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46자)

매각기일

4만 번째 전세사기 피해자 · 금나율

2026년 9월 15일 화요일 오전 아홉 시 반⁠, 인천 미추홀구 학익동 인천지방법원 경매법정 앞 복도는 지하철 환승 통로처럼 붐볐다⁠. 사람들은 노란 입찰 봉투를 가슴에 안고 벽에 붙어 서 있었다⁠. 대부분 남자였고⁠, 대부분 서류 가방 대신 비닐 쇼핑백을 들었다⁠. 쇼핑백 안에 입찰 보증금 수표가 든 봉투가 있었다⁠.

해든빌 사람들은 복도 끝 창가에 모였다⁠. 재열과 예슬⁠, 옥경희⁠, 사샤⁠, B동 304호와 306호⁠, 401호⁠, 402호 세입자들⁠. 옥경희는 은박지에 싼 김밥 세 줄을 들고 왔다⁠.

“⁠재판 보려면 배가 불러야 돼⁠.⁠”

“⁠할머니⁠, 법정 안에서는 음식 못 드세요⁠.⁠” 법정 경위가 옥경희 앞을 막았다⁠.

“⁠안 먹어⁠. 들고만 있을게⁠.⁠”

“⁠냄새가 나서요⁠.⁠”

“⁠김밥 냄새가 무슨 죄야⁠.⁠” 옥경희가 은박지를 한 겹 더 감았다⁠. “⁠죄는 저 안에 있지⁠.⁠”

복도에서 몇 사람이 웃었고⁠, 경위도 입꼬리를 참았다⁠. 옥경희는 김밥을 사샤의 점퍼 주머니에 넣었다⁠. 사샤의 주머니가 김밥 모양으로 불룩해졌다⁠.

봄에 신청된 해든빌 B동 경매는 7월 첫 기일에 아무도 입찰하지 않아 한 번 유찰됐다⁠. 오늘은 두 번째 기일이었고⁠, 최저가는 감정가에서 한 번 깎여 내려와 있었다⁠. 한 번 깎인 빌라는 경매꾼들이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값이었다⁠. 나윤은 사건 목록을 휴대전화로 보며 숫자를 확인했다⁠. 302호 최저가는 1억 1⁠,900만 원⁠. 예슬과 재열의 보증금보다 4천이 적었다⁠.

LH 직원 둘이 서류 가방을 들고 왔다⁠. 한 사람은 마용배 차장이었다⁠. 마용배는 재열과 악수를 하고⁠, 302호 사건번호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우선매수 신고는 개찰 끝나고 집행관이 최고가 매수인 부르면 바로 하셔야 합니다⁠. 저희가 같이 들어갑니다⁠.⁠”

“⁠바로요⁠? 몇 초 안에요⁠?⁠”

“⁠사안별로 다른데⁠, 오늘은 바로입니다⁠.⁠”

재열이 처음으로 마용배를 보고 웃었다⁠.

*

입찰은 열한 시 십 분에 마감됐다⁠. 집행관이 단상에서 봉투를 사건별로 나눠 열었다⁠. 법정 안은 학교 강당 같았다⁠. 앞에 단상⁠, 뒤에 접이식 의자가 줄지어 있었고⁠, 사람들은 의자에 앉지 않고 통로에 서 있었다⁠. 에어컨 바람이 천장에서 내려왔는데⁠, 18도에 익숙한 나윤에게는 미지근했다⁠.

“⁠해든빌 B동 302호⁠, 입찰자 두 명입니다⁠.⁠”

두 명이라는 말에 예슬이 재열의 팔을 잡았다⁠. 집행관이 봉투를 하나씩 읽었다⁠.

“⁠1억 2⁠,050만 원⁠. 개인⁠. 1억 2⁠,300만 원⁠, 주식회사 해든관리⁠. 최고가 매수신고인은 주식회사 해든관리입니다⁠.⁠”

통로 앞쪽에서 검은 조끼가 움직였다⁠. 김 실장이었다⁠. 김 실장 옆에 마흔 살쯤 된 남자가 노란 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 처남이었다⁠. 처남은 단상으로 걸어 나가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멈췄다⁠.

“⁠우선매수 신고합니다⁠.⁠”

재열이 손을 들고 있었다⁠. 들어 올린 손이 떨렸지만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옆에서 마용배가 서류를 들고 같이 걸어 나갔다⁠.

“⁠전세사기피해자 석재열⁠, 하예슬⁠. 우선매수권을 한국토지주택공사에 넘겼습니다⁠. 공사가 같은 가격으로 매수 신고합니다⁠.⁠”

집행관이 서류를 받아 넘겼다⁠. 법정 안이 조용해졌다가 웅성거렸다⁠. 경매꾼 몇이 처음 보는 장면이라는 듯 고개를 뺐다⁠. 집행관이 서류를 끝까지 읽고 마이크에 입을 댔다⁠.

“⁠해든빌 B동 302호⁠, 최고가 매수신고인과 같은 가격으로 우선매수 신고가 있어 한국토지주택공사를 최고가 매수신고인으로 정합니다⁠.⁠”

예슬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숨을 너무 크게 쉬어서 딸꾹질이 났다⁠. 딸꾹질은 다음 사건이 불릴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재열은 단상 앞에 선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맨 뒤 벽에 서 있던 나윤과 눈이 마주쳤다⁠. 재열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대신 들고 있던 우선매수 신고서 사본을 한 번 들어 보였다⁠.

“⁠해든빌 B동 303호⁠, 입찰자 한 명입니다⁠. 1억 1⁠,950만 원⁠, 주식회사 해든관리⁠. 최고가 매수신고인은 주식회사 해든관리입니다⁠.⁠”

303호에는 세입자가 없었다⁠. 우선매수 신고를 할 사람이 없었다⁠. 처남이 단상으로 나가 영수증을 받았다⁠. 지난주 김 실장이 줄자로 치수를 잰 집이었다⁠.

304호와 306호⁠, 401호⁠, 402호는 아직 피해자 결정이 나지 않았다⁠. 네 집 세입자는 8월 22일 서류 공장에서 신청서를 넣었지만⁠, 위원회 결정은 시간이 들었다⁠. 네 집은 모두 입찰자가 없어 다시 유찰됐다⁠. 다음 기일에는 값이 한 번 더 깎일 것이었다⁠. 깎인 값은 경매꾼에게 좋고 세입자에게 나빴다⁠. 다음 기일 전에 결정이 나면 LH가 들어올 수 있었다⁠.

*

법정 밖 복도에서 재열이 김 실장 앞을 막았다⁠. 재열의 후드가 반쯤 벗겨져 있었다⁠.

“⁠해든관리가 누구 회사예요⁠?⁠”

“⁠우리 처남 회사⁠. 경매 들어오는 게 죄야⁠?⁠”

“⁠처남 회사 입찰 보증금 1⁠,190만 원⁠, 어디서 났어요⁠?⁠”

“⁠그걸 왜 너한테 말해⁠.⁠” 김 실장이 처남의 등을 밀어 계단으로 보냈다⁠. “⁠너는 LH가 사 줬잖아⁠. 됐잖아⁠. 남의 회사 돈 걱정은 왜 해⁠.⁠”

“⁠303은 우리 옆집이에요⁠. 사장이 처남 회사 이름으로 도로 사 가면⁠, 그 집에 다음에 누가 들어와요⁠? 또 누가 1억 2천 주고 들어와요⁠?⁠”

김 실장은 대답하지 않고 나윤을 보았다⁠. 나윤이 재열 뒤에 서 있었다⁠.

“⁠계 실장⁠, 너는 왜 저 사람들 편에 붙어 있어⁠. 너도 우리 식구였잖아⁠. 네 해 동안⁠.⁠”

“⁠식구면 보증금도 돌려줘야죠⁠.⁠”

나윤이 말했다⁠. 말하고 나서야 자기 목소리가 복도 끝까지 갔다는 것을 알았다⁠. 복도의 경매꾼 몇이 돌아보았다⁠. 김 실장은 혀를 차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옥경희가 사샤의 점퍼 주머니에서 김밥을 꺼내 은박지를 벗겼다⁠.

“⁠이제 먹어도 되지⁠? 여기는 복도니까⁠.⁠”

예슬은 아직 딸꾹질을 하면서 김밥을 받아 먹었다⁠. 딸꾹질 사이로 김밥이 넘어가자 딸꾹질이 멈췄다⁠. 예슬이 놀란 얼굴로 재열을 보았다⁠. 재열이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마용배가 서류 가방을 닫으며 다가왔다⁠. 예슬이 계산기를 꺼냈다⁠. 이번에는 마용배가 먼저 말했다⁠.

“⁠저희 감정가가 1억 7천으로 나왔습니다⁠. 오늘 낙찰가가 1억 2⁠,300이니까 차익은 4⁠,700입니다⁠. 대금 내고 소유권 넘어오는 데 두어 달 걸리고⁠, 그다음에 임대 계약을 새로 하시면 됩니다⁠.⁠”

“⁠4⁠,700이요⁠.⁠” 예슬이 계산기에 숫자를 넣었다⁠. “⁠1억 6천에서 4⁠,700이면⁠.⁠”

“⁠보증금을 다 돌려받는 건 아닙니다⁠. 그 집에 계속 사실 수 있는 겁니다⁠.⁠”

“⁠그 침대에서요⁠.⁠” 예슬이 나윤을 보고 말했다⁠.

마용배는 침대가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갸웃하다가 나윤에게 물었다⁠.

“⁠305호도 해든빌이시죠⁠? 결정 나셨어요⁠?⁠”

“⁠아직이요⁠. 8월 10일에 넣었어요⁠.⁠”

“⁠나시면 바로 매입 요청 넣으세요⁠. 305호 경매는 아직 기일이 안 잡혔으니까 시간은 있습니다⁠. 사안별로 다르긴 한데⁠.⁠”

마용배는 사안별이라는 말을 해 놓고 스스로 웃었다⁠. 옥경희가 남은 김밥 한 줄을 마용배의 서류 가방 위에 얹었다⁠. 마용배는 김밥을 내려다보다가⁠, 은박지째 양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

오후 세 시⁠, 나윤은 주안동 해든건설 사무실 계단을 올라갔다⁠. 주안역 뒤 상가 건물 2층이었다⁠. 유리문에 금박 글씨가 붙어 있었다⁠. 「⁠해든건설 · 해든관리⁠」⁠. 두 회사가 문 하나를 같이 썼다⁠.

상만은 사무실 안쪽 소파에서 골프 채널을 보고 있었다⁠. 나윤이 들어가자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끄고 손짓했다⁠.

“⁠계 실장 왔네⁠. 앉아⁠. 커피⁠? 녹차⁠?⁠”

“⁠해든관리랑 해든건설⁠, 문이 하나네요⁠.⁠”

“⁠월세 아끼려고⁠. 우리 처남 회사가 돈이 없어서 내가 방 하나 빌려준 거야⁠.⁠” 상만이 웃었다⁠. 눈가 주름이 먼저 웃었다⁠. “⁠오늘 법원 갔다며⁠. LH가 302 먹었다고 김 실장이 울더라⁠. 괜찮아⁠. 303은 우리가 가져왔잖아⁠.⁠”

“⁠사장님은 채무자라서 입찰 못 하세요⁠.⁠”

“⁠그러니까 처남이 했지⁠.⁠”

상만은 녹차 티백 두 개를 종이컵에 넣고 정수기 뜨거운 물을 받았다⁠. 한 잔을 나윤 앞에 놓았다⁠. 나윤은 손을 대지 않았다⁠.

“⁠계 실장⁠, 경찰에 나 얘기 했어⁠?⁠”

“⁠아직요⁠.⁠”

상만이 손뼉을 한 번 쳤다⁠. “⁠아직이라는 말 좋다⁠. 아직이라는 건 아직 안 했다는 거고⁠, 안 할 수도 있다는 거잖아⁠.⁠” 상만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계 실장 같은 애가 해든관리에 와 주면 좋겠다⁠. 303부터 새로 계약서 써야 되거든⁠. 월급은 반 소장 사무실 두 배⁠.⁠”

“⁠303 들어올 사람 보증금으로 뭐 하시게요⁠?⁠”

“⁠회전⁠.⁠”

상만은 휴대전화를 들어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호치민의 서울갈비 가게 앞이었다⁠. 케이크에 「⁠1주년⁠」이라고 쓰여 있었고⁠, 앞치마를 두른 젊은 남자가 케이크를 들고 웃고 있었다⁠. 상만의 아들이었다⁠. 아들의 볼살이 상만을 닮았다⁠.

“⁠다음 달에 한 번 갈 거야⁠. 아들이 아빠 오면 갈비 구워 준대⁠. 계 실장도 와⁠. 비행기 표 내가 끊어 줄게⁠.⁠”

“⁠사장님⁠.⁠”

“⁠응⁠.⁠”

“⁠2024년 4월 6일에 사장님이 보내신 문자⁠, 저 아직 있어요⁠.⁠”

상만의 손가락이 휴대전화 화면 위에서 멈췄다⁠. 사진이 넘어가다 반쯤 걸친 채 멈췄다⁠. 상만은 화면을 끄고 휴대전화를 탁자에 엎었다⁠.

“⁠보너스 50만 원 그거⁠?⁠” 상만이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목소리는 그대로 다정했다⁠. “⁠있으면 좋지⁠. 계 실장이 나한테 50만 원 받았다는 증거잖아⁠. 그거 경찰이 보면 계 실장도 같이 가는 거야⁠. 리베이트 받은 중개보조원⁠. 신문에 나면 그렇게 나와⁠. 나는 412채 건물주고⁠, 계 실장은 50만 원 받은 사람이고⁠. 사람들은 누구를 더 미워할까⁠?⁠”

나윤의 무릎 위에서 손가락이 니트 소매를 말아 쥐었다⁠.

“⁠그러니까 갖고 있어⁠. 잘 갖고 있어⁠. 계 실장이 갖고 있으면 나도 안심이야⁠. 우리 둘 다 같은 걸 갖고 있으니까⁠.⁠”

상만이 녹차 잔을 나윤 쪽으로 조금 더 밀었다⁠. 티백 끈이 잔 가장자리에 붙어 흔들렸다⁠. 나윤은 일어났다⁠. 잔은 그대로 두었다⁠.

*

해 질 녘 여섯 시 반⁠, 나윤은 숭의 로터리를 건너 집으로 가다가 으뜸공인중개사사무소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 유리창 안에 불이 켜져 있었다⁠. 영업시간이 끝났는데 블라인드가 올라가 있었다⁠.

태식이 사무실 안쪽 복합기 옆에 있었다⁠. 문서 파쇄기 앞이었다⁠. 서랍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한 장씩 넣고 있었다⁠. 파쇄기가 종이를 먹을 때마다 위잉⁠, 소리가 유리 너머로 작게 들렸다⁠. 태식의 셔츠 등판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18도 사무실에서 땀을 흘리는 사람을 나윤은 처음 보았다⁠.

태식이 고개를 들었다⁠. 유리창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태식은 종이를 든 채 한참 나윤을 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처럼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손에 든 종이가 파쇄기 입구에서 반쯤 빨려 들어가다 멈췄다⁠.

태식은 남은 손을 뻗어 블라인드 줄을 당겼다⁠. 흰 블라인드가 위에서부터 차르르 내려왔다⁠. 태식의 얼굴이 가려지고⁠, 젖은 셔츠가 가려지고⁠, 마지막으로 파쇄기의 초록 불빛이 블라인드 틈으로 한 줄 남았다⁠.

출처 민사집행법 · 우선매수 신고 · 채무자의 매수 신청 제한 SBS Biz · 「⁠전세사기 특별 지원 ‘⁠2년 더⁠’⁠」 — 피해자 우선매수권의 LH 양도와 LH 경매 매입

7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매각기일 · 4만 번째 전세사기 피해자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