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132자) · 가람 · 10월 29일
열두 집
다섯 번째 목요일 · 정이한
만 19세 이상 이용가
오정민이 돌린 종이는 동의서가 아니었다. 첫 집 대문 앞에서 이장 집 사람들이 버리고 간 한 장을 주워 읽고서야 알았다. A4 한 장에 추진위 로고가 찍혀 있었고, 제목은 「사실 확인서」였다. 본인은 2026년 10월 22일 목요일 오후 두 시 이십 분, 서진리 정류장에서 배해든 씨가 버스에 오르는 것을 보았음을 확인합니다. 그날은 비가 왔습니다. 그 아래 서명란이 있었고, 서명란 옆 괄호 안에 작은 글씨로 「본 확인서는 서진항 국가어항 지정 보상 절차에 첨부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열세 해 전에는 입으로 외우게 했다. 이번에는 종이에 이름을 쓰게 했다.
해든의 공책을 펼쳐 들고 나는 골목 첫 집부터 다시 돌았다. 오정민이 한 시간 앞서 지나간 길이었다. 오후 두 시의 해가 머리 위에서 조금 기울었고, 골목 시멘트 바닥에 말려 놓은 멸치에서 짠 냄새가 올라왔다. 집집마다 담벼락 아래 스티로폼 부표가 쌓여 있었는데, 오래된 것은 햇볕에 삭아서 손으로 누르면 하얀 알갱이가 부스스 떨어졌다. 어느 집 개가 나를 따라 세 집을 걸어오다가 돌아갔다. 돌아가면서 한 번 뒤를 돌아봤는데, 나는 그 개가 나를 따라온 게 아니라 내 주머니의 귤 냄새를 따라왔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
서진슈퍼 유리문에는 「잠시 외출」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는데, 안에서 한말순이 계산대에 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문을 두드리자 그녀는 종이를 떼고 문을 열었다.
“추모회 끝나고 오신다고 하셨는데요.”
“끝나고 오면 늦을 것 같아서요.”
한말순은 한숨을 쉬고 계산대 밑에서 작은 손금고를 꺼냈다. 열쇠가 아니라 번호로 여는 것이었고, 그녀는 번호를 돌리는 동안 몸으로 금고를 가렸다. 금고 안에 반으로 접힌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외상 공책에서 뜯어낸 한 장이었다. 뜯긴 자리의 종이 섬유가 보풀처럼 일어나 있었다.
「2013년 11월 13일 수요일, 회관 앞 — 소주 세 박스, 맥주 두 박스, 마른오징어 열 마리, 새우깡 여섯. 어촌계장 오태식 앞으로.」
“다음 날 그 양반이 와서 이 장을 뜯어 가라고 했어요. 수요일 장부가 있으면 안 된다고요. 그래서 뜯기는 뜯었는데, 버리라고 했는데 안 버렸어요.” 한말순이 종이 모서리를 손톱으로 폈다. “그래도 외상은 외상이잖아요. 그 양반 아직 이거 안 갚았어요.”
“그날은 무슨 요일이었습니까?”
“그날은 수요일이지요. 여기 수요일이라고 써 있잖아요.”
가게 안쪽 방문이 열리고 한말순의 남편 조기봉이 러닝셔츠 바람으로 나왔다. 그는 금고와 종이를 보더니 얼굴이 붉어졌다.
“당신 지금 미쳤어? 그거 나오면 우리 보상 날아가!”
“외상값은 받아야 할 거 아냐.” 한말순이 종이를 내게 건넸다. “당신은 목요일 하든가. 나는 수요일 할래.”
조기봉은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한말순은 계산대 밑 서랍에서 오정민이 두고 간 확인서를 꺼내 서명한 자리를 반으로 찢었다. 찢는 소리가 가게 안에 오래 남았다. 나는 수첩에 다섯이라고 적었다.
*
이복순 할머니 집에는 오정민이 아직 앉아 있었다. 마루 끝에 걸터앉아 할머니 귀에 대고 확인서를 읽어 주는 중이었다. 할머니는 알아듣지 못해 자꾸 되물었고, 오정민은 목소리를 점점 높이다가 나를 보자 입을 다물었다.
오정민이 일어서며 형사님은 이제 사건에서 빠지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확인서를 할머니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주민분들 괴롭히실 권한 없으세요.”
“그러니까 저는 괴롭히지 않고 여쭙기만 하겠습니다. 오 국장님은 할머니가 못 알아들으시는 종이에 서명을 받고 계십니다.”
“다 알아들으세요. 목요일 얘기는 할머니가 제일 잘 아세요.”
오정민이 할머니 손에 볼펜을 쥐여 주었다. 할머니는 볼펜을 쥔 채 나를 봤다. 첫날 나에게 마루가 울릴 만큼 목요일을 외치던 눈이었다. 나는 오정민의 어깨 너머로 몸을 숙여 할머니 귀에 대고 크게 말했다.
“할머니, 도현이, 윤재, 태윤이, 미르가 언제 나갔습니까?”
할머니 손에서 볼펜이 멈췄다. 오정민이 할머니 이름을 부르며 볼펜 쥔 손을 서명란으로 끌었다. 할머니가 그 손을 뿌리쳤다. 여든 먹은 사람의 힘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세게 뿌리쳐서 볼펜이 마루 밑으로 굴러 들어갔다.
할머니가 첫날과 같은 크기로 외쳤다. “수요일, 수요일 밤에!”
거기서 할머니가 멈췄다. 입이 한 번 더 열렸다가 닫혔다. 열세 해 동안 그 뒤에 늘 붙어 나오던 말은 아침부터였다. 할머니는 그 말을 입안에서 한참 굴리다가, 끝내 뱉지 않고 삼켰다. 삼키느라 목울대가 크게 한 번 움직였다.
“애들이 밤에 나갔어. 비는 안 왔어.” 할머니가 무릎 위 확인서를 손바닥으로 밀어 마루에 떨어뜨렸다. “우리 태윤이 불빛이 제일 앞에 있었어. 내가 마당에서 봤어. 나는 그때 회관에 안 갔으니까. 늙어서 안 불렀으니까.”
오정민은 확인서를 줍지 않고 대문을 나갔다. 나가면서 휴대폰을 꺼냈지만 신호가 서지 않는 골목이었다. 할머니는 오정민이 나간 쪽을 한참 보다가 나를 보고, 이번에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열세 해 동안 나는 아침부터 비가 왔다고 했어. 아침부터라고 하면 애들이 아침에 안 나간 게 되니까. 그 말을 제일 크게 하면 아무도 내 얼굴을 안 보니까.”
나는 그 말을 수첩에 옮기지 못했다. 볼펜을 쥔 손이 마루에 닿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셈은 여섯이 됐다.
*
박태윤의 부모 박상철과 문금자는 마당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복순 할머니가 옆집이었고, 담이 낮아서 다 들렸다고 했다. 그 집 처마 밑에는 바퀴에 바람이 다 빠진 어린이 자전거 한 대가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체인은 녹이 슬어 붉은 가루가 되어 바닥에 흘러내렸고, 핸들에 감긴 파란 테이프만 아직 색이 남아 있었다. 열세 해 동안 아무도 그 자전거를 치우지 않았다. 문금자는 앞치마를 두 손으로 쥐어 뜯고 있었고, 박상철은 말없이 확인서 두 장을 내게 내밀었다. 둘 다 이미 반으로 찢겨 있었다.
박상철은 태윤이 제삿날을 옮겨야겠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문금자가 남편 팔을 붙잡고 수요일이라고 두 번 말했고, 나는 일곱과 여덟을 적었다.
정미르의 할아버지 정만수는 일흔넷이었고, 늙은 진돗개 한 마리와 함께 살았다. 그는 마당 수돗가에서 개를 씻기다가 나를 보고 개 목줄을 놓았다. 개가 물을 털면서 내 바짓가랑이에 몸을 비볐다. 정만수의 아내 유순덕이 부엌에서 나와 개를 쫓았고, 나에게 수건을 던져 주었다.
“미르 에미 애비는 그 일 있고 다음 해에 서울로 갔어요. 우리한테 목요일 하라고 해 놓고 저희는 가 버렸지.” 유순덕은 그렇게 말하고 확인서를 부엌 아궁이에 넣었다. 종이가 파랗게 타오르다 오그라들었다. “그날은 수요일이에요. 우리 미르는 수요일에 갔어요.”
정만수는 개를 다시 붙잡아 비누칠을 하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끄덕이다가 한 번은 크게 끄덕였다. 아홉과 열이었다.
김태석의 아내 윤정희는 방파제 쪽 창고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내가 오기 전에 남편에게 다 들었다고 했다. 그녀는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수요일이라고 말했고, 그러고 나서 그물 한 코를 다 꿰맨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그이가 열세 해 동안 수요일 밤마다 방파제에 나갔어요. 그물 보러 간다고. 그물은 목요일 새벽에 봐도 되는데.” 그녀가 실을 이로 끊었다. “이제 좀 집에 있겠네요.”
그렇게 열하나가 됐다.
*
다섯 집은 문을 열지 않았다. 황보현 부부는 마당에 있으면서 대문을 잠갔다. 내가 대문 틈으로 이름을 부르자 황보현이 대문 앞까지 걸어 나왔는데, 문은 열지 않고 철문 살 사이로 나를 봤다.
“형사님은 오늘 밤 지나면 터널 넘어 가시잖아요.”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화가 난 사람보다 더 오래 생각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우리는 여기 남아요. 우리 딸이 인천에서 투석을 받아요. 일주일에 세 번. 보상 나오면 그걸로 딸 옆에 방 얻어서 올라가려고 했어요. 수요일이라고 하면 그게 없어지는 거예요. 형사님이 그 돈 대 주실 거예요?”
“못 대 드립니다.”
“그럼 목요일 할게요.” 그는 돌아서다 말고 한 번 더 나를 봤다. “나쁜 사람이라서 목요일 하는 거 아니에요. 그건 알아 두세요.”
나는 대문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그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틀린 데가 없는 말 앞에서 나는 할 말이 없었고, 할 말이 없는 채로 다음 집으로 걸었다. 노진구와 노진호 형제는 문을 열자마자 형이 동생을 방으로 밀어 넣고 도로 닫았다. 대문을 나서는데 뒤에서 창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동생 노진호가 고개를 내밀고 형, 나는 수요일 할래, 하고 소리쳤다. 창문은 곧바로 도로 닫혔고, 안에서 형제가 투닥거리는 소리와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가 차례로 났다. 나는 그걸 셈에 넣지 않았다. 닫힌 창문 너머로 형에게 소리친 말은 아직 제 발로 누구 앞에 서서 한 말이 아니었다. 송재만의 집에서는 김옥례가 나와 목요일 문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더 말했는데, 말하는 내내 눈이 오정민이 두고 간 확인서 쪽을 향해 있었다. 최덕배 부부는 집에 없는 척을 했지만 텔레비전에서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이 대문 밖까지 쩌렁쩌렁 울렸고, 내가 대문을 두드리자 소리가 뚝 끊겼다가 삼 분쯤 뒤에 조심스럽게 다시 커졌다. 조기봉은 슈퍼 안쪽 방에서 끝내 나오지 않았다.
오후 여섯 시 반, 해가 갯벌 끝으로 내려앉았다. 골목 끝 담벼락의 현수막이 바람에 한 번 부풀었다. 「주민 동의 23/23」. 누군가 그 숫자 위에 검은 매직으로 줄을 하나 그어 놓았다. 누가 그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회관 창에 불이 들어왔다. 미닫이 너머로 이장이 접의자를 펴는 모습이 보였다. 철제 다리가 장판에 닿을 때마다 둔한 소리가 골목까지 났다. 나는 그 소리를 세면서 회관 쪽으로 걸었다. 스물넷까지 셌을 때 소리가 멎었고, 한참 뒤에 한 번 더 나서 스물다섯이 됐다.
회관 앞 계단에 윤슬이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해든의 공책이 펼쳐져 있었고, 손에 까만 볼펜을 쥐고 있었다. 내가 수첩을 펴서 오늘 받은 이름을 불러 주자 윤슬은 공책의 이름 옆에 하나씩 점을 찍었다. 한말순, 이복순, 박상철, 문금자, 정만수, 유순덕, 윤정희. 점을 찍을 때마다 볼펜 끝이 종이를 눌러 뒷장까지 자국이 배었다.
“열하나예요.” 윤슬이 점을 세고 말했다. “언니는 둘에서 멈췄는데.”
“남은 게 열둘입니다. 이장님하고 윤슬 씨 어머니도 거기 있습니다.”
윤슬은 엄마 이름 옆 빈자리를 볼펜 끝으로 한 번 짚었다가, 점은 찍지 않고 볼펜을 거두었다. 회관 안에서 이장이 스물다섯 번째 의자의 등받이를 손바닥으로 쓸고 있었다.