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5,322자)
이백 장
4만 번째 전세사기 피해자 · 금나율
2027년 3월 11일 목요일 오전 열 시, 주안역 2번 출구 앞 복사집. 나윤은 USB를 사장에게 건넸다. 폴더 이름은 「으뜸 2022~2026」이었다. 네 해 동안 계약이 끝날 때마다 휴대전화로 찍어 둔 계약서 사진이 들어 있었다. 서류 순서대로 찍었다. 계약서, 특약, 확인·설명서. 경찰이 휴대전화를 돌려줄 때 사진도 그대로 돌아왔다.
“몇 장이에요?”
“계약서로 이백열한 건이에요. 특약하고 설명서까지 하면 육백 장 조금 넘어요.”
“양면이요, 단면이요?”
나윤은 잠깐 생각했다. 계약서는 늘 단면으로 썼다. 손님이 뒷면을 못 보고 넘기면 안 되었다.
“단면이요.”
“단면이면 육백 장이 넘는데. 종이 아깝게.” 사장이 투덜대며 출력 버튼을 눌렀다. “무슨 서류예요? 이사 많이 다니셨나 봐요.”
“제가 이사 보낸 집들이에요.”
사장은 더 묻지 않았다. 출력이 끝나자 사장이 계산기를 두드렸다. 육백열두 장, 단면, 장당 50원. 3만 600원.
“600원은 빼 드릴게요. 무거우니까.”
“무거우면 깎아 주세요?”
“무거운 서류는 대개 좋은 일 아니더라고요. 이 동네 복사집 이십 년 하면 알아요. 이혼 서류, 소송 서류, 경매 서류.” 사장이 종이 묶음을 상자에 담아 주었다. “계약서는 처음이에요. 계약서를 이렇게 무겁게 뽑아 가는 사람은.” 복사기가 사십 분 동안 돌았다. 기계가 종이를 내놓을 때마다 따뜻한 냄새가 났다. 나윤은 기계 옆에서 첫 장을 받았다. 2022년 3월 4일, 해든빌 A동 101호. 보증금 1억 2천. 임차인 이름 아래 나윤의 글씨로 쓴 중개보조원 이름이 있었다. 첫 계약이었다. 계약을 마친 저녁 태식이 짜장면을 사 주었다. 탕수육도 시켜 주었다. 나윤은 탕수육 소스를 부어 먹었고, 태식은 찍어 먹는 사람이었다.
*
오후, 305호. 나윤은 종이 육백 장을 바닥에 펼쳤다. 거실이 모자라 현관까지 이어졌다. 해든빌 것을 한 줄, 숭의동 다른 빌라 것을 한 줄, 주안동과 도화동 것을 한 줄로 놓았다. 해든빌 줄이 가장 길었다. 76세대 가운데 쉰여덟 집이 나윤의 글씨였다.
나윤은 특약을 한 장씩 읽었다. 「임대인은 잔금일 다음 날까지 근저당 일부를 감액한다」. 2022년 여름부터 같은 문장이 이어졌다. 감액했다는 확인서는 한 장도 없었다. 특약은 약속이었고, 약속은 확인되지 않았다. 나윤은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하면 계약이 깨졌다.
C동 204호, 2023년 6월. 사샤의 계약서였다. 임차인 국적 칸에 「우즈베키스탄」. 사샤가 서명하고 나서 도장 대신 손가락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도장이 아직 없었다. 나윤이 인주를 내밀었다. 사샤의 엄지 지문이 계약서에 남아 있었다. 지문이 컸다.
D동 501호, 2022년 9월. 반태식, 1억 8천. 중개보조원 칸이 비어 있었다. 소장이 자기 집을 자기 사무소에서 계약했다. 서류철을 정리하며 찍기만 하고 한 번도 읽지 않은 계약서였다. 특약 칸에도 같은 문장이 들어 있었다. 태식은 자기 집 계약서에도 감액 특약을 넣었다. 자기도 믿었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믿고 싶었다는 뜻이었다.
B동 501호, 2022년 5월. 옥경희, 8천. 임차인 서명 칸에 옥경희의 이름이 칸 밖까지 넘쳐 있었다. 「옥」 자 하나가 서명 칸을 다 차지하고, 「경희」는 칸 아래 여백에 내려가 있었다. 계약 날 나윤이 칸 안에만 써 달라고 하자 옥경희가 대답했다. 이름은 크게 써야 안 잊어버려. 나윤은 서명 칸을 넘친 이름을 그대로 두었다. 옥경희가 맞았다. 다섯 해가 지나도 잊히지 않았다.
B동 302호, 2024년 4월 6일. 석재열, 하예슬. 1억 6천. 예슬의 서명은 동그랗고, 재열의 서명은 짧았다. 특약 칸 아래 여백에 연필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예슬이 계산기 대신 연필로 대출 이자를 계산해 본 자국이었다. 나윤은 사진을 찍을 때 연필 자국을 지우지 않았다.
바닥에 앉아 이백열한 건을 다 읽고 나니 해가 졌다. 나윤은 패딩 조끼 안주머니에서 태식의 편지를 꺼냈다. 2월에 받은 뒤로 열지 않은 봉투였다. 봉투 입구는 열려 있었다.
「나윤아.
부탁 거둔다. 한솔이 붙었다. 그거면 됐다.
니가 본 대로 말해라. 니가 본 것만 말해라. 나는 내가 한 거 법정에서 내 입으로 말한다.
에어컨은 18도가 맞다. 손님은 시원해야 계약한다. 그건 지금도 맞다고 생각한다.
반태식」
나윤은 편지를 두 번 읽었다. 세 번째에는 마지막 줄만 읽었다. 웃음이 났다. 웃다가 바닥의 종이 위로 고개를 숙였다. 302호 계약서 위였다. 종이가 젖지 않게 얼른 고개를 들었다.
*
저녁 일곱 시, C동 204호. 사샤의 집은 상자로 반이 차 있었다. 상자마다 매직으로 러시아어와 한국어가 같이 쓰여 있었다. 「부엌 · кухня」, 「할아버지 · дедушка」. 할아버지 상자에는 사진 액자 하나와 낡은 손풍금이 들어 있었다.
“1937년에 연해주에서 기차 타고 우즈베키스탄 가실 때 들고 가신 거예요. 기차가 한 달 걸렸대요. 아이고, 그때는 이삿짐센터도 없고.” 사샤가 손풍금 주름을 한 번 폈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할아버지는 집을 세 번 잃었어요. 연해주에서 한 번, 타슈켄트에서 한 번. 저는 한국에서 한 번. 우리 집안은 거시기, 집을 잃는 데 재주가 있어요.”
“5월 28일에 이사하죠.”
“네. 트럭 불렀어요. 근데 냉장고가 문제예요. 엘리베이터 없잖아요. 2층이라도 냉장고는 무거워요. 위원장님이 들어 준대요. 실장님도 들어 줘요.”
“들게요.”
사샤는 상자를 테이프로 감다가 나윤을 보았다.
“실장님, 증인 서는 거 어떤 기분이에요? 저는 출입국 사무소 갈 때마다 증인 같은 기분이에요. 내가 나를 증명해야 돼요. 서류로.”
“비슷해요. 제가 저를 증명해야 해요. 제가 쓴 서류로요.”
“그럼 서류 많은 사람이 이겨요?”
“서류 많은 사람이 많이 들켜요.”
사샤가 웃었다. 테이프를 길게 뜯어 할아버지 상자를 마저 감았다. 그러다 냉장고 문에 붙여 둔 종이 한 장을 떼어 나윤에게 내밀었다. 새로 얻은 원룸의 계약서 사본이었다. 냉장고 문에는 월미도 자석 하나만 남았다.
“실장님, 이거 봐 주세요. 이번엔 제가 등기부도 뗐어요. 700원.”
나윤은 등기부를 끝까지 넘겼다. 근저당 없음. 공동담보 없음. 집주인은 공장 앞 세탁소 할머니였다. 보증금 500만 원, 월세 35만 원.
“깨끗해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실장님이 깨끗하다고 하니까 거시기 무섭네요.” 사샤가 말하고 나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이고, 농담이에요.”
“알아요. 맞는 말이에요.”
*
밤 아홉 시, 숭의 로터리 포장마차. 나윤은 혼자 어묵을 먹으러 갔다. 비닐 천막을 젖히자 구석 자리에 태식이 있었다. 소주 한 병과 계란말이 한 접시. 둘은 동시에 서로를 보았다. 둘 다 일어나지 않았다.
“재판 얘기는 안 한다. 변호사가 하지 말래.” 태식이 먼저 말했다. “증인하고 피고인이 술 먹으면 큰일 난대.”
“저 어묵 먹으러 왔어요.”
“어묵은 괜찮겠지.”
나윤은 다른 탁자에 앉았다. 두 탁자 사이는 한 걸음이었다. 포장마차 주인이 어묵 꼬치를 나윤 앞에 놓았다. 태식은 계란말이를 먹었고 나윤은 어묵을 먹었다. 천막 밖으로 버스가 로터리를 돌아 나갔다.
“한솔이 4월부터 길병원 간다.” 태식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신규 간호사. 첫 월급 받으면 아빠 영치금 넣어 준대. 웃기지?”
“안 웃겨요.”
“그래. 안 웃기다.” 태식이 소주를 따랐다. 잔이 넘칠 뻔했다. “사무실 내놨다. 권리금 없이. 보러 오는 사람이 없더라. 숭의 로터리 으뜸 하면 다들 안다고. 채광은 끝내주는데.”
“채광은 진짜 좋았어요.”
“그렇지?” 태식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반가운 얼굴이었다가, 곧 반가움을 접었다. “에어컨 얘기는 진짜다. 편지에 쓴 거.”
“알아요.”
태식이 먼저 일어났다. 계산대에서 지갑을 열다가 멈추고 돌아보았다.
“니 어묵은 니가 내라. 같이 내면 큰일 난대.”
“네. 제가 낼게요.”
태식이 천막을 젖히고 나갔다. 나윤은 어묵값 4천 원을 냈다. 9월에는 둘이서 23,000원을 나눠 냈었다. 오늘은 각자 냈다.
*
밤 열 시, 302호. 나윤은 프린트한 302호 계약서를 들고 초인종을 눌렀다. 예슬이 문을 열었다. 수면 양말을 신고 있었고, 배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아직 몰라요. 다음 주에 피 검사요.” 예슬이 먼저 말했다. “손은 그냥 버릇이에요. 실장님 들어와요.”
재열은 식탁에 앉아 있었다. 나윤은 계약서를 식탁에 올렸다. 재열과 예슬이 같이 들여다보았다. 예슬이 연필 자국을 손끝으로 짚었다.
“이거 내가 쓴 거네. 이자 계산한 거. 3.8퍼센트였어. 그때 금리.” 예슬이 웃었다. “실장님, 이것도 찍어 뒀어요?”
“다 찍었어요. 지우지 않았어요.”
재열이 특약 칸을 읽었다. 「임대인은 잔금일 다음 날까지 근저당 일부를 감액한다」. 재열은 소리 내어 한 번 읽고, 다시 한 번 읽었다.
“이거 법정에서 읽어요?”
“읽을 거예요. 이백열한 장에 다 들어 있다고 말할 거예요. 제가 만든 문장이라고요. 감액 확인서는 한 장도 없다고요.”
“실장님도 같이 들어가요.”
“네. 같이 들어가요.”
재열은 계약서를 가지런히 모아 나윤에게 돌려주었다.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두 번 두드려 맞추었다. 나윤이 서류를 맞추는 손버릇이었다. 재열이 언제 손버릇까지 보았는지 나윤은 몰랐다.
“가져가요. 우리 건 우리가 원본 있어요.”
*
밤 열한 시, 305호. 바닥의 종이를 다시 순서대로 모으니 한 시간이 지났다. 이백열한 건을 해든빌, 숭의동, 주안동과 도화동 순서로 세 묶음으로 나누었다. 묶음마다 집게를 물렸다. 검은 집게 세 개였다. 8월 7일 아침 303호 집 보여 주기에 쓸 계약서를 물렸던 것과 같은 집게였다.
나윤은 검사실 수사관에게 문자를 보냈다. 밤이라 전화는 하지 않았다. 내일 아침 전화하겠다고 쓰려다 지우고 다시 썼다.
「계나윤입니다. 계약서는 이백열한 건입니다. 특약과 확인·설명서까지 육백 장이 넘습니다. 다 가져가겠습니다. 제 이름이 들어간 것도 다 가져가겠습니다. 면담은 15일 월요일 오전에 가겠습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밤 열한 시였다. 나윤은 냉동실 문을 열었다. 맨 안쪽에 지퍼백 하나가 얼어 있었다. 10월 27일 뷔페에서 옥경희가 쥐여 준 떡이었다. 증거야, 실장이 갖고 있어. 나윤은 다섯 달째 증거를 얼려 두고 있었다. 떡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나윤은 지퍼백을 다시 맨 안쪽에 넣었다. 판결이 나면 옥경희와 같이 쪄 먹을 생각이었다.
나윤은 휴대전화를 냉장고 위에 올려 두었다. 「305」 통장 옆이었다. 선인장에 물을 주었다. 3월 12일이 아니라 11일이었다. 하루 일렀다. 태식이 한 달에 한 번이라고 했지 날짜를 정해 주지는 않았다.
출처 공인중개사법 제26조 · 거래계약서 작성과 사본 5년 보존 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