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231자)
편의점 파라솔
망한 기획사 연습생 넷으로 데뷔시키기 · 오세림
숙소 냉장고 문에는 A4 용지 한 장이 자석 네 개로 붙어 있었다. 맨 위에 「반찬 당번 — 어기면 사형」이라고 적혀 있었고, 그 아래로 요일마다 김치 담당, 계란 담당, 밥 담당, 그리고 「아무도 안 먹는 멸치볶음 담당」이 나뉘어 있었다. 글씨는 소담의 것이었다. 9월 11일 금요일 아침 여덟 시, 나는 그 앞에서 열 개들이 계란판을 들고 서 있었다. 계란판은 비어 있었다.
“누가 먹었어요?”
소담이 물었다. 정확히는, 물은 게 아니라 이미 범인을 정해 두고 자백을 받는 목소리였다.
“계란 담당 유나잖아요.”
태희가 이불 속에서 말했다. 3층 투룸의 작은방에는 이층 침대 두 개가 붙어 있었고, 사람 넷이 누우면 바닥에 발 디딜 데가 없었다. 큰방은 옷걸이와 캐리어와 접이식 빨래 건조대가 차지하고 있었다.
“담당은 사 오는 사람이지 먹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이층 침대 위 칸에서 예나가 고개만 내밀었다.
“단백질.”
“열 개를?”
“이틀.”
“그럼 이틀 동안 우리는 뭘 먹었는데?”
“멸치.”
소담이 냉장고 문을 쾅 닫았다. 자석 하나가 떨어져 냉장고 밑으로 굴러 들어갔다. 이안은 침대 아래 칸에서 귀마개를 낀 채 돌아누웠다. 나는 학원에서 쉬는 시간마다 터지던 싸움을 떠올렸다. 그때 쓰던 방법은 하나였다. 싸움을 수업으로 바꾸는 것.
“좋아요. 반찬 회의는 오늘 저녁 일곱 시. 그 전에 숙제 검사부터 할게요. 어제 내 준 거, 팀 이름 후보 다섯 개씩.”
이불 셋이 동시에 움직였다. 냉장고 밑으로 들어간 자석은 그날 끝내 아무도 꺼내지 않았다.
*
방송사 서류에는 팀 이름을 넣어야 했다. 대표가 정해 둔 이름은 「스타라이트 걸즈」였고, 넷은 그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무슨 상한 반찬 이름을 말하듯 얼굴을 찌푸렸다.
연습실 화이트보드에 후보 스무 개가 올라갔다. 태희가 낸 것은 전부 콜센터 말투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는 팀 이름이 아니라 대기음이라고 소담이 지적했다. 소담이 낸 것은 성악 용어였는데, 「아첼레란도」를 세 번 연달아 발음하다가 혀를 깨물었다. 예나는 한 개만 냈다. 「부산」. 이안은 한 개도 내지 않았다.
내 차례가 오자 나는 영어로 하나를 적었다. 「Late Bloomers」.
“늦게 피는 꽃이라는 말이에요. 남들보다 늦게 피는데 피긴 피는 사람들.”
넷이 화이트보드를 한참 봤다. 소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촌스러워요.”
“뜻은 좋잖아요.”
“뜻 좋은 게 원래 촌스러워요. 결혼식 축가처럼.”
“앞에만 쓰면 되지.”
태희가 말했다. 블루머스를 지우개로 지우자 「Late」만 남았다.
“레이트.”
“그거 지각이라는 말 아니에요?”
“지각생이네.”
예나가 말했다. 그 말에 넷이 동시에 웃었다. 이안도 웃었다. 태희가 사 년, 소담과 예나가 삼 년씩, 이안이 사 년 반을 연습생으로 버텼다. 그 햇수를 다 더하면 열네 해가 넘었고, 그동안 남들은 데뷔하고 해체하고 재결합까지 했다. 지각생이라는 말은 놀리는 말이었는데, 넷 다 그 말을 놀림으로 듣지 않았다.
팀 이름은 「레이트」가 됐다. 화이트보드 구석, 예나가 지난번에 써 놓은 「서술어」 옆에 누가 또 작은 하트를 그려 넣었다.
남은 문제는 대표였다. 방송사에 전화해 보니 강유찬의 말이 맞았다. 기획사 대표의 위임장이 있어야 매니저 이름으로 서류를 낼 수 있었다. 대표 전화는 여전히 꺼져 있었다.
위임장은 그날 오후 다섯 시에 퀵서비스로 왔다. 보낸 사람 칸이 비어 있는 누런 봉투였고, 안에는 대표 도장이 찍힌 위임장 한 장과 메모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메모지에는 볼펜으로 딱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미안합니다. 애들 잘 부탁합니다.」
퀵 기사에게 어디서 받아 왔냐고 물었더니 강남역 근처 지하철역 보관함이라고 했다. 나는 메모지를 손에 쥐고 계단에 오래 앉아 있었다. 대표는 우리가 서류를 내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가 대표에게 그 말을 전했는지, 나는 그때 물어보지 않았다.
*
밤 열한 시가 넘어서 서류에 붙일 영상을 다시 찍었다. 시장 영상에 연습실 영상 하나를 더 붙이기로 했다. 압류 딱지가 붙은 조명은 켜도 되는 물건이었지만, 넷은 그 딱지가 화면에 걸리지 않게 조명 방향을 몇 번이나 바꿨다. 붉은 테두리가 거울에 비칠 때마다 다시 찍었다.
태희의 랩 대목에서는 세 번 연속으로 끊겼다. 박자가 빨라지는 자리에서 태희가 숨을 못 쉬었다. 나는 학원에서 듣기평가 대비반을 맡던 시절을 떠올렸다.
“태희 씨, 그 줄은 한 덩어리로 들리게 끊어 읽어야 돼요. 영어 듣기평가 원어민이 빨리 말하는 것 같아도, 사실 의미 단위로 숨을 쉬거든요. 「나는 지하에서」 숨, 「사 년을 셌어」 숨.”
“매니저님, 숨 쉬는 자리를 그어 주세요.”
나는 태희의 가사 종이에 빗금을 그었다. 수능 영어 지문에 긋던 그 빗금이었다. 태희는 빗금대로 숨을 쉬었고, 네 번째에 끊기지 않았다. 다 부르고 나서 태희는 콜센터 상담원 목소리로 말했다. “고객님, 문의하신 빗금 서비스 만족스럽습니다.” 소담이 바닥을 치며 웃다가 조명 딱지를 화면에 다시 걸리게 만들었다.
열한 시 사십 분에 소담이 배고프다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계란은 없었다. 나는 지갑을 챙겨 길 건너 편의점으로 갔다.
편의점 앞에는 초록 파라솔 두 개가 펼쳐져 있었다. 하나는 비어 있었고, 하나에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회색 후드를 입은 쪽은 처음에 태희인 줄 알았다. 이안이었다. 태희의 후드를 빌려 입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 남색 정장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강유찬이 명함 한 장을 테이블 위로 밀었다. 이안은 그걸 바로 집지 않았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 둔 채 명함만 내려다봤다. 파라솔 끝에 매달린 전구가 바람에 흔들려서, 명함 위로 빛이 왔다 갔다 했다.
나는 거기까지 보고 길을 건넜다. 신호등이 빨간불이었다.
“늦은 시간에 회의하시네요.”
강유찬이 고개를 들었다. 놀라지 않았다. 내가 올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대행님, 편의점 오셨어요? 앉으세요. 뭐 드실래요?”
“이안 씨, 올라가 있을래요? 소담 씨가 배고프대요.”
이안이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테이블 위의 명함을 집었다. 집는 손이 빨랐다. 그러고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삼각김밥을 사러 간 건지, 나를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이안이 앉았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아직 따뜻했다.
“이사님, 이안 씨한테 직접 연락하지 마세요. 저를 거치시라고 했잖아요.”
“이안 씨가 먼저 나오라고 했어요. 저는 불려 나왔고요.”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틈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서류는 내세요. 붙을 거예요. 이안 씨 목소리면 1차는 넘어요. 홍대 2차도 넘을지 모르죠. 그런데 3차는 상암 스튜디오에서 심사위원이 점수를 줍니다. 그 심사위원 자문을 제가 맡았어요. 이번 시즌 기획 단계부터요.”
그는 그 말을 아주 천천히 했다. 한 단어씩 테이블에 내려놓듯이.
“그러니까 대행님이 어떻게 해도 이안 씨는 결국 제 앞에 서요. 대행님은 그 사이 두 달 동안 나머지 셋까지 끌고 가느라 적금이고 뭐고 다 쓰실 거고요. 그냥 지금 이안 씨 하나 보내 주시면 표 실장님 빚 절반이 정리됩니다. 셋은 다른 데 알아봐 드릴 수도 있어요. 저 그 정도는 해요.”
“셋은 물건이 아니에요.”
“이안 씨도 물건 아니죠. 그러니까 이안 씨가 정하게 두세요.”
그때 편의점 문이 열렸다. 이안이 비닐봉지를 들고 나왔다. 삼각김밥 네 개와 바나나우유 하나가 비쳐 보였다. 이안은 우리 테이블 옆에 멈춰 섰다.
“이안 씨는 사인 안 해요. 그렇죠?”
나는 이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안이 대답하기 전에 그 말을 먼저 한 것이 실수라는 걸, 말하고 나서 알았다.
이안이 나를 내려다봤다. 화난 얼굴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그건 제가 정해요, 매니저님.”
이안은 강유찬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길을 건너갔다. 이번에는 신호가 초록불이었다.
강유찬이 일어났다. 의자를 테이블 안쪽으로 밀어 넣고, 파라솔 끝 전구를 한 번 손으로 툭 쳐서 흔들림을 멈췄다.
“좋은 선생님이실 것 같아요. 학생이 대답하기 전에 답을 알려 주시네.”
그는 길 끝에 세워 둔 검은 차로 걸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바나나우유 한 개를 사러 들어가야 할지, 그냥 따라 건너가야 할지 정하지 못한 채 한동안 앉아 있었다.
*
결국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카운터에 초록 조끼의 알바생이 있었다. 지난 토요일 시장 앞에서 담배를 든 채 끝까지 서 있다가 소리가 형편없다고 말한 그 사람이었다. 이름표에 「한민재」라고 적혀 있었다.
“그 정장 아저씨, 이번 주에만 세 번째예요.”
그가 바코드를 찍으며 말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매번 그 아가씨랑요?”
“두 번은 혼자 와서 커피만 마시고 그쪽 지하 계단만 봤어요. 오늘 처음 같이 앉았고요.”
“그걸 왜 저한테 말해 줘요?”
“그날 소리가 너무 형편없어서요. 반주 파일을 그 스피커로 틀면 저음이 다 날아가요. 제가 작곡과 휴학 중이라 그런 게 귀에 걸려요.”
그는 바나나우유 옆에 계란 한 판을 올려놓았다. 나는 계란을 산다고 한 적이 없었다.
“아까 그 아가씨가 계란 없다고 혼잣말하던데요.”
*
새벽 한 시에 서류를 냈다. 계단 세 번째 칸, 와이파이 한 칸으로 영상이 올라가는 데 이십육 분이 걸렸다. 「접수 완료」가 뜨자 위층에서 소담이 계란 프라이를 열 개 부치는 소리가 났다. 예나 몫으로 네 개를 남겨 두라고 소리쳤는데, 안 남겼을 것이다.
반찬 회의는 결국 열리지 않았고, 소담은 내가 회의를 미뤘다는 이유로 나를 당번표에 넣었다. 빨래 담당, 이번 주 전부. 새벽 두 시에 나는 숙소 큰방 바닥에 앉아 빨래 바구니를 뒤집었다. 연습복, 양말, 땀에 젖어 딱딱해진 수건. 세탁기에 넣기 전에 주머니를 하나씩 뒤졌다. 학원에서 교복 빨래 담당하던 원장 사모님이 하던 버릇이었다. 볼펜 하나 들어가면 한 통이 다 망가진다고.
이안의 검정 연습 바지 오른쪽 주머니에서 빳빳한 종이가 나왔다. 명함이었다. 블루웨이브 엔터테인먼트 신인 발굴 이사 강유찬.
뒤집었다. 뒷면에 만년필 글씨가 있었다.
「9월 20일 오후 두 시. 7층 연습실에서 봐요.」
그런데 명함은 새것이 아니었다. 귀퉁이가 닳아 둥글게 되어 있었고, 한 번 젖었다 마른 자국이 물결처럼 번져 있었다. 오늘 밤 편의점 파라솔에서 받은 명함이 아니었다. 이안은 이 명함을 훨씬 전부터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럼 오늘 이안이 집어 간 명함은 어디 있지?
세탁기 문을 닫지 못한 채 나는 작은방 쪽을 봤다. 아래 칸 침대에서 이안이 귀마개를 낀 채 등을 돌리고 있었다. 숨소리가 너무 고르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