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54자)

30퍼센트

4만 번째 전세사기 피해자 · 금나율

2026년 10월 27일 화요일 저녁 일곱 시⁠, 주안동 해오름뷔페 연회장 입구 위로 현수막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해든빌 가족 여러분 감사합니다 · 해든건설 임직원 일동⁠」⁠. 가족이라는 글자가 제일 컸다⁠.

연회장 안에는 원탁이 열두 개 있었다⁠. 원탁마다 흰 식탁보 위에 서류 봉투가 하나씩 놓였다⁠. 봉투 안에 종이 두 장이 들어 있었다⁠. 「⁠합의서⁠」와 「⁠처벌불원서⁠」⁠. 벽을 따라 뷔페 음식이 길게 차려져 있었다⁠. 초밥⁠, 갈비찜⁠, 잡채⁠, 떡⁠, 그리고 맨 끝에 육회⁠.

해든빌 사람은 마흔 명쯤 왔다⁠. 대책위 사람도 있었고⁠, 대책위에 한 번도 안 나온 사람도 있었다⁠. 나윤은 맨 구석 원탁에 혼자 앉았다⁠. 305호 세입자로 온 것이었다⁠. 대책위 회의에서 빠지라는 말은 들었어도⁠, 세입자로 오지 말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옥경희는 접시 두 개를 들고 줄 끝에 붙었다⁠. 하나에는 음식을 담고⁠, 하나에는 떡을 담았다⁠. 떡 접시는 가방 안의 지퍼백으로 옮겨졌다⁠.

“⁠이거는 증거야⁠. 건물주가 떡 줬다는 증거⁠.⁠”

사샤는 뷔페 한쪽의 쌀국수 코너 앞에서 멈췄다⁠. 머리띠를 한 요리사가 국수를 말아 주었다⁠. 사샤가 국수를 받아 들고 요리사에게 물었다⁠.

“⁠이거 사장님 아들 가게에서 왔어요⁠? 호치민이요⁠?⁠”

요리사는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사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국수를 들고 왔다⁠. “⁠아이고⁠, 국물이 거시기 달아요⁠. 사장님 말처럼요⁠.⁠”

육회는 칠 분 만에 비었다⁠. 빈 접시 앞에 줄이 남아 있었다⁠.

*

일곱 시 반⁠, 도상만이 마이크를 잡았다⁠. 감색 정장에 넥타이⁠, 가슴에 흰 손수건⁠. 얼굴은 영장 기각 날 사진처럼 고개를 조금 숙인 각도였다⁠.

“⁠해든빌 가족 여러분⁠, 먼저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 부평 사업이 늦어지면서 여러분께 걱정을 끼쳤습니다⁠. 오늘은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먼저 하려고 모셨습니다⁠.⁠”

상만은 조건을 천천히 말했다⁠. 합의서와 처벌불원서에 서명하면 11월 10일까지 보증금의 30퍼센트를 계좌로 보낸다⁠. 나머지 70퍼센트는 부평 사업이 정리되는 대로 보낸다⁠. 대신 고소를 취하하고 대책위에서 나온다⁠.

“⁠1억 6천이면 4⁠,800만 원입니다⁠. 열흘 안에 들어갑니다⁠. 경매 기다리시면 몇 년 걸립니다⁠.⁠”

연회장이 웅성거렸다⁠. 원탁마다 봉투를 여는 소리가 났다⁠. 나윤은 봉투를 열지 않았다⁠. 처벌불원서가 무엇인지 알았다⁠. 사기는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다고 처벌이 멈추는 죄가 아니었다⁠. 대신 판사는 형을 정할 때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종이를 본다⁠. 종이가 많을수록 형이 줄었다⁠. 상만이 사고 싶은 것은 해든빌 사람들의 서명이 아니라 판사 앞에 쌓을 종이의 두께였다⁠.

연회장 문이 열렸다⁠. 재열이 들어왔다⁠. 야간 근무를 빼고 온 차림이었다⁠. 후드 위에 검은 점퍼⁠,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뒤로 대책위 사람 열 명이 따라 들어왔다⁠. 예슬이 맨 끝이었다⁠.

재열은 원탁 사이를 걸어 앞으로 나갔다⁠. 상만과 두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멈췄다⁠. 처음으로 둘이 같은 자리에서 마주 보았다⁠.

“⁠30퍼센트 어디서 나요⁠?⁠”

“⁠내 돈이지⁠.⁠” 상만이 웃었다⁠. 눈가 주름이 먼저 웃었다⁠. “⁠석재열 씨 맞지⁠? 위원장님⁠. 얼굴은 사진으로 먼저 봤어⁠. 단체 사진 잘 나왔더라⁠.⁠”

“⁠영장 기각되고 보름 만에 생긴 돈이요⁠? 412채 다 경매 들어가는데 어디서 돈이 생겨요⁠?⁠”

“⁠사업하는 사람은 돈이 생길 데가 있어⁠.⁠”

“⁠그 데가 또 세입자예요⁠?⁠”

상만의 웃음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이어졌다⁠. 상만은 재열을 보지 않고 연회장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돌렸다⁠.

“⁠여러분⁠, 위원장님 말씀 들으셨죠⁠. 위원장님은 LH가 집을 사 줬어요⁠. 위원장님은 기다릴 수 있어요⁠. 여러분 중에 LH가 안 사 주는 집⁠, 결정이 아직 안 난 집⁠, 몇 년 기다릴 수 없는 집 있으시죠⁠. 저는 그분들께 지금 드리겠다는 겁니다⁠.⁠”

재열의 턱이 굳었다⁠. 사샤가 쌀국수 그릇을 내려놓았다⁠. 상만은 마이크를 든 손을 들어 연회장 구석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기 계신 분⁠. 다들 아시죠⁠. 기사 보셨을 거예요⁠. 여러분 계약서를 쓴 사람입니다⁠. 계나윤 씨⁠. 저분은 50만 원 받았어요⁠. 저는 지금 여러분께 4⁠,800만 원을 드리려는 겁니다⁠. 누구 말을 믿으시겠어요⁠?⁠”

마흔 개의 얼굴이 구석으로 돌아왔다⁠. 필로티에서 처음 이름이 불리던 날과 같은 모양이었다⁠. 다른 것은 이번에는 가리키는 손이 상만의 손이라는 것뿐이었다⁠.

나윤은 일어났다⁠. 마이크가 없었다⁠. 목소리를 크게 냈다⁠.

“⁠맞아요⁠. 50만 원 받았어요⁠. 사장님이 주셨어요⁠. 2024년 4월 6일 오후 세 시 십이 분에 문자 보내시고 바로 보내셨어요⁠. 그 문자 지금 경찰에 있어요⁠.⁠”

상만의 손가락이 마이크 위에서 멈췄다⁠.

“⁠처벌불원서는 사장님 형량을 줄이는 종이예요⁠. 사기는 피해자가 처벌 원하지 않는다고 재판이 멈추지 않아요⁠. 판사가 형을 정할 때 이 종이를 봐요⁠. 30퍼센트는 그 종이 사시는 돈이에요⁠. 그리고 그 30퍼센트가 어디서 나오는지 사장님은 지금 말씀 안 하셨어요⁠.⁠”

“⁠계 실장⁠.⁠” 상만이 마이크를 내렸다⁠. 마이크 없이도 목소리는 다정했다⁠. “⁠계 실장은 지금 피의자야⁠. 피의자 말을 누가 들어⁠.⁠”

“⁠피해자이기도 해요⁠. 305호요⁠.⁠”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육회 접시 앞의 줄이 흩어졌다⁠. 상만은 다시 마이크를 들어 식사 맛있게 하시라고⁠, 서명은 천천히 하셔도 된다고 말하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김 실장이 원탁마다 볼펜을 돌렸다⁠. 볼펜에 「⁠해든건설⁠」이라고 박혀 있었다⁠.

나윤이 연회장을 나가려는데 상만이 출입문 옆에서 길을 막았다⁠. 손에 이쑤시개를 들고 있었다⁠. 갈비찜을 먹은 사람의 입 냄새가 났다⁠.

“⁠계 실장⁠, 아까 말 잘하더라⁠. 국회에서도 잘했다며⁠. 기사 봤어⁠. 「⁠리베이트 받은 중개보조원의 고백⁠」⁠. 제목 좋더라⁠.⁠”

“⁠사장님 이름은 안 나왔죠⁠.⁠”

“⁠안 나왔지⁠. 건물주 A씨⁠. 나는 A야⁠.⁠” 상만이 이쑤시개를 입에 물었다⁠. “⁠A는 412채고⁠, 계 실장은 실명이고⁠. 세상이 공평하지⁠?⁠”

“⁠사장님⁠.⁠”

“⁠응⁠.⁠”

“⁠30퍼센트⁠, 부평 청천동 새 빌라 보증금이에요⁠?⁠”

상만이 이쑤시개를 뺐다⁠. 눈가 주름이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계 실장은 일을 너무 꼼꼼하게 해⁠. 내가 그랬지⁠. 장점인데 단점이라고⁠.⁠”

상만은 길을 비켜 주었다⁠. 나윤이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등 뒤에서 상만이 김 실장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볼펜 모자라면 더 갖다 놔⁠.

*

밤 아홉 시⁠, 주안역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나윤은 전화를 걸었다⁠. 공인중개사 학원 동기였다⁠. 학원을 같이 다니다 먼저 시험에 붙어 부평 청천동에서 사무소를 연 친구였다⁠.

“⁠나윤이⁠? 기사 봤어⁠. 너 괜찮아⁠?⁠”

“⁠괜찮아⁠. 하나만 물어볼게⁠. 요즘 청천동에 해든건설 신축 빌라 전세 나와⁠?⁠”

“⁠해든⁠? 나와⁠. 이번 달에 엄청 나와⁠. 우리 사무소에도 문의가 왔어⁠. 근데 우리는 안 해⁠. 공동담보 근저당이 너무 커⁠.⁠” 친구가 목소리를 낮췄다⁠. “⁠다른 데서는 해⁠. 이번 달에만 열한 건 들어갔대⁠. 보증금 1억 5천짜리들⁠. 리베이트 R5 준다고 단톡방에 돌았어⁠. 너 그 R 알지⁠?⁠”

“⁠알아⁠.⁠”

“⁠그거 왜 물어⁠?⁠”

나윤은 정류장 광고판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열한 건에 1억 5천이면 16억 5천이었다⁠. 해든빌 76세대의 30퍼센트를 대충 더하면 비슷한 숫자가 나왔다⁠. 숫자 하나를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1억 5천⁠. 8월 7일에 303호로 들어올 뻔했던 간호사의 보증금과 같은 숫자였다⁠.

“⁠계약서 쓴 사무소 이름 알 수 있어⁠?⁠”

“⁠알아볼게⁠. 근데 나윤아⁠, 너 이번엔 조심해⁠.⁠”

버스가 왔다⁠. 나윤은 버스를 보냈다⁠. 다음 버스를 기다리며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 「⁠청천동 해든 신축 · 10월 11건 · 1억 5천 · R5⁠」⁠.

*

밤 열 시⁠, 나윤은 3층 복도에서 예슬과 재열의 목소리를 들었다⁠. 302호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둘은 현관에 선 채로 말하고 있었다⁠. 나윤은 305호로 가려다 계단참에서 멈췄다⁠. 지나가려면 302호 앞을 지나야 했다⁠.

“⁠4⁠,800이야⁠. 열흘 안에⁠.⁠” 예슬이 말했다⁠. “⁠시험관 한 번에 오백이야⁠. 나 서른이야⁠. 서른하나 되면 확률 떨어져⁠. 의사가 그랬어⁠.⁠”

“⁠그거 쓰면 저 사람 형 줄어⁠.⁠”

“⁠형 줄든 말든 내 나이는 안 줄어⁠.⁠”

“⁠예슬아⁠.⁠”

“⁠LH가 집 사 줬잖아⁠. 우리는 거기 살 수 있어⁠. 그럼 남은 1억 1⁠,300은 어차피 없는 돈이야⁠. 없는 돈 중에 4⁠,800이라도 오면⁠.⁠” 예슬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 돈 어디서 나오는지 몰라도 돼⁠. 나 그거 몰라도 돼⁠.⁠”

“⁠나는 알아야 돼⁠.⁠” 재열의 목소리는 낮았다⁠. “⁠4⁠,800이 또 누구 1억 6천이면⁠, 우리가 그 사람 침대 가져오는 거야⁠.⁠”

조용해졌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예슬이 현관에 주저앉는 소리가 났다⁠. 신발장에 등이 닿는 소리였다⁠.

나윤은 계단참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둘 사이에 대 줄 말이 없었다⁠. 둘 다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침대에서요⁠.⁠” 예슬에게 그렇게 말한 사람이 나윤이었다⁠.

302호 문이 열리고 재열이 나왔다⁠. 계단참의 나윤을 보았다⁠. 놀라지 않았다⁠. 문이 얇다는 것을 서로 알았다⁠.

“⁠들었죠⁠.⁠”

“⁠네⁠.⁠”

“⁠실장님은 써요⁠?⁠”

“⁠안 써요⁠.⁠”

“⁠왜요⁠? 실장님은 9⁠,500 중에 2⁠,850이잖아요⁠.⁠”

“⁠제가 쓰면 사장님이 판사 앞에서 그래요⁠. 계약서 쓴 사람도 저를 용서했다고요⁠.⁠”

재열은 대답하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담배를 사러 가는 걸음이었다⁠.

*

밤 열 시 반⁠, 필로티 주차장에 접이식 탁자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탁자 위에 서류 봉투가 쌓였고⁠, 탁자 뒤에 김 실장이 앉아 있었다⁠. 형광등 아래 종이에 「⁠합의서 현장 접수⁠」라고 적혀 있었다⁠. 대책위가 서류 공장을 차렸던 기둥 앞이었다⁠.

나윤이 내려갔을 때 탁자 앞에 옥경희가 서 있었다⁠. 잠옷 위에 카디건을 걸쳤고⁠, 손에 인감도장을 쥐고 있었다⁠. 도장 뚜껑은 이미 열려 있었다⁠.

“⁠할머니⁠.⁠”

“⁠실장 왔네⁠.⁠” 옥경희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말리지 마⁠. 말리면 나 큰 글씨로 실장 욕 써⁠.⁠”

“⁠안 말려요⁠.⁠”

“⁠왜 안 말려⁠.⁠”

“⁠할머니 돈이에요⁠. 할머니가 정하시는 거예요⁠.⁠”

옥경희는 그제야 나윤을 보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주름이 깊었다⁠. 필로티에서 달력 뒷면에 남의 보증금을 받아 적던 손이 도장을 쥐고 떨렸다⁠.

“⁠우리 아들 장가 밑천이야⁠. 8천 중에 2⁠,400⁠. 우리 아들 마흔둘이야⁠. 장가 못 가⁠. 2⁠,400이면 장가 비슷한 거라도 가⁠.⁠” 옥경희가 처벌불원서를 끌어당겼다⁠. “⁠50만 원 받은 사람은 이런 거 계산 안 해 봤지⁠?⁠”

“⁠해 봤어요⁠. 매일요⁠.⁠”

옥경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인주에 도장을 꾹 눌렀다⁠. 처벌불원서 맨 아래 칸에 붉은 도장이 찍혔다⁠. 해든빌 76세대 가운데 첫 번째였다⁠. 김 실장이 종이를 받아 봉투에 넣으며 나윤을 보고 웃었다⁠.

옥경희는 도장을 닫고 계단으로 올라가다 한 번 멈췄다⁠. 카디건 주머니에서 지퍼백을 꺼냈다⁠. 뷔페에서 담아 온 떡이었다⁠. 옥경희는 지퍼백을 나윤의 손에 쥐여 주었다⁠.

“⁠증거야⁠. 실장이 갖고 있어⁠.⁠”

1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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