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329자)

단체 사진

4만 번째 전세사기 피해자 · 금나율

2026년 8월 14일 금요일 저녁 일곱 시 오십 분⁠, 해든빌 B동 필로티 주차장에는 금요일보다 의자가 열 개 더 놓였다⁠. 사샤가 공장에서 쓰다 버린 플라스틱 의자를 트럭으로 실어 왔다⁠. 의자마다 등받이에 「⁠남동 3공장 식당⁠」이라고 매직으로 적혀 있었다⁠.

“⁠식당 의자예요⁠. 앉으면 밥 생각 나요⁠. 아이고⁠, 그래도 거시기하게 튼튼해요⁠.⁠”

옥경희는 기둥에 새 종이를 붙였다⁠. 「⁠오늘 안건 — 계나윤 각서⁠」⁠. 글자가 커서 「⁠각서⁠」 두 글자가 종이 밖으로 반쯤 나갔다⁠. 나윤은 종이를 보고 숨을 한 번 길게 쉬었다⁠. 자기 이름이 안건이 된 것은 처음이었다⁠.

여덟 시에 사람은 마흔네 명이었다⁠. 단톡방 숫자와 같았다⁠. 재열이 앞에 서서 말했다⁠.

“⁠오늘은 계나윤 씨가 각서 얘기를 해요⁠. 질문은 끝나고 받아요⁠. 중간에 소리 지르지 마세요⁠. 소리 질러도 보증금 안 나와요⁠.⁠”

몇 사람이 웃었다⁠. 나윤은 의자에 앉지 않고 기둥 옆에서 앞으로 나갔다⁠. 손에는 종이 한 장도 없었다⁠. 서류를 들고 나가면 서류 뒤에 숨게 된다⁠.

“⁠2024년 4월 6일 302호 계약 때 각서를 쓴 사람은 도상만 사장이에요⁠. 사장이 불러 주고 직접 썼고⁠, 저는 입회인 칸에 서명했어요⁠. 소장님이 서명하라고 했어요⁠.⁠”

“⁠그건 다 아는 얘기고요⁠.⁠” 맨 뒤에서 누가 말했다⁠.

“⁠그때 저는 근저당이 네 동 전체에 묶여 있는 걸 알았어요⁠. 한 집만 석 달 안에 지울 수가 없다는 것도 알았어요⁠.⁠”

필로티가 조용해졌다⁠. 천장의 형광등이 지잉 하고 울었다⁠. 재열이 팔짱을 낀 채 물었다⁠.

“⁠알았어요⁠, 몰랐어요⁠? 한 번만 더 말해 줘요⁠.⁠”

“⁠알았어요⁠.⁠”

“⁠알면서 서명했어요⁠?⁠”

“⁠네⁠.⁠”

C동 402호 남자가 일어났다⁠. “⁠수수료는 얼마 받았어요⁠?⁠”

“⁠법정 수수료요⁠. 1억 6천 전세면 0⁠.3퍼센트⁠, 양쪽에서 48만 원씩이에요⁠. 사무실로 들어갔어요⁠.⁠”

나윤은 숫자를 정확히 말했다⁠. 정확한 숫자는 입에서 잘 나왔다⁠. 정확하지 않은 숫자 하나는 목구멍 아래에 남겨 두었다⁠. 상만이 R3를 붙여 보낸 문자와⁠, 계약한 주 금요일 나윤의 통장에 들어온 50만 원⁠. 남자가 다시 앉았다⁠. 나윤은 앉은 남자의 무릎을 보았다⁠. 무릎이 계속 떨렸다⁠.

*

질문은 사십 분 동안 이어졌다⁠. 왜 말리지 않았느냐⁠, 소장은 왜 안 왔느냐⁠, 실장 집도 경매냐⁠. 나윤은 대답할 수 있는 것에는 대답했고⁠, 모르는 것에는 모른다고 했다⁠. 305호도 경매개시결정이 왔다고 말하자 앞줄의 몇 사람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예슬이 손을 들었다⁠. 계산기는 무릎 위에 있었다⁠.

“⁠저 하나만 말할게요⁠. 76세대 중에 결정 신청한 집이 31집이에요⁠. 나머지 45집은 서류를 못 떼서 못 했어요⁠. 저희 회사에서 서류 떼는 사람 저 하나고⁠, 저도 평일엔 못 빠져요⁠. 실장님은 이 동네 계약서를 다 썼으니까 이 동네 서류도 다 떼요⁠. 실장님한테 서류 맡겨요⁠.⁠”

“⁠계약서 쓴 사람한테 또 맡겨⁠?⁠” 옥경희가 말했다⁠.

“⁠할머니⁠, 할머니 집 등기부 이번 주에 누가 떼 줬어요⁠?⁠”

옥경희가 입을 다물었다⁠. 등기부 일흔여섯 장은 지난 화요일 재열이 한 집씩 나눠 주었다⁠. 옥경희는 받은 등기부를 큰 글씨로 다시 베껴 냉장고에 붙여 두었다⁠.

재열이 손을 들어 표결을 했다⁠. 나윤에게 서류를 맡기자는 손이 스물셋⁠, 반대가 열아홉⁠, 손을 든 둥 만 둥 한 사람이 둘이었다⁠. 옥경희는 처음에 반대로 손을 들었다가 예슬과 눈이 마주치자 내렸다가⁠, 다시 반쯤 들었다⁠. 사샤가 반쯤 든 손을 보고 말했다⁠.

“⁠할머니⁠, 그건 거시기 기권이에요⁠.⁠”

재열이 결과를 말했다⁠.

“⁠계나윤 씨는 서류 담당으로 남아요⁠. 조건이 있어요⁠. 서류 말고 다른 일에는 안 끼어요⁠. 회의에서 표결 안 해요⁠. 그리고 우리한테 숨기는 거 생기면 그날로 끝이에요⁠.⁠”

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구멍 아래의 50만 원이 한 번 더 내려갔다⁠.

*

모임이 끝나고 사람들이 의자를 접는 동안 나윤은 재열에게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월요일 밤 상만이 보낸 문자였다⁠. 「⁠대신 금요일 대책위 모임에 누가 나오는지 사진 좀 보내 줘⁠. 얼굴 잘 나오게⁠.⁠」

재열이 화면을 한참 보았다⁠. 다 읽고도 눈을 떼지 않았다⁠.

“⁠이거 왜 보여 줘요⁠?⁠”

“⁠숨기는 거 생기면 끝이라면서요⁠.⁠”

재열이 처음으로 웃었다⁠. 소리 없이 입꼬리만 한쪽으로 올라갔다⁠.

“⁠보내요⁠. 내가 찍어 줄게요⁠.⁠”

재열이 의자를 접던 사람들을 불러 세웠다⁠. 마흔네 명이 필로티 기둥 앞에 세 줄로 모였다⁠. 앞줄은 식당 의자에 앉고⁠, 뒷줄은 서고⁠, 옥경희는 가운데에서 「⁠해든빌 대책위원회⁠」 종이를 가슴에 안았다⁠. 사샤는 두 손가락을 펴서 브이를 했다가⁠, 재열이 주먹이라고 하자 주먹 위로 다시 브이를 올렸다⁠.

“⁠다들 얼굴 잘 나오게요⁠. 건물주가 한 집씩 찾아와서 직접 설명하고 싶대요⁠.⁠”

재열이 말하자 웃음이 터졌다⁠. 플래시가 세 번 터졌다⁠. 세 번째 사진에서 옥경희는 눈을 감았고⁠, 예슬은 계산기를 높이 들었고⁠, 사샤의 브이는 주먹보다 높았다⁠.

나윤은 세 번째 사진을 골라 상만에게 보냈다⁠. 「⁠사장님⁠, 금요일 모임 사진입니다⁠. 마흔네 분 모두 직접 설명 들으시겠다고 합니다⁠. 한 집씩 기다리겠습니다⁠.⁠」

메시지 옆의 숫자 1이 금방 사라졌다⁠. 답은 오지 않았다⁠.

*

밤 열한 시⁠, 305호 초인종이 울렸다⁠. 예슬이 캔맥주 두 개를 들고 서 있었다⁠. 재열은 야간 근무를 나갔다고 했다⁠.

“⁠실장님⁠, 저 계산 하나만 해 주세요⁠. 회사 계산 말고요⁠.⁠”

나윤은 거실 바닥에 앉아 해든빌 45세대 목록을 만들던 참이었다⁠. 집집마다 필요한 서류를 줄로 적어 두었다⁠. 임대차계약서⁠, 전입세대 열람⁠, 확정일자⁠, 등기부⁠, 경매개시결정⁠, 보증금 이체 내역⁠. 예슬은 목록 옆에 앉아 맥주를 땄다⁠.

“⁠2024년 4월에 계약할 때요⁠, 실장님이 이 집 채광 좋다고 했던 거 기억나요⁠?⁠”

“⁠그럼요⁠. 남향 같은 동향이라고 했죠⁠.⁠”

“⁠진짜 좋아요⁠. 아침에 침대까지 해가 들어와요⁠. 그래서 저희 그 침대에서 아기 갖자고 했어요⁠. 시험관 하려고 이천 모아 놨는데요⁠.⁠” 예슬이 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재열 씨가 그 돈 헐어서 현수막 샀어요⁠. 현수막 두 장에 십팔만 원⁠. 나머지는 변호사 비용으로 남겨 두재요⁠.⁠”

나윤은 맥주를 따지 못하고 캔만 쥐고 있었다⁠. 캔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손바닥을 적셨다⁠.

“⁠계산해 달라는 게 뭐예요⁠?⁠”

“⁠1억 6천에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돈이요⁠. 제일 나쁘게 잡아서요⁠.⁠”

나윤은 이면지를 꺼내 화살표를 다시 그렸다⁠. 늘솔금고⁠, 아래에 세입자⁠. 낙찰가가 감정가의 칠 할로 떨어지면 금고 몫을 빼고 남는 돈이 거의 없었다⁠. 302호는 소액임차인 선 위라 먼저 받는 돈도 없었다⁠. 나윤은 마지막 줄에 0을 썼다가⁠, 0 옆에 LH라고 썼다⁠.

“⁠LH가 사 주면 달라져요⁠. 경매에서 싸게 사는 만큼 그 차이를 임대료에서 깎아 줘요⁠. 그 집에 계속 살 수 있어요⁠.⁠”

“⁠그 침대에서요⁠?⁠”

“⁠그 침대에서요⁠.⁠”

예슬이 웃었다⁠. 처음으로 눈까지 웃었고⁠, 웃다가 캔을 엎질렀다⁠. 맥주가 45세대 목록 위로 번졌다⁠. 둘은 동시에 휴지를 찾았고⁠, 나윤은 젖은 종이를 들어 올려 형광등에 비춰 보았다⁠. 번진 잉크 아래로 집 호수가 아직 읽혔다⁠.

*

8월 18일 화요일 오전 열한 시⁠, 재열이 사무실 유리문 밖에서 전화를 걸었다⁠. 들어오라고 손짓해도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라 나윤이 또 밖으로 나갔다⁠.

재열이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 주었다⁠. 「⁠미추홀경찰서 수사과입니다⁠. 석재열 님 고소 사건 관련 출석 일정 협의를 위해 연락드립니다⁠.⁠」

“⁠명예훼손이래요⁠. 지난주에 B동 앞에 건 현수막이요⁠.⁠”

B동 정문 위에 걸린 현수막은 나윤도 출근길마다 보았다⁠. 「⁠도상만은 보증금 돌려줘라 · 해든빌 피해자 일동⁠」⁠. 처음엔 끝에 「⁠사기꾼⁠」이라는 낱말이 더 있었는데⁠, 옥경희가 매직으로 덧쓴 것이었다⁠. 재열이 이튿날 테이프로 가렸지만 테이프가 비에 젖어 떨어졌다⁠.

“⁠사진 보낸 다음 날 고소했대요⁠. 얼굴 잘 나왔나 봐요⁠.⁠”

“⁠변호사 필요하면 전세사기피해지원센터에 가 보세요⁠. 법률 상담을 해 줘요⁠.⁠”

“⁠실장님은 이런 것도 알아요⁠?⁠”

“⁠남의 집 서류만 네 해 했어요⁠.⁠”

재열은 대답 대신 점퍼 주머니에서 껌을 꺼내 하나를 나윤에게 주었다⁠. 박하 껌이었다⁠. 냉동 창고에서 졸음을 쫓으려고 씹는다고 했다⁠. 나윤은 껌을 받고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고맙다는 말을 받을 사람은 자기가 아니었다⁠.

*

오후에 태식이 출력물 한 장을 나윤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법원 경매정보 화면을 뽑은 종이였다⁠. 「⁠인천지방법원 · 해든빌 B동 302호 · 303호 · 304호 · 306호 · 401호 · 402호 · 매각기일 2026⁠. 9⁠. 15⁠.⁠」

“⁠봐⁠. 사람들이 떠드니까 금고가 서두르잖아⁠.⁠”

“⁠경매 신청은 봄에 들어갔어요⁠. 대책위 생기기 전이에요⁠.⁠”

“⁠그래서 더 조용히 있어야지⁠. 매각기일까지 4주야⁠. 4주 안에 상만이 PF만 나오면 다 취하될 수 있어⁠.⁠”

나윤은 달력을 보았다⁠. 4주가 조금 넘었다⁠. 302호는 결정을 받았으니 LH에 매입을 요청할 수 있었다⁠. 나머지 다섯 집은 아직 결정 신청도 넣지 않았다⁠. 피해자로 결정되기 전에 집이 팔리면 우선매수권도⁠, LH 매입도 손에 쥐어 보지 못하고 끝났다⁠. 9월 15일까지 서류를 다 만들어야 했다⁠. 해든빌 76세대 전부의 서류를⁠.

태식이 서랍을 열어 등기부 한 장을 꺼냈다⁠. 해든빌 D동 501호였다⁠. 임차인 반태식⁠, 보증금 1억 8천⁠, 전입 2022년 9월⁠. 을구 1번 늘솔금고 근저당⁠.

“⁠나도 묶였어⁠. 1억 8천⁠. 한솔이 엄마 병원비 치르고 남은 돈 다 넣었어⁠.⁠”

“⁠알아요⁠.⁠”

“⁠알면 왜 그래⁠.⁠” 태식이 등기부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내가 상만이를 왜 믿겠냐⁠. 믿어야 내 돈이 나오니까 믿는 거야⁠. 대책위가 시끄러우면 늘솔금고가 겁먹고⁠, 금고가 겁먹으면 PF가 안 나와⁠. 그럼 나도 너도 302호도 다 끝이야⁠.⁠”

“⁠PF 안 나와요⁠, 소장님⁠. 늘솔금고가 네 동을 경매에 넣었어요⁠. 친구가 하는 금고가 친구 집을 경매에 넣어요⁠?⁠”

태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리모컨을 집어 에어컨 온도를 내리려다 이미 18도라서 버튼만 두어 번 눌렀다⁠. 삑⁠, 삑⁠. 기계가 더는 내려가지 않는다고 울었다⁠.

“⁠토요일 열 시에 303 계약 하나 써⁠.⁠”

“⁠네⁠?⁠”

“⁠지난번 간호사⁠. 1억 3천이면 들어오겠대⁠. 사장이 2천 깎아 줬어⁠. 그 돈 들어오면 사장이 302 바로 빼 준대⁠. 재열이네 살리는 거야⁠.⁠” 태식이 나윤의 눈을 보았다⁠. “⁠니가 쓴 계약서로 들어온 집⁠, 니가 쓰는 계약서로 빼 주는 거야⁠. 그럼 됐잖아⁠.⁠”

책상 위 등기부 두 장이 에어컨 바람에 가장자리를 떨었다⁠. 302호와 D동 501호⁠. 나윤은 두 장을 겹쳐 집게로 물리지 못하고 손바닥으로만 눌렀다⁠.

출처 공인중개사법 시행규칙 · 주택 중개보수 상한 — 임대차 1억 원 이상 6억 원 미만 0⁠.3퍼센트 뉴스서울 · 2026년 4월 · 「⁠국토교통부 ‘⁠전세사기특별법⁠’ · ‘⁠부동산개발사업관리법⁠’ 개정안 국회 본회의 통과⁠」 — 전세사기피해지원센터의 법률·금융·주거 지원

3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단체 사진 · 4만 번째 전세사기 피해자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