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506자)

어서 오세요

냉동 수면 이백 년 뒤, 국보가 되었다 · 백로하

“⁠어서 오세요⁠.⁠”

마이크에 대고 이 말을 하자 사천삼백 명이 조용해졌다⁠. 나는 젓가락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국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천 년 잠은 6월이고요⁠. 그 전까지 이 가게 문 엽니다⁠. 내일부터요⁠. 들어오셔서 물건 고르시면 제가 계산해 드릴게요⁠.⁠”

웅성거림이 일었다⁠. 2226년 사람들은 「⁠계산⁠」이 무엇인지 알았다⁠. 손바닥을 판에 대는 일이다⁠. 그런데 누가 「⁠계산해 드리는⁠」 것은 몰랐다⁠. 사람이 사람 앞에 서서 물건을 받고⁠, 값을 말하고⁠, 봉투에 넣어 주는 일 말이다⁠. 이들의 세상에서 이 일은 백 년 전에 기계가 가져갔다⁠.

기라온이 내 손에서 마이크를 가져갔다⁠. 이 사람은 사람들을 보았고⁠, 사람들은 이 사람을 보았다⁠. 앞줄의 젊은 여자가 손을 들었다⁠.

“⁠들어가도 돼요⁠? 진짜 유리 안으로요⁠?⁠”

뒤이어 손이 백 개쯤 올라갔다⁠. 기라온은 이 손들을 한참 보다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하루 백 명이요⁠. 자리는 내일 아침 문 앞에서 줘요⁠.⁠”

이 사람은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이 자리에서 배웠다⁠.

*

다음 날 아침 아홉 시⁠, 첫 손님이 편의점 자동문 앞에 섰다⁠. 딩동⁠.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손님은 서른쯤 된 남자였다⁠. 문이 열리자 이 사람은 이 자리에 얼어붙었고⁠, 내가 인사하자 한 발 물러섰다가 다시 들어왔다⁠. 계산대 앞 진열대에는 박물관이 재현해 둔 빈 과자 봉지와 음료 깡통이 줄지어 있었다⁠. 이 사람은 그중에서 감자 칩 봉지 하나를 골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왔다⁠. 제물을 바치는 손 같았다⁠.

나는 봉지를 받아 바코드 기계에 갖다 댔다⁠. 기계는 이백 년 전에 죽었지만 나는 입으로 소리를 냈다⁠. 삑⁠.

“⁠천팔백 원입니다⁠. 봉투 필요하세요⁠?⁠”

남자의 입이 벌어졌다⁠. 이 사람은 봉투가 무엇인지 몰랐고⁠, 천팔백 원이 무엇인지 몰랐고⁠, 왜 내가 자기에게 무언가 필요하냐고 묻는지 몰랐다⁠. 이 사람은 손바닥을 계산대 위에 철썩 얹었다⁠. 나는 이 손바닥 옆에 봉지를 내려놓고⁠, 봉지를 비닐봉투에 넣어 손잡이를 이 사람의 손가락에 걸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이 사람은 묵념을 했다⁠. 그러고는 봉투를 가슴에 안고 나가다가 문 앞에서 돌아서서⁠, 이번에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 그냥 웃었다⁠.

이날 백 명이 왔다⁠. 다음 날도 백 명이었는데 줄은 박물관 정문까지 이어졌다⁠. 사흘째 줄은 정문을 넘어 둑 아래 계단까지 내려갔다⁠. 마하로가 말하길 둑 위 전차 안에서 사람들이 「⁠봉투 필요하세요⁠」를 서로에게 인사처럼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나흘째 온 손님 중에는 팔뚝에 「⁠어서 오세요⁠」를 그려 넣은 사람도 있었다⁠. 지워지는 물감이기를 빌었다⁠.

엿새째 오후에 아흔이 넘은 할아버지가 왔다⁠. 지팡이를 짚었고⁠, 걸음이 느려서 자동문이 두 번 닫혔다가 열렸다⁠. 진열대 앞에서 오래 서 있다가 껌 한 통을 골라 왔다⁠. 나는 삑 소리를 내고⁠, 봉투가 필요하냐고 묻고⁠, 껌을 봉투에 넣어 할아버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

할아버지가 이 자리에 섰다⁠. 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눈을 비볐다⁠.

“⁠다시 말해 봐요⁠.⁠”

“⁠또 오세요⁠.⁠”

“⁠사람이 나한테 그 말을 한 게 몇 해 만인지 몰라⁠. 집 문도⁠, 밥틀도⁠, 전차도 다 그 소리를 내⁠. 근데 다 같은 소리야⁠. 내 얼굴을 안 봐⁠.⁠”

이 사람은 껌을 든 손으로 내 손등을 한 번 두드리고 나갔다⁠. 다음 손님이 들어오는 딩동 소리가 나는 동안 나는 계산대 밑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2026년 새벽에도 저런 할아버지들이 있었다⁠. 담배 한 갑 사러 와서 날씨 이야기를 십 분씩 하던 사람들⁠. 나는 이 사람들이 귀찮았다⁠.

*

열흘째 되는 날⁠, 기라온이 가게를 옮겼다⁠.

줄이 박물관을 한 바퀴 둘러서 다른 관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문을 못 찾는다는 게 이 사람의 말이었다⁠. 유리관 안 편의점 계산대가 통째로 뜯겨 본관 일 층 큰 로비 한가운데로 옮겨졌다⁠. 자동문도 감지기째 떼어 왔다⁠. 로비 천장은 삼 층 높이였고⁠, 계산대는 이 한가운데서 장난감처럼 작았다⁠.

이날부터 나는 「⁠걷는 국보⁠」가 되었다⁠. 아침 여덟 시 반⁠, 팔팔이가 유리관 문 앞에 와서 「⁠국보 이동을 시작합니다⁠」라고 하면 나는 복도와 승강기를 지나 로비로 간다⁠. 밤에는 같은 길로 돌아온다⁠. 문은 팔팔이가 열었다⁠. 팔팔이의 손바닥은 박물관 안 모든 문을 열었다⁠. 내 것은 여전히 아무것도 못 열었다⁠.

그리고 사흘 뒤⁠, 로비 계산대 위에 새 판이 걸렸다⁠.

「⁠살아 있는 21세기 — 이십사 시 편의점⁠」

“⁠편의점은 원래 이십사 시간이라면서요⁠.⁠”

기라온이 판 아래에서 말했다⁠. 이 사람은 내가 첫날 마하로에게 한 말을 그대로 들고 왔다⁠. 녹음은 전부 한다고 했었다⁠.

“⁠밤에는 누가 와요⁠?⁠”

“⁠둑 경비⁠, 배 일꾼⁠, 밤 전차 기사⁠. 밤에 일하는 사람이 이 도시에 많아요⁠. 그 사람들은 낮에 줄을 못 서요⁠.⁠”

“⁠야간 수당은요⁠?⁠”

“⁠그게 뭐예요⁠?⁠”

“⁠밤에 일하면 한 시간에 한 배 반 쳐 주는 거요⁠. 2026년에는 법이었어요⁠. 지키는 가게는 반쯤이었지만⁠.⁠”

기라온이 판을 올려다보았다⁠.

“⁠국보는 일하지 않아요⁠. 전시돼요⁠. 계산대 앞에 서 있는 것도 시범이고⁠, 손님한테 봉투를 건네는 것도 시범이에요⁠. 시범에는 값을 안 쳐요⁠. 그 값은 관람료로 박물관이 받아요⁠.⁠”

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이 로비에서 내가 아무리 손을 놀려도⁠, 그건 「⁠제 손으로 일한⁠」 것이 아니었다⁠. 이 사람은 이 틈까지 미리 막아 두고 판을 걸었다⁠.

그렇게 나는 이백 년을 건너와서 다시 야간을 섰다⁠. 낮 손님을 받고 저녁에 유리관에서 네 시간 자고⁠, 밤 열한 시에 팔팔이를 따라 다시 로비로 내려갔다⁠. 허리가 먼저 알았다⁠. 이 자세⁠, 이 시간⁠, 이 형광등⁠. 로비 불은 형광등이 아니었지만 허리에게는 같았다⁠.

밤손님은 낮손님과 달랐다⁠. 이들은 울지 않았고 묵념도 하지 않았다⁠. 둑 경비들은 진열대 앞에서 장난을 쳤고⁠, 배 일꾼들은 내게 바다 이야기를 했다⁠. 새벽 한 시에 온 전차 기사는 계산대에 팔꿈치를 괴고 앉아 졸다가 갔다⁠. 나는 경비가 졸도록 내버려 두었다⁠. 2026년에도 그런 손님이 있었다⁠.

팔팔이는 사흘 만에 내 말을 배웠다⁠. 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 손님이 오자⁠, 팔팔이가 계산대 뒤로 미끄러져 들어가 둥근 팔로 과자 봉지를 받아 들고 말했다⁠. “⁠봉투가 필요하십니까⁠?⁠” 배 일꾼 셋이 이 자리에서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돌아와 보니 셋이 아직 묵념 중이었고⁠, 팔팔이는 「⁠안녕히 가십시오⁠」를 할 차례를 기다리며 파란 불을 깜박이고 있었다⁠. 이날부터 밤손님들은 팔팔이가 계산하는 줄과 내가 계산하는 줄을 따로 섰다⁠. 팔팔이 줄이 더 길었다⁠. 장례 같아서 좋다고 했다⁠.

*

일이 터진 건 이 주의 마지막 새벽이었다⁠.

스무 살쯤 된 둑 경비 하나가 계산을 마치고 나가다가 손목에 찬 작은 기계를 툭 쳤다⁠. 기계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헐⁠. 대박⁠.⁠”

내 목소리였다⁠. 숨 쉬는 박자까지 내 것이었다⁠.

“⁠그거 뭐예요⁠?⁠”

경비가 손목을 들어 보였다⁠. “⁠「⁠국보 목소리⁠」요⁠. 박물관에서 팔잖아요⁠. 집 문이 열릴 때 ‘⁠어서 오세요⁠’ 해 주고⁠, 밥틀이 다 되면 ‘⁠헐 대박⁠’ 해 줘요⁠. 요새 다 이거 깔아요⁠.⁠”

경비가 나가고 딩동 소리가 났다⁠. 「⁠어서 오세요⁠.⁠」 녹음된 여자 목소리였다⁠. 나는 이 소리가 이제 이 도시의 어느 집 문에서는 내 목소리로 난다는 것을 생각했다⁠. 내가 유리관 안에서 잘 때 뒤척이며 낸 소리도 팔렸을까 싶었다⁠.

새벽 한 시 반에 마하로가 녹음기를 걷으러 로비에 왔다⁠. 이 사람은 밤마다 이 시간에 와서 하루 치 녹음을 받아 갔다⁠. 나는 계산대 밖으로 나가 마하로 앞을 막았다⁠.

“⁠제 목소리 팔고 있었어요⁠?⁠”

마하로는 녹음기를 쥔 손을 내리지 않았다⁠.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고⁠, 이 사이가 대답이었다⁠.

“⁠알고 있었어요⁠?⁠”

“⁠알았어요⁠. 처음부터는 아니고⁠, 둘째 주부터요⁠. 「⁠옛말 음성⁠」이라고⁠, 박물관 상점에서 팔아요⁠. 그 몫으로 21세기관 난방을 돌려요⁠. 내 연구비도 거기서 나와요⁠.⁠”

“⁠제 목소리로 번 몫이 얼마예요⁠?⁠”

“⁠박물관 전기 몫 석 달 치쯤이요⁠.⁠”

“⁠저는 그걸로 물 한 컵도 못 사요⁠.⁠”

이 사람이 처음으로 녹음기를 등 뒤로 감췄다⁠. 나는 이 손을 봤다⁠. 손가락 마디가 하얬다⁠.

“⁠미안해요⁠. 그래도 녹음은 해야 돼요⁠. 당신 말은 이 시대에 남은 마지막 살아 있는 옛말이에요⁠. 당신이 잠들면 다음 봄까지 아무도 그 말을 안 해요⁠.⁠”

“⁠그러니까 잠들기 전에 다 짜 가겠다는 거네요⁠.⁠”

마하로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 사람은 계산대 위의 녹음기를 새것으로 바꿔 놓고 갔다⁠. 나는 이 녹음기를 엎어 두었다⁠. 엎어도 녹음은 될 것이었다⁠.

*

새벽 두 시⁠, 자동문 앞에 큰 그림자가 멈췄다⁠. 딩동⁠.

들어온 사람은 덩치가 문틀만 한 남자였다⁠. 서른 중반쯤 되었고⁠, 흰 앞치마를 둘렀고⁠, 두 손에 뚜껑 덮인 냄비를 들고 있었다⁠. 앞치마 가슴에 로비 옆 구내식당 이름이 박혀 있었다⁠.

“⁠어서 오세요⁠.⁠”

“⁠무늬예요⁠. 저 옆 식당 해요⁠.⁠”

이 사람은 냄비를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뚜껑 틈으로 김이 샜는데⁠, 아무 냄새가 안 났다⁠. 김에서 냄새가 안 나는 국물은 처음이었다⁠.

“⁠우리 식당은 바깥 업체예요⁠. 박물관 거 아니고 내 거요⁠. 밥틀 죽을 내요⁠. 하루에 열 그릇도 못 팔아요⁠. 근데 저녁마다 이 로비에서 라면 냄새가 나니까 사람들이 우리 식당 앞을 지나가면서 코를 킁킁대요⁠. 우리 집 거에는 그런 냄새가 없어요⁠.⁠”

이 사람이 뚜껑을 열었다⁠. 맑은 국물에 국수가 잠겨 있었다⁠.

“⁠맛 좀 봐 줘요⁠. 뭐가 모자란지 말해 주면⁠, 이 한 그릇 드릴게요⁠. 일한 값으로요⁠.⁠”

일한 값⁠. 나는 이 말을 한 번 더 들었다⁠. 보관자가 주지 않은 밥⁠, 제 손으로 일해서 받은 밥⁠. 이 사람은 박물관 사람이 아니었다⁠. 바깥 업체였다⁠.

나는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떠 맛봤다⁠. 물이었다⁠. 따뜻한 물에 아주 희미하게 다시마가 지나간 맛이었다⁠.

“⁠소금이 없어요⁠. 다시마는 끓이지 말고 찬물에 담갔다가 건져야 하고요⁠. 멸치나⁠, 아니면 마른 생선 같은 거 있어요⁠? 대가리 떼고 볶아서 넣어야 돼요⁠. 그리고 간장이 있으면 반 숟가락만⁠…⁠”

말하는 사이에 무늬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작은 판을 꺼내 내 말을 받아 적듯 손가락을 놀렸다⁠. 이 손이 점점 빨라졌다⁠.

“⁠그럼 이건 그냥 드세요⁠. 다음 거는 고쳐서 가져올게요⁠.⁠”

이 사람이 냄비를 내 쪽으로 밀었다⁠. 나는 숟가락을 다시 쥐었다⁠.

“⁠그 그릇에 손대면요⁠.⁠”

로비 입구에서 구두 소리가 났다⁠. 기라온이었다⁠. 새벽 두 시인데 외투 단추가 목까지 채워져 있었다⁠. 이 사람은 밤마다 이 시간에 한 번 로비를 돌았다⁠. 나는 이걸 이날 처음 알았다⁠.

“⁠구내식당 계약은 오늘로 끝나요⁠. 국보에게 들어가는 음식은 내가 검사해요⁠. 바깥 업체가 검사 안 한 음식을 국보에게 주면 계약을 끊을 수 있어요⁠. 계약서에 그렇게 적혀 있어요⁠.⁠”

무늬의 큰 손이 냄비 손잡이에서 멈췄다⁠. 무늬는 기라온을 보고⁠, 나를 보고⁠, 냄비를 봤다⁠. 하루 열 그릇이라고 했다⁠. 이 열 그릇도 이 식당 자리가 있어야 판다⁠.

기라온은 이 자리에 선 채로 기다렸다⁠. 서두르지 않았다⁠. 이 사람은 무늬가 냄비를 도로 가져갈 거라고 알고 있었다⁠.

무늬가 숨을 크게 쉬었다⁠. 앞치마가 한 번 부풀었다가 꺼졌다⁠. 그리고 냄비를 내 앞으로 한 뼘 더 밀었다⁠.

3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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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귤까는중2026.10.27· 3화

    이백 년 뒤 사람들 말은 알아들을 수 있나요?

    • 백로하작가2026.10.27

      대부분은 알아들어요. 그런데 낱말 뜻이 조금씩 바뀌어 있어서 오해가 자꾸 생깁니다.

어서 오세요 · 냉동 수면 이백 년 뒤, 국보가 되었다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