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3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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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만 번째 전세사기 피해자 · 금나율

2026년 10월 2일 금요일 오전 열 시⁠, 인천경찰청 4층 조사실의 의자는 한 달 전과 같은 자리에 있었다⁠. 달라진 것은 탁주엽이 처음 한 말이었다⁠.

“⁠계나윤 씨는 오늘 피의자 신분입니다⁠. 진술을 거부할 수 있고⁠, 거부해도 불이익은 없습니다⁠.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신 말은 재판에서 증거로 쓰일 수 있습니다⁠. 이해하셨어요⁠?⁠”

“⁠네⁠.⁠”

책상 위에 쫄면 그릇은 없었다⁠. 대신 삶은 달걀 두 알이 휴지 위에 놓여 있었다⁠. 탁주엽은 달걀을 보는 나윤의 눈을 보고 하나를 밀어 주었다⁠.

“⁠쫄면 집 사장님이 달걀을 따로 싸 주셨어요⁠. 오늘은 쫄면 안 먹으려고요⁠. 불을까 봐⁠.⁠”

나윤은 달걀을 받지 않았다⁠. 조끼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임의제출 하겠습니다⁠. 비밀번호는 0406이에요⁠.⁠”

탁주엽이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0406이 무슨 날짜인지 묻지 않았다⁠. 수사관 하나가 들어와 제출서를 받아 적고 휴대전화를 비닐 봉투에 넣었다⁠. 봉투 입구를 접는 소리가 났다⁠.

“⁠9월 1일에 하신 진술 가운데 바꾸고 싶은 게 있으세요⁠?⁠”

“⁠두 개요⁠.⁠” 나윤은 손을 무릎 위에 모았다⁠. “⁠R3 모른다고 했는데⁠, 알아요⁠. 도상만 사장이 계약 하나 끝날 때마다 따로 보내는 돈이에요⁠. R1이 100만 원이에요⁠. 302호 계약 때 R3가 소장님한테 갔고⁠, 저한테 50만 원이 왔어요⁠.⁠”

탁주엽이 자판을 쳤다⁠. 이번에는 나윤이 한 말과 길이가 같았다⁠.

“⁠두 번째는요⁠?⁠”

“⁠잘 기억 안 난다고 한 전화요⁠. 기억나요⁠. 2024년 4월 6일 오전 열 시쯤이에요⁠. 도상만 사장이 사무실 전화로 소장님한테 했어요⁠. 스피커가 켜져 있었어요⁠. 새로 들어오는 신혼부부 돈으로 A동 201호 빼 줘야 하니까 오늘 도장 꼭 받으라고요⁠. 저는 그 말을 듣고 한 시간 뒤에 302호 계약서를 뽑았어요⁠.⁠”

자판 소리가 멈췄다가 다시 이어졌다⁠. 탁주엽은 다 치고 나서 화면을 한참 보았다⁠.

“⁠반태식 씨 진술하고 많이 다르네요⁠. 반태식 씨는 리베이트를 사무실 운영비라고 했고⁠, 계 실장이 나눴다고 했어요⁠.⁠”

“⁠저는 50만 원 받은 것만 알아요⁠. 소장님이 얼마 받았는지는 몰라요⁠.⁠”

“⁠그건 저희가 알아볼게요⁠.⁠” 탁주엽이 달걀 하나를 집어 책상 모서리에 톡 쳤다⁠. 껍질에 금이 갔다⁠. “⁠계나윤 씨⁠, 하나만 물을게요⁠. 이거 왜 지금 말하세요⁠? 한 달 전엔 안 하셨잖아요⁠.⁠”

나윤은 달걀 껍질의 금을 보았다⁠. 금은 한 줄에서 시작해 사방으로 번졌다⁠.

“⁠한 달 동안 그 집 앞을 매일 지나다녔어요⁠. 302호요⁠. 문에 경매 종이가 붙어 있어요⁠. 제가 쓴 계약서로 들어간 집이에요⁠.⁠”

탁주엽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판을 쳤다⁠. 나윤의 말을 그대로 쳤는지⁠, 줄여서 쳤는지는 화면이 보이지 않아 알 수 없었다⁠. 조서는 열네 장이었다⁠. 나윤은 열네 장을 다 읽고 장마다 손도장을 찍었다⁠. 마지막 장에서 탁주엽이 껍질을 다 깐 달걀을 다시 밀어 주었다⁠. 이번에는 받았다⁠. 달걀은 아직 따뜻했다⁠.

*

열두 시 반⁠, 나윤은 경찰청 정문 앞 화단 턱에 앉아 있었다⁠. 휴대전화가 없으니 시간을 볼 데가 없었다⁠. 경찰청 건물 벽의 시계를 보려고 고개를 젖혔다가 목이 아파 내렸다⁠. 휴대전화 없이 사는 법을 열네 해 만에 처음 다시 배우는 중이었다⁠.

공중전화는 경찰청 1층 로비에 하나 있었다⁠. 나윤은 동전을 찾느라 조끼 주머니를 다 뒤졌다⁠. 오백 원짜리 하나와 백 원짜리 셋이 나왔다⁠. 재열의 번호는 외우고 있었다⁠. 계약서에 수없이 적은 번호였다⁠.

“⁠재열 씨⁠, 계나윤이에요⁠. 공중전화예요⁠.⁠”

“⁠공중전화요⁠? 아직 있어요⁠?⁠”

“⁠경찰청엔 있어요⁠. 오늘 저녁 모임 열어 주실 수 있어요⁠? 할 말이 있어요⁠.⁠”

수화기 너머에서 냉동 창고 지게차 경보음이 삐삐 울렸다⁠. 재열은 경보음이 멈출 때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숨기던 거요⁠?⁠”

“⁠네⁠.⁠”

“⁠여덟 시요⁠.⁠” 재열이 말했다⁠. “⁠다 오라고 할게요⁠.⁠”

전화가 끊기고 공중전화가 백 원짜리 하나를 도로 뱉었다⁠. 나윤은 동전을 쥐고 한참 로비에 서 있었다⁠.

*

밤 여덟 시⁠, 필로티 주차장에는 쉰여덟 명이 모였다⁠. 단톡방 사람보다 많았다⁠. 단톡방에 없는 노인들을 옥경희가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 데려왔다⁠. 기둥에는 새 종이가 붙어 있었다⁠. 옥경희의 글씨가 아니었다⁠. 재열의 글씨였고⁠, 작았다⁠. 「⁠안건 — 계나윤⁠」⁠.

나윤은 앞으로 나갔다⁠. 오늘도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휴대전화도 없었다⁠.

“⁠8월 14일 모임에서 수수료 얼마 받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저는 법정 수수료만 말했어요⁠. 하나를 빼고 말했어요⁠.⁠”

필로티 천장의 형광등이 지잉 울었다⁠. 지난번에 깜박이던 등은 누가 갈아 끼워 이제 깜박이지 않았다⁠.

“⁠도상만 사장은 계약이 끝날 때마다 중개사무소에 따로 돈을 보냈어요⁠. 리베이트요⁠. 302호 계약 때 300만 원이 소장님한테 갔고⁠, 그중 50만 원이 저한테 왔어요⁠. 그리고 302호 계약 한 시간 전에 저는 도상만 사장이 302호 보증금으로 A동 201호 보증금을 돌려주겠다고 하는 전화를 들었어요⁠. 듣고도 계약서를 뽑았어요⁠. 오늘 경찰에 다 말했어요⁠. 저는 사기 방조 피의자예요⁠.⁠”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B동 앞 도로로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가 길게 들렸다⁠.

맨 뒤에서 종이컵 하나가 날아왔다⁠. 컵은 나윤의 발 앞에 떨어져 굴렀다⁠. 빈 컵이었다⁠. 던진 사람은 C동 402호 남자였다⁠. 남자는 컵을 던진 손을 내려다보다가 주머니에 넣었다⁠. 누가 사기꾼이라고 했고⁠, 누가 그만하라고 했고⁠, 누가 울었다⁠.

옥경희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우산을 짚지 않았다⁠.

“⁠50만 원⁠?⁠”

“⁠네⁠.⁠”

“⁠우리 아들 장가 밑천 8천 날아가는데⁠, 실장은 50만 원 받았어⁠?⁠”

“⁠네⁠.⁠”

옥경희는 나윤을 오래 보았다⁠. 화를 낼 줄 알았는데 화를 내지 않았다⁠. 다시 앉으면서 혼잣말처럼 말했다⁠.

“⁠싸게 팔았네⁠.⁠”

웃는 사람은 없었다⁠. 웃음이 날 자리에서 아무도 웃지 않자⁠, 말이 더 아프게 내려앉았다⁠.

재열이 앞으로 나왔다⁠. 나윤과 한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멈췄다⁠. 재열은 나윤을 보지 않고 사람들을 보았다⁠.

“⁠50만 원이요⁠.⁠” 재열이 말했다⁠. “⁠우리 집은 1억 6천이고요⁠.⁠”

재열이 한 말은 그것뿐이었다⁠. 숫자 두 개를 나란히 놓았을 뿐인데 필로티 안의 공기가 기울었다⁠. 예슬이 의자에서 일어나 계단으로 올라갔다⁠. 계산기를 의자 위에 두고 갔다⁠.

재열이 그제야 나윤을 보았다⁠.

“⁠서류는 계속 해 주세요⁠. 304호⁠, 306호 결정 아직이고⁠, 실장님 아니면 할 사람이 없어요⁠. 대신 대책위 회의에서는 빠지세요⁠. 단톡방은 남으세요⁠. 서류 공지 받아야 하니까⁠. 말은 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재열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오늘 말한 건 잘한 거예요⁠. 늦게 한 거고요⁠.⁠”

재열은 의자 위의 계산기를 집어 들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나윤의 발 앞에서 종이컵이 바람에 반 바퀴 굴렀다⁠. 나윤은 컵을 주워 필로티 구석 쓰레기통에 넣었다⁠. 쓰레기통 옆에 김 실장이 붙였던 「⁠급매 전세⁠」 전단이 구겨진 채 버려져 있었다⁠.

*

밤 열 시⁠, 3층 복도를 지나 305호로 가는데 302호 문이 열렸다⁠. 예슬이 문틀을 붙잡고 서 있었다⁠. 눈이 부어 있었고⁠, 손에 계산기가 없었다⁠.

“⁠실장님⁠.⁠”

나윤은 멈췄다⁠. 302호 문의 「⁠법원 경매 진행 중⁠」 종이가 예슬의 어깨 너머로 보였다⁠. 빨간 사인펜 줄이 복도 등 아래서 검붉었다⁠.

“⁠그 침대에서요⁠, 라고 했잖아요⁠. 우리 집에서 맥주 먹던 날⁠. LH가 사 주면 그 침대에서 계속 살 수 있다고요⁠.⁠”

“⁠네⁠.⁠”

“⁠그 말 할 때도 50만 원 생각했어요⁠?⁠”

나윤은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면 예슬은 믿어 줄 사람이었다⁠. 예슬은 언제나 먼저 믿어 주는 사람이었다⁠. 2024년 4월 계약 날에도 나윤이 내민 각서를 먼저 믿었다⁠.

“⁠했어요⁠. 매일 했어요⁠.⁠”

예슬의 입술이 떨렸다⁠. 울 줄 알았는데 울지 않았다⁠. 대신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요⁠. 거짓말은 아니네요⁠.⁠”

“⁠예슬 씨⁠.⁠”

“⁠오늘은 말 걸지 마세요⁠. 내일은 몰라요⁠. 내일 되면 304호 서류 물어볼 거예요⁠. 그건 물어볼 거예요⁠.⁠”

문이 닫혔다⁠. 닫히기 전에 예슬이 문 안쪽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계산기였다⁠. 문틈으로 계산기 단추 누르는 소리가 한 번 났다⁠. 뭘 계산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

밤 열한 시⁠, 305호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한솔이 서 있었다⁠. 실습복 위에 카디건을 걸쳤고⁠, 손에 신발 상자를 들고 있었다⁠.

“⁠언니⁠, 저 이거 아빠 이불장에서 찾았어요⁠. 맨 아래 칸에 신발 상자가 있었는데⁠, 신발이 아니었어요⁠.⁠”

상자 안에 통장이 넷 들어 있었다⁠. 은행이 다 달랐다⁠. 통장마다 겉장 모서리가 닳아 둥글었고⁠, 한 권은 비닐 커버 안에 요양병원 주차권이 끼워져 있었다⁠. 오래⁠, 자주 펼친 통장이었다⁠. 한솔이 맨 위의 것을 펼쳐 보였다⁠.

“⁠이거 아빠가 엄마 병원비 통장이라고 했던 거예요⁠.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도 계속 썼어요⁠. 병원비 남은 거 갚는다고요⁠.⁠”

나윤은 거실 바닥에 통장을 펼쳤다⁠. 입금 내역이 줄줄이 이어졌다⁠. 보낸 사람은 거의 다 같았다⁠. 「⁠해든건설⁠」⁠. 금액 옆에 태식의 글씨로 볼펜 메모가 적혀 있었다⁠. 「⁠R2⁠」 「⁠R3⁠」 「⁠R5⁠」⁠. 2022년 봄부터 2024년 겨울까지⁠, 장마다 같은 이름과 같은 글씨가 이어졌다⁠.

나윤은 서랍에서 낡은 계산기를 꺼냈다⁠. 중개사무소 첫 월급으로 산 것이었고⁠, 휴대전화가 없으니 이것밖에 없었다⁠. 한 줄씩 더했다⁠. 한솔은 옆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숫자가 바뀌는 계산기 화면만 보았다⁠. 네 권을 다 더하고 나니 사십 분이 지나 있었다⁠. 계산기 화면에 마지막 숫자가 떴다⁠. 1억 9⁠,100만 원⁠.

“⁠이거 엄마 병원비예요⁠?⁠”

나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한솔 엄마는 2022년 봄에 갔다⁠. 통장의 입금은 2022년 봄에 시작됐다⁠.

네 번째 통장의 메모는 달랐다⁠. R이 아니었다⁠. 「⁠부평 늘봄공인 소개⁠」 「⁠간석 미래공인 소개⁠」 「⁠주안 새길공인 소개⁠」⁠. 같은 메모가 여섯 줄이었다⁠. 줄마다 500만 원씩 들어와 있었다⁠. 날짜는 2022년 여름에 몰려 있었다⁠.

나윤은 여섯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탁주엽이 말한 숫자였다⁠. 계약을 맡은 중개사무소가 일곱 곳⁠. 으뜸이 그중 하나였고⁠, 나머지 여섯 곳은 태식이 상만에게 데려간 곳이었다⁠. 사무소 하나를 데려갈 때마다 500만 원이었다⁠.

“⁠언니⁠, 소개가 뭐예요⁠?⁠”

나윤은 네 번째 통장을 덮지 못했다⁠. 이백 장⁠. 나윤이 네 해 동안 뽑은 계약서가 이백 장이었다⁠. 이백 장마다 태식의 통장에 R이 하나씩 찍혀 있었다⁠. 그리고 이백 장 바깥에서⁠, 다른 여섯 사무소의 계약서들이 같은 길로 흘러갔다⁠.

“⁠한솔아⁠.⁠” 나윤이 처음으로 한솔의 이름을 불렀다⁠. “⁠이거 아빠한테는 말했어⁠?⁠”

한솔은 고개를 저었다⁠. 카디건 소매로 눈가를 문질렀다⁠. 실습복 가슴에 「⁠간호학과 4학년 반한솔⁠」 명찰이 달려 있었다⁠. 명찰 사진 속 한솔은 웃고 있었다⁠. 입사 첫날 태식이 웃으라고 했던 나윤의 명찰처럼⁠.

9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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