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459자)

서른여덟 집

4만 번째 전세사기 피해자 · 금나율

2026년 11월 3일 화요일 오전 열 시⁠, 학익동 인천지방법원 경매법정⁠. 사샤는 맨 앞줄에 앉아 무릎 위에 서류 봉투를 올려 두고 있었다⁠. 봉투 안에는 은행 세 곳에서 받은 대출 거절 문자가 캡처되어 들어 있었다⁠.

“⁠첫 번째 은행은 재직 기간이요⁠. 두 번째는 체류 자격이요⁠. 세 번째는 그냥 죄송하대요⁠.⁠” 사샤가 손가락 세 개를 차례로 접었다⁠. “⁠아이고⁠, 세 번째가 제일 거시기해요⁠. 이유를 안 알려 주니까⁠.⁠”

C동 204호는 9월에 한 번 유찰되어 최저가가 1억 500만 원으로 내려와 있었다⁠. 우선매수를 하려면 사샤가 낙찰가만큼 돈을 내야 했다⁠. LH는 외국 국적 세입자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용배 차장은 설명회에서 사안별로 다르다고 했지만⁠, 사샤의 사안은 한 가지뿐이었다⁠.

집행관이 사건 번호를 불렀다⁠. 입찰자는 둘이었다⁠. 개인 한 명이 1억 520만 원을 썼고⁠, 해든관리가 1억 700만 원을 썼다⁠. 김 실장이 일어나 영수증을 받았다⁠. 김 실장의 구두에서 끽 소리가 났다⁠. 9월 15일에도 같은 소리가 났다⁠. 구두 밑창을 갈 돈은 없는 회사가 1억 700만 원은 있었다⁠.

사샤가 나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실장님⁠, 해든관리가 사는 돈은 어디서 와요⁠? 사장님 돈이 사장님 집을 사는 거예요⁠?⁠” 나윤은 대답 대신 수첩에 해든관리 낙찰가를 적었다⁠. 302호⁠, 303호에 이어 세 번째 줄이었다⁠.

사샤는 봉투를 무릎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법정을 나와 복도 의자에 앉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

“⁠실장님⁠, 저 이제 얼마 받아요⁠?⁠”

나윤은 수첩을 꺼냈다⁠. 사샤의 보증금은 1억 1천이었다⁠. 늘솔금고 근저당이 잡힌 2021년 5월 기준 소액임차인 선 1억 3천 아래였다⁠. 배당 때 근저당보다 먼저 받는 돈이 4⁠,300만 원이었다⁠. 낙찰가의 절반을 넘지 않으니 그대로 나왔다⁠.

“⁠4⁠,300만 원은 금고보다 먼저 받아요⁠. 남은 6⁠,700만 원은 사장님한테 받아야 하는 돈으로 남아요⁠.⁠”

“⁠사장님은 호치민 아들 가게에 돈 있죠⁠?⁠”

“⁠모르겠어요⁠.⁠”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요⁠.⁠” 사샤가 휴대전화를 들어 보였다⁠. 타슈켄트의 어머니가 보낸 음성 메시지였다⁠. “⁠한국 사람들은 집을 사는 게 아니라 은행 빚을 산대요⁠. 엄마는 한국에 한 번도 안 와 봤어요⁠.⁠”

복도 끝에서 김 실장이 해든관리 명함을 누군가에게 건네고 있었다⁠. 나윤은 명함을 받는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부평에서 온 중개사였다⁠. 7월부터 주안동 해든건설 사무실을 드나들던 얼굴이었다⁠.

*

오후 두 시⁠, 학원 동기에게서 문자가 왔다⁠.

「⁠청천동 해든하임⁠. 11건 다 부평 늘봄공인⁠. 소장 이름은 모름⁠. 너 조심해⁠.⁠」

늘봄공인⁠. 나윤은 수첩을 거꾸로 넘겼다⁠. 10월 2일 밤 한솔이 들고 온 네 번째 통장⁠. 「⁠부평 늘봄공인 소개⁠」⁠. 2022년 여름 반태식의 통장으로 500만 원이 들어온 여섯 줄 가운데 첫 줄이었다⁠.

나윤은 숭의역에서 수인분당선을 타고 인천시청역에서 인천 1호선으로 갈아탄 뒤 부평구청역에서 내렸다⁠. 해든하임 청천은 시장 뒤 골목 끝에 있었다⁠. 6층⁠, 필로티 주차장⁠, 복도식⁠. 해든빌을 위로 한 층 늘린 모양이었다⁠. 1층 우편함에는 이름 스티커가 새로 붙어 있었다⁠. 스티커의 하얀 색이 아직 누렇게 바래지 않았다⁠.

주차장에 이삿짐 트럭이 서 있었다⁠. 젊은 부부가 침대 매트리스를 같이 들고 있었다⁠. 매트리스 비닐에 「⁠신혼 특가⁠」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아내 되는 사람이 매트리스 귀퉁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나윤은 매트리스 반대편 끝을 받쳤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셋이서 4층까지 올렸다⁠. 4층 복도 창 아래로 가스 계량기가 줄지어 있었다⁠. 숫자가 다 0에 가까웠다⁠.

“⁠감사합니다⁠. 이사 오세요⁠?⁠”

“⁠아니요⁠. 등기부 떼 보셨어요⁠?⁠”

아내가 남편을 보았다⁠. 남편이 웃었다⁠. “⁠중개사님이 다 봐 주셨어요⁠. 근저당 조금 있는데 신축이라 시세가 높아서 괜찮대요⁠. 건물주님이 부평에 크게 사업하신대요⁠.⁠”

“⁠공동담보 목록까지 보셨어요⁠?⁠”

“⁠그게 뭐예요⁠?⁠”

나윤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2024년 4월 6일 오전⁠, 302호 거실에서 예슬이 똑같은 얼굴로 똑같은 말을 물었다⁠. 나윤은 신축이라 괜찮다고 대답했었다⁠. 나윤은 휴대전화를 꺼내 인터넷등기소 화면을 열어 보여 주었다⁠.

“⁠열람은 700원이에요⁠. 근저당 옆에 공동담보라고 나오면 목록을 같이 보세요⁠. 이 건물 하나에만 잡힌 빚인지⁠, 다른 건물까지 묶인 빚인지 나와요⁠. 그리고 전세사기피해지원센터에 전화하시면 계약서 같이 봐 줘요⁠.⁠”

“⁠저기⁠, 혹시 어느 부동산에서 나오셨어요⁠?⁠”

나윤은 패딩 조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명찰의 끈이 손가락에 감겼다⁠.

“⁠어디서도 안 나왔어요⁠. 저도 세입자예요⁠.⁠”

부부는 나윤에게 생수 한 병을 주었다⁠. 나윤은 생수를 받고 계단을 내려왔다⁠. 1층에서 우편함 사진을 찍었다⁠. 스티커 열한 장⁠. 주차장 기둥에 붙은 늘봄공인 전단도 찍었다⁠. 「⁠청천동 신축 전세 · 마지막 2세대⁠」⁠. 마지막이 두 세대 남아 있었다⁠.

*

밤 여덟 시⁠, 해든빌 필로티⁠. 대책위 긴급 모임이었다⁠. 기둥에 옥경희의 큰 글씨가 붙어 있었다⁠. 「⁠38⁠」⁠. 숫자 하나만 쓴 종이였다⁠. 처벌불원서를 쓴 집이 서른여덟이었다⁠. 76세대의 꼭 절반이었다⁠.

“⁠상만이 조건이 대책위 탈퇴야⁠.⁠” 옥경희가 먼저 말했다⁠. 오늘은 큰 글씨가 아니라 육성이었다⁠. “⁠나 탈퇴해야 돼⁠. 그래야 2⁠,400 들어와⁠. 근데 단톡방은 안 나가⁠. 나 나가면 큰 글씨 누가 써⁠.⁠”

“⁠고소 취하하신 분은 같이 못 가요⁠.⁠” 재열이 말했다⁠. 재열의 손에는 대책위 고소장 사본이 들려 있었다⁠. “⁠우리가 낸 고소장에 서른여덟 집 이름이 빠지면⁠, 사장님 변호사가 판사 앞에서 그래요⁠. 피해자 절반이 용서했다고요⁠.⁠”

“⁠니는 LH가 집 사 줬잖아⁠.⁠”

필로티가 조용해졌다⁠. 상만이 뷔페에서 한 말과 같은 말이었다⁠. 옥경희도 알고 있었다⁠. 알고서 말한 얼굴이었다⁠.

“⁠할머니⁠, 저도 1억 1⁠,300 못 받아요⁠.⁠”

“⁠니는 거기 살잖아⁠. 나는 내 집에서 나가야 돼⁠. 나 일흔넷이야⁠. 일흔넷에 어디 가서 전세 얻어⁠. 니가 얻어 줄 거야⁠?⁠”

재열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샤가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사샤는 오늘 집을 잃은 사람이었다⁠. 서른여덟 집 가운데 아홉 집이 아직 결정이 안 난 집이었고⁠, 일곱 집이 LH가 들어오지 않는 집이었다⁠.

나윤은 기둥 뒤에 서 있었다⁠. 대책위 회의에서 빠진 사람의 자리였다⁠. 나윤은 손을 들었다⁠.

“⁠한 가지만 보여 드려도 돼요⁠? 그다음엔 갈게요⁠.⁠”

재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윤은 휴대전화를 재열에게 건넸다⁠. 청천동 우편함 사진⁠, 주차장 전단⁠, 학원 동기의 문자⁠. 재열이 사진을 넘기다 멈췄다⁠. 재열의 엄지가 늘봄공인이라는 글자 위에서 떨렸다⁠.

“⁠부평 청천동에 해든건설 새 빌라가 있어요⁠. 10월에만 전세 열한 건이 들어갔어요⁠. 보증금 1억 5천씩⁠. 계약서는 부평 늘봄공인에서 썼고요⁠. 반 소장님이 2022년에 사장님한테 데려간 사무소예요⁠.⁠” 나윤은 숫자를 천천히 말했다⁠. “⁠열한 건이면 16억 5천이에요⁠. 서른여덟 집의 30퍼센트를 다 더하면 13억 남짓이고요⁠.⁠”

“⁠그러니까⁠.⁠” 옥경희가 달력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내 2⁠,400이 걔네 돈이야⁠?⁠”

“⁠오늘 4층에 신혼부부가 매트리스 들고 이사 왔어요⁠. 비닐에 신혼 특가라고 적혀 있었어요⁠.⁠”

옥경희는 오래 말이 없었다⁠. 매직펜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열었다 닫았다⁠. 사샤가 옆에서 세었다⁠. 일곱 번이었다⁠.

“⁠나 도장 찍었어⁠.⁠” 옥경희가 말했다⁠. “⁠찍은 거 안 물러⁠. 물러 달래도 상만이가 안 물러 줘⁠.⁠”

“⁠네⁠.⁠”

“⁠근데 그 신혼부부 주소 줘⁠. 내가 큰 글씨로 편지 써서 보낼 거야⁠. 등기부 떼라고⁠.⁠”

투표는 손으로 했다⁠. 서른여덟 집 가운데 서른한 집이 대책위를 나갔다⁠. 일곱 집은 도장을 찍고도 남았다⁠. 고소는 남은 사람 이름으로 이어 가기로 했다⁠. 옥경희는 나가겠다는 손을 들었다⁠. 손을 내린 다음 큰 글씨 종이와 매직펜을 재열의 탁자에 올려놓았다⁠.

“⁠이건 두고 가⁠. 내 거 아니고 대책위 거야⁠.⁠”

*

밤 아홉 시 반⁠, B동 옥상⁠. 빨래 건조대 사이로 옥경희가 말리는 고추 채반이 놓여 있었다⁠. 재열은 컵라면을 들고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야간 근무 들어가기 전이었다⁠. 나윤이 올라가자 재열이 컵라면 뚜껑을 덮었다⁠.

“⁠드세요⁠. 저 그냥 바람 쐬러 왔어요⁠.⁠”

“⁠불어요⁠.⁠” 재열이 다시 뚜껑을 열었다⁠. “⁠예슬이 오늘 봉투 돌려줬어요⁠. 김 실장한테⁠. 안 쓰겠대요⁠.⁠”

나윤은 난간을 잡았다⁠. 녹슨 쇠가 손바닥에 차가웠다⁠.

“⁠제가 뭐라고 해서요⁠?⁠”

“⁠실장님이 뷔페에서 그 종이 사장님 형량 줄이는 종이라고 한 날⁠, 예슬이가 밤새 계산했어요⁠. 시험관 몇 번⁠, 4⁠,800이면 아홉 번⁠. 그러고 나서 아홉 번을 다른 사람 1억 6천으로 하는 거냐고 저한테 물었어요⁠. 제가 대답을 못 했어요⁠. 예슬이가 혼자 대답했어요⁠.⁠”

재열은 국물을 마셨다⁠. 숭의 로터리 쪽 불빛이 컵라면 김에 흐려졌다⁠.

“⁠실장님⁠, 왜 청천동까지 갔어요⁠?⁠”

“⁠제가 쓴 계약서랑 똑같은 계약서가 거기서 쓰이고 있어서요⁠. 특약 문구까지 똑같을 거예요⁠. 제가 처음 만든 문구예요⁠. 「⁠임대인은 잔금일 다음 날까지 근저당 일부를 감액한다⁠」⁠. 사장님이 좋다고⁠, 다른 사무소에도 쓰라고 했어요⁠.⁠”

재열이 젓가락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먹었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윤도 기다리지 않았다⁠.

계단 문이 덜컹 열렸다⁠. 사샤가 숨을 몰아쉬며 올라왔다⁠. 휴대전화 화면을 앞으로 내밀었다⁠.

“⁠실장님⁠, 위원장님⁠. 이거요⁠. 공장에 베트남 동료가 있잖아요⁠. 제가 사장님 아들 가게 계정 보여 줬어요⁠. 재미로요⁠. 근데 재미가 아니에요⁠.⁠”

화면에 서울갈비 계정의 새 글이 떠 있었다⁠. 갈비 사진 아래로 베트남어 몇 줄과 한국어 한 줄이 있었다⁠.

「⁠1주년 감사 행사 · 다음 주 아버지 오심 · 손님들께 직접 인사드립니다⁠」

“⁠동료가 그러는데요⁠, 베트남어로는 아버지가 한국에서 오래 고생하셨다고 써 있대요⁠.⁠” 사샤가 머리를 긁었다⁠. “⁠아이고⁠, 고생은 우리가 거시기 했는데⁠.⁠”

나윤은 탁주엽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네 번 가고 탁이 받았다⁠. 입 안에 무언가가 들어 있는 목소리였다⁠.

“⁠쫄면이에요⁠. 말씀하세요⁠.⁠”

“⁠도상만 출국금지 지금 돼 있죠⁠?⁠”

“⁠돼 있죠⁠. 기간이 다음 주 수요일까지라 연장 신청 들어갔고요⁠. 법무부에서 결정 나와야 해요⁠. 왜요⁠?⁠”

나윤은 서울갈비 글을 캡처해 보냈다⁠. 전화기 너머에서 젓가락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다음 주 수요일이 11일이죠⁠.⁠”

“⁠11일이요⁠. 연장은 보통 그 전에 나요⁠. 보통은요⁠.⁠”

전화가 끊겼다⁠. 사샤는 고추 채반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재열은 빈 컵라면 용기를 손에 쥔 채 서쪽 하늘을 보았다⁠. 인천공항으로 내려가는 비행기 불빛이 하나 깜빡이며 지나갔다⁠. 나윤은 수첩에 달력을 그렸다⁠. 11월 11일 수요일⁠, 12일 목요일⁠, 13일 금요일⁠. 13일은 최소보장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나윤은 11과 13 가운데에 있는 12에 동그라미를 쳤다⁠.

출처 주택임대차보호법 시행령 · 2021년 5월 11일 시행 — 과밀억제권역 소액임차인 보증금 1억 3천만 원 이하⁠, 우선변제 4⁠,300만 원⁠, 주택가액의 2분의 1 범위 출입국관리법 제4조·제4조의2 — 범죄 수사를 위한 출국금지는 1개월 이내⁠, 기간 연장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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