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5,398자)

첫 공판

4만 번째 전세사기 피해자 · 금나율

2027년 2월 18일 목요일 오전 열 시⁠, 학익동 인천지방법원 형사 대법정⁠. 방청석 맨 앞줄에 해든빌 사람 열네 명이 앉았다⁠. 옥경희는 가방에 매직펜과 달력 종이를 넣어 왔다가 법정 입구에서 경위에게 막혔다⁠.

“⁠법정 안에서는 글씨 든 종이 못 드십니다⁠.⁠”

“⁠큰 글씨만 안 되는 거예요⁠, 작은 글씨도 안 되는 거예요⁠?⁠”

“⁠다 안 됩니다⁠.⁠”

옥경희는 종이를 가방에 넣고 자리에 앉았다⁠. 앉아서 매직펜 뚜껑을 열고 왼쪽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 「⁠12년⁠」⁠. 사샤가 옆에서 보고 속삭였다⁠. “⁠할머니⁠, 아직 판결 안 났어요⁠.⁠” 옥경희가 대답했다⁠. “⁠미리 써 두는 거야⁠. 판사 보라고⁠.⁠”

나윤은 방청석 맨 뒷줄에 앉았다⁠. 증인으로 나올지 모르는 사람은 앞줄에 앉지 말라고 검사실 수사관이 일러 주었다⁠. 맨 뒷줄에서도 피고인석이 보였다⁠.

도상만은 1월 8일 호치민에서 송환되었다⁠. 인천공항에서 수갑을 찬 채 고개를 숙인 사진이 찍혔다⁠. 영장 기각 날과 같은 각도였다⁠. 이번에는 영장이 기각되지 않았다⁠. 1월 말 구속 기소되었다⁠. 사건은 반태식의 사건과 합쳐졌다⁠. 피고인석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게 되었다⁠.

교도관이 문을 열었다⁠. 상만이 들어왔다⁠. 연한 하늘색 수의를 입었고⁠, 머리는 짧게 잘랐다⁠. 앞치마도 정장도 아니었다⁠. 상만은 방청석을 한 번 둘러보았다⁠. 맨 앞줄의 해든빌 사람들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웃지 않았다⁠. 눈가 주름이 웃을 준비만 하다 멈췄다⁠.

태식은 변호인 옆에 앉아 있었다⁠. 불구속 피고인이라 양복을 입었다⁠. 넥타이는 한솔이 골라 준 것이라고 나윤은 들었다⁠. 태식은 법정에 들어온 뒤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

검사가 공소사실을 읽었다⁠. 2020년부터 2024년까지 인천 미추홀구·부평구·남동구 빌라 412채⁠. 금고 공동담보 근저당을 먼저 잡은 집에 세입자를 들이고⁠, 새 세입자의 보증금으로 앞 세입자의 보증금을 돌려준 돌려막기⁠. 피해자 291명⁠, 보증금 398억 원⁠. 중개사무소 일곱 곳에 리베이트를 주고 계약을 몰아 준 사실⁠. 반태식이 세 해 동안 받은 리베이트 1억 9⁠,100만 원과 다른 중개사무소 여섯 곳을 끌어들인 사실⁠.

검사는 숫자를 하나씩 읽을 때마다 숨을 쉬었다⁠. 291명을 읽고 한 번⁠, 398억을 읽고 한 번⁠. 방청석 맨 앞줄에서 누군가 코를 훌쩍였다⁠. 예슬이었다⁠. 예슬은 1월에 시험관 시술을 다시 시작했다⁠. 최소보장 633만 원이 2월 첫 주에 결정되었다⁠. 시험관 한 번에 오백⁠. 예슬의 계산기에는 133만 원이 남아 있었다⁠.

“⁠피고인 도상만⁠, 공소사실을 인정합니까⁠?⁠”

상만이 일어났다⁠. 수의 소매가 손목까지 내려왔다⁠.

“⁠재판장님⁠, 저는 사람들을 속이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부평 청천동 PF 사업 자금이 늦어졌을 뿐입니다⁠. 자금이 들어왔으면 다 돌려드렸을 겁니다⁠. 부동산은 원래 돌아가는 겁니다⁠. 돌아가다 잠깐 멈췄습니다⁠.⁠”

방청석에서 짧은 웃음이 났다⁠. 웃음이 아니라 숨이 터지는 소리였다⁠. 재판장이 방청석을 한 번 보았다⁠. 옥경희가 손바닥을 무릎 아래로 감추었다⁠.

“⁠피고인 반태식⁠, 공소사실을 인정합니까⁠?⁠”

태식의 변호인이 대신 일어났다⁠. 리베이트를 받은 사실은 인정한다고 했다⁠. 다만 리베이트의 숫자는 도상만이 정했고⁠, 반태식 본인도 보증금 1억 8천을 도상만에게 묶인 피해자이며⁠, 돌려막기 구조는 몰랐다고 했다⁠. 태식은 변호인이 말하는 동안 책상 위의 자기 손만 보았다⁠.

*

열 시 오십 분⁠, 십 분 휴정⁠. 나윤은 법정 밖 화장실 앞에서 손을 씻었다⁠. 찬물이었다⁠. 거울 속에서 금테 안경이 다가왔다⁠. 상만의 변호인이었다⁠. 변호인은 손을 씻지 않고 나윤 옆 세면대에 손만 올려놓은 채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고쳤다⁠.

“⁠계나윤 씨죠⁠. 오늘 증인 신청이 들어갈 겁니다⁠.⁠” 변호인이 거울 속의 나윤에게 말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12월 3일 통화⁠, 기억하시죠⁠. 받겠다고 하신 거요⁠. 법정에서 그 말이 어떻게 들릴지 미리 생각해 두시는 게 좋습니다⁠. 증인을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나윤은 수도꼭지를 잠갔다⁠. 종이 수건을 두 장 뽑아 손가락 사이까지 닦았다⁠.

“⁠변호사님⁠, 그 통화 영상 처음부터 끝까지 보셨어요⁠?⁠”

“⁠물론이죠⁠.⁠”

“⁠그럼 사장님이 내일 여섯 시부터 열 시까지 집게 들고 있다고 하신 것도 보셨겠네요⁠.⁠” 나윤은 종이 수건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것도 다 기록돼 있어요⁠. 탁 경위님이 그러시는데⁠, 기록은 앞에서부터 읽는 거래요⁠.⁠”

변호인은 넥타이에서 손을 떼고 웃었다⁠. 상만과 닮은 웃음이었다⁠. 눈가가 먼저 웃었다⁠. 나윤은 먼저 화장실을 나왔다⁠. 복도에서 손이 다시 떨렸다⁠. 이번에는 찬물 탓으로 돌렸다⁠.

*

열한 시 사십 분⁠, 증거와 증인 신청이 이어졌다⁠.

“⁠검찰은 증인으로 계나윤을 신청합니다⁠. 으뜸공인중개사사무소 전 중개보조원이고⁠, 해든빌 B동 305호 세입자입니다⁠. 도상만이 보낸 리베이트 문자⁠, 2024년 4월 6일 302호 계약 당시 통화 내용⁠, 계약서 이백여 장의 작성 경위를 증언할 사람입니다⁠.⁠”

나윤은 맨 뒷줄에서 자기 이름을 들었다⁠. 필로티에서⁠, 뷔페에서 들었던 이름이었다⁠. 법정에서 들으니 이름이 더 길었다⁠.

태식의 변호인이 일어났다⁠.

“⁠피고인 반태식 측도 증인으로 계나윤을 신청합니다⁠. 리베이트 숫자를 누가 정했는지⁠, 반태식이 돌려막기 구조를 알았는지에 대해 사무실에서 가장 가까이 일한 사람입니다⁠.⁠”

재판장이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같은 이름이 두 번 나왔다는 얼굴이었다⁠.

상만의 변호인이 마지막으로 일어났다⁠. 검은 정장에 금테 안경을 쓴 남자였다⁠. 12월에 해든빌 세입자들에게 문자를 보낸 사람이었다⁠.

“⁠도상만 측은 증인 계나윤에 대해 증거를 하나 제출하겠습니다⁠. 2026년 12월 3일 증인이 피고인 도상만과 나눈 영상통화 녹음입니다⁠. 증인이 피고인에게 돈을 받겠다고 한 말이 들어 있습니다⁠. 증인의 진술이 믿을 만한지 판단하실 때 보셔야 할 자료입니다⁠.⁠”

방청석 맨 앞줄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열네 개의 얼굴이 맨 뒷줄로 왔다⁠. 재열의 얼굴은 돌아오지 않았다⁠. 재열은 앞만 보고 있었다⁠.

재판장이 기일을 정했다⁠. 3월 18일 목요일 오후 두 시⁠, 증인 계나윤 신문⁠. 검찰 측과 반태식 측이 같은 날 신문하고⁠, 도상만 측이 반대신문을 한다⁠.

“⁠증인은 소환장을 받으시면 출석하셔야 합니다⁠.⁠” 재판장이 법정 뒤쪽을 보며 말했다⁠. 나윤이 거기 앉아 있는 것을 아는 얼굴이었다⁠.

*

열두 시 십 분⁠, 법정 밖 복도⁠. 해든빌 사람들이 자판기 앞에 모였다⁠. 사샤가 율무차를 뽑아 옥경희에게 주었다⁠. 옥경희는 손바닥의 「⁠12년⁠」을 사샤에게 보여 주었다⁠. 땀에 번져 「⁠1⁠」이 반쯤 지워져 있었다⁠.

“⁠2년이 됐네⁠.⁠” 옥경희가 손바닥을 비볐다⁠. “⁠이러면 안 되지⁠. 다시 써야지⁠.⁠”

“⁠할머니⁠, 그건 반 소장님 숫자 같아요⁠.⁠” 사샤가 말했다⁠. “⁠아이고⁠, 손바닥이 거시기 예언하네요⁠.⁠”

사샤는 1월에 배당금 4⁠,300만 원을 받았다⁠. 남은 6⁠,700만 원은 상만의 재산을 찾는 대로 받을 돈으로 남았다⁠. C동 204호를 산 해든관리는 김 실장이 고소를 한 뒤로 아무도 집을 비우라고 오지 않았다⁠. 사샤는 5월 말까지 살고 이사하기로 했다⁠. 공장 근처 원룸이었다⁠. 보증금 500만 원짜리였다⁠.

나윤은 복도 끝 창가에 있었다⁠. 재열이 다가왔다⁠. 야간 근무를 빼고 온 날이었다⁠. 후드 위에 검은 점퍼⁠. 해든빌 3층 복도 끝에 서 있던 첫날과 같은 차림이었다⁠.

“⁠302호 LH 임대 계약 했어요⁠. 1월에요⁠. 10년 살 수 있대요⁠.⁠” 재열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마용배 차장이 계약서 줄 때 그러더라고요⁠. 이번엔 사안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나윤이 웃었다⁠. 재열도 조금 웃었다⁠. 나윤을 보고 웃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누구 편 설 거예요⁠?⁠”

나윤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검사는 사장님 잡으려고 불렀고⁠, 소장님 변호사는 소장님 덜 나쁘게 하려고 불렀어요⁠. 둘 다 저한테 사실만 말하래요⁠. 사실이 둘 다 맞아요⁠.⁠” 나윤이 말했다⁠. “⁠아직 몰라요⁠.⁠”

“⁠실장님이 모른다고 할 때가 제일 무서워요⁠.⁠” 재열이 말했다⁠. “⁠9월에 조사실 다녀와서도 모른다고 했잖아요⁠.⁠”

“⁠이번엔 다른 모름이에요⁠.⁠”

“⁠뭐가 달라요⁠?⁠”

“⁠그때는 아는데 모른다고 했고요⁠. 지금은 정말 몰라요⁠. 사실을 다 말하면 소장님은 덜 나쁜 사람이 되고⁠, 사장님 변호사는 녹음을 틀어요⁠. 둘 다 사실이에요⁠.⁠”

재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점퍼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302호 현관 열쇠였다⁠. LH가 새로 바꿔 준 열쇠였다⁠. 재열은 열쇠를 손바닥에 올려 나윤에게 보여 주었다⁠.

“⁠우리 집이 아직 우리 집인 건 실장님이 9월에 김 실장이 302호 받아 간다고 문자 보내 줘서예요⁠. 그것도 사실이에요⁠.⁠” 재열이 열쇠를 다시 넣었다⁠. “⁠그 사실도 법정에서 말해요⁠. 녹음보다 먼저요⁠.⁠”

*

오후 한 시⁠, 법원 정문⁠. 나윤이 계단을 내려가는데 정문 기둥 옆에서 누군가 나윤을 불렀다⁠.

“⁠언니⁠.⁠”

한솔이었다⁠. 회색 코트에 간호학과 이름이 박힌 가방을 메고 있었다⁠. 2월 중순이었다⁠. 국가고시 결과가 나온 주였다⁠.

“⁠붙었어요⁠.⁠” 한솔이 먼저 말했다⁠. “⁠어제 발표 났어요⁠. 아빠한테는 아직 말 안 했어요⁠. 오늘 재판 끝나고 말하려고요⁠.⁠”

“⁠축하해요⁠.⁠”

“⁠언니가 아빠 통장 돌려줬잖아요⁠. 그때 제가 아빠한테 경찰 가라고 했어요⁠. 아빠가 그날 새벽에 갔어요⁠.⁠” 한솔이 가방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봉투 겉에 태식의 글씨가 있었다⁠. 「⁠계나윤⁠」⁠. 이름 석 자만 쓰여 있었다⁠. “⁠아빠가 언니한테 주래요⁠. 직접 주면 증인한테 부탁하는 거라서 안 된대요⁠. 변호사님이 그랬대요⁠. 그래서 제가 주는 거예요⁠.⁠”

나윤은 봉투를 받지 않았다⁠. 한솔은 봉투를 내민 채 기다렸다⁠. 바람이 불었다⁠. 봉투 끝이 한솔의 손가락 사이에서 떨렸다⁠.

“⁠한솔 씨가 주는 것도 같은 거예요⁠.⁠”

“⁠알아요⁠.⁠” 한솔이 말했다⁠. “⁠그래도 받아 주세요⁠. 안에 부탁은 없대요⁠. 아빠가 그렇게 말했어요⁠. 부탁은 지난 12월에 다 했대요⁠.⁠”

나윤은 봉투를 받았다⁠. 무게가 거의 없었다⁠. 종이 한 장이었다⁠. 봉투는 풀로 붙어 있지 않았다⁠. 태식은 봉투를 봉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계약서 봉투도 늘 열어 둔 채로 손님에게 건넸다⁠. 손님이 안을 한 번 더 볼 수 있게⁠.

한솔이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나윤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인천지방검찰청 검사실 수사관이었다⁠.

“⁠계나윤 씨⁠, 3월 18일 증인 신문 전에 검사님이 한 번 뵙자고 하십니다⁠. 증인 면담이요⁠. 3월 초에 시간 되시면 연락 주세요⁠. 그리고 하나 여쭤볼게요⁠.⁠” 수사관이 서류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 “⁠계약서 이백여 장이라고 하셨는데⁠, 정확히 몇 장입니까⁠? 검사님이 숫자를 정확히 알고 싶어 하세요⁠.⁠”

“⁠세어 보고 말씀드릴게요⁠.⁠”

전화를 끊고 나윤은 봉투를 패딩 조끼 안주머니에 넣었다⁠. 명찰 옆이었다⁠. 명찰과 봉투가 가슴에서 같이 바스락거렸다⁠. 법원 정문 앞으로 2월 바람이 지나갔다⁠. 나윤은 버스를 타지 않고 걸었다⁠. 학익동에서 숭의동까지 걸으면 한 시간이었다⁠. 이백 장을 세려면 한 시간보다 오래 걸릴 것이었다⁠.

출처 형사소송법 · 증인의 출석 의무와 소환⁠, 검사와 피고인 측의 증인 신청과 신문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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