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337자)

근저당이 먼저

4만 번째 전세사기 피해자 · 금나율

2026년 8월 10일 월요일 아침 여덟 시 사십 분⁠, 나윤은 사무실 문을 따고 들어가 에어컨부터 껐다⁠. 소장이 오기 전 이십 분 동안은 사무실이 사람 사는 온도였다⁠.

휴대전화에는 금요일 밤에 생긴 단톡방이 떠 있었다⁠. 「⁠해든빌 대책위⁠」⁠. 사람이 서른한 명에서 마흔넷으로 늘어 있었다⁠. 맨 위는 옥경희의 메시지였다⁠. 글자 크기를 가장 크게 바꿔 두어서 한 줄에 네 글자씩 들어갔다⁠. 「⁠오늘도⁠」 「⁠힘내자⁠」 「⁠도상만⁠」 「⁠나와라⁠」⁠. 글씨 아래로 꽃 사진이 아홉 장 이어졌고⁠, 누가 「⁠할머니 글씨 크기 줄이는 법 알려 드릴까요⁠」라고 묻자 다시 큰 글씨로 「⁠싫어⁠」⁠.

새벽 두 시에 올라온 메시지도 있었다⁠. 「⁠계나윤 씨는 왜 단톡방에 있죠⁠? 강퇴 투표합시다⁠.⁠」 삼 분 뒤 재열이 답했다⁠. 「⁠계나윤 씨는 세입자로 남습니다⁠. 각서 일은 다음 모임에서 본인이 설명합니다⁠.⁠」 재열의 답 아래로는 아무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나윤은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등기소에 들어갔다⁠. 해든빌 A동부터 D동까지 76세대 등기부를 한 집씩 열었다⁠. 열람 한 번에 700원이었다⁠. 결제 창이 일흔여섯 번 떴고⁠, 카드 문자가 일흔여섯 번 왔다⁠.

등기부는 집마다 같은 말을 했다⁠. 「⁠을구 1⁠. 근저당권설정 2021년 5월 14일 · 근저당권자 늘솔금고⁠」⁠. 공동담보목록을 펼치자 76세대가 한 줄씩 이어졌다⁠. 해든빌 네 동 전체가 한 근저당에 묶여 있었다⁠. 한 집만 빚을 갚고 빠질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나윤은 이면지를 꺼내 볼펜으로 화살표를 그렸다⁠. 맨 위에 「⁠늘솔금고 2021⁠. 5⁠.⁠」⁠, 아래에 「⁠세입자 2022⁠~2024⁠」⁠. 경매가 되면 낙찰 대금은 위에서부터 내려온다⁠. 금고가 먼저 받고⁠, 남으면 세입자가 받는다⁠. 해든빌의 낙찰가는 대개 감정가 아래로 떨어질 테니 남을 게 거의 없었다⁠.

화살표 옆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소액임차인 선⁠. 경매에서 남은 돈이 없어도 보증금이 적은 세입자는 정해진 만큼 먼저 받는다⁠. 선은 근저당이 잡힌 날로 정해지고⁠, 2021년 5월 인천 미추홀구의 선은 보증금 1억 3천이었다⁠. 나윤의 305호 9⁠,500만 원은 선 아래였다⁠. 재열과 예슬의 302호 1억 6천은 선 위였다⁠.

볼펜 끝이 종이를 찢었다⁠. 계약서를 쓴 사람이 계약서를 받은 사람보다 덜 잃는 구조였다⁠.

*

열 시에 흰 SUV가 사무실 앞 인도에 바퀴 하나를 올리고 멈췄다⁠. 도상만이 떡 상자를 들고 내렸다⁠. 예순한 살⁠, 마 소재 연회색 재킷에 반바지⁠, 골프장 볕에 그을린 손등에서 시계가 번쩍였다⁠. 웃을 때 눈가 주름이 먼저 웃는 사람이었다⁠.

“⁠계 실장⁠, 인절미⁠. 콩고물 흘리지 말고 먹어⁠. 반 소장은 꿀떡⁠.⁠”

태식은 일어나서 떡 상자를 받았고 에어컨을 다시 18도로 내렸다⁠. 상만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휴대전화로 사진 여섯 장을 넘겼다⁠. 빈집 사진이었다⁠. 「⁠A동 103 · A동 402 · B동 303 · C동 501 · D동 204 · D동 305⁠」⁠.

“⁠9월 안에 여섯 채 다 채워 줘⁠. 이번엔 R5 줄게⁠. 반 소장 고생 많잖아⁠.⁠”

나윤은 R5가 무엇인지 알았다⁠. 상만의 집 계약을 하나 끝낼 때마다 법정 수수료 말고 따로 들어오는 돈이었다⁠. R1이 100만 원⁠, R5가 500만 원이었다⁠. 상만은 이 숫자를 문자로 보낼 때도 꼭 R을 붙였다⁠.

“⁠사장님⁠, 이 집들 들어올 보증금은 어디로 가요⁠?⁠”

“⁠어디로 가긴⁠. 302 빼 주고⁠, 401 빼 주고⁠. 대책위인지 뭔지 하는 애들 시끄러운 집부터 빼 주면 조용해지지⁠.⁠”

“⁠303 들어온 1억 5천으로 302를 빼 주시면⁠, 303 세입자 보증금은 누가 돌려줘요⁠?⁠”

“⁠다음 사람이 돌려주지⁠.⁠” 상만이 인절미 하나를 집어 콩고물을 털었다⁠. “⁠돌려막기라는 말 쓰지 마⁠, 계 실장⁠. 회전이라고 해⁠. 부동산은 원래 돌아가는 거야⁠. 은행도 남의 돈 받아서 남한테 빌려주잖아⁠.⁠”

“⁠은행은 근저당이 없잖아요⁠. 네 동 다 늘솔금고 공동담보예요⁠.⁠”

나윤이 책상 위의 등기부 묶음을 밀었다⁠. 상만이 맨 위 장을 넘겨 보다가 웃었다⁠.

“⁠이거 다 뗐어⁠? 일흔여섯 장⁠? 장당 칠백 원이면 오만 원 넘게 썼네⁠. 계 실장 돈 많다⁠.⁠” 상만이 등기부를 내려놓고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늘솔금고 이사장이 내 고등학교 친구야⁠. 9월 말에 부평 땅 PF 나오면 근저당 싹 정리해 준대⁠. 그때까지만 돌리면 돼⁠.⁠”

“⁠2024년 4월에도 석 달이면 정리한다고 하셨어요⁠. 302호 각서에요⁠.⁠”

“⁠각서는 마음이야⁠. 마음이 있으면 늦어도 돼⁠.⁠”

태식이 꿀떡을 입에 넣은 채 웃었다⁠. 너무 크게 웃어서 떡고물이 책상에 튀었다⁠. 나윤은 태식이 웃는 동안 상만의 손을 보았다⁠. 손가락은 계속 휴대전화 화면을 넘기고 있었다⁠. 사진첩 다음 장에는 호치민의 한식당 간판이 있었다⁠. 「⁠서울갈비⁠」⁠. 상만이 화면을 들어 보였다⁠.

“⁠우리 아들 가게⁠. 9월에 일 주년이야⁠. 반 소장⁠, 같이 가자⁠. 베트남 갈비는 숯이 달라⁠.⁠”

상만은 떡 상자를 두고 일어나면서 나윤의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계 실장은 일을 너무 꼼꼼하게 해⁠. 그게 장점인데 단점이야⁠. 303은 이번 주 안에 다시 잡아 놔⁠.⁠”

SUV가 떠나자 태식이 리모컨을 쥔 채 나윤을 보았다⁠.

“⁠사장 앞에서 등기부는 왜 꺼내⁠.⁠”

“⁠소장님 D동 집도 같은 근저당이에요⁠.⁠”

태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떡 상자 뚜껑을 닫고⁠, 나윤의 몫으로 나온 인절미를 나윤 책상 위로 밀었다⁠.

*

점심시간에 나윤은 사무실 뒤 계단에 앉아 휴대전화로 전세사기피해자 지원관리시스템에 들어갔다⁠. 신청 화면은 순서대로 물었다⁠. 임차주택 주소⁠, 보증금⁠, 전입일⁠, 확정일자⁠. 여기까지는 손가락이 알아서 움직였다⁠. 계약서를 쓸 때마다 남의 집 주소로 수없이 치던 칸이었다⁠.

다음 화면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피해자로 결정되려면 네 가지를 갖춰야 했다⁠. 대항요건과 확정일자⁠, 보증금 5억 원 이하⁠, 여러 임차인의 피해⁠, 그리고 임대인이 보증금을 돌려줄 의도가 없었다고 볼 만한 이유⁠. 마지막 칸 옆에는 「⁠입증 자료 첨부⁠」 단추가 있었다⁠.

입증 자료라면 나윤이 제일 많이 가지고 있었다⁠. 2024년 4월 6일 오전⁠, 302호 계약서를 쓰기 한 시간 전에 상만이 사무실 전화로 태식에게 한 말을 나윤은 옆자리에서 들었다⁠. 새로 들어오는 신혼부부 돈으로 A동 201호 빼 줘야 하니까 오늘 도장 꼭 받아⁠. 수화기 너머 목소리를 다 듣고도 나윤은 계약서에 집게를 물렸다⁠.

나윤은 등기부 사본과 경매 안내문만 첨부하고 「⁠제출⁠」을 눌렀다⁠. 화면에 「⁠접수되었습니다⁠」가 떴다⁠. 접수 번호를 캡처하는 동안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밥은⁠.⁠”

“⁠먹고 있어⁠.⁠”

“⁠뉴스 보니까 빌라가 다 그렇다며⁠. 니 집은 니가 다 알아보고 들어간 거니까 괜찮지⁠?⁠”

“⁠응⁠.⁠”

“⁠엄마 퇴직금 사천은 니 시집갈 때 그대로 돌려받는 거다⁠.⁠”

“⁠엄마⁠, 나 시집 안 가⁠.⁠”

“⁠그럼 엄마 장례 치를 때 써⁠.⁠”

“⁠엄마 안 죽잖아⁠.⁠”

“⁠그러니까 오래 묻어 두라는 거지⁠.⁠”

엄마가 웃으며 끊었다⁠. 나윤은 인절미를 하나 입에 넣었다⁠. 콩고물이 니트에 떨어졌고⁠, 털어도 털어도 남색 조끼 위로 노란 가루가 번졌다⁠.

*

오후 네 시⁠, 사무실 유리문 밖에 재열이 와 있었다⁠. 낮잠을 자다 나온 얼굴이었다⁠. 머리 한쪽이 눌려 있었고⁠, 후드 끈 한쪽은 길고 한쪽은 짧았다⁠. 들어오라는 손짓에 재열은 고개를 저었다⁠. 나윤이 밖으로 나갔다⁠.

“⁠금요일에 오실 거죠⁠?⁠”

“⁠갈게요⁠.⁠”

“⁠각서 얘기⁠, 사람들 앞에서 하셔야 돼요⁠. 저는 실장님이 무슨 말을 하든 안 끊을 거예요⁠. 대신 다른 사람들은 끊을 수도 있어요⁠.⁠”

“⁠알아요⁠.⁠”

나윤은 사무실로 들어가 등기부 묶음을 들고 나왔다⁠. 일흔여섯 장이 서류 봉투 두 개에 나뉘어 들어 있었다⁠.

“⁠네 동 다 떼 놨어요⁠. 근저당 날짜랑 공동담보 목록이에요⁠. 신청서 쓸 때 다들 필요해요⁠. 한 집에 한 장씩 나눠 주시면 돼요⁠.⁠”

재열이 봉투를 받고 무게를 손으로 가늠했다⁠.

“⁠얼마 들었어요⁠?⁠”

“⁠오만삼천이백 원이요⁠.⁠”

“⁠대책위 회비에서 드릴게요⁠.⁠”

“⁠안 주셔도 돼요⁠.⁠”

“⁠줄 거예요⁠. 실장님한테 빚지기 싫어요⁠.⁠”

재열의 말은 짧고 평평했다⁠. 화를 내는 말투가 아니라서 나윤은 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유리문이 열리고 태식이 나왔다⁠. 문틈으로 18도의 바람이 쏟아져 나와 재열의 후드 끈을 흔들었다⁠.

“⁠여기 영업장이에요⁠. 대책위 일은 밖에서 보세요⁠.⁠”

“⁠밖이잖아요⁠.⁠” 재열이 발밑의 보도블록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영업해서 우리 집이 이렇게 된 거잖아요⁠.⁠”

태식의 얼굴이 붉어졌다⁠. 무슨 말을 하려다 재열의 점퍼를 보고 다른 말을 했다⁠.

“⁠팔월에 점퍼는 왜 입어요⁠.⁠”

“⁠냉동 창고에서 왔어요⁠. 영하 20도요⁠.⁠” 재열이 사무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근데 여기가 더 춥네요⁠.⁠”

재열은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로터리 건너편으로 걸어갔다⁠. 태식은 문을 닫고 들어와 리모컨을 쥐었다가 처음으로 22도까지 올렸다⁠. 오 분 뒤 다시 18도로 내렸다⁠.

*

퇴근길에 나윤은 해든빌 B동 1층 우편함을 열었다⁠. 305호 칸에 노란 봉투가 꽂혀 있었다⁠. 「⁠인천지방법원⁠」⁠. 봉투를 뜯자 「⁠부동산임의경매개시결정⁠」이 나왔다⁠. 신청 채권자 늘솔금고⁠, 목적 부동산 해든빌 B동 305호⁠. 결정일은 7월 28일이었다⁠.

남의 집 경매 서류는 수십 번 읽어 보았다⁠. 사건번호를 확인하고⁠, 채권자를 보고⁠, 감정 날짜를 기다리라고 설명해 주면 됐다⁠. 자기 이름이 적힌 봉투는 손이 먼저 읽었다⁠. 나윤은 봉투를 반으로 접었다가 다시 폈다⁠. 접힌 자국이 사건번호 위로 지나갔다⁠.

계단에서 슬리퍼 끄는 소리가 났다⁠. 옥경희가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들고 내려오다 나윤의 손에 들린 노란 봉투를 보았다⁠.

“⁠실장⁠, 그거 법원 거지⁠? 우리 집도 그런 거 와⁠?⁠”

“⁠아직 안 왔으면 곧 와요⁠, 할머니⁠. 오면 뜯지 말고 저 주세요⁠. 날짜부터 봐 드릴게요⁠.⁠”

“⁠뜯지 말라니⁠. 내 편지를 내가 왜 안 뜯어⁠.⁠” 옥경희가 봉투를 흔들었다⁠. “⁠나는 뜯어서 큰 글씨로 다시 써 놓을 거야⁠. 그래야 읽지⁠.⁠”

필로티 기둥에는 아직 옥경희의 글씨가 붙어 있었다⁠. 「⁠해든빌 대책위원회⁠」⁠. 누가 아래에 작은 글씨로 덧붙여 놓았다⁠. 「⁠다음 모임 14일 금요일 저녁 여덟 시⁠」⁠.

휴대전화가 떨렸다⁠. 「⁠도상만 사장님⁠」⁠.

「⁠계 실장⁠, 305는 내가 제일 먼저 빼 줄게⁠. 직원 집인데 당연하지⁠. 대신 금요일 대책위 모임에 누가 나오는지 사진 좀 보내 줘⁠. 얼굴 잘 나오게⁠. 내가 한 집씩 찾아가서 직접 설명하려고 그래⁠.⁠」

메시지 아래에 엄지 하나를 든 그림이 붙어 있었다⁠. 나윤은 우편함 문을 닫지 못한 채 화면을 보았다⁠. 3층 복도 창으로 302호 불빛이 보였다⁠. 예슬이 창가에 서서 무언가를 계산기로 두드리고 있었다⁠.

출처 대법원 인터넷등기소 · 등기사항증명서 열람 수수료 안내 주택임대차보호법 시행령 · 2021년 5월 11일 시행 — 과밀억제권역 소액임차인 보증금 1억 3천만 원 이하 lawtalk · 「⁠전세사기 피해자 결정 신청 — 인정 4요건과 거절 시 이의신청 방법⁠」 — 결정 4요건⁠, 시·도 신청⁠, 전세사기피해자 지원관리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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