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369자)

4만 번째

4만 번째 전세사기 피해자 · 금나율

2026년 8월 7일 금요일 아침 아홉 시 반⁠, 인천 미추홀구 숭의 로터리 모퉁이의 으뜸공인중개사사무소는 냉장고 안처럼 추웠다⁠. 소장 반태식은 출근하자마자 에어컨을 18도에 맞추고 리모컨을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계나윤은 그래서 팔월에도 니트를 입었고⁠, 니트 위에 패딩 조끼까지 껴입고 프린터 앞에 서 있었다⁠.

벽걸이 텔레비전 아래로 자막이 지나갔다⁠. 「⁠전세사기 피해자 609명 추가 인정⁠…누적 4만 명 넘어⁠」⁠. 7월 한 달 동안 609명이 더 피해자로 결정되었고⁠, 2023년 6월 특별법이 생긴 뒤로 결정된 건수는 모두 4만 278건이었다⁠.

태식이 리모컨을 꺼내 채널을 트로트로 돌렸다⁠.

“⁠아침부터 재수 없는 거 보지 마⁠. 계 실장⁠, 두 시에 해든빌 B동 303호 보여 줘⁠. 상만 사장이 부탁한 거야⁠. 손님은 스물아홉 살 간호사⁠.⁠”

“⁠B동 지금 경매 들어간 동이에요⁠, 소장님⁠.⁠”

“⁠303은 아직 안 들어갔어⁠. 건물주가 잠깐 자금이 막혔을 뿐이야⁠. 9월 말이면 큰 대출 나온대⁠. 채광 끝내준다고 해⁠. 남향 같은 동향이라고⁠.⁠”

“⁠동향은 동향이에요⁠.⁠”

“⁠아침 해가 들잖아⁠. 아침 해는 남향보다 부지런해⁠.⁠”

프린터가 전세 계약서를 한 장씩 뱉었다⁠. 나윤은 표준 계약서 세 부와 특약 한 장⁠, 확인·설명서를 순서대로 겹쳐 검은 집게로 물렸다⁠. 네 해 동안 몸에 붙은 순서였다⁠. 건물주 도상만의 집 계약서는 거의 다 이 손으로 뽑았다⁠. 숫자를 세 본 적은 없었고⁠, 세어 보면 이백 장쯤이었다⁠.

열 시 오십 분에 휴대전화가 울렸다⁠. 「⁠302호 하예슬⁠」⁠.

“⁠실장님⁠, 저예요⁠. 통지서 왔어요⁠. 결정됐대요⁠. 저희 피해자래요⁠.⁠”

예슬의 목소리 끝이 웃음처럼 올라갔다가 떨어졌다⁠. 나윤은 대답 대신 집게로 묶은 계약서를 겨드랑이에 끼고 사무실 문을 밀었다⁠. 뒤에서 태식이 어디 가느냐고 외쳤다⁠. 바깥은 34도였고⁠, 패딩 조끼를 벗을 생각은 오 분을 걷는 동안 한 번도 나지 않았다⁠.

*

해든빌 B동은 5층짜리 복도식 빌라였다⁠. 3층 복도 한쪽은 유리창이 길게 이어졌고⁠, 맞은편 벽에는 현관문과 가스 계량기가 번갈아 붙어 있었다⁠. 302호 문에 에이포 용지 한 장이 테이프 네 귀퉁이로 붙어 있었다⁠. 「⁠법원 경매 진행 중⁠」⁠. 글자 아래 빨간 줄은 누가 사인펜으로 그었다⁠. 옆에는 집행관이 남기고 간 안내문을 떼어 낸 자국이 누렇게 남아 있었다⁠.

나윤이 사는 305호는 세 집 건너였다⁠. 305호 문에는 아직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예슬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회사에 못 간 차림이었다⁠. 반팔 셔츠 단추를 하나씩 어긋나게 채웠고⁠, 손에는 계산기가 들려 있었다⁠.

“⁠읽어 보세요⁠. 저 세 번 읽었는데 세 번 다 같은 말이에요⁠.⁠”

「⁠전세사기피해자 결정 통지서⁠」⁠. 「⁠귀하는 「⁠전세사기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전세사기피해자로 결정되었음을 통지합니다⁠.⁠」 아래 붉은 네모 안에 번호가 크게 찍혀 있었다⁠. 「⁠제40⁠,000호⁠」⁠.

“⁠뉴스 보셨죠⁠? 4만 명 넘었다고⁠. 저희가 딱 4만 번째래요⁠.⁠” 예슬이 계산기를 두 번 눌렀다⁠. “⁠복권은 한 번도 안 맞더니 이런 건 맞네요⁠.⁠”

예슬은 웃으려다 입꼬리가 내려왔다⁠. 안에서 휴대전화가 울렸고⁠, 예슬은 회사 전화라며 들어갔다⁠. 문이 반쯤 열린 채였다⁠.

나윤은 통지서와 계약서 묶음을 한 팔에 하나씩 든 채 복도에 남았다⁠. 복도 창유리에 자기 모습이 비쳤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를 고무줄 하나로 대충 묶었고⁠, 베이지 니트 위에 남색 패딩 조끼⁠, 목에는 파란 줄에 매단 명찰이 흔들렸다⁠. 「⁠부동산중개사무소 계약담당 계나윤⁠」⁠. 2024년 4월 6일 토요일⁠, 이 집 계약서를 쓸 때도 같은 명찰이었다⁠. 명찰 사진 속 얼굴은 웃고 있었고⁠, 유리에 비친 얼굴은 눈가가 붉었다⁠. 눈물이 턱 끝에서 통지서 귀퉁이로 떨어졌다⁠. 나윤은 종이를 털지도 못하고 들고만 있었다⁠.

복도 끝 계단참에 남자가 있었다⁠. 회색 후드를 쓰고 위에 검은 점퍼를 걸쳤다⁠. 팔월에 점퍼를 입은 사람은 이 동에 둘이었고⁠, 하나가 나윤이었다⁠. 석재열은 인천항 냉동 물류센터에서 밤새 영하 20도 창고를 드나들고 아침에 돌아오는 사람이었다⁠. 졸린 눈으로도 재열은 나윤의 겨드랑이에 낀 계약서 묶음을 먼저 보았다⁠.

“⁠303 보여 주러 왔어요⁠?⁠”

“⁠아니요⁠. 예슬 씨 전화 받고요⁠.⁠”

재열이 휴대전화 화면을 들어 보였다⁠. 방 구하는 앱이었다⁠. 「⁠해든빌 B동 303호 · 전세 1억 5천 · 즉시 입주 · 안심 매물⁠」⁠. 올린 곳은 으뜸공인중개사사무소였다⁠.

“⁠안심 매물이요⁠. 오늘 두 시에 누구한테 보여 줘요⁠?⁠”

“⁠취소할게요⁠.⁠”

“⁠2년 전에 우리한테 근저당 석 달이면 지운다고 한 사람 누구였죠⁠?⁠”

“⁠건물주가요⁠.⁠”

“⁠옆에서 고개 끄덕인 사람은요⁠?⁠”

나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계단참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재열의 점퍼 어깨에 맺힌 물방울을 비췄다⁠. 냉동 창고에서 묻혀 온 성에가 녹는 중이었다⁠.

“⁠오늘 저녁 여덟 시⁠, 1층 필로티 주차장에서 B동 모임 해요⁠. 다른 동도 와요⁠. 소장님은 오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재열이 후드를 벗었다⁠. “⁠실장님은 오세요⁠. 세입자니까⁠.⁠”

*

한 시 반⁠, 나윤은 사무실 책상에서 간호사 손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주인 사정으로 오늘 보여 드리기 어렵다고⁠, 다른 집을 찾아 드리겠다고 말했다⁠. 손님은 출근 전에 들르려고 했다며 아쉬워했다⁠. 나윤은 다른 집을 찾아 드리겠다는 말을 한 번 더 하고 끊었다⁠.

태식이 책상 앞으로 의자를 끌고 왔다⁠. 의자 바퀴가 장판 위에서 끽 소리를 냈다⁠.

“⁠니가 뭔데 손님을 돌려보내⁠?⁠”

“⁠B동은 늘솔금고 근저당이 동째로 잡혀 있어요⁠. 302호 경매 들어갔고⁠, 아래위 집도 곧 들어가요⁠. 303에 들어온 사람 1억 5천은 어디로 가요⁠?⁠”

“⁠상만 사장이 302 빼 주는 데 쓰겠지⁠. 그러면 302는 사는 거야⁠.⁠”

“⁠그럼 303은요⁠?⁠”

“⁠303은 그다음 사람이 빼 주지⁠.⁠” 태식은 말해 놓고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쓸었다⁠. “⁠건물주가 잠깐 자금이 막혔을 뿐이야⁠. 사람들이 대책위니 뭐니 떠들면 경매가만 떨어지고 세입자만 손해 봐⁠. 니 보증금은 안 걸렸냐⁠? 305 9⁠,500⁠.⁠”

“⁠걸렸어요⁠.⁠”

“⁠그럼 가만히 있어⁠. 오늘 저녁 모임은 가지 마⁠. 계 실장이 가면 우리 사무실이 간 거야⁠.⁠”

태식의 휴대전화가 책상 위에서 떨었다⁠. 화면에 「⁠도상만 사장님⁠」이 떴고⁠, 태식은 스피커를 켜고 두 손으로 전화기를 받쳐 들었다⁠.

“⁠반 소장⁠, 303 왜 펑크야⁠? 간호사가 나한테 문자 했어⁠. 집주인 사정이라고 했다며⁠.⁠”

목소리 뒤로 골프공 맞는 소리가 났다⁠. 태식이 나윤을 쳐다보았다⁠. 나윤이 전화기 쪽으로 몸을 숙였다⁠.

“⁠사장님⁠, 계나윤입니다⁠. 303 넣을 세입자 보증금으로 302 빼 주실 거예요⁠?⁠”

“⁠계 실장이구나⁠. 우리 실장은 목소리도 반듯해⁠.⁠” 상만이 웃었다⁠. “⁠돈에 이름 써 놨어⁠? 들어오는 돈이 나가는 돈이지⁠. 부동산은 원래 돌아가는 거야⁠. 다음 주에 사무실 한번 갈게⁠. 떡 사 갈 테니까 303 다시 잡아 놔⁠. 나 다음 달엔 호치민 아들 식당 개업 일 주년이라 바빠⁠.⁠”

전화가 끊겼다⁠. 태식은 화면이 꺼진 전화기를 한참 받쳐 들고 있다가 내려놓았다⁠.

태식의 책상 유리 밑에는 대학 입학식 날 찍은 딸 한솔의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사진 옆에 상만이 지난 설에 보낸 한우 선물 세트 영수증도 끼워져 있었다⁠. 나윤은 대답하지 않고 에어컨 리모컨을 집어 20도로 올렸다⁠. 태식이 손을 뻗어 도로 18도로 내렸다⁠. 리모컨이 두 사람 사이를 세 번 오갔고⁠, 나윤이 졌다⁠.

엄마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저녁은 먹고 다니냐⁠. 보증금 얘기 뉴스에 많이 나오던데 니 집은 괜찮지⁠?⁠」 보증금 9⁠,500만 원 가운데 4⁠,000만 원은 엄마가 학교 급식실에서 스물두 해 일하고 받은 퇴직금이었다⁠. 305호 계약서도 나윤이 직접 썼다⁠. 2023년 3월⁠, 소장이 직원 집이니 건물주가 500만 원 깎아 줬다며 웃었고⁠, 나윤은 깎인 500만 원만 보고 근저당 줄은 건너뛰었다⁠. 나윤은 「⁠괜찮아⁠. 사무실이 추워서 감기만 조심하면 돼⁠」라고 보내고 휴대전화를 엎었다⁠.

*

밤 여덟 시 필로티 주차장에는 서른 명쯤 모였다⁠. 차를 다 빼낸 바닥에 접이식 의자가 스무 개⁠, 나머지는 서 있었다⁠. B동 501호 할머니 옥경희가 달력 뒷면에 매직으로 쓴 글씨를 기둥에 붙였다⁠. 「⁠해든빌 대책위원회⁠」⁠. 글자 하나가 손바닥만 했다⁠.

“⁠글씨가 커야 건물주가 멀리서도 읽지⁠.⁠”

옥경희가 말하자 몇 사람이 웃었다⁠. C동의 고려인 청년 사샤는 남동공단 공장에서 얻어 왔다며 프린터 토너 두 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이고⁠, 서류 많이 뽑으려면 이게 거시기하게 필요해요⁠.⁠” 사샤가 말하자 또 웃음이 났다⁠.

나윤은 기둥 옆에 서 있었다⁠. 모임은 보증금 이야기로 시작했다⁠. 한 사람씩 일어나 동과 호수⁠, 보증금을 말했다⁠. A동 201호 9⁠,000만⁠, C동 402호 1억 2천⁠. 숫자가 하나 나올 때마다 누가 한숨을 쉬었고⁠, 옥경희는 숫자마다 달력 뒷면에 받아 적다가 글씨가 너무 커서 종이를 세 장이나 썼다⁠.

“⁠나는 501호⁠, 8⁠,000만⁠. 우리 아들 장가갈 때 보태 주려던 돈이야⁠.⁠”

사샤가 손을 들었다⁠. “⁠C동 204호⁠, 1억 1천이요⁠. 근데 저 우즈베키스탄 사람이에요⁠. 고려인이요⁠. 외국 사람도 피해자 돼요⁠?⁠”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몇 사람이 나윤을 쳐다보았다⁠. 집 이야기라면 이 동네에서 나윤이 제일 많이 아는 사람이었다⁠. 나윤은 피해자 신청은 받아 줄 거라고 말하려다 확인해 보고 알려 드리겠다고 바꿔 말했다⁠. 사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확인⁠. 한국 사람들 확인 좋아하죠⁠.⁠”

재열이 종이 한 장을 들었다⁠. 76세대 가운데 결정 신청을 넣은 집은 31집이었다⁠. 결정 통지서를 받은 집은 302호를 포함해 아홉 집이었다⁠. 나머지는 서류를 어떻게 떼는지 몰라서⁠, 회사에 하루 못 빠져서⁠, 아직 건물주를 믿어서 넣지 못했다⁠. 위원장을 뽑는 데는 오 분이 들었다⁠. 위원장은 재열이었다⁠. 손을 든 사람은 재열 하나였고⁠, 박수는 길었다⁠.

재열이 앞으로 나와 서류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휴대전화 손전등 몇 개가 종이를 비췄다⁠.

“⁠2024년 4월에 우리 집 계약할 때 받은 각서예요⁠. 건물주 도상만이 직접 썼어요⁠. 「⁠본인은 2024년 7월 6일까지 위 부동산의 근저당을 말소할 것을 보증함⁠」⁠. 석 달이요⁠. 2년 지났는데 근저당 그대로예요⁠.⁠”

재열이 종이를 돌려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입회인 서명도 있어요⁠. 「⁠입회인 으뜸공인중개사사무소 계나윤⁠」⁠.⁠”

필로티 천장의 형광등 하나가 깜박였다⁠. 재열이 고개를 들어 주차장 기둥 옆을 보았다⁠.

“⁠이 서명 한 사람⁠, 저기 기둥 옆에 서 있네요⁠.⁠”

서른 개의 얼굴이 한꺼번에 돌아왔다⁠. 나윤의 목에 걸린 명찰이 패딩 조끼 지퍼에 부딪혀 딸깍 소리를 냈다⁠.

출처 머니투데이 · 2026년 8월 7일 · 「⁠전세사기 피해자 609명 추가 인정⁠…누적 4만명 넘어⁠」 이투데이 · 2026년 8월 7일 · 「⁠전세사기 피해자 4만 명 넘었다⁠…LH 피해주택 매입도 1만 가구 돌파⁠」 — 누적 결정 4만 278건

1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4만 번째 · 4만 번째 전세사기 피해자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