡이로 바닥을 짚고 앞으로 나섰다⁠. “⁠안주인⁠, 나는 이 판의 큰어른이오⁠. 큰어른 방값은 반으로 해 주시오⁠.⁠”

“⁠큰어른이면 방값을 두 배로 내⁠.⁠”

“⁠그럼 나는 이놈 짐꾼이오⁠.⁠”

“⁠짐꾼은 마구간에서 자⁠.⁠”

구팔봉은 이날 밤 내 방 바닥에서 잤다⁠. 방값은 내가 냈다⁠. 노인은 이것도 스승 대접이라고 했다⁠.

그렇게 방을 얻었다⁠. 이층 맨 끝⁠, 옆 객잔과 벽 하나를 같이 쓰는 방이었다⁠.

*

이 벽이 얇았다⁠. 이날 밤 내가 잠을 못 이룬 건 그래서였다⁠. 구팔봉은 바닥에 눕자마자 코를 골았는데⁠, 이 노인의 코골이에는 박자가 있어서 차라리 들을 만했다⁠. 문제는 벽 너머였다⁠.

“⁠결승까지는 이기시오⁠. 다 이기시오⁠. 그래야 사람들이 돈을 걸지⁠.⁠”

낮고 매끄러운 남자 목소리였다⁠. 개봉 말씨에 흑룡방 사람들 특유의 끝을 삼키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결승에서는 지시오⁠.⁠”

대답이 없었다⁠. 대신 쇠가 쇠를 스치는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칼을 칼집에서 손가락 한 마디쯤 뽑았다가 도로 밀어 넣는 소리였다⁠. 이 소리 끝이 떨렸다⁠.

“⁠동생 손가락 열 개가 아직 다 붙어 있소⁠, 하 소저⁠. 방주께서 그렇게 전하라 하셨소⁠.⁠”

“⁠…⁠…알았다⁠.⁠”

짧고 낮은 여자 목소리였다⁠. 하 소저라는 말이 내 귀를 붙잡았다⁠. 숭산 오는 길에 사람들이 입에 달고 다니던 이름이 하나 있었다⁠. 올해 우승 후보⁠, 여자 검객 하원비⁠. 나는 일어나 앉았다⁠. 벽에 귀를 대지 않아도 들렸지만⁠, 대고 싶었다⁠. 여자가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길게 들이쉬고는 꽤 오래 내쉬지를 않았다⁠.

이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발소리 없는 사람이 들어왔다⁠. 나는 이게 누구인지 알았다⁠.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톡⁠, 톡⁠.

“⁠하 소저⁠, 걱정 마시오⁠. 결승 판돈은 아주 클 거요⁠. 숭산 아래 객잔 거리에 마침 판을 여는 사람이 있소⁠. 개봉에서 내가 밑천까지 대 줬지⁠.⁠”

나는 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백 냥 꾸러미를 끌어당기던 손이었다⁠. 셈이 너무 쉽게 맞던 이 순간이 그제야 다시 들렸다⁠. 나는 판을 판 게 아니었다⁠. 그물을 판 거였다⁠.

구팔봉이 코를 골다 말고 잠꼬대를 했다⁠. “⁠판은 연 놈이 임자야⁠.⁠”

벽 너머에서 칼이 칼집에 끝까지 밀려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1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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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필깎이2026.10.26· 1화

    목값이 진짜 목숨 값이에요? 무공 모르는 사람이 판을 열면 목부터 위험할 것 같은데요?

    • 설묵향작가2026.10.27

      맞아요, 첫 화부터 판돈보다 자기 목값을 먼저 셉니다. 무공이 없으니 말로 버티는 수밖에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