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01자)

적극 검토하겠습니다

4만 번째 전세사기 피해자 · 금나율

2026년 10월 20일 화요일 오후 한 시 오십 분⁠,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는 의자가 마흔 개 놓여 있었다⁠. 앞줄 탁자에 이름표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국토교통위원회 ○○○ 의원실⁠」 「⁠국토교통부 전세사기피해지원 담당⁠」 「⁠한국토지주택공사⁠」⁠. 뒤쪽 의자에는 전국에서 온 피해자 대책위 사람들이 앉았다⁠. 수원⁠, 대전⁠, 부산⁠, 인천⁠. 사람들은 저마다 서류 봉투를 무릎에 올려 두었다⁠. 봉투 두께가 다 비슷했다⁠.

옥경희는 피켓을 접어 가방에 넣어 왔다⁠. 회의실에서는 피켓을 들 수 없다는 말을 듣고 가방 지퍼만 반쯤 열어 두었다⁠. 「⁠4만⁠」의 「⁠4⁠」가 지퍼 틈으로 보였다⁠.

“⁠보이기만 하면 돼⁠. 안 든 거야⁠.⁠”

사회는 의원실 보좌관이 맡았다⁠. 마흔 살쯤⁠, 감색 정장에 안경을 쓴 남자였다⁠. 보좌관은 첫인사를 하고 나서 말했다⁠.

“⁠오늘 주신 말씀 하나하나 적극 검토하겠습니다⁠.⁠”

옥경희가 오른손 엄지를 접었다⁠. 하나⁠.

간담회가 시작되기 전⁠, 보좌관은 발언자들을 회의실 옆 대기실로 불렀다⁠. 한 사람에 삼 분⁠, 넘으면 쪽지를 넣겠다고 했다⁠. 쪽지라는 말에 사샤가 손을 들었다⁠.

“⁠쪽지에 뭐라고 써요⁠?⁠”

“⁠「⁠마무리 부탁드립니다⁠」요⁠.⁠”

“⁠아이고⁠, 공장 반장님은 그냥 「⁠야⁠」 하는데⁠.⁠”

대기실에 웃음이 났다⁠. 보좌관도 웃었다⁠. 웃고 나서 보좌관은 명단을 보며 나윤에게 다가왔다⁠. 목소리를 낮췄다⁠.

“⁠계나윤 님⁠, 확인할 게 있어서요⁠. 지금 수사 중이시죠⁠? 피의자로요⁠. 의원실 간담회에 수사 중인 분이 발언하시면 의원님께 부담이 될 수 있어서요⁠. 서면으로 내 주시면 자료집에 넣어 드리겠습니다⁠.⁠”

“⁠서면으로 내면 누가 읽어요⁠?⁠”

“⁠자료집은 의원님과 국토부에 다 갑니다⁠.⁠”

“⁠자료집은 두꺼워요⁠. 저도 계약서 이백 장을 뽑았지만⁠, 손님들은 맨 위 한 장만 읽었어요⁠.⁠” 나윤이 명단의 괄호를 가리켰다⁠. “⁠피의자가 부담되시면 피해자로 말할게요⁠. 305호 결정 통지서도 가져왔어요⁠. 둘 다 맞는 말이에요⁠.⁠”

보좌관은 통지서를 받아 보았다⁠. 「⁠제⁠」 다음의 번호를 한참 보았다⁠. 2만이나 3만이 아닌⁠, 4만 다음의 숫자였다⁠.

“⁠삼 분입니다⁠.⁠”

“⁠이 분 오십 초로 할게요⁠.⁠”

보좌관은 통지서를 돌려주고 명단에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동그라미는 이름 옆의 괄호를 감쌌다⁠.

*

재열은 대책위 발언 순서 세 번째였다⁠. 마이크 앞에 앉자 후드를 벗고 점퍼 지퍼를 내렸다⁠. 회의실이 더워서였다⁠. 재열은 원고를 보지 않았다⁠.

“⁠인천 미추홀구 해든빌 B동 302호 석재열입니다⁠. 보증금 1억 6천이요⁠. 9월 15일에 LH가 우리 집을 1억 2⁠,300에 샀어요⁠. 감정가하고 차이가 4⁠,700이래요⁠. 그걸로 임대료를 빼 준대요⁠. 계속 살 수 있어요⁠. 고맙습니다⁠. 진짜로요⁠.⁠”

재열이 한 번 숨을 쉬었다⁠.

“⁠그런데 1억 6천에서 4⁠,700 빼면 1억 1⁠,300이 남아요⁠. 그 돈은 어디로 가요⁠?⁠”

국토부 사무관이 마이크를 당겼다⁠. 삼십 대 후반⁠, 하얀 셔츠 소매 끝이 까맣게 닳아 있었다⁠. 매일 서류를 넘기는 소매였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4월 23일 국회를 통과한 개정 특별법에 따라 11월 13일부터 최소보장제가 시행됩니다⁠. 경매나 공매가 끝난 뒤 피해자분이 회수한 금액이 보증금의 3분의 1보다 적으면⁠, 그 차액을 최소지원금으로 드립니다⁠. LH가 신청을 받고 지급합니다⁠.⁠”

“⁠3분의 1이면 우리 집은 5⁠,333만이에요⁠. 경매차익 4⁠,700을 빼면 633만 원 받는 거죠⁠?⁠”

“⁠계산은 그렇게 됩니다⁠.⁠”

“⁠나머지 1억 667만 원은요⁠?⁠”

“⁠최소보장제는 바닥을 정한 겁니다⁠. 어떤 피해자분도 3분의 1 아래로 내려가지 않게요⁠.⁠”

“⁠바닥이요⁠.⁠” 재열이 마이크를 쥐었다⁠. “⁠우리는 바닥에 내려앉은 게 아니에요⁠. 바닥 밑에 있어요⁠. 바닥을 정했으면 거기까지 사다리라도 놔 줘야죠⁠. 피해자들은 반을 달라고 했잖아요⁠.⁠”

“⁠말씀하신 2분의 1 요구는 법안 심사 때도 나왔고⁠, 국회에서 논의한 끝에 3분의 1로⁠.⁠”

“⁠그럼 여기서 다시 논의해요⁠. 여기 국회잖아요⁠.⁠”

보좌관이 끼어들었다⁠. “⁠석재열 위원장님 말씀⁠, 적극 검토하겠습니다⁠.⁠”

옥경희가 검지를 접었다⁠. 둘⁠.

*

사샤는 다섯 번째였다⁠. 외국인등록증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처음에는 목소리가 작았다⁠. 보좌관이 마이크를 가까이 대 달라고 했고⁠, 사샤는 마이크에 입을 너무 가까이 대서 첫마디가 웅 울렸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해든빌 C동 204호 박 알렉산드르입니다⁠. 사샤라고 불러 주세요⁠. 고려인이에요⁠. 할아버지가 연해주 사람이에요⁠.⁠”

사샤는 9월 7일 구청 강당에서 들은 말을 그대로 옮겼다⁠. 외국 국적이면 LH가 매입에 참여할 수 없다⁠, 기금법에 지원 대상이 국민으로 한정돼 있다⁠. 11월 3일에 집이 경매에 나간다고 했다⁠.

“⁠같은 건물⁠, 같은 근저당⁠, 같은 경매예요⁠. 옆 동 친구 집은 LH가 사요⁠. 우리 집은 몰라요⁠. 저는 피해자 결정은 받았어요⁠. 결정은 받았는데 결정 다음이 없어요⁠.⁠”

LH 본사 직원이 마이크를 당겼다⁠. 기금법 규정상 어렵다고⁠, 법이 바뀌면 따르겠다고 했다⁠. 국토부 사무관은 외국인 피해자 지원 방안을 관계 부처와 협의하고 있다고 했다⁠. 보좌관이 말했다⁠.

“⁠사샤 님 말씀⁠, 적극 검토하겠습니다⁠.⁠”

옥경희가 가운뎃손가락을 접으려다 멈췄다⁠. 가운뎃손가락만 접기가 어려웠다⁠. 옥경희는 손을 펼쳤다가 다시 엄지부터 접었다⁠. 사샤가 그걸 보고 마이크 앞에서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떨었다⁠.

*

나윤은 여덟 번째였다⁠. 발언자 명단에는 「⁠전직 중개보조원 계나윤(⁠해든빌 B동 305호 피해자⁠)⁠」이라고 적혀 있었다⁠. 재열이 명단을 넘기다 괄호를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렸다⁠. 피해자라는 말을 넣자고 한 사람은 예슬이었다⁠.

나윤은 원고를 썼다가 오늘 아침 버렸다⁠. 원고를 들면 원고 뒤에 숨는다는 것을 필로티에서 배웠다⁠.

“⁠2022년부터 2024년까지 인천 미추홀구의 중개사무소에서 중개보조원으로 일했습니다⁠. 한 건물주의 집 계약서를 이백 장쯤 뽑았습니다⁠. 계약서는 제가 뽑고⁠, 설명과 도장은 소장님이 했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했다⁠. 뒤쪽에서 누가 볼펜 뚜껑을 닫는 소리가 났다⁠.

“⁠손님들은 저를 실장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중개보조원이라고 먼저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법이 바뀌어서 중개보조원은 손님한테 자기가 보조원이라는 것을 먼저 알려야 합니다⁠. 안 알리면 과태료가 500만 원입니다⁠. 제가 일할 때도 그 법이 있었으면 손님 몇 분은 저한테 한 번 더 물어보셨을 겁니다⁠.⁠”

나윤은 탁자 위의 손을 폈다⁠.

“⁠계약 때 확인·설명서에는 근저당이 한 줄로 적힙니다⁠. 그 근저당이 집 하나가 아니라 건물 네 동 76세대에 같이 잡혀 있다는 건⁠, 공동담보 목록을 따로 떼어 봐야 압니다⁠. 저는 알았습니다⁠. 손님한테 목록을 보여 드리지 않았습니다⁠. 건물주가 근저당을 석 달 안에 지우겠다는 각서를 써 줄 때 저는 입회인 칸에 서명했습니다⁠. 그 각서는 법적으로 아무 힘이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국토부 사무관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고 메모를 시작했다⁠.

“⁠건물주는 계약 하나가 끝날 때마다 중개사무소에 따로 돈을 보냈습니다⁠. 문자에 R과 숫자를 붙였습니다⁠. R3는 300만 원입니다⁠. 2024년 4월 302호 계약 때 R3가 사무소로 갔고⁠, 저는 그중 50만 원을 받았습니다⁠. 302호는 아까 말씀하신 석재열 위원장님 집입니다⁠.⁠”

뒤쪽 의자가 삐걱거렸다⁠. 부산에서 온 대책위 사람 하나가 몸을 돌려 재열을 보았다⁠. 재열은 앞만 보았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하나입니다⁠. 확인·설명서에 공동담보 목록을 붙이게 해 주십시오⁠. 한 장만 더 붙이면 됩니다⁠. 그 한 장을 제가 붙이지 않았습니다⁠.⁠”

나윤이 마이크에서 몸을 뗐다⁠. 회의실에 박수가 나지 않았다⁠. 박수를 칠 말이 아니었다⁠. 국토부 사무관의 볼펜이 종이 위에서 계속 움직였다⁠.

보좌관이 마이크를 당겼다⁠. “⁠계나윤 님 말씀⁠.⁠”

옥경희가 보좌관을 쳐다보았다⁠. 엄지부터 다시 접을 준비를 했다⁠.

“⁠구체적인 제도 개선안이라 의원님께 그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옥경희가 손을 내렸다⁠. 접지 않았다⁠. 이날 보좌관이 적극 검토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이 대답 한 번뿐이었다⁠. 간담회가 끝날 때까지 옥경희가 접은 손가락은 일곱 개였다⁠.

*

회의실 밖 복도에서 기자 하나가 나윤을 따라왔다⁠. 이십 대 후반⁠, 목에 출입증을 걸고 녹음기를 쥐고 있었다⁠.

“⁠계나윤 씨⁠, 잠깐 인터뷰 되실까요⁠? 리베이트 받은 중개보조원이 직접 국회에서 증언한 건 처음 같아서요⁠.⁠”

재열이 나윤 앞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몸을 반쯤 틀어 나윤을 가렸다⁠.

“⁠이름은 빼 주세요⁠. 이 사람 수사 중이에요⁠.⁠”

“⁠재열 씨⁠.⁠”

“⁠실장님은 가만있어요⁠. 이름 나가면 동네에서 못 살아요⁠.⁠”

“⁠이름 넣으세요⁠.⁠” 나윤이 재열의 어깨 너머로 기자에게 말했다⁠. “⁠50만 원도 넣으세요⁠. 숫자 빼면 제가 한 말이 아니에요⁠.⁠”

재열이 돌아보았다⁠. 화난 얼굴이 아니었다⁠. 나윤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재열은 한참 나윤을 보다가 옆으로 비켰다⁠.

“⁠그럼 302호도 넣어요⁠. 우리 집이 그 집이라고요⁠. 1억 6천이라고요⁠.⁠”

기자가 녹음기를 들었다⁠. 나윤과 재열은 나란히 서서 묻는 말에 대답했다⁠. 복도 창으로 국회 잔디밭이 보였다⁠. 잔디밭 끝에서 사샤가 엄마와 영상통화를 하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

인천으로 돌아오는 광역버스 안에서 단톡방이 울렸다⁠. 대책위 사람 하나가 받은 메시지를 옮겨 왔다⁠. 보낸 사람은 도상만이었다⁠.

「⁠해든빌 세입자 여러분께⁠. 그동안 걱정 끼쳐 죄송합니다⁠. 처벌불원서를 써 주시는 분께는 보증금의 30%를 먼저 돌려드리겠습니다⁠. 나머지 70%는 부평 사업이 정리되는 대로 드립니다⁠. 10월 27일 화요일 저녁 일곱 시⁠, 주안동 해오름뷔페 연회장⁠. 식사 준비했습니다⁠.⁠」

버스 안이 조용해졌다⁠. 해든빌 사람들의 휴대전화가 거의 동시에 울렸기 때문이었다⁠. 옥경희가 글씨 크기를 키워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크게 읽으니 「⁠30%⁠」가 화면을 꽉 채웠다⁠.

“⁠뷔페래⁠.⁠” 옥경희가 말했다⁠. “⁠육회 나오려나⁠.⁠”

아무도 웃지 않았다⁠. 웃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몇이 화면의 30%를 손가락으로 오래 눌렀다⁠. 재열은 창밖을 보았다⁠. 버스는 경인고속도로로 들어갔고⁠, 창밖으로 빌라 지붕들이 줄지어 지나갔다⁠.

출처 파이낸셜뉴스 · 2026년 10월 6일 · 「⁠전세사기 피해자 보증금 3분의 1 최소 보장⁠…11월 13일 시행⁠」 — 회수액이 보증금 3분의 1보다 적으면 차액 지급⁠, LH가 신청·지급 경향신문 · 2026년 4월 24일 · 「⁠‘⁠보증금은 돈 아니라 집⁠’ 법 한계를 넘은 피해자들⁠…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 통과⁠」 — 피해자들이 요구한 2분의 1이 아닌 3분의 1 아주경제 · 2024년 7월 10일 · 「⁠경기도⁠, ‘⁠공인중개사법 시행령·시행규칙⁠’ 일부 개정 시행⁠」 — 중개보조원 신분 고지 의무 뉴스서울 · 양천구 「⁠중개보조원 명찰제⁠」 — 고지하지 않으면 중개보조원과 개업 공인중개사에게 각각 과태료 500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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