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07자)

영장 기각

4만 번째 전세사기 피해자 · 금나율

2026년 10월 12일 월요일 아침 여섯 시 사십 분⁠, 제물포역 앞 김밥집 주방에서 나윤은 단무지를 썰었다⁠. 일한 지 엿새째였다⁠. 사장은 예순 살 여자였고⁠, 첫날 나윤의 이력서를 보지도 않고 칼을 쥐여 주었다⁠.

“⁠부동산 하던 사람은 칼질이 반듯해⁠. 계약서처럼 썰어⁠.⁠”

계약서처럼 써는 게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나윤의 단무지는 두께가 다 같았다⁠. 사장은 반듯한 단무지를 보고 일당을 오천 원 올려 주었다⁠.

주방 벽 텔레비전에서 아침 뉴스가 나왔다⁠. 「⁠9월 전세사기 피해자 623건 추가 인정⁠…누적 4만 1⁠,559건⁠」⁠. 9월 한 달 동안 위원회는 세 번 모여 1⁠,642건을 심의했고⁠, 623건을 피해자로 결정했다⁠. LH가 사들인 피해주택은 1만 1⁠,148가구가 되었다⁠. 화면이 바뀌어 LH가 산 어느 빌라 현관이 나왔다⁠. 현관문에 「⁠LH 공공임대⁠」라고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저 집은 그래도 됐네⁠.⁠” 사장이 김을 펼치며 말했다⁠. “⁠우리 조카도 부평 빌라 전세사기야⁠. 걔네 집은 아직 경매도 안 들어갔대⁠. 경매라도 들어가야 뭐가 된다는데⁠.⁠”

“⁠경매가 들어가야 LH가 사요⁠.⁠”

“⁠그거 봐⁠. 부동산 하던 사람은 다 알아⁠.⁠”

사장은 칭찬을 했고⁠, 나윤은 단무지를 썰었다⁠. 칼끝이 도마에 닿을 때마다 같은 소리가 났다⁠.

*

아홉 시에 근무가 끝났다⁠. 나윤은 집으로 가는 길에 B동 우편함을 열었다⁠. 휴대전화는 지난주 목요일에 돌려받았다⁠. 경찰이 안의 내용을 다 복사해 갔다고 했다⁠. 돌려받은 휴대전화는 전과 똑같이 생겼는데⁠, 손에 쥐면 남의 것처럼 낯설었다⁠.

우편함 305호 칸에 흰 봉투가 있었다⁠. 봉투를 뜯자 낯익은 종이가 나왔다⁠. 두 달 전 302호 복도에서 예슬에게 받아 든 종이와 같은 모양이었다⁠. 「⁠전세사기피해자 결정 통지서⁠」⁠. 「⁠귀하는 「⁠전세사기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전세사기피해자로 결정되었음을 통지합니다⁠.⁠」

나윤은 통지서를 들고 계단에 앉았다⁠. 열흘 전 인천경찰청 조서에는 나윤의 이름 옆에 피의자라고 적혀 있었다⁠. 한 사람이 같은 달에 두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피해자 계나윤⁠, 피의자 계나윤⁠. 어느 이름도 틀린 이름이 아니었다⁠.

나윤은 통지서를 반으로 접으려다 멈췄다⁠. 재열의 말이 생각났다⁠. 곤란하면 종이를 접는다고⁠. 나윤은 통지서를 펼친 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종이가 바람에 들썩였고⁠, 나윤은 손바닥으로 눌렀다⁠.

단톡방에는 사흘 전 밤의 소식이 아직 위에 있었다⁠. 재열이 올린 기사 사진이었다⁠. 10월 9일 금요일⁠, 인천지방법원은 도상만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증거를 없앨 우려와 달아날 우려가 크지 않다고 했다⁠. 사진 속 상만은 법원 정문을 걸어 나오며 기자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숙인 고개 아래로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사진 아래에 옥경희의 큰 글씨가 이어졌다⁠. 「⁠웃네⁠」 「⁠저거⁠」 「⁠웃어⁠」⁠. 한 줄 더⁠. 「⁠판사⁠」 「⁠안경⁠」 「⁠바꿔⁠」⁠.

*

오후에는 304호와 306호의 서류를 정리했다⁠. 304호 결정은 지난주에 나왔고⁠, 306호는 아직이었다⁠. 예슬이 점심시간에 문자를 보냈다⁠. 「⁠304호 LH 매입 요청서 오늘 내도 돼요⁠? 계약서 사본 몇 부 필요해요⁠?⁠」 필로티에서 50만 원을 말한 밤 이후 예슬이 처음 보낸 문자였다⁠. 말 걸지 말라던 밤에서 열흘이 지나 있었다⁠. 나윤은 「⁠두 부요⁠. 원본 대조필 도장은 제가 받아 올게요⁠」라고 답했다⁠. 예슬은 엄지를 든 그림 하나로 답했다⁠. 상만이 보내던 것과 같은 그림이었는데⁠, 다르게 보였다⁠.

한솔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열흘 전 밤⁠, 나윤은 통장 네 권을 신발 상자에 도로 넣어 한솔에게 돌려주었다⁠. 아빠한테 먼저 물어봐⁠, 일주일 안에 아빠가 경찰에 안 내면 언니가 말할게⁠. 한솔은 상자를 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이 지나고 사흘이 더 지났다⁠.

*

저녁 여섯 시⁠, C동 204호 사샤의 집에서 나윤은 사샤가 받아 온 법원 우편을 펼쳤다⁠. 사샤의 결정 통지서는 지난주에 왔다⁠. 그리고 오늘 매각기일 통지가 왔다⁠. 「⁠해든빌 C동 204호 · 매각기일 2026⁠. 11⁠. 3⁠.⁠」

사샤의 집은 열두 평 원룸이었다⁠. 바닥에 매트리스가 깔려 있었고⁠, 머리 위 빨랫줄에 공장 작업복 세 벌이 널려 있었다⁠. 작업복 가슴마다 「⁠남동 3공장 박 반장 대리⁠」라고 수가 놓여 있었다⁠. 반장 대리라는 직함은 사샤가 직접 지었다고 했다⁠. 냉장고 문에 타슈켄트의 엄마와 찍은 사진이 자석으로 붙어 있었다⁠. 사진 옆 자석은 「⁠인천 월미도⁠」였다⁠.

“⁠결정은 났어요⁠. 피해자 맞대요⁠. 근데 LH가 안 사요⁠. 그럼 이 결정은 뭐예요⁠?⁠”

“⁠우선매수권은 있어요⁠. 경매 날 가장 높게 부른 값에 사샤 씨가 먼저 살 수 있어요⁠.⁠”

“⁠제가요⁠? 돈은요⁠?⁠”

“⁠대출을 받아야 돼요⁠. 피해자는 저리 대출이 있어요⁠. 외국 국적이 되는지는⁠.⁠” 나윤이 말을 멈췄다⁠. “⁠확인해 볼게요⁠.⁠”

“⁠아이고⁠, 또 확인⁠.⁠” 사샤가 웃었다⁠. 웃음 끝이 짧았다⁠. “⁠실장님⁠, 확인 안 해도 알아요⁠. 은행 가면 외국인등록증 보고 이렇게 해요⁠.⁠” 사샤가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어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사안별로 다릅니다⁠.⁠”

나윤도 웃었다⁠. 마용배 흉내가 똑같았다⁠. 웃고 나서 둘 다 냉장고의 사진을 보았다⁠. 사진 속 엄마는 꽃무늬 수건을 쓰고 있었다⁠.

“⁠엄마한테는 아직 말 안 했어요⁠. 한국 사람은 서류 잘한다고 했잖아요⁠. 엄마가 실망할까 봐요⁠.⁠”

“⁠11월 3일 전에 국회 가요⁠. 10월 20일이요⁠. 사샤 씨도 말하잖아요⁠.⁠”

“⁠말하면 바뀌어요⁠?⁠”

“⁠모르겠어요⁠. 말 안 하면 안 바뀌는 건 알아요⁠.⁠”

사샤가 냉장고 문을 열어 음료수 두 캔을 꺼냈다⁠. 하나를 나윤에게 건네고 문을 닫았다⁠. 닫히는 바람에 엄마 사진이 한 번 펄럭였고⁠, 월미도 자석이 사진 모서리를 꽉 눌렀다⁠.

*

밤 열 시⁠, 305호 초인종이 울렸다⁠. 현관 화면 속에 태식이 서 있었다⁠. 넥타이도 셔츠도 아니었다⁠. 회색 등산복 차림이었고⁠,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나윤은 체인을 건 채 문을 반만 열었다⁠.

“⁠한솔이가 니한테 뭐 가져갔지⁠?⁠”

“⁠가져왔다가 도로 가져갔어요⁠.⁠”

“⁠어디 있는지 알아⁠?⁠”

“⁠한솔이한테 있어요⁠. 소장님 이불장 맨 아래 칸에 있던 신발 상자요⁠.⁠”

태식의 얼굴이 무너졌다⁠. 무너지는 소리가 날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태식은 복도 창틀을 한 손으로 짚었다⁠.

“⁠봤냐⁠.⁠”

“⁠봤어요⁠. 1억 9⁠,100이요⁠. 네 권 다 더했어요⁠. 계산기로요⁠.⁠”

“⁠니가 더했으면 맞겠지⁠.⁠” 태식이 웃었다⁠. 웃음이 아니었다⁠. “⁠소개비도 봤냐⁠.⁠”

“⁠여섯 줄이요⁠. 부평⁠, 간석⁠, 주안⁠. 500만 원씩이요⁠.⁠”

태식은 창틀에 이마를 댔다⁠. 복도 창유리가 태식의 숨에 뿌옇게 흐려졌다가 다시 맑아졌다⁠.

“⁠한솔이 엄마가 요양병원에 네 해 있었어⁠. 한 달에 300이 나갔어⁠. 간병인 쓰면 400⁠. 내가 중개사무소 해서 한 달에 버는 게 400이었어⁠. 2021년 가을에 빚이 9천이 됐어⁠. 카드론⁠, 현금 서비스⁠, 보험 약관 대출⁠. 그때 상만이가 왔어⁠. 반 소장⁠, 내가 빚 정리해 줄게⁠. 대신 우리 집 좀 맡아 줘⁠. 부평에 아는 사무소 있으면 소개 좀 해 줘⁠.⁠”

나윤은 체인을 풀지 않았다⁠. 풀지 않은 체인이 둘 사이에 한 뼘 길이로 걸쳐 있었다⁠.

“⁠빚 정리해 준 돈도 해든빌 세입자 보증금이었어요⁠?⁠”

“⁠몰라⁠. 그런 건 안 물어봤어⁠. 물어보면 안 받을 것 같아서⁠.⁠” 태식이 이마를 떼었다⁠. “⁠니가 이백 장 쓸 동안 나는 이백 번 도장 찍었다⁠. 니가 뽑아 오면 안 읽고 찍었어⁠. 읽으면 못 찍으니까⁠. 니 50만 원은 그래서 준 거야⁠. 니가 읽고도 뽑았으니까⁠.⁠”

“⁠그래서 실무는 제가 다 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니 이름을 댔지⁠.⁠” 태식이 처음으로 나윤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게⁠. 하면 니가 용서해야 되잖아⁠. 니가 그런 거까지 하지 마⁠.⁠”

나윤은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체인이 팽팽해졌다⁠.

“⁠소장님⁠. 통장 경찰에 내세요⁠. 소장님 손으로요⁠.⁠”

“⁠내가⁠?⁠”

“⁠제가 내면 소장님은 끝까지 니 이름을 댄 사람이에요⁠. 소장님이 내면 적어도 그건 아니에요⁠. 한솔이도 그걸 볼 거예요⁠.⁠”

태식은 한참 서 있었다⁠. 복도 끝 302호 문이 조금 열렸다가 닫혔다⁠. 누가 엿듣다 문을 닫았는지⁠, 바람이 열었다 닫았는지 알 수 없었다⁠. 태식이 등산복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뺐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

“⁠한솔이가 밤마다 이불장 앞에 앉아 있어⁠. 열었다 닫았다 해⁠. 나 들으라고⁠.⁠”

“⁠그럼 들으세요⁠.⁠”

태식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슬리퍼가 아니라 등산화였는데도 발소리가 질질 끌렸다⁠.

*

열한 시⁠, 302호 문이 다시 열렸다⁠. 재열이 나와 있었다⁠. 야간 근무가 없는 날이었다⁠. 손에 종이 한 장을 들고 305호 앞까지 걸어왔다⁠.

“⁠다 들었어요⁠. 일부러 들은 거 아니에요⁠. 문이 얇아요⁠.⁠”

“⁠알아요⁠. 제가 계약서 쓸 때 문 두께는 안 적었어요⁠.⁠”

재열이 피식 웃었다⁠. 다음 날이면 잊을 만큼 작은 웃음이었다⁠.

“⁠이거요⁠.⁠” 재열이 종이를 내밀었다⁠. 「⁠전세사기 피해 지원 개선 간담회 · 10월 20일 화요일 오후 두 시 ·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 ·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의원실 주최⁠」⁠. 아래에 발언자 명단이 있었다⁠. 「⁠해든빌 대책위원장 석재열⁠」 다음 줄이 비어 있었다⁠.

“⁠전국에서 피해자 대책위들이 와요⁠. 수원⁠, 대전⁠, 부산⁠. 국토부 사무관도 오고요⁠. 대책위마다 둘씩 말할 수 있대요⁠. 하나는 내가 하고⁠, 하나는⁠.⁠”

“⁠사샤 씨요⁠?⁠”

“⁠사샤 씨는 따로 시간 받았어요⁠. 외국 국적 사례로요⁠.⁠” 재열이 명단의 빈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실장님이요⁠. 전직 중개보조원으로요⁠. 계약서를 쓴 사람이 계약서를 어떻게 썼는지요⁠. 예슬이가 그러자고 했어요⁠. 나는 반대했고요⁠. 예슬이가 이겼어요⁠.⁠”

“⁠대책위 회의에서 빠지라고 하셨잖아요⁠.⁠”

“⁠거기는 대책위 회의가 아니잖아요⁠. 국회예요⁠.⁠” 재열이 종이를 나윤의 손에 쥐여 주었다⁠. “⁠50만 원 얘기도 하셔야 돼요⁠. 안 하면 안 시켜요⁠.⁠”

“⁠할게요⁠.⁠”

재열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302호로 돌아갔다⁠. 문이 닫히기 전에 안에서 예슬의 목소리가 들렸다⁠. 했대⁠? 했대⁠.

*

새벽 다섯 시 십이 분⁠, 나윤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김밥집에 나가려고 맞춰 둔 알람보다 삼 분 빨랐다⁠. 「⁠소장님⁠」⁠.

「⁠한솔이 통장 경찰에 갖다줬다⁠. 내가⁠. 탁 경위한테 직접⁠. 니 이름 댄 거 내가 거짓말이었다고 했다⁠. 한솔이는 학교 갔다⁠.⁠」

메시지는 거기서 끝났다⁠. 조금 뒤에 한 줄이 더 왔다⁠.

「⁠선인장 물 줘라⁠. 한 달에 한 번⁠.⁠」

나윤은 창틀을 보았다⁠. 선인장은 아직 어두운 창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지난번 물을 준 지 스무 날이었다⁠. 나윤은 물을 주지 않았다⁠. 한 달이 되려면 열흘이 남아 있었다⁠.

출처 헤럴드경제 · 2026년 10월 11일 · 9월 전세사기 피해자 623건 추가 인정 기사 — 누적 4만 1⁠,559건⁠, 9월 전체회의 세 차례 1⁠,642건 심의⁠, LH 피해주택 매입 1만 1⁠,148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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